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화 (6/653)

남미에 떨어진 삼별초(3)

그 양키 유머인지 뭔지 적힌 사항이 진짜 실제로 벌어졌다니.

정신을 집중해서 그날 밤의 기억을 재조립했다.

술인지 뭔지에 취해 쓰러진 밤의 기억은 아직 생생했다.

자신은 대작 게임, 유니버셜 킹덤즈의 속으로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너무 리얼해서 이것이 혹시 자신이 사려고 했던 최신형 VR 기기를 쓰고 있지 않을 까 볼을 꼬집어보았지만, 아픔도 느껴지는 것은 너무 전형적인 이야기였다.

‘분명히 모딩을 하고 게임 시작 버튼을 눌렀다. 랙도 걸렸고.’

그럼 이것이 실제라면 자신은 시황제도 도달하지 못했던 불로불사의 경지에 올랐다 이 말인가?

상민은 헛웃음을 짓다가 다시금 표정을 바꾸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진지해지자.’

현실을 받아들인 이후, 이 몸이 과거에 제멋대로 살아온 기억들과 상민의 기억들이 혼합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잡탕찌개를 이루었다.

비유를 하자면 아주 몰입감 있고 긴 영화를 봤는데 그 속의 주인공이 굉장히 나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 물론 장르는 고어물이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연한 소리기도 했다.

스릴러나 고어물을 별로 좋아하진 않아도 그것이 무섭거나 꺼리는 마음은 없었는데, 자신의 기억을 살펴보니 영화의 그 장면들은 잔인한 축에도 끼지 않아 보였다.

다행히도 기억의 융합 이후 김상민이란 사람의 자아적 근본은 현대인에 기반하고 있는 모양이다.

살아온 세월의 길이와 교육 수준,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아무래도 현대 쪽이 더 비중이 높겠지.

자아적 성찰에 대한 논쟁은 이만 하면 된 듯 싶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깊게 파고들 수 있겠지.

지금은 현 상황에 대한 아주 냉철하고도 명료한 해석이 필요할 때였다.

다시 그 유니버설 킹덤즈로 돌아가보자.

분명 자신이 세팅을 한 능력은 불로불사(+1000) 이외에도 백점을 꽉꽉 채웠었다.

일당백(+20)

문무겸전(+30)

매력(+30)

적응력(+10)

지휘력(+10)으로.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 먼치킨이든 뭐든 간에 그냥 포인트 한도 만점 정도로 늘리고 사기특성 다 때려 박았지!’

몹시 억울했다.

좋은 것들을 골라 넣었지만 현실로 닥친 지금은 그 못 먹을 떡들이 매우 매우 커보였다.

게임이야 인게임 콘솔로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지금 현실은 뭐 어떻게 수정하란 말인가.

하지만 그 순간 오싹한 마음이 들었다.

굳이 안 좋은 능력, 마이너스 특성을 집어넣어서 포인트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귀찮아서 그냥 좋은 것만 같다 붙였는데.

나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광인(狂人)이나 멍청이 심지어 불임과 같은 특성을 넣어버렸으면.

“......”

지금 이성을 유지하고 있긴 했을까?

그는 순간 자신의 판단에 감사함을 가지기로 했다.

그가 가진 특성들은 제각기 좋은 특성이긴 했지만, 당장 지금 실험할 수 있는 것은 저 중에서 일당백(一當百) 정도였다.

이 게임 전에 나왔던 유로피안 킹즈에 근거하여 살펴본다면,

지휘력은 자신이 아닌 자신의 부하 입장에서 봐야할 것이고, 매력은... 그 효과를 받는 상대가 없는 것이 애통할 뿐.

문무겸전은 그냥 능력치 버프였는데, 조금 복잡해보여 지금은 실험할 수 없었다.

적응력은 게임 안에서 가장 모호하게 구현된 것으로 논쟁의 소지는 있어도 전 시리즈의 게임에선 10포인트를 쓸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넣고 여기 와서 생각해보니 존나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다른 포인트에 쓸 걸.

상민은 잡생각을 멈췄다.

그리고는 정 산원과 같이 쓰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는 군막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군막의 지지대로 쓸려고 하다가 짧아서 못 쓴 굵은 나무가 몇 개 있었다.

다가가서 은근슬쩍 엉덩이를 빼고 데드리프트 자세를 취했다.

상당히 묵직한데, 체감 무게가 낮았다.

하룻밤 사이 몸에 일어난 미묘한 차이를 당사자가 모를리가 없었다.

‘확실히 힘이 세진 느낌이다. 예전에 몸 만든답시고 전역 후 6개월동안 열심히 개고생했던 그 시절 최고 전성기보다 더 강한 느낌이긴 한데.’

혹시라도 특성이 아니라 나이가 젊어져서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닐까.

일당백이라는 이름값 치고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사실 현대사회를 살면서 여러 헬창들을 봐 왔던 터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란 것이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인간인 이상 근육의 한계중량은 어느 정도 제한되기 마련이고 제아무리 항우나 사자심왕 리처드라 하더라도 21세기에 근골이 좋은 프로 운동선수나 보디빌더가 하루에 몇 시간동안 쇠질을 하고 보충제를 먹으며 몸을 단련하는 것에 비할 수 있을까?

물론 모르지, 저 둘이 후세에 태어나 제대로 몸을 체계적으로 관리했으면 엄청났을 수도.

하지만 저 영웅들과 살았던 동 시대의 사람들이 현대사회의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허약하고 비리비리했다는 것이 더 신뢰성 높을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저 둘은 자체의 힘보다도 냉병기를 이용한 전투기술이 실로 무시무시했던 사람들이겠지.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도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어제 갑자기 몰려온 피로에 군영을 설치하자마자 기절하듯 자버렸다.

근무가 없었다는 것이 다행이다.

자고 일찍 일어나니 날은 아직 밝아지기 전이라, 새벽녘의 어슴푸레함만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순찰중인지 지나가던 병졸 몇 명이 군례를 취했다.

대충 화답한 후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도를 뽑고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것은 도무(刀舞)라고 보기에도 굉장히 어설퍼 보였는데, 그 어설픔이 휘두르는 와중에도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마치 오랫동안 몸에 각인 된 것처럼 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자신의 몸을 누군가 조종하는 느낌이었다.

인터넷에서 봤던 막 옛날 검술 장인들이 솔로로 드릴(Drill)을 하는 것처럼.

‘와 이거.’

익숙하지 않지만 익숙하다.

이성과 놀라움을 의식적으로 비우고 오직 본능에만 몰두하니 곧이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나는 거슬리는 갑주 마찰 소리가 이제는 하나의 화음으로 들렸다.

무아지경.

대충 휘두르는 도의 궤적은 아직은 몸에 맞지 않아 살짝 어색한 것처럼 보였으나 접근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 두 동강이 되어 장기자랑을 할 것이다.

한참동안 도를 들고 휘두르던 상민은 대체 누가 갔다 놨는지 모를 통나무 하나에 겨누었다. 근거없는 자신감이라도 생긴 모양.

- 쩌억

가로로 베는 것이 아니라 세로로, 머리부터 중심 기둥을 지나쳐 아래까지 단번에 도가 파고들어 통나무를 쪼개버렸다.

고밀도의 물체를 베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날의 예리함도 예리함이지만 오히려 가하는 순간적인 힘과 기술이 모두 빼어나야 할 수 있는 것인데.

날이 실제로 파고든 길이는 몇 센치에서 그쳤지만, 그 검흔을 따라 엄청난 힘으로 마치 도끼로 장작을 패듯, 결을 따라 쭈욱 쪼개져 나간 모양.

자신의 행동의 결과물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민의 뒤에, 정 산원이 다가왔다.

이름은 정용길(鄭龍吉)이라 했다.

그의 동공이 놀라움에 흔들리고 있었다.

세로로 깔끔하게 쪼개진 통나무를 보며 침을 삼킨 그가 말했다.

“근래에 낭장님의 무예가 더욱 뛰어나지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초면이라도 부하니까 반말 해야겠지?

기억에 따르면 서로 오래 본 사이니까.

“...그런가?”

땔감으로나 쓸 나무가 되어버린 통나무를 멋쩍은 듯 발로 밀고 있는 상민에게 용길이 말했다.

“무예 수련 중에 송구하오나, 신의군 지유 회의가 있사오니 채비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휘관 회의?”

“예, 별장급 지유 이상은 모두 참석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알겠다.”

병졸들 몇이 깔끔하게 잘린 통나무들을 치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상민은 대충 옷차림을 정돈하고 자신들의 부대 중앙에 있는 군막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방금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손이 살짝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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