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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1화 (11/653)

상황 파악

사고의 흐름은 마치 실타래와 같아서 풀리지 않는 부분을 잘라내면 그 뒤로는 손쉽게 처리해 나갈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수많은 정보들이 암암리에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꽉 막혀 있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8월이지만 고려와 정 반대의 서늘한 기후

그리고 익숙하면서 익숙하지 않다는 별자리들.

남미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뉴트리아.

그리고 어제 보았던 지도까지.

그 지도의 질은 이 시대의 지도답게 가독성이 좋지 않았고 너무나 대충 그려진 지도였다.

말린 양의 가죽 위, 굵은 붓으로 그린 지도.

하지만 그려진 해안선은 꽤 익숙한 곳이었다.

라 플라타(Rio de La Plata)강.

파라나강과 우루과이 강이 만나는 거대한 강의 하구.

그 특유의 지형을 어찌 그 같은 대전략게임 고인물이 모를 수 있겠는가.

대체 어째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몰랐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유니버셜 킹덤즈 속으로 지금 떨어진 이유조차 설명이 되지 않았다.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게임 속에 모딩이 잘못된 것이 있었거나, 그가 잘못 클릭을 했을 수도 있다.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증거들을 앞에 두고 외면하는 것도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다.

아침 근무를 서고 온 상민은 서둘러 길을 나섰다.

오늘 할 일은 정말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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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강 서쪽에 신의군이 담당하는 둔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점과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거점의 방어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

하지만 땅은 비옥하여 농작물이 잘 자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제 막 개간이 끝나 드넓은 벌판에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민전(民田)을 불하(拂下)한 것이 아니라 반쯤 저들이 나라의 땅을 소작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일견 의욕이 없을 법 했지만, 이대로면 모두 굶어 죽겠다는 생각인지, 아니면 이렇게 넓은 평야를 눈앞에 둔 농부의 본능적인 행동인지 벅찰 정도로 많은 곳을 개간을 한 모양이다.

‘이거 다 노동력이 필요한데.’

일을 크게 벌인 것은 보기엔 좋겠지만 실속은 별로 없을 수 있었다.

하물며 지금 땅보다도 사람이 귀한 마당에.

삼국시대에 이미 도입된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는 고려에서는 이미 보편화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우경(牛耕)을 할 수는 없었다.

땅보다도 사람이 귀하다면 사람보다 귀한 것이 지금의 소였으니까.

조정, 아니 군부에서 중요한 가축들, 소 말 양을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 해도 그들이 번식하는 것을 기다리려면 몇 년은 걸릴 것이다.

민간이 그 혜택을 받는 일도 족히 수년은 필요로 했고.

사람이 끄는 인쟁기를 바라보던 상민이 혀를 찼다.

심지어 사람들은 제각기 나무 괭이를 쓰고 있었다.

철소(鐵所)의 사람들이 다른 일들로 바쁘기 때문일까.

‘상부에 건의를 해 봐도 묵묵부답일 뿐.’

고개를 흔들고 이미 불가능하다 결론이 난 사항을 뇌리에서 지웠다.

통정은 상민에게 이곳 둔전의 꽤 광범위한 권한을 수락한 상태였다.

행정, 그리고 사법권까지.

백정들의 대표로 삼은 나이가 많은 노인 열 몇 명이 상민의 부름에 다가왔다.

“아이고, 장군님, 긴 밤 평안하셨는지요?”

상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엄한 척 하고 있으나, 사실 고역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21세기 출신 예의바른 청년에게는 아직도 적응하기 힘든 부분 중 하나였다.

“그대들에게 알려 줄 것이 있다.”

“예에.”

“본디 파종을 하기로 계획했던 가을보리와 가을밀의 파종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예에?”

상민은 밤새 고민한 것을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큰 도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법.

스스로에게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다.

현재 고려의 농업은 밭농사와 논농사로 나뉘어 있었다.

규모는 당연하게도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컸다.

한반도 사람의 쌀 사랑은 유난스러운 면이 있어, 아마 한민족이 외계 행성으로 떨어진다면 다른건 다 둘째치고 제일 먼저 쌀부터 어떻게 재배할 수 있을지 알아볼 사람들이었다.

다만 수풀과 잡목들이 우거진 땅을 개간하는 것도 벅찬 마당에 관개수로를 정비할 여유는 전혀 없는 관계로 이앙법(移秧法)은 꿈도 꾸지 못했고, 심지어 수경직파법(水耕直播法)도 힘들어 보였다.

마치 밭과 같이 관리할 수 있게 건경직파법(乾耕直播法)을 시도하고 있는 상황.

그가 농업의 달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전문가(머리가 흰 어르신들)의 말을 들어줄 줄은 알았다.

밭의 작물을 보자면 오곡 전부, 즉 보리와 콩, 수수, 조, 기장에 더해 밀과 팥 등이 재배되고 있었다.

고려는 2년 3작법의 윤작법이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조를 기른 후 가을보리, 그리고 콩을 기르는 식으로.

지금 여기에 뭘 기를 지는 한 평생 농사일을 한 그들이 알아서 기르겠지.

다만 지금 불러 모아 그들에게 추파성 작물은 웬만하면 심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추파성 작물을 날씨가 풀리는 시점에 심어버리면 당장 잘 자라긴 하겠지만 나중에 개화가 안 돼 쓸모가 없어질 것이니까.

농사일이라곤 쥐뿔도 모를 것 같이 생긴 장군이 그러한 명령을 하자 농부들은 고개를 숙이면서도 의문스러운 눈빛이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지방에 가족이 있어 농사일을 도와 준 것도 아니고.

도시에서 태어난 고아가 농사일을 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국사 공부할 때 활자로 배운 몇 마디 말이 전부였다.

시비법이니 퇴비법이니. 윤작이니 이모작이니 이앙법이니.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그는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공무원이 된 죄책감이 살짝 들었다.

남미,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의 농법에 대해 본 자료는 전혀 없었다.

이것은 순전히 자신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다.

‘젠장.’

물론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긴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시간만이 말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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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농민들 사이에서 상민은 꽤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다.

일단 일을 하지 않는다고 때리는 자는 아니었다는 것으로 별점이 하나 올라갈 것이고.

남의 세간을 사사로이 약탈하지 않는 것으로 또 하나의 별점이 올라갈 것이다.

금수가 아니라면 별 두개는 받고 시작한다 하더라도.

물어보는 것에 친절히 답해주는 것.

같은 백정들 간의 불화에 대해 중재를 해 주는 것.

그것도 굉장히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합리적으로 공명정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

별초 병사들, 그가 지휘하는 신의군들이 백정들을 착취하려는 것을 엄히 다스리는 것들.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든 포청천을 바라보는 것 마냥 그들의 눈에는 신망이 가득했다.

“다음 일을 고하시오.”

“다름이 아니오라...”

통정이 시킨 일은 아니었다.

자신도 평소 나서서 일을 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 시기의 사람들이 사는 꼴이 너무나 안타깝고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자원 봉사하는 느낌으로 일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문은 며칠 만에 다른 군의 관할 아래 둔전을 경작하는 백정들뿐만 아니라 소(所) 출신 백성들까지 퍼져나갔다.

소(所)란 향 부곡과 더불어서 고려의 특수행정구역으로 일반적인 논밭을 가꾸는 백정들이 아니라 각기 가진 재주를 가지고 먹고 사는 자들이었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사학계에서 의견이 나뉘어져 있었지만 단체의 성질은 분명했다. 일반 백정들보다 힘든 일을 하며 나라에 공물을 바치는 자들이라 대접도 못 받고 돈도 많이 뜯기는 3D업종이라 볼 수 있었다.

고려에는 여러 소가 있었고, 전란의 시기에 다인철소같이 몽골에 맞서 싸운 이들도 많았다.

삼별초의 선단이 강화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할 때 예상외로 많은 자들이 호응을 하며 합류했다.

몽골에 대한 적개심일 수도 있었겠고, 차별받는 사회 구조에 대한 불만으로 신정부 세력에 가담했을 수도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다.

알아보겠다고 설문지를 돌릴 수도 없었으니까.

여하튼 지금 이 새로운 땅에 떨어진 고려에 그들의 수가 적지 않게 있다는 말이다.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철소(鐵所)의 인원들은 별초들의 무구를 손보고 철제 농기구를 만들고 있었다.

어량소(魚梁所)의 인원들은 강에 어전을 설치하고 물고기를 잡고 있었으며, 자기소(瓷器所)와 와소(瓦所)의 인원들은 제각기 도자기나 기와를 굽느라 바빴다.

지소(紙所, 종이), 다소(茶所, 차) 등의 사람들은 가지고 온 씨앗들이 싹틀 때 까지는 일반 백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공통적으로 하는 일과는 관계가 없이 아직도 사회적으로 만연한 차별의 분위기는 존재하고 있었다.

사회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것도 이 봉건 사회에선 더더욱.

백성들의 관념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 것이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적어도 별초들의 수뇌부들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렸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겠지.

자발적으로 내려온 인원이면 대우를 좀 해줄 법도 했지만 대체로 그들은 무지(혹은 무식)하거나 이런 사소한 것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백성들이 지소 출신의 천민을 업신여겨 그들이 힘써 개간한 땅을 함부로 빼앗고 항의하는 자를 때려눕혔다.

지속적인 괴롭힘에 부부가 앓아누웠고 심지어 모친은 기식이 엄엄하다 하니, 부부의 아들이 상민에게 울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제 아바지와 오마니를 살려주시라요!”

서해도(해주) 출신인지 방언이 강한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진흙투성이의 바닥에 머리를 쳐박았다.

그 사이 돌멩이라도 있었는지, 머리에 상처가 났다.

그 꼴이 안타까웠으나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기 관할 구역도 아니었기에.

용길도 귀엣말을 했다.

“사정이 딱하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상민은 깊은 정신적 피로감을 느꼈다.

이 주먹구구식 시스템에서 자신의 행동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으니까.

상민이 망설이는 기색을 하다, 이내 단념하는 것처럼 보이자 소년은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엎드린 채 기어와 그 더러운 손으로 상민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래, 어쩌면.’

“이 놈이 주제를 모르고 본관의 몸과 무구에 손을 대었으니 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상민은 거칠게 소년을 떨쳐내더니 돌연 낯빛을 바꾸어 호통을 쳤다.

그 기세가 실로 위압적이라 주변 사람들이 사색이 되었다.

“무인에게 검과 갑주는 곧 생명이며 긍지인 것인데 이놈이 감히 그것을 더럽혔다.”

그리고는 용길에게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명령했다.

“놈과 놈의 가족들을 끌고 와 크게 벌을 내려야 할 것이다. 정 산원은 속히 실행하라.”

과격한 말에 소년은 공포에 얼어붙은 듯 가만히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덜덜 떨 뿐이었고 주변 사람들도 모두 시선을 피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안 그래도 가끔 잘 대해주니까 도리어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긴 했다.

자신은 순수하게 선의로 하는 일인데 그로인해 짜증이 쌓이는 일도 있었다.

한번쯤 화를 낼 때도 되었긴 했지.

그래서 지금 자신은 반은 진텐이다.

상민은 짐짓 화가 난 듯 뒤돌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몇 시진 뒤, 소년과 그의 가족이 상민 앞에 끌려왔다.

소년의 부모는 폭행을 당해 크게 상해 있어 들것에 실려 왔다.

에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동화책에 보면 촌에 사는 농부들은 죄다 어리석지만 착할 것 같은 스테레오타입을 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더도그마의 오류처럼, 약자가 항상 선한 것도 아니었고 강자가 항상 악한 것도 아니었으니.

이것을 보아라.

같은 피지배 계층의 백정이 그보다 더 낮다고 생각하는 피지배 계층인 소의 사람에게 가한 행패를.

도덕적 우월성은 신분의 귀천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니.

보는 사람이 없자 상민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했다.

“죄를 문책하기에 앞서, 저 자의 가족이 태형을 때리기에 위중하니 먹을 것을 주어 돌보는 것이 좋겠다.

“...예에.”

평소 상민의 성격을 알고 있던 용길이 그럼 그렇지 하고 가볍게 투덜거리며 의원을 부르러 나갔다.

“내 말이 어느 정도는 진심이다. 아무리 어리다 하나, 아까와 같은 행동은 네 명을 단축시킬 수 있으니 명심 하거라.”

다른 무장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진다?

이 소년은 이미 삼도천을 건너는 중일 게다.

소년은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 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절을 했다.

“네 가족이 살 곳과 일할 곳을 지정해 주겠으니 볼기짝 몇 대 맞고 가거라.”

형식상 가볍게 태형 열 대를 맞은 소년이 연신 굽실거리며 건물을 빠져나갔지만 상민의 얼굴은 한참 동안이나 도무지 밝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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