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전투
박량은 몸이 날랜 병졸 몇 명과 군 내 열 필도 되지 않는 군용 거세마를 이끌고 척후대를 이끄는 임무를 받았다.
하루 종일 궁궐 수비만 하다 오랜만에 말을 타고 대지를 누비니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강 아래에 위치해 있는 창양은 남쪽의 방어만 집중적으로 신경 쓰면 되었기에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순찰을 돌다 보니 어느새 누적되는 군마의 말굽에 작은 순찰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순찰로를 지나다 말을 쉬게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나무 위에서 망을 보던 부하가 내려와 보고했다.
“낭장님! 저쪽 평야에 야인 한 무리가 보입니다!”
“그래?”
첫 접촉이다.
이 넓은 땅에서 유랑하며 살아가는 수가 적은 민족을 만나기란 쉽지도 않아서 근래에는 예전 교하에서 받았던 정보가 다 사실은 헛것이 아니었을까 의심을 품었을 정도.
“군마의 말발굽 소리는 들킬 수 있으니 너와 나만 조용히 갔다 오자.”
박량은 온 몸의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풀숲과 관목, 나무에 몸을 숨겨가며 자세하게 관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했다.
“이상한데?”
량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저들은 큰 새를 잡아 구워 먹는 것인지 웃음소리와 흥에 겨워 춤을 추는 것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무리가 다르다.’
둘 모두 이 땅의 여느 야인들처럼 몸에 걸친 조악한 가죽 떼기는 비슷했으나 하는 행동들이 달랐다.
한쪽 구석, 모닥불이 비추지 않는 곳에 꿇려진 자들이 온 몸이 결박되어 있었다.
어린 아이인지 누군가 울음을 터트리자 음식을 먹던 야인 한 명이 크게 화를 내며 그 아이에게 다가가 복부를 두세 번 발로 찼다.
그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의식을 잃은 모양인지, 주변의 무리들이 술렁였다.
곁에 있는 병졸이 속삭였다.
“포로를 잡은 모양입니다.”
“그래 보인다. 저 큰 새의 깃털을 머리에 꽃은 자들이 정벌에 성공한 모양이구나.”
“저들의 수가 많습니다.”
박량이 투덜거렸다.
“날 뭐로 보는 거냐. 내가 아무리 겁이 없거니 저 많은 인원 전부와 싸울 생각은 없다.”
‘대장님이 신신당부하지 않았으면 창을 꼬나 쥐고 혼자 돌격 했을 거잖습니까.’
어이가 없었지만 병졸은 굳이 사견을 입 밖에 내뱉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저들의 규모는 거의 이 백에 달했다.
포로도 백 명 이상 되어 보였고.
상당히 많은 숫자였다.
아군의 전공 열보다 아군의 손실 하나를 더 걱정하는 자신의 상관을 떠올린 박량이 입맛을 다셨다.
“우리 쪽 위험지역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인데, 여기서 인원을 분리해 창양의 지원을 호출할까?”
판단하기 약간 애매한 위치긴 했다.
“...군마가 없어 빠르게 당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들도 군마가 없으니 거리를 두고 몰래 뒤따라가면 좋겠지. 이곳부터 흔적을 남겨 놓을 테니 따라 오는 건 할 수 있겠지?”
보내줄 법도 했지만 먹잇감을 눈에 포착한 맹수마냥 침이 잔뜩 고여 보이는 상관의 얼굴에 병졸이 투덜거렸다.
뭔 말을 해도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그럼 제가 갔다 오지요.”
부하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던 박량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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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을 받고 주둔군 절반을 떼어 기본적인 군장 상태로 급속행군을 실시한 상민이 박량의 최종 위치까지 오자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특이사항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척후들이 감시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상민이 입을 열었다.
한 병졸이 상관 대신 대답했다.
“몇 무리가 더 합류를 했는지 규모가 살짝 증가한 것 빼고는 별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계속 동남쪽으로 이동하려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박량이 그동안 알아낸 것을 덧붙였다.
“포로와 정복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심한 모양인데. 오늘은 세 명을 더 죽였소.”
“그래. 준비하자.”
상민은 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반사 처리를 꼼꼼하게 하도록 지시한 터라 얄팍한 달빛 아래에 육안으로 그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빠르고 깔끔하게 끝내자.”
내륙으로 너무 깊이 들어온 감이 있었다.
자신들 병력도 대부분 보군인 탓에 포위되면 좋은 꼴은 보지 못하겠지.
원주민들이 대체로 좋은 시야와 감각을 가지고 있어 약간은 불안했지만 상민은 군을 넓게 퍼트린 후 화살을 쏘며 돌격을 하는 것을 계획했다.
군의 숫자는 오백 대 삼백.
화살로 쏘며 적의 숫자를 줄이고 보병끼리 맞부딪히면 육박전을 통해 능히 제압할 수 있었다.
아군이 더 많지만 저들의 숫자도 적지 않아 우리도 피해를 어느 정도 입겠지.
이 시대의 첫 대규모 전투를 앞에 둔 상민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문경이 뜬금없는 계획을 제안하기 전까지.
“형님, 이거 너무 겁쟁이 같은 전략 아니오?
형님이랑 저랑 기병 열만 말을 타고 오랜만에 몸을 한번 풀어 보지요. 우리들의 야습이 시작될 때 다른 방향에서 보군들이 짓쳐 들어간다면 저들은 분명 크게 혼란에 빠질 거요. 보군의 희생도 줄일 수 있는 것은 덤이겠지요.”
삼별초의 무장들은 무능하지 않은 현장 지휘관이다.
일세의 대제국과 싸워 온 사람들이니까.
그 도덕성을 차치하고 그들의 능력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저 하늘 꼭대기에서 마우스 클릭으로만 전술을 짜는 탁상행정의 인간에 불과했고.
국가를 경영하는 대전략에는 그나마 자신이 있었지만 이런 소소한 전술에서는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합리적인 전술이기도 했다.
보병 진형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 원주민이고 무기도 조악하지만 정렬하여 힘 대 힘으로 부딪히면 사상자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병사들이 자동소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석재, 골재 무기라도 급소에 맞으면 골로 가는 것은 마찬가지니.
듣기로는 이 땅에 돌팔매질에 능숙한 부족들도 많이 있더랬다.
건양 본군처럼 군마의 엄청난 우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문경은 있는 군마라도 제대로 쓰자는 것이다.
문득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바라보니 모두 머리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 시대의 남자라면 한 번 쯤 이런 미친 짓을 하고 그것을 무용담 삼아 술을 마셔야 명성이 자자해지지.
심지어 상민과 문경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자도 있었다.
대체 무인이란 인간들이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상민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성동격서의 전략도 맞긴 맞는데, 정치인의 마음가짐으로 이 단순무식한 인간들에게 호감도작을 하기 위해선 가끔은 정신줄을 놔야 할 때도 있었다.
“량, 네가 보군을 이끌고 우리에 호응해라.”
“또 대장만 재밌는 거 하려고 하시는구려.”
그래도 하루 종일 정찰을 하느라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을 것이다.
박량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자신과 척후들이 타고 온 군마를 급조한 기병대에 건네주었다.
열 명의 기병들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기 필마로 돌진해서 뒤지는 것만큼 추하게 죽는 게 없는데.’
속마음과 달리 상민은 가슴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한 자루 창과 도를 꼬나 쥐고 달려 나가 적들의 목을 베어버리는 것.
그게 무섭고 두려워서?
아니.
너무 신나서.
정신이 어떻게 나가버린 것이 아닐까?
내 호르몬에 내가 지배당하는 것이 아닐까?
‘정신 나갈 거 같다.’
이 몸이 현지적응이라도 했는지, 큰 전투를 앞에 두고 심박 수가 빠르게 증가하며 온 몸에 기이한 고양감이 들었다.
똘똘이를 올라타고 등에 찬 만궁과 기병용 모(矛, 창), 그리고 환도를 점검했다.
주인의 비장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똘똘이의 투레질도 어딘가 난폭해 보였다.
“충분한 속력을 받은 뒤에 넌 명적을 쏘아라.”
문경에게 박량과 호흡을 맞출 시기를 판단하라 하며 후일을 조율하자 옆에서 보군을 준비하던 박량이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난 대장이 바뀐 후로부터 사람 성격이 아예 달라졌다 느꼈는데, 오늘 보니 아예 전부가 바뀐 것은 아닌 것 같소.”
상민은 정곡을 찔려 한참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이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생각과 가치관이 있었지.
상민이 이곳에 떨어져 한동안 갈팡질팡하는 것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인가.
나중이야 제 무위를 찾았다지만, 하루아침에 삼별초 내에서 손꼽히는 맹장이 도도 제대로 못 쓰고 문경에게 대련하여 지는 꼬라지를 어떻게 봤을까.
이곳에 자신의 의식이 들어오기 전 살아가던 김상민이란 존재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더 무식하고, 더 저돌적이고, 더 난폭한.
더 용맹하고 매사에 앞장서던.
하지만 상민에게 이제는 그러한 종류의 리더십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자신은 바뀌어가고 있었다.
하드한 리더십에서 소프트한 리더십으로.
물론 상민 자신의 생각으론 분명 긍정적인 방향이다.
건양부터 그를 따라온 백성들이 말해 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동료 신의군,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문득 불안감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이라곤 사실상 자신의 부하들이 상민에게 제공하는 충성심뿐이다.
그리고 상민은 마땅히 믿고 따를 수 있는 무인으로서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야 했다.
단골 지역구를 잃은 국회의원의 앞날이 불투명해지는 것처럼.
그에게도 그러한 자신의 지지자들의 기대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