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8화 (18/653)

결의

깊은 밤.

달조차 뜨지 않아 어두웠다.

상민은 갑주를 벗고 평상복 차림으로 거처에서 나와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순찰을 도는 무리들을 슬쩍 슬쩍 피해가며.

흥평궁의 후원에는 전각이 두 개 있었다.

담장도 아직은 제대로 지어지지 않은 구간이 있었다.

부속 건물은 아직도 지어지고 있었지만 덕분에 밤중에도 월담을 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신분상으로도 굳이 월담을 할 이유도 없었겠지.

‘나는 이 장르가 퓨전 판타지라 생각했지만 청불 로맨스 스릴러 정치 사극이었군.’

공민왕을 다룬 한국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애틋한 만남부터 처참한 결말까지.

너무 플래그를 세우는 것 아닌가?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아직도 자신의 부대가 왕궁 전체적인 경호를 맡고 있기에 병졸들의 근무 서는 것을 잘 확인하는 척 둘러보다 슬그머니 담장 틈 사이로 들어갔다.

마당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궁인 하나가 그와 눈이 마주치더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살며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6개월 동안 이 짓거리를 하다 보니 궁인들조차도 거동이 마치 일류 스파이를 보는 듯 했다.

전각의 후원에는 나름대로 꽃과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고려에서 쉽사리 보지 못한 꽃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꽃에는 관심이 없어 저게 무엇들인지 모른다.

한동안 그것들을 구경하고 있자, 전각의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늘 따라 그녀가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

화장 기술이 뛰어나지도 않은 시절에 이토록 아름답다니.

눈에 짙은 콩깍지가 씐 걸까.

그녀는 반가움에 그에게 날듯이 다가왔다.

“오늘은 평안하셨습니까? 전주(殿主) 전하.”

“네. 그대는요?”

이제는 정말 성화전(晟和殿)을 부여받아 전하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예다.

자신의 손을 꼭 잡은 그녀가 자신을 후원의 나무 밑 바위로 이끌었다.

그 따뜻함에 얼어붙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저는 오늘 어떤 일이 있었나면요...”

작은 새처럼 조잘거리는 그녀가 그냥 보기만 해도 좋아 그는 웃으며 맞장구만 칠뿐이다.

한동안 소소한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하던 그녀가 문득 상민에게 말했다.

“오늘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

“전하께서 심려 쓰실 바가 안 될 소소한 것입니다. 염려마세요.”

예가 그의 품 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겠죠. 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으니까.”

상민은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니옵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이대로 있어 주시면 됩니다.”

“이대로 있어 달라고요?”

예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들었다.

붉어진 눈에 약간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제가 이대로 당신 곁을 떠나 버려도 괜찮은가요?”

“......”

“난 괜찮지 않아요. 못해요. 그냥 콱 죽어버릴 수도 있어.”

최근에 드는 소문은 상민도 알고 있었다.

삼별초 고위급 무장과 혼담이 오간다고 했나.

그런 그녀가 이런 말을 하자 속에서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한심한 새끼. 연인에게 이런 말이나 듣고 있다니.

“이딴 옷, 이딴 궁궐 내가 원하던 것들도 아니었는데.”

“소장과 함께 어디 먼 곳으로 떠나시렵니까?”

반쯤은 농담하는 어투로, 반쯤은 기대하는 어투로 상민은 그렇게 말했다.

예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되는 걸 알면서 말하는 것이잖아요.”

“뜻이 맞는다면 안 될 것도 없습니다.”

예가 마주잡은 손을 꿈지럭거렸다.

“장군께서는 책임감이 강하시니 휘하의 따르는 자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겠지요.”

“전하께서도 효심이 깊으시니 부상(父上)을 저버릴 수 없으시겠지요.”

예는 처연히 올려다보았다.

말장난을 치고 있는 이 남자는 아직도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웃지 마세요. 그럴 기분 아니니까.”

상민은 입꼬리를 내리지 않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장, 고백할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인가요?”

상민이 마치 대단한 비밀을 이야기 하는 것 마냥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예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의 머리 향기가 은은하다.

“예전 전하께서 흥양사에서 소장에게 질문하신 적이 있으셨지요?”

“무엇이었죠? 그때는 겨를이 없어서.”

자신의 흑역사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예가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소장은 나쁜 사람입니다.”

“...?”

“소장은 고려의 충신이 아닙니다.”

예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나도 효녀는 아니에요.”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의 말 꼬리를 잘랐다.

“말 그대로입니다.”

상민의 얼굴은 어느새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예가 숨을 삼켰다.

“전하.”

상민의 눈동자는 타오르고 있었다.

“저는 아직 약하여 오직 한 사람밖에 위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의 손등을 들어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게 중요한 것은 고려가 아닌 당신입니다. 고려라는 대궐이 불에 타들어간다 하더라도 전 그것을 진화하며 타죽기보단 당신의 손을 끌고 도망을 칠 비겁한 자입니다.”

“......”

“전하께서도 선택을 하실 순간이 오실 겁니다. 그때 제 말을 다만 기억해 주소서.”

너무 늦지 않게.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직시하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

밤이 늦어 이제는 동이 터 오르려 한다.

거처로 돌아온 상민은 촛불 하나만을 켜 놓고 무언가 생각하다 나무 서랍을 열고 그동안 세필로 빼곡히 정리했던 종이들을 꺼내보았다.

종이가 귀한 탓에 몇 번이나 빨아 써 질이 좋지 못했다.

잠시 그것들을 보던 상민은 이윽고 촛불을 붙여 다 태워 버렸다.

“아 뜨거.”

손을 후후 불자 화상 부위가 가라앉았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어제 낮의 기억들이 머리에 계속 맴돌아 신경이 쓰였다.

대체 왜 그런 행위를 한 것이지?

왜 굳이 분란을 조장하는 것이지.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양아치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습관이니까.

하지만 상민은 그 뒤에 숨겨진 깊은 악취가 어렴풋이 맡아지는 것을 느꼈다.

상민은 일어나 새 종이를 가져왔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래. 이게 내 적성이지.

충신은 무슨.

서포터는 무슨.

와드를 박아도 고맙다는 소리를 안 하는 놈들이 트롤을 하며 자신에게 선정치질을 시전하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 나라를 캐리할 놈들이 단 하나도 없는데, 멍청하게 있어봐야 나만 손해잖아?

기초적인 자정작용을 할 펀더멘탈 자체가 아예 없는 조직에서 대체 뭘 기대했던 거지.

게다가 이제는 실체적 위협이 그와 그의 부대에게 가해지고 있다.

이곳에 떨어지고 그동안 고민했던 것과는 다르게 글이 일필휘지로 쓱쓱 적혀나갔다.

이 땅에 필요한 것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하찮은 동정심으로 헐벗고 굶주리는 저 먼 과거의 ‘조상들’을 보며 동정심을 가지는 것은 자유겠지만 그렇다고 뭐가 바뀌진 않았다.

자신도 노력 할 만큼 했다.

대법관 노릇도 해가면서.

어줍잖은 동정심으로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했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결국 이 체계가 유지된다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을 테니까.

관광지에 온 여행객 같은 태도는 집어 치워.

충신인 척 하지마.

너는 최영이 적성이 아니야.

그리고 왕예.

네 여자 뺏기고 질질 짜야 정신을 차리겠냐.

상민은 피식 웃었다.

결국 내 이 병신 같은 마음에 시동을 거는 것은 아주 원초적인 감정이구나.

그래 맞다.

지금 상민의 대뇌피질에 딱 박혀버린 인물은 정신적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는 상민보다 한참 어린 여자였다.

존나 한심한 새끼.

정신 못 차리네.

그렇게 외로웠냐?

외로웠다.

자신의 심정은 다른 사람들도 사회에 나갔다가 다시 군 생활 일 년 더 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외로움과 원초적 욕망으로 그녀에게 끌린 것은 아니다.

옛날 동화에서나 나올 공주의 신분에 대한 동경도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것들로 상민의 감정을 판단하기엔 난해했다.

왕예는 그의 안티테제였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통틀어 출신을 모를 정도로 근본은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남자와

출신이 무척이나 고귀하지만 날개가 꺾인 채 새장 안에 갇힌 여자.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처럼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주변의 환경들에 의해 촉진되고 농축되는 감정들.

그들은 반대 극성에 이끌리는 자석처럼 서로에게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비단 그 이유 밖에 없겠냐?

오, 아니지, 아니야.

가식 떨지마, 김상민.

원하는 것은 권력이다.

군주제의 정점에 서 휘두르는 압도적인 권력.

- 아, 상민 선배 보육원 출신이래? 그렇게 안 생겼는데 진짜 의외다.

- 자네는 우리 소현이 진지하게 생각하나? 그럼 뭘 해줄 건가? 집은 살 수 있나? 사돈댁도 안 계신데?

- 김 대리, 혼자서 잘난 척 한다고 되는 거 아니야. 회사는 자네 혼자만 있는 거 아니거든. 그 버릇 좀 고치도록 해.’

부모도 알 수 없는 가장 비천한 출생으로 태어난 근본 없는 놈이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는 것.

다시는 아무도 출신으로 그를 비웃지 못하는 것.

그의 손짓에 수만의 사람들을 부릴 수 있는 것.

가장 높은 곳에서 황금빛 비단 옷을 입고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곁에 두는 것.

그래 그것이겠지.

인정하니 개운했다.

자신은 원래 이런 놈이었다.

처음에는 차마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온갖 짓을 해서 현대로 돌아가려 해봤다.

떨어지고 나서 흔히 보던 소설처럼 날개가 몇 개 달린 아름다운 천사가 튜토리얼을 설명해 주지도 않았고,

킹태창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심풀이로 읽었던 여러 소설책에 나오는 클리셰들을 쪽팔리니까 조용하게 시도해봤다.

될 턱이 있나.

뜬금없이 목간에 /?나 /help를 쳐 도움말이 눈앞에 뜨는지 보기도 했고.

콘솔 커맨드를 적어보기도 했다.

변화는 없었다.

진짜로 아무것도 바뀌는 일이 없었다.

마치 어떠한 전능한 존재는 그 자신을 이곳에 던져놓고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것은 그래도 할 만 했다.

고층빌딩이 즐비했던 서울에서처럼 이 아무것도 없는 평야에서도 아침 해가 뜨고 다시 진다.

나는 먹고 자고 똥을 싸고 업무 보러 나가는 것이 그동안 했던 일의 전부였고.

돌아가고는 싶었다.

아주 조금?

냉장고 안 차가운 맥주가 땡겼다.

달달한 카페 모카도 땡겼고,

앞으로는 절대 못 볼 개봉 예정 영화가 보고 싶기도 했다.

보이스톡으로 대학 동창들과 팀랭을 하며 서로 욕을 하며 웃고 떠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딱 마시고 방구석에서 배를 긁으며 비디오게임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돌아가야 하는가?

도저히 그것들로는 충족할 수 없는 걸.

남자는 야망에 살아간다.

군림하고 싶다.

대접받고 싶다.

그 욕망은 사회성의 가면 아래 억누른다고 억눌러질 부류의 본능이 아니다.

나는 동시대에 같이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

나는 주인공이다.

이들이 조연이다.

이곳은 현대와는 다르게 내가 모딩하고, 내가 에딧한 세상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나다.

오직, 나만이 저들을 부귀로 이끌 수 있다.

비뚤어진 선민의식이 아니었다.

선택받은 자의 자각이었다.

내가 고려를 이끌어야 한다.

내가 고려를 지배해야 한다.

타고난 기품이 온 몸에 스며들어 있는 여배우 같기도 하고, 그 나이대의 발랄한 소녀 같기도 한 예가 더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래, 그녀가 가지고 있는 고려의 왕관에 대한 정당성이겠지.

그녀가 고려의 왕이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왕온과 왕환이 죽는다면.

그렇다면 남은 제관(帝冠)에 대한 클레임은 결국에는 그녀가 가지게 될 것이니.

그녀와 이어진다면 자신은 이 고려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취하고, 아끼는 이들을 구하고 그의 욕망을 해결하는 방법은 한 길에 모두 다 있었다.

나아가야 하는 길도 하나고 원하는 길도 하나인 셈인데.

상민아, 너는 왜 지금 일어나 행동하지 않느냐.

군막을 박차고 나서 어렴풋이 빛이 나는 동쪽을 바라본다.

역사서에 적힐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며.

위화도를 앞에 둔 이성계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신하들의 추대를 받은 왕건의 심정이 이랬을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가 진정 후(後) 고려의 왕건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궁예에게 머리를 숙여야 했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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