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
신미년(辛未, 1271년) 11월 열이레.
상민의 집은 건양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신의군들이 모여 사는 구역 쪽에.
계급이 좀 되어 자신의 집은 고래등까진 아니더라도 기와가 올라간 집이다.
남들이 초가의 지붕에서 떨어지는 정체모를 벌레들과 같이 동거할 때, 상민은 기와집에서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생활도 이제는 안녕.
‘소확행이 따로 없었는데.’
평상시엔 일과를 시작하기 전 간단히 아침 운동을 하고 어제 받아 놓은 물로 간단히 씻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달랐기에 상민은 해가 뜨기도 전 어슴푸레한 새벽 시간에 일어나 마당에 푸르륵대며 얌전히 서 있는 나귀에 몇 가지 짐을 올리고 있었다.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딱히 없구나.”
중랑장이 되고, 혼자 살던 자신의 집에 한 소년이 찾아왔다.
그래, 옛날에 구해준 그 소년이다. 해주 방언이 강했던.
이제는 제법 방언이 입에서 떨어지고 있는 모양.
자신의 어투를 닮아가고 있는 걸까.
상민은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
이제 겨우 중학생 애를 이리 가노로 부려먹기 찝찝하여 다시 되돌려 보내려 했으나, 그 소년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말했었다.
“소인이 감히 장군께 생모지은(生母之恩)을 입었으니 이를 갚지 않는다면 소인은 금수만도 못한 자가 되옵니다. 부디 이를 헤아려 주소서!”
“생모지은이라고...?”
분명 부모가 모두 실려 왔을 텐데.
소년의 얼굴이 순간 흐려졌다.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소년은 파르르 분기에 떨고 있었다.
상민은 그것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알겠다. 다만 너를 노(奴)로 삼지 않을 것이다. 네 이름이 뭐냐.”
“성은 감히 가지지 못하였고 남들은 저를 금손이라 불렀나이다.”
“......”
예전 보육원 출신 친한 동생이 떠올랐다.
“이제 네 이름은 서승현, 서승현이다.”
그 이후 승현과 승현의 어미는 자신의 집 행랑에서 기거하며 잔 심부름을 도맡았다.
자신은 그들에게 숙식과 안전을 제공했다.
그녀의 어미도 음식을 그나마 잘 해 자신의 주거환경이 한 삼십 팔 퍼센트 증가한 기분이다.
승현의 신분도 천인이 아니기에 자신에게 배당된 세 노비를 모두 관리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
“어머니께서는요?”
“나는 괜찮으니 장군님과 이 어미를 따라오지 않겠니?”
“소자가 할 일이 있습니다.”
“......”
승현의 어미, 지소(紙所) 출신 아지가 걱정이 되는지 아들의 손을 잡았다가, 상민에게 폐가 될 까 다시금 놓았다.
그 모습이 애절해 보였다.
남편을 잃었으니 이제는 아들밖에 남지 않아 저리 가슴이 미어지겠지.
승현이 어미를 다독이고 상민에게 말했다.
“하명하신 것은 목숨을 걸고 해 놓겠습니다.”
“네가 그리 강하게 주장을 해서 들어준 것이지만 너무 위험하게는 행동하지 마라.
의지가 가득한 것은 알겠는데. 하지만 사내라면 불리할 때 어리석게 강행하지 않고 마땅히 훗날을 기약할 줄도 알아야 한다.”
- 가자!
행랑어멈 아지가 짐을 가득 실은 나귀를 끌고 오는 것을 보고 상민도 말을 대문 밖으로 끌고나온 후 그 위에 올라탔다.
안 그래도 키와 골격이 큰 사람이 완전무장을 하고 올라가자 말이 약간 푸르륵대며 신경질을 부렸다.
'착하지 똘똘아.'
갈기를 몇 번 쓰다듬은 상민이 승현을 보고 말했다.
“집을 부탁한다.”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상민이 말을 몰아 나가자, 몇 명의 장수들이 그 뒤로 말을 타고 따라붙었다.
신의군이 주로 거주하는 골목에서 병사들이 나오더니 그들을 따랐다.
그 수는 차츰 불어나 셀 수 조차 없었다
병사들의 가족까지 제각기 짐을 챙기니 건국 이후 가장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 행렬이 되었다.
승현은 골목을 나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장관이다.
수많은 용사들을 지휘하는 장군.
고려 내에서 손꼽히는 무장이기도 했고, 근래에 백성들 사이에서 인망이 자자한 장군이다.
그에게 가솔로써 의탁을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장수들처럼 성정이 난폭하지도 않았고 탐욕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승현이 본 그 누구보다도 덕이 있는 사람이었다.
승현은 그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다.
좀 더 오래,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게.
‘꼭 해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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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양 서문.
주변 성벽도 아직 없거나 낮아 성문만 달랑 있는 꼴이 예전 서울의 남문, 숭례문과 비슷하게 생겼다.
건축 기법은 다르겠지만 그걸 알아볼 안목은 자신에게 없었고.
그래도 폼나게 저길 통과해서 나가야겠지?
일군을 이끌고 가장 앞에서 말을 끌고 가는 기분은 참 묘했다.
말을 타는 것은 예전의 자신에게는 익숙하지 않았으나 지금의 자신에게는 좀 역동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MTB를 타는 느낌 정도에 불과했다.
엉덩이가 무진장 아프고 가끔 혀를 씹기도 하는 면에선 정말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타고 있는 이 말, 똘똘이는 너무나도 눈에 띄었다.
평균적인 고려마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은 이 말은 왕온이 전주에서 강화로, 강화에서 건양으로 가져온 명마로 옛 금나라에서 사온 대완마(大宛馬)의 혈통을 이었다 한다.
그가 왕예의 부마도위로 내정이 되면서 선물한 이 말은 사실상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명마이긴 한데, 토양과 기후가 바뀌면서 무언가 잔뜩 심술이 났는지 몇 년 동안이나 사람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난리를 피워댔다고 한다.
정작 상민이 가니, 밥을 잔뜩 먹은 고양이처럼 와서 얼굴을 부비적거렸지만.
왕온이 그것을 신기하게 여겨 거세하여 군마로 쓰기보다는 사랑하는 딸의 부마에게 선물로 주었다.
“난 암말도 아닌데 넌 왜 그러냐.”
- 푸르르
그가 자신의 손길을 느끼며 미묘하게 투레질을 했다.
베이지색 말은 햇빛에 비추면 마치 갈기가 황금처럼 반짝였다.
미쳤다, 미쳤어. 이 시대의 람보르기니를 타는 기분이다.
적당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임시로 똘똘이로 부르고 있지만 매우 큰 결례를 저지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루빨리 멋들어진 이름을 생각해 내어야 할 텐데.
그 말을 타고 대열 맨 앞에서 나서니 마치 위대한 장군의 출정식인 것 처럼 느껴졌다.
거리의 사람들은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자 모두 머리를 숙였고, 동경하거나 혹은 염려하는 눈초리를 보내었다.
혹자는 직접 짐을 싸서 따라나올 정도였다.
뭐?
따라나온다고?
상민은 멋있는 포즈가 손상되지 않게 고개를 세우고 정면을 바라보는 척하며 바로 옆에 있는 연수에게 복화술을 사용해 가며 물었다.
“대체 저 자들은 왜 따라오는 것이냐.”
“안 그래도 우리의 행렬 뒤로 인파가 너무 많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런, 성문 밖에서 정리하자.”
서문을 통과해서 보니 진짜 자신의 행렬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붙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상민은 병사들의 대오를 정돈하고는 이번 원정과 관계되지 않은 외부인을 따로 떼어냈다.
바로 앞에서 사람들의 대열이 잘려나가자 병사들의 제지를 받은 백성들이 흐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장군님!”
“저 좀 대려가 주시오!”
“여기, 쇤네는 지난 번에 건양 서쪽에서 농사를 지은 사람입니다요! 저는, 제 가족은 갈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무슨.’
상민은 당황했다.
왜 이들은 이리 아침부터 우리들의 행렬에 합류하려 하는가.
아니 가면 개고생이라니까? 이 높은 성벽도 없다니까?
모두 이상할 정도로 절박해 보였다.
자식들이라도 보내려는 자들.
아니 무슨 건양이 바닷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타이타닉이라도 되는 것도 아니고.
“예기(禮記)에선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 하였소.”
자신이 위치한 곳 근처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 옆에 서 있던 폐포파립(弊袍破笠)의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그루터기에 앉은 여인이 치마폭에 감싼 작은 아이들을 달래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옛 고려에서는... 다 옛말이지. 나라의 녹을 먹는 문신이었으나, 지금은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라오.”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잘못되었소.”
“덕이 있는 곳에 따르는 것이 죄는 아니오.”
“사정이 딱하기는 하나, 우리들은 저들을 품을 수 없소. 또한 그대도 마찬가지.”
“이미 이곳까지 나온 저 무리들은 부마도위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 판단한 것이오.
저들의 눈동자를 보시오. 거멓게 죽어가던 눈이 작은 희망을 품고 그대를 보고 있으니. 아마 살면서 마지막으로 보는 구원의 불꽃이라 생각하는 것이겠지.“
그 말에 상민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설픈 동정심으로 그들을 포용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상민은 머리를 굴렸다.
솔직한 말로 현 시점에서 인력은 보물이다.
무리가 아닌 선에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얼마나 될 것인가.
‘미안한 말이지만 쓸모가 있는 사람들을 대동하는 것이 맞겠다.’
목수나 대장장이, 기와장이 등 손재주가 있는 자들, 그리고 나이가 젊고 건장한 청년들이 우선으로 뽑혔다.
남은 자들에게서 절망이 퍼져 나가자 상민이 말했다.
“서부 개척 이후 몇 번 더 선단의 행렬이 왕래할 것이다. 그대들은 평소의 생활을 영위하다 그 기회를 잡는 것이 좋겠다.”
어떻게 다독여 그들을 다시 건양 안쪽으로 돌려보낸 상민은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기운이 쭉 빠짐을 느꼈다.
그는 오랫동안 서 있던 말을 쉬게 하기 위해 내려왔다.
그리고는 흥미가 동했는지 그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대도 내 행렬에 합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상민은 이 사내의 근거없는 자신감이 어이가 없었다.
데리고 가 줄려다가도 심술이 나 버렸다.
“그냥 갈 수도 있는데.”
상민의 말에 정체모를 사내는 슬쩍 웃었다.
자신감이 슬며시 엿보였다.
그는 뒤에 끌고 온 것으로 보이는 말 네 필을 보여주었다.
“그 어린 아이가 그러더이다. 이놈들이 꼭 필요할 것이라고.”
‘어린아이? 누구지. 승현은 아닐 테고.’
그 순간 자신의 말이 격하게 반응했다.
‘뭐야 이 놈. 발정이라도 났나?’
자신의 말을 겨우 진정시키니, 그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혈통 좋은 암말 넷이오. 내 가문의 보물들과 내 처가 소지한 모든 패물, 그리고 건양의 소유물들을 처분하여 태복시(太僕寺, 사복시(司僕寺)의 옛 이름) 사람에게 구한 것이지. 그대에게 내 뱃삯으로 바치려 하오만, 받아줄 수 있겠소?”
상민은 황급히 대답했다.
“예 암요, 그렇고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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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김지숙(金之淑)의 합류 이후 그들은 서쪽으로 더 나아가 드디어 나루터에 도착했다.
과선과 초마선들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나루터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숫자가 많아, 일부의 병졸들은 자신들보다 상류에서 타고 합류 할 것이다.
제일 덩치가 큰 배 하나를 기함으로 삼고 배의 선수에서 바다를 둘러보았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에도 배를 타고 왔었는데.
벌써 정말 오래전의 이야기 같군.
그 때에는 겨우 중대장 정도의 직책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일군을 이끄는 장군이다.
게다가 신의군들의 가족들과 자신만 바라보던 민초들도 많이 따라 나오게 되었으니 자신의 어깨에 걸린 책임이 무거웠다.
“소영강의 하구로 나아가라.”
“예 장군.”
머릿속에서 유명 해적 OST가 들려오는 듯 했다.
강물은 얌전해 파도가 부서지고 그 물바람이 햇빛에 반사되지는 않았지만.
뱃사공들과 병졸이 복명을 하고 준비를 했다.
그는 저 멀리 보이는 건양성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보지 못하겠지.
어제 밤 그녀가 건넨 노리개에는 아련히 그녀의 체취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꺼내 잠시 만지다 다시금 품 안에 집어넣었다.
등 뒤에 있던 문경이 그 모습을 보고 끌끌 혀를 찼다.
“형님만 젊어서 좋겠수?”
대답은 말로 하지 않았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그를 무시하고 상민은 가져온 가죽 지도를 펼쳤다.
황사의 낭장이 궁금한 듯 상민의 등 뒤에서 얼쩡거렸다.
보면 알긴 아냐?
“어디로 간 답니까?”
“우리는 서쪽으로.”
아침 해가 뜬 곳이 저녁 해로 저물 곳.
우리의 땅이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느니.
첫 대학생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처럼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소영강 하구에서 도저히 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 위에선 아직도 바다라 생각하는 그 거대한 라플라타 강의 하구로 나아가니, 뒤로 죽 꼬리를 문 대선단이 눈에 보였다.
“이게 게임이지!”
휘하 장수들의 뚱한 눈초리를 무시하고 상민은 선수에서 호연지기가 가득 담긴 고함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