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0화 (10/653)

불화의 전조

통정과 상민은 중손을 뒤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넓은 총군영의 전각은 여러 무구들과 서책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어 당금의 상황을 반영하는 듯했다.

“지유. 소장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통정 아우 왔는가.”

상민은 군례를 취해보였다.

갑옷 걸이 앞에 서서 갑주를 막 다 입은 중손은 통정의 방문에 즐거운 듯 웃었다.

옆에서 도와주던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팔과 어깨를 한 바퀴 돌려 몸을 풀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낭장 김상민입니다.”

“아, 그래, 그랬었지. 미안하군.”

“소장은 괜찮습니다.”

깜빡한 듯 그가 손을 저었다.

“여기 차를 내오거라!”

밖에 크게 소리친 중손이 호탕하게 웃었다.

마치 옛 소설 속에 나오는 전형적인 호걸처럼 보였다.

“요즘 정신이 없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앉게, 그는 의자를 가리켰다.

통정이 멍하니 탁상 위의 지도를 바라보던 상민의 어깨를 슬쩍 치자 상민이 표정을 관리하며 자리에 앉았다.

서로 몇 분 정도 소소한 환담을 나누었다.

두 명의 아저씨들이 추억을 되짚는 순간에 상민이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저 두 눈으로 지도를 더듬어 가며 살필 뿐.

통정이 웃음기를 거두고 입을 열었다.

“당장 원정에 나서실 요량이십니까?”

중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강된 척후들이 저들의 부락과 규모를 상세히 파악한 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농사일이 바쁘고 노동력이 적습니다. 또한 식량도 부족하니 적어도 한 해의 소출을 기다린 후 결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배후에 불온한 적들을 남겨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겠나?”

상민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도 문제고 안해도 문제인 경우가 있을 땐 자신은 그냥 물러서 있는 것이 편하다.

논쟁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통정도 딱히 크게 반대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대가 중랑장으로 추천한 인물이더군.”

화제가 떨어지자 중손이 상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진급심사를 받는 것처럼 상민의 허리가 저절로 꼿꼿하게 펴졌다.

“예, 지유.”

“알다시피, 일군을 이끄는 중요한 자리인 장군과 중랑장은 마땅히 주상 폐하의 재가를 받는 것이 순리일세. 통정 아우 그대라면 잘 알고 있겠지.”

“...맞사옵니다.”

시종이 다가와 따뜻한 차를 건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는 무슨 향인지 몰라도 고급스러운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상민은 다소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하지만 청량한 뒷맛이 입 안에 착 감긴다.

그나저나 전란의 시기에 이런 것도 용케 잘 가지고 있구나.

“고리타분하며 무의미한 절차일 뿐이지.”

중손의 한 마디가 이어졌다.

통정은 차를 받아 입에 대었다가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다시 내려놓았다.

“지유께선 무엇을 하고자 하십니까?”

“우리의 첫 봉기에 맹세했던 것 기억나는가?”

“다시는 외적에게 굴복하지 않겠다 하셨지요.”

“그것도 있겠지만.”

“......”

중손은 상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상민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통정에게 말했다.

“소장은 이만 둔전에 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가 보시게.”

통정 대신 대답한 중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상민은 천막 밖으로 나갔다.

아직은 자신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

“별초의 운명은 별초가 정하는 것이라 하신 것 말씀이십니까.”

“그래.”

통정은 두 손을 모으고 깍지를 꼈다.

“그대도 아까 보았겠지만.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야.

북적이 아닌 듣도 보도 못한 야만족들, 닥쳐올 기근과 어리석은 백성들.

새로운 전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고려는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의 형세이고 진일보(進一步)하기 위해선 오직 하나의 뜻으로 뭉쳐야 이 국난을 헤쳐 나갈 수 있네.“

중손은 고개를 숙인 통정을 바라보았다.

그가 달래는 듯한, 흡사 애원하는 듯한 어조로 자신의 전우에게 말했다.

“통정 아우, 그대는 나를 믿지 못하겠는가?”

통정이 끓는 소리로 대답했다.

“정녕 새로운 고려의 경성공(景成公, 최충헌)이 되려 하십니까?”

중손은 입술을 씰룩였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그들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똑똑히 보셨지 않습니까.”

“선대 별감들의 과오야 내 잘 알고 있으니 같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네.”

통정은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가 난 듯 소리쳤다.

“고려의 근간은 오직 성상 폐하입니다. 형님께서는 지난 백 년간 앞으로는 보위(保衛)의 뜻을 밝혔지만 뒤로는 종묘와 사직을 넘보았던 자들이 앞으로는 백성을 위하고 북적에 항거한다 하며 어찌 고려를 좀먹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중손도 소리를 높였다

“그리하여 왕씨들이 그동안 앞장서 북적과 항거하여 싸웠는가? 항전을 이야기하면서 마치 꽁지를 만 개처럼 겁에 질려 호시탐탐 북적들과 강화를 할 생각에 고려 안에서 자중지란을 피운 것밖에 없거늘!”

“다르십니다, 강화에서 저에게 그토록 말씀하셨던 것과 너무나 다르십니다! 그곳에서 분명 배 형님께서는 처음 이 동생에게 종묘와 사직을 바로 세워 대고려의 충신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새롭게 조정을 세워 성상을 받들어 간적들과 권신들을 쳐 내시겠다고도 하셨지요. 하지만 지금 이 꼴을 보십시오, 권력과 탐심에 얼굴이 일그러진 임유무(林惟茂)의 주구들, 이응렬 송군비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습니까!”

중손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말은 똑바로 하게! 장열공(莊烈公, 임연)의 후계 임유무 공자가 무엇을 해보기도 전에 죽인 것은 그대들 신의군이 아니었던가. 때문에 결국 왕정(원종)이 몽골을 등에 업고 출륙환도를 꾸민 것이었거늘!”

“그것이 비단 저희의 문제였습니까? 암암리에 모든 장수들이 더 이상의 대몽항쟁은 불가하다 생각하여 당장 야별초의 병력들도 출륙을 준비하고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숙이고 들어가려 할 때 그 잘난 왕정이 명부를 빼돌려 우리 모두를 북적에게 팔아넘기려 했던 것이고?”

통정은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순진한 척 하지 말게, 왕정은 이미 그 전부터 몽골을 등에 업고 우리를 모두 제거하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으니. 그대도 잘 알지 않는가.”

그래.

그것은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기르던 사냥개는 쓸모가 없어지면 삶아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 사냥개가 예전 주인들을 물었던 사냥개라면 더욱 더.

그리고! 중손이 소리쳤다.

“김통정이. 현실을 직시하라. 왕온은 내가 만든 작품이네. 노영희도, 이신손도, 유존혁도 아닌 오직 내가, 삼별초의 힘을 이끌어 만든 내 허수아비다 이 말이야.”

쿵.

중손도 일어나며 묵직한 주먹이 탁상을 치자, 둔탁한 소음이 울려 펴졌다.

밖에 있던 무장들이 큰 소음에 놀라 다가왔으나, 중손은 손을 들어 그들을 멀리 내보내었다.

그의 철갑이 절그럭거렸다.

그 소란에도 통정은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김통정은 현 고려 제일의 무장이다.

중손은 그를 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신으로 수많은 몽골의 장수들과 잡졸을 베어 넘겼던 호랑이 같은 자이기도 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중손의 목도 달아날 수 있었다.

허나 이 호랑이가 사납기 그지없다고 하더라도 성정이 올곧고 책임감이 두터워 하나의 약점을 잡고 있으면 쥐고 흔들기 편한 자이기도 했다.

“통정아우. 솔직히 터놓고 말하도록 하지. 그대가 왕씨에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우형(愚兄)이 가장 잘 알고 있네.”

통정은 가만히 중손을 바라보았다.

“약속하겠네. 폐하의 안위가 위협받은 일은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한 없을 것이네.

나는 고려의 무장으로 오직 고려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칠 것이니.“

“...그렇다면 끝까지 고려의 무장으로 남으실 것입니까?”

중손은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를 설득하기 위해선 그 수밖에 없지 않나.”

“.......분명 약조를 하신 것입니다.”

“천지신명과 부처님께 맹세코 반드시.”

일인지하 만인지상.

교정별감(敎定別監)의 지위에 오를 배중손을 바라보던 통정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따르겠습니다.”

별감으로 가는 마지막 방해물을 치운 중손의 얼굴에 승리감이 맴돌 찰나, 통정은 예전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그가 받은 비단에는 이리 적혀있었다.

.

-겨울 철 두터이 쌓인 눈 아래 파릇한 보리가 숨 쉬니

농부가 웃는 것은 다가올 봄의 즐거움을 미리 아는 까닭이로다.

배움이 그리 길지 않아 시조와 비유법을 모르는 통정은 잠시 고민하다 상민을 불러 논의했다.

예전부터 아는 부하였으나 최근 정말 의외의 모습만을 발견하고 있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색무취의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다만 황상의 일도 있고 하여, 그를 그저 믿는 수밖에 없었다.

평소 자기 절제가 뛰어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장이 망령된 말을 뱉는 것일지는 모르나, 금상 폐하의 실질적 권력은 없는 상태입니다.”

상민은 운을 띄우며 통정의 안색을 살폈다.

어두우나 노기는 없었다.

“계속하라.”

“금상의 밀서는 오직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는 이치(韬光养晦)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상민도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눈앞의 아저씨가 자기 라인은 맞는 것일까.

이 사람 죽으면 자신도 굴비 엮듯이 엮여 죽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쪽으로 갈아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정이 든 사람들도 많이 있는 마당에.

상민은 자신의 상관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무식할 정도로 책임감이 있으며, 대나무같이 올곧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 책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도광양회라. 그대가 만든 말인가?”

“...옛 촉한의 소열제(昭烈帝, 유비)의 일화를 빗댄 고사이옵니다.”

아니다, 그냥 신문에서 봤다.

“그러하구나.”

통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저 멀리 지어지고 있는 궁궐의 터를 바라보았다.

시간. 오로지 시간만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녕 시간이 흐른다고 다시 고려가 옛 원문대왕(元文大王, 현종)과 인효대왕(仁孝大王, 문종)의 치세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자신도 결국은 조정의 반기를 든 삼별초의 무장일 뿐인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