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고려와 원, 그리고 왜
하루아침에 반역도들의 무리가 사라졌다.
처음 이 보고가 올라왔을 때, 삼별초 토벌대의 지휘관 김방경(金方慶)은 전혀 믿지 않았다.
전주와 나주에서 접전을 치룬 까닭에 그들의 규모와 능력에 대해 누구보다 소상히 알고 있는 장수였기에.
항해하다 죄다 물고기밥이 되는 허망한 최후를 맞이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방경 일신의 능력도 대단하였지만 삼별초의 능력도 마찬가지로 대단했다.
철저한 기만전술이라 판단한 김방경은 천천히 진도로 진군을 계속하였지만 정말로 흔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심지어 척후도 운용하지 않았다.
방경은 기세를 몰아 벽파진을 점거하고 진도를 바라보았다.
“진실로 없다는 것이냐.”
섬은 인적이 드물었다.
본디 예전부터 섬에 살았던 자를 잡아와 취조하니 그런 무리들을 본 적이 있으나 어느 순간 사라졌다 했다.
바다 안개가 짙게 깔려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모르겠다는 첨언을 들은 방경은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다.
그는 장계를 올려 왕정에게 고했다.
- 신 등이 진도에 도달해 역적들의 동태를 살피려 하니 흔적이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까닭을 괴이하게 여겨 주변 백정들을 심문하여 살피니 모두가 일관된 진술을 하는 것이 거짓을 고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나이다.
- 중략 -
소장이 생각건대, 역도들의 무리가 탐라로 향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어명을 내려 주소서.
왕정은 그 장계를 받고 고심에 빠졌다.
당장 고려의 수군은 구멍이 크게 뚫린 상태였다.
서해안의 군선이란 군선은 죄다 약탈당한 것은 물론 고기잡이 소선까지 죄다 싹 털어간 놈들은 메뚜기 떼와 같았다.
조운선도 약탈당하고 고려의 군민들도 약탈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상흔일 뿐이라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크게 우려하는 것은 진도에 거점을 잡고 우월한 수군을 이용하여 삼남의 물류를 쥐고 할거하여 오랫동안 조정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탐라로 향한다?
당장은 아늑할지 모르나, 고려가 회복하며 다시 군선을 만들어 토벌대를 보낼 것이니 그들의 비참한 최후는 정해져 있으리라.
'저들의 행패도 고려해야 할 텐데.'
쿠빌라이 칸은 남송을 치고 있으면서도 왜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욕심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왜가 남송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이유가 어찌되었건 그럴 여력은 충분히 있는 나라였다.
삼별초가 매우 위협적인 단체였고 골칫거리긴 했지만 역으로 이는 고려의 지지부진한 대몽협력에 큰 면죄부가 되고 있기도 했었다.
몽골 입장에선 당장 탐라에 처박힌 삼별초는 별 위협이 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었으나 몽골은 탐라 섬 자체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초지가 유목민에게 매력적인 까닭인가.
왕정은 서둘러 탐라에 정찰선을 띄우라 명한 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김방경이 보낸 장계를 읽은 왕정이 얼굴을 감싸쥐었다.
탐라는 비었다.
삼별초의 무리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장군 고여림과 영암부사 김수 등이 작은 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제주에 들어가 살펴보니 그들이 왔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일천 척의 대선단이 어디로 향했을까.
진도와 탐라가 아니라면 어디로.
대부분이 소선들로 이루어진 선단이 송 남쪽으로 가기엔 거리가 멀고 바다가 험하다.
왜로 향했을까.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쿠빌라이는 더 이상 사정을 봐 주지 않을 것이다.
삼별초가 왜로 향했다면 심지어 고려 입장에서도 명분이 서는 원정이 되어버리는 마당에.
이제는 정말 방도가 없었다.
고려는 진심으로 모든 역량을 다해 대왜 원정을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왕정은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대칸에게 쓸 표문(表文)을 작성했다.
납작 엎드려야 한다.
수치스러운 일이나 그래야 고려가 산다.
왕정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극도의 스트레스에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
고려와 원의 대왜 정벌군이 편성되었다.
그 규모는 실로 놀라워서 몽골군 사만여 명, 고려군 삼만여 명에 전선만 이천 척에 달했다.
또한 고려의 저력을 동원하여 충분한 시간을 두고 만든 군선은 견고했다.
원 세조 쿠빌라이는 그 규모와 함대의 질에 크게 만족감을 표했다.
고려의 왕이 죽어 그의 부마(충렬왕)가 뒤를 이었다.
무슨 일인지 요즘 들어 태도가 고분고분해진 것을 넘어 아예 적극적으로 변한 것도 좋았다.
마지막으로 총 지휘관 인선이 문제인 것이었는데.
홍다구(洪茶丘)는 자꾸만 사사로운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분란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 요즘 그의 눈에 좀 거슬리는 면이 있었다.
흔도(炘都)는 마침 병을 앓고 있어 언제 나을지 몰랐다.
“우승상(右丞相). 그대가 가겠는가?"
중서우승상(中書右丞相) 바얀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소신이 왜의 구주 지역에 발판만 마련해도 대칸의 군세가 능히 왜 전역을 복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송의 토벌에는 소신을 불러 주시옵소서.
친애하는 신하의 그러한 말에 쿠빌라이는 크게 웃으며 그리 하겠다 약조했다.
1273년 음력 12월 12일.
대원제국과 고려의 연합군이 구주로 떠났다.
신의 바람(神風, 카미카제)이 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