첫 전투(2)
밝은 달 아래, 철제 편자를 단 말발굽이 대지를 박찼다.
일정한 리듬의 그 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다.
암순응이 완료된 눈으로 목표를 바라봤다.
저들도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자신은 쏘아지는 화살의 첨단(尖端)이다.
적이라는 고깃덩어리를 자르는 도축칼의 칼날처럼 가장 먼저 저들의 살에 파고들 것이다.
바람 소리가 쉭쉭거리며 머리를 울렸다.
문경이 곁에서 무어라 고함을 쳤다.
“형님! 눈을 감으면 안 되오! 끝까지 적을 바라보시오!”
아 쪽팔려.
어린 애 교육시키는 것 마냥 조련당하고 있다니.
문경이 동생인데 맨날 형이 모자라 챙겨주는 것 같잖아.
'사실 그게 팩트 아닐까.'
모자란 형이 되기 싫어 상민은 억지로 눈을 떴다.
분명 21세기의 자동차의 속도가 절대적인 면에서 월등히 빠를 텐데, 말 위에서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돌격하는 건 자신의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리고 이 똘똘이.
이 미력한 주인이 항상 본성을 억누르고 있었을지 모른다.
드넓은 평야,
그곳을 달렸던 적토와 절영 그리고 부케팔로스.
자신이 하늘 아래 가장 뛰어났었다는 명마들과 같은 혈통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마냥 미친 듯이 달려 나가는 똘똘이의 속도를 다른 군마들이 따라잡기 힘들어 보였다.
상민은 굳이 진정시키지 않았다.
들을 것 같지도 않았고.
일렬횡대로 시작한 진형이 똘똘이의 속도로 인해 자연스럽게 쐐기꼴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쐐기의 거리가 벌어졌다.
들판에 어떠한 천막도 없이 모닥불 옆에서 널브러져 쉬고 있던 저들이 당황한 모습으로 일어나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 삐이이
문경이 뒤에서 명적을 쏘았는지 괴기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앞에서도 명적 소리가 화답했다.
주변은 자신 혼자다.
뒤의 기마들이 다가오려면 적어도 이 백 미터는 더 달려야 한다.
두려움이라기보단 이제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뒤지면 뒤지는 거지.
반쯤은 정신을 놓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중세 유럽의 기사들마냥 카우치드 랜스를 하려다 어울리지 않는 창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상민이 문득 이제는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자들의 표정을 보았다.
공포.
두려움.
절망감.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상민은 무의식의 흐름 속에서 나아갈 길을 찾았다.
갈 곳 없이 초조하게 움켜쥐던 창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래, 나는 정복자이고, 너희들은 정복당하는 대상이다.
나는 포식자이고 너희들은 피식자이다.
본능이 소리치고 있다.
몸에 기억된 머슬 메모리.
그리고 정신에 기억된 전장의 향기.
이미 앞서 살아왔던 상민 육신의 기억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그에게 명령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너를 믿어라.
본능에 몸을 맡겨라.
사랑하는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처럼.
전투도 그와 비슷할 것이니.
흐름에 몸을 맡기면 네 경험과, 네 육신과 네 영혼이 상대방과 어울릴 것이다.
현대인의 정신에 잠들어 있던 살육의 본능이 강제로 각성했다.
그래, 그도 이 야만의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자들의 후손이다.
인간은 역사 이래로 만인과 투쟁하며 살아온 종족이다.
평화의 DNA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몰랐다.
그에게도 이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
상민은 들고 있던 창을 선두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에게 던졌다.
비틀린 온 몸이 원상 복구되며 그 힘을 받은 창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람에게 박혔다.
체구도 작지 않은 자가 발이 거의 십 센티미터 정도 공중에 뜨고 이내 쓰러지는 것이 복부 뒤에 절반 이상 빠져나온 창대에 가로막혀 눕지도, 서지도 못하는 형체가 되어버렸다.
몇 번의 꿈틀거림 끝에 그 자의 움직임이 멎을 때 쯤, 상민의 말이 적과 부딪혔다.
- 콰앙
마치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폭음과도 같은 충돌 소리.
군마에 저항하려던 사람의 얼굴이 함몰되고 똘똘이는 그 시신을 예우할 가치도 없다는 듯 짓밟으며 지나갔다.
대기병 방진조차 짜지 않은 자들의 최후.
그래, 너희들은 이 동물을 보지도 못했겠지.
압도적인 높이와 질량.
한 놈, 두 놈, 세 놈.
16파운드짜리 제일 무거운 볼링공이 핀들을 볼썽사납게 치고 가는 것처럼.
기마가 힘을 잃어버리기 전까지 앞에서 항거하던 자들이 으스러지고, 박살난다.
인재지변(人災地變)의 무게에 대퇴부 뼈가 부러져 하얗고 날카로운 뼈의 조각이 허벅지를 뚫고 불쑥 튀어나온 자가 비명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가 워낙 시끄러워서 친히 볼륨을 줄여주었다.
전방 우측에서 돌창이 허벅지를 노리고 날아온다.
횡도(橫刀, 환두대도)를 뽑고 왼쪽의 적의 목젖을 자르며 허벅지를 찌른 자의 돌창을 뺏어 들어 머리에 박아주었다.
철과 돌의 대결에서는 패배했던 돌이 돌과 뼈의 대결에선 승리를 거두었다.
찔린 허벅지가 얼얼하지만 돌창이 직접적인 상처를 내진 못했다.
오히려 상민의 화만 돋웠지.
군마의 돌격력이 상쇄되자 사방에서 적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보아라.
네놈들의 눈동자가 이미 패배감에 물들어 있는 그 사실을 너희들만 모르고 있으니.
상민은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잔혹하고 오만했다.
횡도를 쥔 왼손과 다르게 오른손은 무구가 없었다.
하지만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동일했다.
패 죽이고 쳐 죽이고 베어 죽인다.
발로 차서 죽이고 죽은 놈의 시신을 한 손의 힘만으로 끌어올려 휘두르다 던진다.
심신은 미쳐 날뛰는 정신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
육체는 정신이 무너지는 순간 아무 의미 없다 그랬지.
하지만 정신이 미쳐 날뛰는 순간 육체의 한계도 사라진다.
적의 시신이 죽어가며 지린 소변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묻은 그들의 혈향이 너무나도 짙기에.
돌팔매에 쏘아져 오는 돌.
표면이 맨들맨들하다.
그것을 허리를 비틀며 충격을 흡수하며 한 손으로 잡아채자, 주변의 적들이 경악했다.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몹시 얼얼하다.
그것을 느낄 새도 없이 절반쯤 돌아간 허리를 다시 원상복구하며 그 반동으로 귀중한 선물을 되돌려준다.
가는 돌이 고와야 오는 돌도 고운 법.
손바닥은 마치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듯.
우완 정통파 에이스, 노아 신더가드에 빙의해 던진 것 마냥 쏘아져 나간 돌은 던진 사람 대신 그 옆에 있던 엄한 놈의 머리를 부수고 끄트머리조차 잘 보이지도 않게 틀어 박혔다.
옆의 돌을 던진 당사자가 미안함인지, 공포감인지 괴성을 지르며 도망갔다.
조악한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허리를 숙이며 피했으나 투구가 벗겨진다.
날아가는 투구를 집어 채 홧김에 앞에 서 있는 놈에게 집어던졌다.
쇳덩이 맛을 보거라.
어때? 철기 맛이 쫀득쫀득하지?
가는 길에 철분은 부족하지 않게 해 줄게.
마땅히 고맙다고 대답을 해야 할 사람의 함몰된 얼굴을 바라보며 상민이 대답하지 않은 무례함을 용서해 주었다.
뒤에서 다가오던 적이 말발굽에 채여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소리를 시작으로 다시금 한 명과 한 마리의 짐승은 먹잇감을 물어 뜯었다.
뒤늦게 지각생들이 대열을 부수고 합류했다.
일인에 대적하려던 자들도 그들의 파도에 산산이 흩어졌다.
하지만 피바다는 이미 이곳에 펼쳐져 있었으니.
아홉 명의 기마들이 도망가는 적들을 주살하러 떠나는 것과 다르게 문경은 천천히 다가왔다.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屍山血海).
상민의 주변에 벌어진 엄청난 참상에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이윽고 처음 던졌던 시신에서 뽑아낸 창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고맙긴 한데 사람 몸 한 번 들어갔다 나오니까 창날이 다 상해서 못쓰겠구나.
“혼자만 즐기니 기분 좋소?”
상민은 대답대신 씩 웃어 보였다.
저 멀리 보병들이 진군하여 뒤늦게 공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장의 상황은 모두 정리되는 순간.
단 열 명의 돌격, 아니 단 하나의 돌격에 적의 기세는 꺾였고, 일부는 흩어져 달아났다.
- 후욱 후우
호흡이 갑자기 가빠져 올라왔다.
진작 그랬을 것이나 지금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지.
러닝머신을 매우 과다하게 했을 때의 기분이 느껴졌다.
속에서 신물이 느껴졌으나, 전장에서 시체를 보고 토하는 그런 꼴불견이라 인식 되기는 싫었기에 입술을 짓씹어가며 필사적으로 참았다.
태연한 척, 아직도 왼손에 쥔 횡도을 몇 번 털어 피를 흩뿌린다.
금빛이 이제는 핏빛으로 변해버린 군마 위에 오연히 전장을 내려다본다.
일당백의 무인.
부하들이 자신을 보는 눈길은, 이미 경외의 시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민심, 아니 군심은 떡상해 있었다.
‘다행이다.’
그는 같이 고생을 한 똘똘이를 쓰다듬었다.
대완마의 다른 이름, 한혈마(汗血馬)는 피 같은 땀을 흘린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놈은 자신의 피가 아닌 적의 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이놈이 걸은 걸음 마다 핏물이 떨어져 길게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피가 말발굽에 의해 파여진 흙에 고였다가 이내 대지에 스며든다.
그는 똘똘이의 금빛 갈기에 진득하니 달라붙은 피를 훔쳐내며 그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널 적제(赤蹄)라 부르겠다.”
붉은 굽.
지어보니 마음에 들었다.
아비 세 번 죽인 자가 탔던 빨간 토끼(赤兎, 적토)보다 이름이 훨 좋구만.
말이란 놈은 분명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동물이건만, 적제가 앞발을 들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이.
드루이드세요?
자신의 말을 쓰다듬으며 진정한 교감을 한 상민이 주변의 시선에 약간 무안함을 느끼며 소리를 질렀다.
“새 깃털을 머리에 꼽은 자들이 적이다! 투항하는 자는 살리고 도망가는 자는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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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자는 없었다.
도망가려는 자는 있었으나, 그들은 목 없는 시체로 화했다.
투항자들은 진영 한 가운데에서 꿇어 앉혀 있었다.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대충 오십 명 정도 될까.
반면 싸움에 참가하지 않았던 포로 원주민들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전장의 광기가 그들에게 튀어가지 않도록 사전에 단단히 일러두었으니까.
머리가 박살난 시체 옆에 나뒹구는 투구를 머리에 쓰고 상민이 핏웅덩이를 걸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공포에 질린 그들이 상민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은 여자, 그리고 어린 아이들.
한 여인이 저들의 짓인지 이미 숨이 끊어버린 아이의 시체를 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박량이 그들의 보관되었던 식량들을 가져왔다.
살짝 상했는지 냄새도 어딘가 시큼하게 변해가는 고기 조각 그리고 오디같이 생긴 이름 모를 열매들. 조와 비슷한 곡식 알갱이들.
농사라곤 모르는 수렵 채집인들의 조악한 음식들.
먹을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잘도 이런 걸 먹고 다니네.’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국적이고 다소 야성적인 얼굴이지만, 어딘가 동양스러운 얼굴을 가진 것은 그의 착각인가.
상민은 그 무리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체격의 소년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헐벗고 있는 것은 비슷했으나 손목과 목에 걸린 장신구는 다른 이들과 달라보였다.
장신구라고 보기에도 좀 밋밋하다. 돌 쪼가리를 꿰뚫어 차고 다니는 정도.
거의 성인에 달할 정도로 체격이 컸지만 앳된 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기에는 높은 신분으로 보였다.
왜 살려두었는지 물어볼 사람은 죄다 죽었네.
그는 도를 들고 가 소년의 목과 손에 걸린 줄을 끊어냈다.
거친 줄에 살갗이 다 까졌는지 핏물이 보였다.
상민은 그에게 자신의 단도 하나를 내밀어 고갯짓으로 나머지 포로들을 가리켰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으나, 행동의 의미는 통한다.
시대와 문화,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자신의 무기를 상대방에게 건네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 소년이 자신의 부족원들의 줄을 하나 하나 끊을 동안 조용한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처음의 분위기와는 달랐는데, 죽기 직전의 절망감 대신 의아함,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호기심과 희석된 두려움 그리고 그 단도의 철제 칼날에 대한 궁금증 등등이 그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오다 주웠으니 가다 먹어라.”
그는 시크하게 식량 자루를 소년에게 건넸다.
머뭇거리는 그가 도통 받으려는 행동을 보이지 않기에 소년의 발 앞에 내려놓은 상민이 등을 돌렸다.
- retám mutí oblé mi-tí?
등 뒤에서 소년이 소리쳤다.
무슨 뜻일까.
소년이 단도를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박량이 흠칫 경계했으나 딱히 뭘 하진 않았다.
소년은 약간 머뭇대다 공손히 두 손으로 단도를 상민에게 내밀었다.
무게가 그리 무거울 것 같지는 않은데 마치 가득 찬 물그릇을 받치는 것 마냥 손이 잘게 떨린다.
상민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단도의 도집을 끌러 그 위에 얹어 주었다.
그리고는 손을 펴 손바닥을 위로 하여 넓은 대지를 가리켰다.
“돌아가라, 그대들이 왔던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