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8화 (8/653)

남미에 떨어진 삼별초(5)

다음날

상민은 새벽같이 일어나 근무에 투입하기 위해 준비를 하며 생각을 해 보았는데 약간, 아니 몹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단지 주변인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보육원 출신임에도 현역 입대를 결정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딱 입대를 결정하고 첫날 신교대 아침 기상나팔을 들을 때 바로 후회했었지.

‘아니 난 분명 시작할 때 삼별초의 지휘관으로 설정을 해 놓은거 같은데 기껏 낭별장급이냐.’

허울뿐인 왕이라도 되게 해 주던가.

고위급 지휘관이 되게 해 주던가.

아니면 그냥 왕자라도.

왜 그들 경호를 해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이렇게 근무 가는 것이 익숙한 이유는 무엇일까.

근무뿐만 아니라 어느새 그는 이 말 같지도 않은 게임 속 군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의 적응력 특성 때문일지도.

혹은 2년간 뼛속에 박힌 군필자의 마인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꼭 탄약고 초소경계 투입하는 느낌이 나서 투덜댄 것이다.

이 당시의 근무는 부대별로 돌아가며 서는 시스템이라,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병졸이 근무를 나가는 형식이었다.

CCC? 지통실?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장수급도 서 있어야 한다.

자신이 이끄는 이백 명의 군사들 중 남아있는 절반 이상의 병졸들은 용길이가 통솔하며 알아서 하겠지.

초번은 자신이었다.

그가 갑주를 갖춰 입고 부하들을 인솔해 성상의 군막으로 가니 임시로 투입되어 번을 서고 있던 우별초 교위가 대놓고 으슥한 곳 바닥의 돌에 걸터 앉아 있다가 자신을 보며 밍기적 몸을 일으켰다.

심지어 교위가 이끄는 병졸들도 제각기 창을 바닥에 뉘이고, 어딘가에 기대어 있다가 자신이 오니 눈치를 보며 그러지 않은 척을 하는데.

저 인간들이 꼴보기 싫은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마음에 안 든다. 하나부터 열까지.

‘군필 꼰대 특인가? 아니 저건 내가 꼰대가 아니라 그냥 잘못된 거 아닌가?’

심지어 위에서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엄명까지 내려온 마당에.

상민은 자신이 좌우별초 소속이라면 모르겠지만, 신의군 소속인 이상 뭐 함부로 지랄을 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냥 참았다.

나대지 말기로 작정한 것도 있고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는 상황을 좀 보고 싶은 것도 있고.

“딱히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수고했다.”

전혀 수고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근무에서 해방되어 신이 난 듯 빠른 걸음으로 물러나는 교위와 그 병사 무리들을 보며 상민은 인솔해온 병사들을 배치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자신이 지정해야 하는구나.

주먹구구식으로 운용되는 병력들은 삼별초가 얼마나 고려 왕실에 대해 무관심한지 알 수 있었다.

“전 무리들이 저리 행동한다 하더라도, 너희들도 똑같이 해서는 아니 된다.”

일을 맡았으면 제대로 해야지.

자신은 더욱이 한 부대의 수장이니 모범을 보여야 했다.

그들에게 전번초처럼 기강이 빠지면 본 중대장, 아니 낭장은 크게 실망할 거라 주의를 주며 위치를 조정했다.

대충 왕의 천막 외곽을 빙 두르고 근처를 순찰해도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시계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어 그냥 기분 탓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시계가 없는데 어떻게 근무 교대를 나누지? 배꼽시계로 하나.

군막의 앞에 서서 저 멀리 산자락 하나 없이 곧게 뻗은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자신도 회의감이 들었다.

그냥 나도 어디 숨어서 꿀 좀 빨까.

근무시간이 두 시간이 넘어가면 시간과 정신의 방에 들어서는 것이다.

하물며 하루의 사분의 일씩 두 차례에 나눠 교대로 서 있는 짓이라니.

총 여섯 시간 정도이고 한번 근무는 세 시간이다.

대체 왜 이 지랄을 하고 있는지.

게임이 나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는지.

정말 신이 존재하여 여기로 날 보낸 건지.

보낸 이유는 뭔지.

아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리가 저려 이제는 하지정맥류를 진지하게 염려하고 있을 때 군막의 문을 들추며 한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극을 보면 항상 고려왕은 황색 곤룡포를 입고 다녔다.

하지만 눈앞의 중년인은 그냥 자색 비단 옷을 입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묘한 분위기가 있어 상민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상민은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이 사극 속에서 자신은 엑스트라 1쯤 되겠지?

중년인은 바람이라도 쐬러 나왔는지, 군막 외곽을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보다 문득 자신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 물음이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처음에는 몰라 하마터면 대답을 못할 뻔 했다.

“경의 이름이 무엇인가?”

주연 배우가 엑스트라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도 좀 이상하게.

경(卿)?

경의 호칭은 나중에 조선시대에서는 적어도 당상관 이상의 품계의 고관에게 쓰는 말인 줄 알았다.

자신은 까마득히 아래의 품계인 6품 정도밖에 되지 않는 하급 무관에 불과했으니까.

뭐라 대답해야 하는 거지?

“소장, 김상민이라 하옵니다.”

“그대는 신의군 소속인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과연 그러하구나.”

고려왕 왕온(王溫)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소매를 가리고 몇 번 기침을 했다.

아저씨, 한 팔백 년 뒤에는 기침 남 앞에서 함부로 하면 잡혀가요.

상민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바람이 추우니 안으로 드소서.”

빈말은 아니었다.

날씨는 괴랄하여, 분명 8월 달 말, 9월 달 초쯤이라던데 굉장히 시원했다.

아니 밤에는 추울 정도였다.

대충 기온은 영상 5도 정도.

하지만 바닷바람이 꽤 거세 체감온도는 더 낮은 것 같았다.

“경은 그래도 짐의 안위를 걱정하는구나.”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빨리 들어가셨으면 좋겠어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말하기엔 자신의 얼굴이 그렇게 두껍지 않아서 그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이럴 때 뭐라고 말을 해야하지.

사극 매니아는 머리를 굴렸다.

“고려의 무장으로서 당연한 일 아니겠사옵니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자신은 이 자에게 어떠한 유감도 없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나 지금의 별초 동료들이나 가지고 있는 생각과 경험이 달라 그들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자에게 죄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직 망국은 아니겠지만 허수아비 왕에 대한 동정심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고.

왕온은 피식 웃더니 그의 찰갑의 견갑부분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군막 안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군막 안으로 들어오겠나?”

뜬금없는 말에 상민은 당황했다.

“...하오나 그것은.”

근무 중에 무슨.

“그대의 임무가 짐의 호위라면, 짐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것이 더욱 좋은 일 아닌가?”

맞는 말이긴 하다.

상민은 몇 번 더 겸양을 하려 했다.

“소장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황명이라 말하면 들을 것이더냐?”

왕온은 문득 피식 웃으며 말했다.

권력이 없는 허수아비 왕.

그런 그의 공허한 황명.

그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항거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저 자는 상민이 그렇게 갈구하던 근본이 있는 자인데 정말 처량하게 사는구나.

황명을 참 소심하게 내리는 꼴이 안쓰럽기도 하여 그의 뒤를 따라 마지못해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군막 치고는 넓었지만 그래도 가구들이 꽉 차 있어 비좁은 공간에 태자와 황녀들이 모두 자리해 있었다.

왕온의 처는 전란의 시기에 병사했다 듣긴 했다.

왕온의 아들 왕환(王桓)은 스무 살 중후반으로 이 몸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나이가 많아보였다.

다만 아비보다도 병색이 완연하고 그도 자꾸만 기침을 하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단체 감기라도 걸렸나.

왕온의 딸 왕영(王榮)과 왕예(王蘂)도 있었는데 환보다는 조금 어려 보였다.

다만 수많은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군영의 한복판에 있어서 그런지 머리부터 흑색의 몽수(蒙首)를 걸치고 부채를 피고 있었다.

얼굴을 볼 수조차 없게.

물론 호위하는 무장의 입장에서 몸가짐을 조심하느라 딱히 볼 의도도 없었지만.

상민은 어색하게 왕온의 뒤에 가서 시립해 군막을 살펴보았다.

인기척이라곤 왕실의 인원 셋과 시중을 드는 노비인지 궁인인지 두명 정도.

자객 걱정?

딱히 할 필요가 있을까. 말했다시피 이곳은 별초의 군영 한복판인데.

왕온은 마치 상민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 아들 환과 딸 영, 예도 처음에는 낯설어 하더니, 이내 적응하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일상적이나, 그들의 평온한 어조에도 숨길 수 없는 그늘과 근심이 있었다.

별초들은 모두 몽골에서 벗어나 쉬고 있는 상황인데.

이들은 결국 그들에 의해 포로 신세나 다름없으니까.

이 자는 왜 자신을 군막 안으로 끌어들인 것인가.

자신을 포섭하려고?

아니 포섭할 사람이 따로 있지.

널린 것이 낭별장인데.

뭐 좋은 점은 있긴 했다.

일단 덜 추운 것도 좋았긴 했지만,

머리가 복잡하기도 하고, 의도가 짐작가지 않아 궁리하면서 자신의 처소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고려의 자기나 장식품들, 생활에 쓰이는 정말 신기한 사치품들을 흘깃흘깃 구경하니 근무가 거의 끝나가 교대 준비를 해야 했다.

교대하러 나가려는 상민에게 뜬금없이 온이 말했다.

“고생이 많네.”

사단장, 아니 대통령이 근무자를 직접 치하하는 것 같잖아.

“상께서 소장을 아끼시는 마음에 너무나 황공하나이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는가?”

“...예.”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렇게 농간에 넘어가는 것이구나.

만약 허튼 일이라도 시키면 바로 보고하러 달려가야겠다.

“이 비단 조각을 그대의 지휘관에게 전달해주게. 배중손 지유가 아니라, 김통정 지유에게 말이야.”

이건 뭐 어떻게 거절할 수조차 없는 명령이긴 했다.

“...명하신대로 따르겠습니다.”

대답한 후 잠시 생각하다 그는 천막의 출입구로 나가기 위해 움직였다.

마침 자신의 처소로 가려는지 왕예가 자리를 뜨기 위해 일어났다.

그녀가 먼저 나갈 수 있게 한걸음 뒤로 물러서니, 거친 나무 의자 어딘가에 걸린 듯

왕예의 몽수가 벗겨졌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흰 얼굴이 다소 붉어지자, 상민은 고개를 숙이고 걸린 몽수의 끝을 빼내었다.

그것을 다시 건네주니 작게 고맙다고 한 뒤 황급히 사라졌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밖에 나와 한 바퀴를 순찰하며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니 낭장 박량이 교대하기 위해 와 있었다.

“특이사항 있나?”

“딱히?”

“아까 황가(家)놈이 외곽 경계를 서다 큰 닭을 몇 마리 잡았다더라고,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그대도 보면 놀랄게야.”

“그래?”

“구워 먹으려 하는 모양인데, 가서 내꺼 안남기면 내 도가 피를 볼지도 모른다고 전해주게.”

“그러지.”

그는 대충 맞장구를 쳐 주고 인수인계를 마친 뒤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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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김상민 낭장인가?”

“예 그렇습니다.”

“들어오시게.”

신의군 총지유이자 도령인 김통정은 안에서 여러 목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현재 보군의 비중이 대다수인 신의군은 외곽 경비와 경호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군마(軍馬)를 보유한 마별초(馬別抄)들이 존재하는 좌우별초들은 정찰을 담당하고 있었다.

갑주를 벗고 평상복 차림으로 탁상에 앉아 있는 통정은 꽤 키가 크고 훤칠하지만 흉터투성이의 얼굴과 앙다문 입술이 사나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얼굴과는 다르게, 그래도 삼별초 지휘관 중 가장 부하를 아끼는 사람이라고 어디서 소문을 들었다.

우별초의 지휘관들을 보다보면 선녀란다.

“근무가 끝난 것 같은데, 무슨 용무로 찾아왔는가?”

“소장이 받은 명령이 있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통정은 의문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민은 무심결에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그에게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놨던 작은 비단조각을 건넸다.

비단에 글을 써 전달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통정은 조용히 물었다.

“폐하께서?”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정은 펼쳐 보지도 않고 그것을 내려놓았다.

자신이 가면 읽어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해해주게. 그대가 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대에게 좋을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통정은 한숨을 쉬었다.

봉인이 손상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확인차 물었다.

“혹시 읽어 보았나?”

“읽지 않았습니다.”

통정은 의문이 섞인 눈으로 쳐다보았다.

“읽지 않았다?”

“...예.”

“글자를 읽을 수 있나?”

“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지.

한 박자 늦게 그 이유가 짐작이 되었다.

무신들이라고 죄다 까막눈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글에 능통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또한 여몽전쟁이 길어질수록 무관의 자질은 더욱 떨어져 지금에 와서는 별초들 중 글을 아는 자가 극히 드물었다.

자신의 이름 석 자만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장수들조차도.

당장 자신이 친한 문경, 연수 용길 중 먹물 조금 묻은 연수 빼고는 죄다 문맹이었다.

상민도 한자를 빠삭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규 교육과정을 지나면 대충 오백자에서 천자정도는 쓰진 못하더라도 읽을 수 있을 것이었고, 취업준비를 하면서 스펙 관리 상 천팔백 자 정도 공부하는 것은 다른 빡센 자격증에 비하면 공부도 아닌 축에 속했다.

자신은 취준을 하면서 그보다 더 나아가 삼천 오백자를 달달 외워 한자 1급을 땄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대충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이곳에서 한자로도 상위 1퍼센트 안에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는다는 소리였다.

“...읽고 쓰는 것에 큰 무리는 없습니다.”

무리는 없었다.

다만 한자가 자신이 배웠던 한자가 왜 이따구로 쓰이지? 하는 용법과 왜 이따구로 생겼지? 라는 생김새가 가끔 다른 것들이 나올 뿐.

문맥을 따지고 보면 뭐 이해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니.

통정의 눈이 요상하게 변했다.

그 눈길에서 불길함을 느낀 상민은 서둘러 돌아가려고 채비했다.

“알다시피 부대의 관직들이 좀 비어있네. 그중에서는 범과 같은 용맹뿐만 아니라 여우의 꾀를 가진 인재들이 필요하지, 하물며 둘 모두를 가진 자네는 말할 것도 없겠군.”

아니 무슨 글자 안다고 여우의 꾀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소장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장사(長史)직에 관심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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