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군과 우별초
신미년(辛未 1271년) 10월 초하루.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자신이 다녔던 회사 인사처의 캐치프레이즈.
너무나 유명한 말이고 상사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기도 했다.
머리에 각인이 될 정도로.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그냥 받아들였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고, 그의 회사에선 문맥상 조직에 인재를 적재적소에 심으라는 뜻이었겠지만, 결국 인적 네트워크 그 자체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인적 네트워크는 무엇을 말할까.
상민은 그것을 동료 지휘관들이라 생각했다.
국사 시간에 삼별초를 배우긴 했지만 기껏 한 페이지, 아니 반 페이지에 불과할 정도로 비중이 작았다.
때문에 현 시대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선 주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야 했다.
그래서 상민이 이곳에 와서 열심히 한 것은 상당히 단순한 일들이었다.
- 따악
바로 무예 수련.
극도의 마초적 사회, 군부 사회에서 하나의 수컷으로 존중받기 위해선 몇 가지가 필요했지만 그중 제일은 바로 일신의 무예이다.
자신이 도를 잘 쓴다는 것은 오자마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이 대련에서의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예전에 즐겨 했던 격투 게임에 비유를 하자면 피지컬과 반사 신경이 좋아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해도 수 십 가지 콤보와 얍삽한 기술, 팁을 모르면 같은 수준의 고인물에게 이길 수 없는 것처럼.
하단 공격에 상단 막기를 하면 쥐어 터진다.
자신의 가장 친한 문경과 처음 대련을 했을때, 문경은 의아해하며 말했다.
“아니, 형님, 간밤에 뭐라도 혼자 좋은 거 마셨습니까? 아주 꼴이 웃기지도 않는구려.”
그때는 자신이 한심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쪽팔리기도 했고.
근데, 그냥 쪽팔리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이곳에서 자신이 약하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부대에게도 민폐였다.
약해보이면 잡아먹힌다.
그래서 그는 일 년 동안 미친 듯이 무예수련을 계속해왔다.
일신의 재능과 힘, 심지어 근육에 각인된 기억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다만 부족한 것은 뇌의 생각과 육체의 간극 부족이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그것이 많이 사라졌다.
정석적인 방법으로 대련을 하면 문경이 이제는 상민을 쉽사리 압도하지 못했다.
오히려 동시대 사람 중에선 압도적인 체격에서 오는 힘에 밀리는 감이 있었지.
이제는 실전 경험 차이 뿐이었다.
조금 더티하게 싸우는 방법.
언제나 그렇듯 전투에서 예의와 기사도를 찾는 것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다.
바닥을 구르고 남의 눈에 흙을 던져가며 싸우는 승리가 고결한 패배보다 값지니까.
결국 무장은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살아가야 했다.
이번엔 그는 문경의 발차기에 오금을 맞아 쓰러졌다.
아, 팔꿈치를 막으니 이제는 로우킥을 날리네.
진짜 잘 싸운다.
온 몸이 물 먹은 듯이 무거웠다.
하지만 조금 쉬면 괜찮아 질 것이다.
문경도 힘이 달리는 지 바닥에 누워 있었다.
“강휘 형님은 괴물이오.”
“뭐가 말이냐.”
“무슨 인간이 그토록 많이 맞았는데 다시 펄떡펄떡 일어난단 말입니까?”
회복탄력성이 극도로 높은 몸 덕에 항상 먼저 질린 얼굴로 대련을 그만두자고 한 것은 문경이다.
놀라운건 니다 임마.
아니, 난 일당백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쟤도 가지고 있는 건가?
음, 그럴 것 같기도.
문경에게 최근 승률 오 할을 달성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현 고려군 제일이라는 통정과 겨루어 봤다.
그 때 허망하게 발린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대의 나름대로 한가락 하는 무장들은 제각기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날을 세우지 않은 도에 온 몸을 두들겨 맞은 탓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계속 누워있는 자신에게 용길이 물통을 가져다 주었다.
“고맙군 용길이.”
상민이 중랑장으로 승진하며 부대를 꾸릴 때, 친한 무인들로 자신의 부대를 채웠다.
자신이 고생할 때 함께 해준 문경과 용길, 연수 등도 제각기 낭 별장으로 영전했다.
승진이 좋긴 좋다.
이제는 궁궐 경계근무에 직접 나가지 않고 휘하의 무장들을 배치할 수 있었다.
다만 항상 책임의 소재(所在)는 그에게 있지만.
그들이 휴식을 취할 때, 병사 한 명이 다가와서 알렸다.
“중랑장님, 큰 일이 발생했습니다!”
물을 마시고 입 안을 가글하던 상민이 그 말에 핏물을 뱉었다.
그리고는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곡창 앞에서 크게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박량 낭장과 우별초 모영귀 낭장이랍니다.”
“아주 지랄 났네.”
무슨 애들 마냥 싸워대기나 하고, 그는 갑주를 챙겨 입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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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창 앞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모여 있었다.
얼굴이 팬더마냥 부은 박량이 꽁꽁 묶인 채로 꿇어 앉혀져 있었고, 마찬가지로 몇 대 맞은 모양인지 입가에 핏기가 있는 모영귀가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퉤 뱉으며 욕을 하고 있었다.
상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가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자신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남한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조용히 물 흐르는 듯 살자고 하는 주의였으나 그런 그도 가끔은 뚜껑이 열릴 정도로 화가 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자신과 친한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같은 전우인데도, 심지어 지휘관급 낭장을 무슨 죄인 다루듯 포승줄에 꽁꽁 묶어버린 이 상황에 대체 어떻게 화가 안 날 수 있겠나.
서로 싸웠으면 그냥 싸운 거지.
박량을 풀어주며 상민이 날카롭게 외치자 영귀가 입술을 씰룩대며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그 쪽에게 물어보시오.”
“네놈은 계급의 위 아래가 없느냐?”
영귀는 콧방귀를 뀌었다.
미친새낀가 정말로.
안 그래도 방금의 대련에서 져서 불이 난 가슴에 기름이 부어져 화가 아주 머리끝까지 난 상민을 연수가 막아섰다.
“일단 자초지종을 들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귓속말에 터지려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은 상민이 포승줄을 풀어냈다.
“말해봐.”
의외로 차분하게 박량이 말했다.
물론 희번덕거리는 눈동자 뒤에는 상민을 보고 애써 억누른 살기가 섞여 있었다.
“우리가 받을 군량에 쌀겨가 반 이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상민은 길 가의 수레에 다가가 살펴보았다.
도정이 안 된 평범한 쌀.
언뜻 보기에는 별 문제 없어보였다.
“위쪽 거 말고 아래쪽을 살펴보시지요.”
“......”
위쪽 군량은 정상적이라 아래쪽의 군량을 살펴보니 과연 그 말대로 쌀겨가 반 이상 섞여 있었다.
대놓고 선을 넘은 장난질.
그 어이없는 광경을 눈으로 확인하자 신기하게도 머리가 차분해졌다.
약간은 웃음기마저 띤 얼굴.
“설명을 해 보라.”
아까의 분노가 화를 내면서 따지는 것이었다면 지금 상민의 어조는 일견 평온해 보였으나 낮게 깔린 뱀이 독니를 드러내고 쉭쉭거리는 살기가 있었다.
만약 해명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도집에서 도를 꺼내 베어버릴 수 있다는 듯.
- 척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상민의 뒤에 서 있는 신의군들과 영귀 뒤에 있는 우별초들이 제각기 도집에 손을 갖다 대었다.
특히 자신들의 상관이 포승줄에 묶인 것을 뒤늦게 발견한 신의군들은 이를 갈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도를 뽑는다면.
얼마나 죽일 수 있을까.
후폭풍은?
우리 부대 애들은?
그들을 지켜야만 하는데.
지키기 위해선 오히려 물러서면 안 된다.
이것이 사소한 일이라고?
아니 군량에 장난질을 치는 것은 군령으로 다스릴 수 있는 중죄이다.
군문에 효수되어도 뭐라 항변할 수 없을 만큼.
정말로 죽여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온 몸의 근육이 마치 물결처럼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저 자를 벨 수 있도록.
상민은 소름이 돋을 정도의 절제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한 지휘관의 모습에 문경과 용길 또한 각오를 했는지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영귀도 이 상황을 의도하지는 않았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뒤의 병사에게 고갯짓을 했다.
잠시 후 비슷한 양의 쌀이 담긴 수레가 그들 손에 이끌려 왔다.
“송구합니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들 뒤에 있는 산원(散員) 하나가 깊게 읍을 하며 그리 말했다.
영귀도 마지못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내가 진급한 게 아니꼬우면 니도 진급을 하던가.
“...죄송합니다.”
천천히 숨을 골랐다.
몸에 분출된 아드레날린이 아직도 쿵쿵거리며 귓가에 아련히 들려왔다.
상민이 눈을 잠시 감고는 등 뒤의 병사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새로운 수레를 챙기고 빠져나가는 신의군의 후미에서 상민이 말했다.
“두 번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
산원이 재차 고개를 숙였지만 영귀는 이미 등을 돌려 자리를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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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에서 박량이 자꾸만 씩씩대자 상민이 피식 웃었다.
“화가 나나?”
“어찌 화가 나지 않겠나.”
공적인 자리에서야 존대를 했다지만 상민은 친한 동료들에게 굳이 존댓말을 강요하진 않았다.
반쯤은 섞어 쓰고 있는 상황인데.
뭐 때가 되면 알아서 하겠지.
그런 거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 내 직속도 아니고.
“네가 두들겨 맞았으나 그만큼 갚아줘서 그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저 영귀라는 놈이 몸이 둔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도록.”
상민의 그 말에 발끈한 량이 빈정거렸다.
“그럼 나만 흠씬 두들겨 맞았다면 진짜로 저들과 도를 들고 한바탕 칼춤이라도 출 생각이셨나?”
“모르지.”
확신이 섞인 대답을 주지는 않았다.
량이 그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들은 걸으면서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따라 나온 문경도, 용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