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밝은 밤에
하루하루는 너무나 빨리 흘러간다.
눈 떠보니 이곳에 떨어진 지도 벌써 꽤 된 것 같은데.
오늘의 일과가 어제의 일과와 다를 바가 거의 없었기에, 뇌리에 저장된 기억이란 다 비슷비슷했다.
그래서 시간이 상대적으로 더 빠르게 흘러간 것처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별초들이 엊그제 밤에 대부분 출정을 해서 거리가 꽤 한산해진 때, 노을이 지기를 기다려 거점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빠져나왔다.
거점 북동쪽에 사찰이 하나 세워졌는데 이름을 흥양사(興陽寺)라 하였다.
그곳을 방문하고 싶다는 왕실의 요청이 있었다.
고려의 불교 풍습이야 말할 것도 없어, 별초의 조정에서도 건립을 지원했고 지금은 관, 군, 민을 막론하고 수많은 자들이 발걸음을 하는 꽤 큰 규모의 사찰이 되어가고 있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그까짓 것 그냥 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지만, 궁궐 안에 속박해 놓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나쁜 놈들의 편에서 그렇게 매정한 말을 던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통정과 상민이 왕온과 그의 아들딸들을 호위하며 가고 있는 것이지.
명목상으로는 출정을 나선 자들의 승리를 기원하고 앞으로의 고려의 평화를 기원하는(國泰民安) 의미의 불재(佛齋)였다.
다만 사람이 꽤 많은 다른 날과는 달리 오늘 밤은 철저히 왕족과 고위 무장들을 대상으로 하는 불재라 인원이 극히 적었다.
절 입구에 들어가니 승려들과 동자승 몇 명이 대사(大事)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려에서 건너 온 세 명의 승려 중, 보성(普成)이 가장 항렬이 높고 학식과 불심이 깊었는데 성주산문(聖住山門) 출신으로 지눌(知訥)의 불계(佛繼)를 이었다.
미리 언질을 받은 것인지 그가 나와 자신들을 환대했다.
“폐하, 소승이 문안을 오래도록 드리지 못한 것이 참으로 송구하옵나이다.”
“짐도 대사의 얼굴을 보는 것이 이리 기쁠 줄 알았다면 더욱 자주 볼 걸 그랬나보오.”
두 손을 부여잡고 해후를 나눈 왕온이 보성의 안내에 따라 사찰의 안으로 들어가자 상민은 능숙하게 병력들을 인솔하여 사찰 주변을 경계토록 했다.
절 가장 큰 마당에 어른의 사정인지 석재가 아닌 목재로 된 상당히 큰 탑이 하나 있었고, 다른 안쪽 구역에 작은 탑이 하나 더 있었다.
혹시라도 안쪽의 위험 요소를 탐색하고 작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 하자 작은 손이 그를 가로막았다.
“불사(佛事)가 이미 시작했으니 장군께서는 저희와 함께 이곳에서 탑을 도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몽수를 뒤집어쓰고 작은 탑을 거닐던 여인의 목소리는 상당히 익숙했다.
가녀린 몸, 그리고 몽수로도 가리지 못하는 크고 선한 눈빛.
향기롭고 달콤한 체향.
“소장이 있을 법 한 곳이 아니오라...”
“장군께서는 분명 저희 자매를 호위하는 일도 있으시겠지요.”
물론 그렇긴 했다.
왕온은 통정이 호위하고 있을 것이었다.
상민도 저 밖의 우중충한 무장들과 남자들 사이에 껴서 불사를 듣고 싶은 마음은 단 일 퍼센트도 없었다.
애초에 평생 무신론자로 살아온 그였기에 종교 자체에 대해 약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마음도 있었다.
“......”
얼떨결에 상민은 자매의 뒤를 좇아 탑을 돌기 시작했다.
앞의 두 여인이 작게 무어라 흥얼거리는 것을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돌아야지.’
고려는 조선에 비해 남녀가 유별하다는 생각이 상당히 옅었다.
성(性)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나라였기에 여성의 인권이 그리 낮지도 않았다.
다만 지금 고려에서도 굳이 여인의 몸으로 저 수많은 남정네들 사이에서 함께 탑을 돌 이유가 단 한 가지도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리를 따로 마련한 것이겠지.
또한 왕실 여인의 신세는 여염집 아낙의 처지와는 분명 다른 면이 있기도 했다.
그녀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에 몸을 맡기고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다 보니 자신도 자연스럽게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하는가.’
상민은 본래부터 자신을 소시민적 인물로 규정한 뒤에 단단한 가면을 쓰고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도 주목받기보다는 주목받는 자를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다.
인기 게임을 하면서도 항상 보조 캐릭을 골라 팀원들을 서포트해주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왜인지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내재적인 자격지심과 애써 모든 것을 낙천적으로 생각하려는 성격.
다른 말로 하면 포기가 빠른 인간.
다만 그냥 그것이 익숙하고 편했을 뿐.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자신도 굳이 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자신은 이곳에 왜 떨어지게 된 것인가.
어떠한 천명(天命)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면 왜 하필 자신이.
자신의 게임에서.
수많은 특성들을 가지고 말이야.
이곳에서도 고려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자신은 방관자적 입장에서 관찰을 하고 있는 사람일 뿐.
무엇인가를 변화시킬 근본적 의지 자체가 희박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야 하는가?
상념이 멈추었다.
자신의 내적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아 그러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앞 사람이 걸음을 멈추었기에.
그래서 상민은 보드라운 앞 사람의 등과 부딪히고 말았다.
참고로 자신은 꽤 무거운 갑주를 입고 있는 상황.
무거운 질량에 약간 밀려나듯 쓰러진 예가 발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이런...”
그 모습을 보면 아무리 몸싸움에 관대한 EPL 주심이라 하더라도 노란 카드를 빼어 들 수 밖에 없었겠지.
자신의 과실이 200%이기에 왕영의 묘한 표정을 너머로 그는 서둘러 왕예를 부축하고 절 전각의 마루로 대려가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붉게 부푼 상처 부위를 살폈다.
발목이 약간 삔 듯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파스도 없고 깁스도 없는데.
당황하는 상민과는 다르게 예는 벗겨진 몽수를 다시 쓰지도 않은 채로 상민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똑한 콧날과 사슴과 같은 눈망울이 그저 궁금함과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사과조차 아직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
예는 짐짓 태연하게 발목을 움직여 보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별로 괜찮아 보이진 않았다.
방금도 고통이 밀려오는 지 살짝 얼굴을 찡그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예는 엉뚱한 말을 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빈정거림이나 힐난이 섞인 목소리는 분명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어투.
상민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소장의 앞날과 이 고려의 앞날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가 가만히 그의 손을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찰갑의 냉기에 차가워진 손을 타고 마치 전류처럼 찌릿하게 흘렀다.
자신은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연애경험이 많지는 않았으나 없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이 손길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편린 정도는 얼추 읽을 수 있었다.
상민은 가슴이 갑자기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한참동안 러닝머신을 타다가 갑자기 바닥에 발을 디뎠을 때 훅 하고 체감되는 심장박동의 난폭함.
에피네프린인지, 도파민인지 그도 아니라면 옥시토신인지.
정체모를 호르몬이 뇌에 과다하게 분비되는 모양이다.
‘이런...’
좋지 않은 징조였다.
가슴이 싸해지는 것과는 반대로, 몸 구석구석 흐르는 이 뒤틀린 욕망은 눈치없이 자꾸만 머릿 속에 헛된 바람을 집어넣는다.
예가 은은하게 웃었다.
“장군께선 참으로 충신이시니 그 곳의 고려는 분명 평화롭겠지요?”
그리고 그 자그마한 말 한마디에 상민의 심기가 뒤틀렸다.
자신은 충신도 아니며 고려는 평화롭지도 않을 것인데.
상민은 내색하지 않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걷는 것이 불편하시면 소장이 거처로 모시오리까?”
예는 몇 번 더 움직여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것들에게 일러 서둘러 가마를 만들라고 해야겠습니다.”
아무리 흥양사의 위치가 가깝다 하나 왕실의 인원들이 발로 걸어가는 것은 상당히 웃긴 일이었다.
가마와 수레 정도는 지금도 몇 번 뚝딱거리면 만들 수 있을 텐데.
귀찮아서 안하는 것인지 일부러 안하는 것인지.
미안함을 다른 감정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던 예가 도리어 상민을 토닥이며 만류했다.
“그러지 마세요.”
부축을 하려 하자, 예가 살짝 신음성을 흘렸다.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모양이다.
둘은 다소 요란하고 왁자지껄한 절의 앞마당의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가만히 그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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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이른 시간 내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상민은 문경과 연수를 불러 경호의 임무를 맡기고는 자신은 갑주와 무구들을 벗고는 세간의 시선을 피해 홀로 그녀를 부축하여 궐로 돌아왔다.
계속 아파하여 나중에는 숫제 등에 업혀 오기까지 했다.
누가 볼까봐 비단보를 꽁꽁 둘러매 마치 포대에 감긴 아기와도 같았다.
힘이 세진 장점이 새삼 느껴졌다.
등 뒤에 따뜻한 온기를 만끽하며 상민은 거리를 걸었다.
백성들이야 야밤에 왕래를 통제했다지만 군졸들의 눈길까지 피할 수는 없었는데.
근무를 서고 있는 자들이 같은 부대원이라는 사실이 새삼 다행이다.
저 멀리 사의와 종강 등의 미심쩍은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며 궐에 도달했다.
후원은 금남(禁男)의 구역이라 그 입구에서 예를 내리자 그녀가 옷매무새를 바르게 한 뒤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감사했습니다.”
“소장이 큰 결례를 저지른 탓이니, 오로지 용서를 구할 따름입니다.”
“이미 다 지나가 기억에 없는 일입니다.”
예는 미소를 지은 뒤 덩달아 같이 돌아오게 된 영에 기대어 안에 들어갔다.
한동안 상민은 망부석마냥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기억에 없다고? 난 절대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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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일도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는다.
전조는 분명히 있었다.
다만 이렇게 급진전을 하게 된 것이 너무나 당혹스러울 뿐.
하지만 분명 싫어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궁궐 담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자, 천하에서 제일 가녀린 척을 하던 예가 언제 그랬냐는 듯 언니와 떨어져 자연스럽게 걷는 보며 기가 찬 영은 동생의 볼을 쿡 찔렀다.
“정신 차리렴.”
“언니는 왜 돌아온 거에요?”
불퉁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는 예의 말에 헛웃음을 지은 영은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언젠가부터 항상 궁 어딘가를 바라보던 동생의 행동이 의문스러워 몰래 알아보았는데, 분명 삼별초의 저 무장에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영이 보기에도 상당히 키가 크고 늠름한 자였는데 인상이 선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했다.
예전에 자신도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자긴 하였는데, 동생은 기억에 남는 정도가 아니라 그 흔적이 크게 각인이 되었나보다.
그 모습이 가여워 불공을 드리는 틈을 타 궁인들을 물리고 둘 만의 기회를 마련해 주니, 오늘 아주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영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결혼 정년기가 된 왕의 두 딸.
결국 그녀와 그녀의 동생은 귀한 꽃에 불과하여 가장 가격을 높게 쳐 주는 자와 혼약을 해야 할 터였다.
그 자가 마음에 들던 아니던,
심지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자라 하더라도.
칼날 위를 걷고 있는 아버지와 오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그리 할 수밖에.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겠지만.
왕영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