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속전쟁
서북쪽으로 보냈던 척후가 돌아오며 야인들의 부락과 규모를 알렸다.
고려가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은 원주민들도 모를 리 없었다.
영토와 대지의 풍요로움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적은 인구 밀도의 원주민들이 상대적으로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은 고려의 규모에 놀라 서로 뭉치기로 한 모양이다.
그 넓은 거리의 부족들이 서로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수천에 달하는 거대한 인원이 있다고 했다.
그 수가 제법 많긴 하나 놀랄 정도의 인원은 아니었다.
동시대의 유라시아 대륙의 유목민의 땅이었으면 아무리 낮아도 만 단위의 군세가 모일 정도의 땅이었다.
예상 병력은 족히 천오백.
부족 사회의 특징상, 창과 활을 쥐고 거동을 할 수 있는 남자는 죄다 병사라 보아도 무방했기에 별초들도 그 군세의 규모를 마냥 얕볼 수는 없었다.
모처럼 별초들에게 전쟁 직전의 열기가 피어올랐다.
수많은 병졸들이 자신의 무구를 차고 갑옷을 입고 출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려가 가지고 있는 군마는 대략 천 여 기에 달했다.
전투에 쓰기 적합한 거세마로 몽고마에 비해 지구력이 낮았지만 쓸 만 했다.
많은 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망치의 역할을 하기엔 충분하다.
그리고 그 군마들은 대부분 마별초의 편제로 좌우별초의 휘하에 편성되어 있었다.
모루의 역할을 할 삼천 명의 보군까지, 총합 사천 명의 별초들이 출정을 준비했다.
엄청난 규모의 출전이었다.
일부 편성에서 제외된 좌우별초와 신의군은 예외였다.
거점의 방어와 노동력의 부족, 군량 소모의 문제 같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
행정도 담당하고 있는 자신과는 다르게 일선의 지휘관급 무장들은 제각기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만이 넘쳐 보이는 문경은 내성의 누대 위에 올라가 있는 상민의 옆에 서 저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이제 막 근무에서 돌아온 문경이 발로 갓 지은 성벽을 찼다.
벽돌부스러기가 휘날리도록 찬 그는 한 박자 늦게 고통이 밀려오는 지 오만상을 찌푸렸다.
“또 왜 그리 화가 나셨나.”
문경은 씩씩대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우리보고 집 지키는 개라 그러잖습니까.”
“대체 누가?”
“제 동향 사람 한 놈이 좌별초에 있는데 그 놈이 그러덥니다.”
상민은 팍 인상을 썼다.
“그건 좀 심했군.”
“저들 사이에선 자주 나오는 말인가 봅니다.”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총지유께서 우리를 그리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아니시겠지.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야만의 시대에 거부감이 있던 상민은 도를 들고 전쟁에 나가 애먼 원주민의 목을 뎅겅 자르고 다니며 잔혹한 전쟁 다큐멘터리를 찍느니 후방에서 남아 내정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나 친한 사람들에게도 이야기 할 것이 되지 못했다.
문경이 들은 말.
친한 사이라면 지 딴에는 반쯤 웃자고 한 이야기겠지만 시기가 좋지는 못했다.
이번 전쟁은 방어전, 혹은 공격전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약탈 및 복속전쟁.
그 말인 즉 슨, 공을 세우는 자는 크게 한 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비로든지 재화로든지.
제외된 신의군의 불평불만이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군대의 동기부여에는 충성과 애국심이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확천금만큼 강한 동기부여가 있을 수 있을까?
조금 잔혹한 이야기겠지만 아주 현실적인 예상을 해보자.
남미 원주민들이 굉장히 공격적인 원주민 중 하나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푸체족은 말을 얻고 그것을 다루는 법을 알아낸 후 스페인 침략자들에 맞서 싸워 그들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이 전투에서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크트리가 너무 차이가 난다.
철제 병기도 없는 이 반쯤 신석기와 청동기를 걸쳐 있는 사람들에게 질 수가 있겠는가.
심지어 현 시점에서 그들에겐 기동성 있는 가축, 말이 없었고, 상대는 무려 몽골제국과 싸우던 고려 최정예 삼별초의 군세였으니.
그것도 개척을 한답시고 오랜 기간에 걸쳐 찔금찔금 온 정착자들이 아니라, 당장 엊그제까지만 해도 활을 쏘고 도를 휘두르던 병사 만 여 명이다.
말이 없는 유목민은, 배 없는 수군보다도 못하다.
저항할 만한 자들은 전부 죽고, 어린 아이와 여자만 살아남겠지.
그들은 노비가 되어 노동력을 담당하거나, 첩이 될 것이다.
‘그 문제가 있긴 했군.’
상민은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도덕적 판단은 차치하고, 이 순간은 중요한 갈림길 일지도 몰랐다.
지금 당장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들은 없어보였지만.
현재 고려는 극도로 불균형한 성비를 자랑하고 있었다.
강화에서 별초들이 제각기 가족을 대동하고 이곳에 왔지만, 애초부터 가정을 꾸리지 않은 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도 많았고.
지금 이 상황은 폭발 직전의 화약고나 다를 바가 없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생식욕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였고 상황이 악화되면 소요가 일어날 수 있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현재 고려는 국가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작은 세력만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상태였다.
전란 전 개성과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었고, 승화후 왕온의 봉토였던 전주가 이보다는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국가의 국력은 곧 인구의 숫자에 기반하는 것인즉, 고른 성비 하에서의 자연인구증가율이 정주민에겐 가장 이상적인 상태였다.
아무리 꿀 같은 땅에 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룰 노동력이 없어서야 무엇을 하겠는가.
적어도 예전 고려의 체급이 되어야 무언가를 자체적으로 할 수 있었다.
정복전쟁은 이 난관을 타개할 유일한 방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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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전투는 부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활이 죽 뻗지 않았다.
아교도 불안하다.
멀리서 사격전을 하기엔 여건이 좋지 않았다.
저들이라고 다른 것 같지는 않아서 쏘는 투석구와 화살이 수패(獸牌, 방패)에 막혀 힘없이 떨어졌다.
“공격하라!”
좌측 보군을 이끄는 노영희가 연신 고함을 질렀다.
대형을 갖추고 전진하는 보병들이 마침내 적 야만인들과 마주하자 큰 충돌이 일었다.
예측된 범위 하에 있었기 때문에 대형이 상하지는 않았다.
칼날을 달아놓은 수패 너머로 엉겨붙던 저들이 스스로의 힘에 상해 쓰러지는 일도 일어났다.
-와아아!
그래도 야인들 치고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저들의 기세가 상당히 강합니다.”
중손의 곁으로 시적이 다가와 말했다.
“근골과 체격이 의외로 좋은 편이다.”
하지만 이미 모루에 안정적으로 얹혀 있는 상황.
저 멀리 충분한 거리에서 가속을 받은 기병이 적들의 후미를 쳤다.
“죽어라!”
자신의 허벅지 마냥 큰 대도를 휘두르는 용장 김인광(金麟光)의 무위에 여러 야만인들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버텨야할 본대가 오히려 나아가 두들겨 패고 있는 상황
개개인의 무예 격차는 물론이고 생전 처음 보는 큰 육상동물과 기수의 돌진 앞에서 야인들의 무리는 기세가 크게 꺾였다.
대 기병 방진은 커녕 진형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야인들이다.
대응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질량을 앞세운 돌격 공격에 저들의 무리가 와해되며 모두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형적이나 그만큼 효과적인 전략.
중손은 고소를 삼켰다.
몽골군이라면 이 어림없는 전술을 시도하기 전에 이미 빼어난 궁술을 자랑하는 궁기병들로 하여금 큰 손해를 강제하며 아군을 구렁텅이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로 회전을 할 수도 없었겠지.
이런 평지에서의 대회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학살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애초에 변변한 대형을 갖추지도 않았던 저들이다.
기마병 상대로 도망갈 수 있을 만큼 달리기가 빠른 자들이 있을 리 없었다.
잔혹한 학살의 시간이 끝나고, 별초들의 군세는 서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 그들의 텅 빈 군락을 쳤다.
이제는 수확의 시간이다.
엉성하게 지은 야인들의 움막에서 겨우 가죽 데기를 걸친 여인들이 끌려나왔고, 늙은이들은 가차 없이 도에 베여 죽었다.
어린 아이들은 반항을 하지 않는 자들을 골라 서로 나눠 가졌으며 다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채집한 작물들도 꽤나 있는 것이 부수적인 수입으로 쓰기에 딱 좋아 보였다.
그 넓은 땅이 고작 사천의 군세에 유린당하는 속도는 너무나도 빨랐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본디 야인들의 촌락이 있었던 곳은 검게 탄 재와 누군지 형체를 찾아 볼 수 없는 탄 뼈들이 쌓여 있는 무덤만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