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군
완연한 아침햇살 아래 상민은 보위도감의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별감께서는 기침하였나?”
“예, 집무실에 계십니다.”
입구에서 번을 서고 있던 병졸이 군례를 취한 뒤 입을 열었다.
“별감께 신의군 중랑장 김상민이 아뢸 것이 있어 왔다 전해드리게.”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자 병졸 하나가 그에가 다가왔다.
“송구하오나 무기는...”
상민은 순순히 도를 건내었다.
병졸은 몸수색을 해 다른 무기가 없는 지 살피고는 이윽고 그를 들여보냈다.
-
기다란 탁상 위엔 촛불 두 개만 켜져 있었지만 아침의 햇살이 들어오는 까닭에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목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중손이 들어온 상민의 인기척을 느끼고도 시선을 떼지 않고 한손을 들어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취해 보았다.
그의 앞 까지 다가온 상민은 마침내 중손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아침부터 바쁘신 와중에 송구합니다.”
“어제 제법 시끄러운 일이 일어났더군.”
목간에서 눈을 돌린 그가 상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예 별감.”
“뭐, 그것에 대해 사죄하러 온 것인가?”
“그런 목적은 아니옵니다.”
“그래. 자네는 사죄할 필요가 없음이야.”
-탁
그가 손에 놓인 목간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래서, 나를 보자고 한 연유가 무엇인가. 김 중랑장. 문신들은 또 어찌 하고 있고?”
“진전이 있사옵니다. 곧 정식으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허면?”
“주제넘을지 모르겠으나 별감께 여쭈어 보고 싶은 것들이 생겨 왔습니다.”
“말해 보라.”
그가 어깨를 돌리며 기지개를 폈다.
“긴한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듣고 있다.”
“......”
상민은 중손의 말에도 그저 침묵을 지켰다.
상민의 분위기에 잠시 몸을 풀던 중손은 고개를 돌려 등 뒤의 호위병들을 물렸다.
“번거롭게 하는구나. 나가 보거라.”
이제 이 공간에는 오로지 둘 뿐.
상민은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별감께서는 건양에서의 군사적 우위를 보장받고 싶어 하신 것이 아닙니까. 너무나 단순한 해결책이 있는 데 어찌하여 결단을 내리시지 않는 지 궁금합니다.”
계속 몸을 풀어가던 중손의 행동이 멈추었다.
노골적인 말에 약간 심기가 거슬린 얼굴이지만, 그래도 흥미가 있어 보였다.
“계속해 보거라.”
“현 고려의 강역 사방에는 알려지지 않은 땅들이 너무나 많사옵니다. 각 군의 수장으로 하여금 변방에 나아가 영토를 개척하고 야적들에게서 고려를 지키는 방패로 삼으소서.”
“허.”
중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나보고 들개들을 사방에 풀어 놓아 키워 나중에 주인을 물게 내버려두란 말이더냐?”
“한낱 들개라도 먹이를 주는 주인을 물지 못하는 법이옵니다.”
“들개는 그런 충직함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어 들개인 법이니라.”
“그렇다면 들개새끼를 잡고 있으면 됩니다.”
“......”
중손은 가만히 상민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사건의 발단이 된 별초의 부대들을 국경으로 보내 군사 거점을 세워 고려의 강역을 방비토록 하소서. 다만 그들 수장의 가족들은 건양에 남아 있게 하십시오.”
“흐음.”
“별감께서는 여차하면 쓸 수 있는 인질들을 잡고 있을 뿐더러 건양의 소출을 온전히 관리하고 계십니다.
개척이란 모름지기 큰 노동력이 필요한 법, 고작 천 정도의 군세와 그 병졸들의 가족들 정도로는 몇 년 사이에 안정된 소출을 관리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중앙의 지원에 기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만에 하나 지방에서 반란이 나더라도 평야에서 회전을 할 수 있는 규모의 군은 없을 터이니 모두 성채 안으로 들어가겠지요. 아무리 둔전을 짓는다 하나 건양에서의 군량이 끊긴 곳은 중앙의 토벌대에 저항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채만 포위하면 수확을 하지 못하여 말라 죽기 마련이지요.
또한 수군과 기마를 거두어 그 중 대부분을 확보하시면 야지와 강의 기동성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장악하시는 것이니 어떠한 염려도 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중손이 한참 생각하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대한 징계의 의미도 되고 말인가?”
“예, 누구도 외지에 나아가 고생을 하고 싶어 하진 않을 것이니 문책(問責)의 의미도 되겠습니다.”
“일의 발단이 된 그 놈들은 그렇다 쳐도, 네 부대의 병졸들의 불만이 거셀 것이다.”
“이것도 나라를 위한 일인데, 인내할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이치에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대의 머리에서 나온 이 계책을 왜 나에게 들려주는 것인가?
마치 스스로 처벌을 내려달라 비는 꼴이 아니더냐.
그대가 원하는 바가 있는 모양인데?“
상민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지유, 소장의 충성을 받아 주시옵소서.”
뜬금없는 상민의 말이 적막한 집무실에 울려 펴졌다.
“그대가 왜?”
중손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대는 이미 내 별초의 사람인데, 구태여 충성을 맹세하는 까닭이 무엇이지?”
“소장은 오로지 충심으로 별감을 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대가 원하는 것은?”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위입니다.”
- 쾅
중손이 대노하여 탁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를 뽑아들어 무릎 꿇은 상민에게 겨누었다.
일련의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나 반응하기도 어려웠다.
과연 일세의 장군이다.
하지만 준비를 하고 막는다면 어찌 막을 수 있어 보였다.
이 순간에는 어차피 막을 의지는 없었지만.
날이 목에 다가와 핏방울이 살짝 보일 정도로 압박하는 데에도 상민은 고요한 눈으로 중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진작 너의 행동을 알고 있었다. 밤중에, 성화전주 전하의 처소에 들어가 요사스러운 혓바닥으로 음탕한 말을 지껄이는 것을!
다만 네놈의 평소의 행동거지가 나름 절제가 있고 그것이 한낱 청춘의 열병으로만 여겨 가만히 있었으니, 네놈이 이제는 주제를 모르고 날뛰려 하는 구나!“
개뿔.
이간계를 시행할 기회라 생각해서 계속 묵인하고 있었겠지.
상민은 목을 파고드는 도날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영희는 그 성정이 과거의 이고(李高)와 같아 능력이 없으나 탐욕이 많은 성정이라 틀림없이 자신 스스로 화를 입을 자입니다.
신손은 난폭하고 앞뒤가 없는 것이 계림의 이의민(李義旼)과 같아 주인을 시해할 자이고,
통정은 과묵하고 신의가 있으나 복고지지(復古支持 무인시대 전으로 돌아가려 함)의 뜻이 있어 경대승(慶大升)에 비유할 수 있으니 장군과는 물과 기름의 존재입니다.
존혁은 암중에 기회를 틈타 정권을 잡을 야심이 가득하니 해양후(海陽侯, 김준)과 같이 가장 위험한 존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놈은?”
“소장은 일개 중랑장일 뿐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만 도날에 실린 힘이 약해졌다.
아 따가워라.
후시딘도 없는 이 마당에.
다시금 상민의 말을 곱씹고 있던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럼 네놈이 보기에는 나는 무엇이냐?”
“별감께서는 별감이십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 하는 것이렸다.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네 놈의 목이 달아날 것을 알라.”
“역사의 흐름대로 갈지, 그것을 거스르고 올라가시려 할지, 그것은 별감께서 쥐고 계시는 돛의 끈에 달렸나이다.
별감의 인도 아래 별초가 강화에서 떠나올 적, 그리 멀지 않은 바다에서 우리는 물안개를 만났습니다. 그 후 약속된 새로운 터전에 도착하여 대업을 이루니, 소장은 분명 하늘의 뜻이 별감에게 있다고 밖에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
그 가능성과 그 한계를 제가 어찌 감히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늘의 뜻이 기거하는 분께 제 몸과 마음의 충정을 바치려 하는 것 뿐이옵니다.“
“...현혹스러운 말이로고.”
그러면서도 그는 도를 거두어 수납했다.
상민은 무릎 꿇은 것을 풀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화가 나 있는 상태로 보였다.
"송구한 말이오나, 보위도감의 최고 지유회의에서 황실의 여러 국혼들에 관해 이야기가 돌았다 알고 있습니다."
"통정이 말했나?"
"아니옵니다. 군영 내에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퍼졌습니다."
"언급하지 말라 하였는데 입이 참으로 가볍구나."
중손은 이를 악물었다.
누군지 대충 짐작은 갔다.
"송구하오나 신의군의 무장으로써, 제 상관과 제 부대의 일에 관여를 할 수밖에 없음을 용서하여 주소서."
"네놈들의 끈이 없는 것 말이냐?"
"병졸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중손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황실의 권위가 정말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모앙이구나. 이토록 떨어진 경우가 국사에 있었는지."
중손 당신이 할 말은 아닌듯 했지만.
자신도 그것을 느꼈는지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
"그래, 분명 너희들에게도 돌아가야 할 몫이 있어야겠지. 통정이 고지식한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 밑에 여우같은 네놈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구나."
한참을 상민을 노려보던 그가 갑자기 피곤한 듯 의자에 털썩 주저 앉고 마른 세수를 했다.
너무나 정곡으로 찌른 상민의 말.
뇌리에 재생되는 그의 동료에 대한 노골적인 평가는 아직도 중손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저 요사스러운 말에 어쩔 수 없이 가슴에 부풀어 오르는 일련의 의심들과 야망들.
그래, 그가 선택을 받은 것인가?
이 고려를 구할 유일한 사람으로써?
자신은 전장에 나아가 적들을 베는 것에 자신이 있었지 이러한 음모와 정쟁에는 소질이 없었다.
난의 주동자라 어찌 별감의 위에 올랐지만 일이 이리 복잡하게 돌아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과거의 전우라 생각했던 장수들은 제각기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듯 했고.
하지만 그는 호랑이의 등에 탄 형세였다.
어설프게 물러나려던 권력자들이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역사가 그에게 속삭였다.
“...여러 장수들이 전주 전하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느냐?”
상민은 물론 그 사실을 알아서 그에게 온 거였다.
물론 삼별초의 고위 무장들은 대부분 결혼을 해 자식을 가졌고 그들도 이곳에 따라온 상황.
또한 황실의 여식은 후처로 들어가기에도 너무나 존귀한 신분이다.
그들은 아마 전주들을 자신의 며느리로 삼을 욕심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를 그 승냥이들을 막는 방패로 쓰소서.”
그는 비웃었다.
“네놈이 똑똑하기 하나 그 놈들도 각기 만만찮은 놈이다. 네 승리가 쉽사리 판단되지 않는구나.”
“사냥개로써, 사냥감을 물어 큰 상처를 입히고 제 자신도 죽는다 하더라도 후의 일은 별감께서 직접 정리하시지 않겠습니까.”
“......”
그가 얼굴에 댄 손으로 깍지를 끼며 목을 받쳤다.
그리고 한참만에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었다.
“생각보다 야별초끼리의 관계는 복잡하다. 나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을 매정히 벌할 수 없다.
그것이 나의 약점이지.
신의군은 반면 그렇지 않으니 네놈은 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야.
네놈이 모욕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고
네놈이 억울할 일이 있을 것이다.
네놈이 위태로운 일도 있겠지.“
“다만 스스로 원하여 한 일이니 어찌 별감을 원망하겠습니까.”
“그토록 성화전주가 좋느냐.”
“제 목을 걸 수 있습니다.”
중손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 보이는 구나.”
젊음이란 그리 어리석고 허망한 것에도 목숨을 걸 그러한 치기가 있는 나이지.
잠시 천장을 쳐다보던 그가 말했다.
“성상의 국혼이 먼저 거행되어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네가 부마에 내정된다 하더라도 실제 혼례는 몇 년 미뤄져야 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혹여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이리 뻔뻔한 놈이 다 있는고?
중손은 어이가 없는 지 웃었다.
“이제는 네놈이 무슨 말을 할지 두렵기까지 하구나.”
“태자 전하의 환후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으음.”
상민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중손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나 죽은 친척이 있어 그 딸을 자신의 수양딸로 삼았다.
그 아이를 태자비로 삼으려 하던 것이 그의 계획이었는데.
“네가 병을 잘 아는가?”
“소신의 예전 가족이 각혈을 계속 하는 병에 걸려 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증상과 태자전하의 환후가 너무나도 똑같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반은 구라고 반은 진짜다.
가족이라곤 없었고, 병을 아는 것은 진짜였으니까.
피가 섞인 기침을 하는 것.
왕환을 처음 본 순간의 기억도 났고 예가 그에게 자주 말해주어 알게 된 사실이다.
폐렴, 결핵 혹은 폐암. 아니면 다른 호흡기 질환.
관찰을 할 기회도 없었고 의사도 아닌 주제에 정확한 증상은 단언할 수 없었지만.
무엇이 되었든, 환의 건강은 젊은 나이에도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이제는 동궁에서 누워 하루를 전부 보낸다 했으니.
결핵이라면 전염성이 있을 수도 있기에 예에게 단단히 일러 되도록이면 오라비와의 접촉을 삼가하라 했는데 얼마나 지키고 있을까.
“가망이 없다 보느냐?”
중손은 태자의 젊음에 기대를 하는 것 같았는데. 그 희망은 썩은 동앗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시대에서는... 아니 현 고려에서는 이를 치료할 방법이 없을 것으로 아뢰옵니다.”
“그래. 의서도, 약초도 기존에 알던 것과 너무나 다르긴 하지.”
중손은 상민이 여태까지 말한 것 중에 지금의 정보가 제일 귀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다. 나가 보거라.”
“예, 주군.”
상민이 깍듯하게 군례를 붙였다.
문을 열기 전, 그가 조용히 말했다.
스산한 결의를 품고서.
“우리가 나눈 이 말들이 새어나간다면 당장 네 놈도 무사치 못하리라.”
“소장은 목을 걸었습니다.”
마찬가지의 결의를 담은 대답은 장지문 넘어 공기에 흩어진다.
혼자 남은 방에서 중손은 조용히 뇌까렸다.
“네놈이 류경(柳璥)이 될 지는 내가 두고 보겠다.”
강화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아직도 살아있을 간신배의 얼굴을 떠올린 중손의 미간은 도무지 펴질 생각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