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에 떨어진 삼별초(2)
예전에 개꿈을 한 번 꾼 적이 있었다.
전역하고 거의 한 사년은 흘렀는데, 그 때 기억은 무척이나 생생했다.
혹한기 그 얼어붙은 텐트에서 눈을 떴는데, 그때 군대 맞후임의 얼굴이 놀랍도록 선명해서 꿈인 줄 알면서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지랄을 하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던 기억이 났다.
늦가을에 문을 안 닫고 침대로 간 그의 병신 같은 행동을 탓해야지.
그래서 이번 꿈은 되게 얌전하게 반응했다.
처음에는 사방에 안개가 낀 채로 항해하는 후줄근한 목재 함선에서 문득 정신을 차렸는데 광경이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목선을 처음 타보는 그는 생동감 있는 이 안개가 참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선수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짜고 비릿한 바닷내음.
흔들리는 바닥과 갈매기인지 새가 끼룩대는 소리.
그러고 보니 바닷가에 놀러 가본 적이 좀 오래 되었다.
소선의 선미에 서 있는 그는 주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본 채로 꿈속 광경을 음미했다.
사극 촬영장에 떨어진 느낌이다.
이순신 장군님 관련해서 뭐 찍나?
하지만 갑옷들이 약간 이상했다.
배의 사람들은 찰갑을 입고 도를 들고 다녔으며, 분위기가 칼날처럼 곤두세워져 있었다.
“주변의 배와 충돌하지 않게 조심하라!”
누군가 고함을 쳤다.
그래, 그렇지. 이 안개에 배를 모는 건 미친 짓이지.
더군더나 레이다도 없는 이 목선은 더더욱 고기밥이 되기 쉬울 테니까.
문득 맞장구를 치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뭔가를 알려고 해 봐도 뭐가 보여야 알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갑자기 안개가 좀 옅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안개가 옅어지는 만큼 주변도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서쪽 바다에 뉘엿뉘엿 해가 떨어지는 붉은 풍경이 인상적이다.
하늘을 보다 고개를 살짝 내려 해수면을 보니 수많은 배들이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그 수는 셀 수조차 없었다.
정말로, 까마득하게 멀리까지 수많은 배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으니까.
와 이거 진짜 개쩐다.
실로 가슴이 웅장해질 만한 광경이었다.
마치 드라마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하는 미군 입장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물론 복식은 미군과는 백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문득 자신의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저들에 비해서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찰갑, 그리고 자신의 허리춤에도 매여져 있는 도집.
귀를 압박하는 무거운 투구.
갑자기 인지하니, 온 몸에 걸친 이 무구들이 꽤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 무겁긴 하나 그렇게 무거운 것은 아닌데.
이 무슨 화법이냐면.
‘이상하네.’
자신이 헬스를 다니긴 했지만, 삼대 오백의 건장한 남성은 아니었다.
그냥 건강을 유지하며 가끔은 빼먹어서 트레이너 동생에게 한 소리를 듣기도 하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이 몸은, 헬스장에서도 특별히 크고 아름다운 근육을 가진 트레이너와도 비견될 만큼 굴곡이 심했다.
키는 백팔십사, 원래 몸과 비슷한 것 같은데 사람들의 키가 좀, 아니 꽤 작아 보이네.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사뭇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뭘 해야 하나?’
주변 병졸들은 자신을 흘깃흘깃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와서 무언가 말하려고 드는 사람은 없었다.
‘어...음...’
자신도 눈치가 있어서 이 소선의 지휘관이 자신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화려한 복식과 투구, 좁아터진 함선에서 그나마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다른 사람들의 일하는 광경을 보기만 하는 자가 지휘관이 아니라 뭐란 말인가.
‘뭘 어쩌라는 거야.’
미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참다못했는지 배의 가장자리에서 다른 배들을 바라보던 한 장수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나름대로 계급이 높아 보였다. 갑옷의 복식이 미묘하게 달랐다.
등 뒤에는 얹은 활도 하나 차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여 다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다.
“김 낭장(郎將)님, 장군께서 소선은 모두 하선하여 군영을 정돈하라 하십니다.”
그런가? 그런가보지.
근데 쟤 이름이 뭐야.
아니 이거 꿈 맞아?
뭔 꿈이 이렇게 길어.
아니 이렇게 선명해?
그래도 사회생활하면서 배운 것이라곤 눈치와 포커페이스였기에 상민은 뒤죽박죽 헝클어진 생각을 정돈하면서도 어떠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장군은 상관이겠지? 난 김 낭장인가본데.
“그대가 이들을 이끌어 장군의 분부대로 행하라.”
상민은 어물쩍 근엄하게 대충 떠넘겼다.
익숙하지 않은 어투였으나 왠지 그리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이것이 몰래카메라여서 모든 것이 끝나고 사람들이 웃더라도 이 정도 연기력이면 능청스럽게 모두 다 알고 있었지만 호응을 한 것뿐이라고 당당히 대답할 수 있을 정도.
물론 상민은 내심 알고 있었다.
몰래카메라는 아닌 것 같다.
어떤 미친놈이 별 볼일 없는 자신을 대상으로 이런 드라마틱한 몰래카메라를 하겠는가?
자신의 대답만으로도 만족했는지 이름 모를 장수는 서둘러 병사들에게 모래밭에 선박을 대라 명령하고는 이리저리 지휘하고 있었다.
와 편하다.
저런 똑 부러진 애가 있으면 군생활 편하지 암.
하지만 그래도 이름 물어보는 건 좀 미안한 일인데.
그는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여 말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현대의 한국말과 정말 어조도 다르고, 단어도 다른 것 같은데 익숙하기 그지없다. 알아듣는 것에는 하등 무리도 없었고 방금 자신이 대답한 것 처럼 발음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정 산원(散員)님, 저희 군막은 어디에 치랍니까?”
“대충 이 별장(別將)님 부대 근처에 치면 되지 않겠나?”
“예이.”
정 산원이라. 머리속에 저장해두자.
소선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하선을 하는 모양.
상민의 배는 꽤 선두에 있었는지 금방 내릴 수 있었다.
눈치를 보다 상민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제일 나중에 배에서 하선했다.
모래밭이 좀 낯설다.
땅에 발을 디디니 갑자기 누적된 멀미가 한꺼번에 그를 휘몰아치는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자리에서 서서 울렁거림을 다스렸다.
이거 꿈 아니다.
진짜로.
이렇게 리얼한 멀미라니.
뭐 먹은 것이 없는지 멀미 자체는 금방 잦아들었다.
하지만 다른 생각들이 그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는데.
그가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자, 자꾸만 무엇이 떠올랐다.
그 기분은 마치 오래된 USB를 머리에 꽃고 하나씩 파일을 로딩하는 것 같았다.
고려, 여몽전쟁기, 삼별초, 진도.
하나씩 그 파일을 열람하던 그는 크게 고함을 지를 뻔 했다.
‘이런 시발.’
상민은 아무래도 고려 시대에 떨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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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번 아는 동아리 선배가 퓨전 사극 제작의 스태프로 들어가 군대 전역 후 알바 겸 엑스트라로 몇 번 출연한 적이 있었다.
내용은 기억하기로는 조선 후기 정조 시대 드라마였던 것 같은데.
돈이 쏠쏠하진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굉장히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았다.
물론 막상 그 여름 땡볕에 촬영하는 순간은 짜증이 났었지만.
그 이전엔 퓨전사극의 배우들이 왜 고증에 전혀 안 맞게 수염이 없이 찍었는지 불만이 많았다. 고려 조선시대를 막론하고 수염 없는 남성은 남자로써의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고자들이라는 생각이 강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촬영장에 가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결국 외모로 먹고사는 아이돌 배우를 섭외한 이상, 피부에 트러블이 날 수 있는 접착제를 바르고 수염을 몇 시간동안 붙인 채 촬영을 하는 행동은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민 같은 고증우선주의자야 몇 없었고 퓨전사극의 메인 시청자는 고증엔 별로 관심이 없는 라이트 시청자였을 테니까.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냐면.
바로 그의 턱에 달린 이 기묘한 수염 덕분이다.
한 번도 기른 적 없는, 그리고 기를 생각도 없던 그에게 상당히 멋스럽게 난 수염이 자고 일어나니 생겨났다.
상민은 무심결에 수염을 쓰다듬었다.
버릇 될 것 같은데.
위생은 둘째 치고 이 힙한 감성은 마음에 든다.
동경을 들어 자신의 외모를 본 상민은 피식 웃었다.
그나마 젊음을 다소 되찾아 이십대 중반으로 돌아간 것은 기뻐해야 하겠지?
그 외의 모든 요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주 밑에 받쳐 입은 땀을 흘려 눅눅해진 옷, 냄새나는 것을 인지하기도 힘들 정도로 후각이 마비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악취, 난생 처음 보는 극혐 그 자체인 이와 빈대, 벼룩.
적어도 여름철 서울보다는 시원하지만 그래도 땀이 나는 계절에 에어컨도 없고 시원하게 샤워를 할 수도 없는 것.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절로 당이 땡겨 달달한 아이스 카페라떼 한잔을 떠올려도 차가운 얼음도, 달달한 설탕도, 커피도 심지어 우유도 구할 수 없는 이 미친 현실.
물론 알고는 있다.
지금 그들이 동시대의 문명수준조차 제대로 즐길 수 없는 반군이라는 것을.
자신은 그냥 이곳에 떨어진 울분을 토하는 것 뿐이다.
고려라니.
아니 조선도 아니고 고려라니.
그것도 여몽전쟁기라니.
당장 이 실패한 전쟁의 결말은 너무나도 뻔했다.
상민 자신의 목이 반란군의 장수라고 쓰인 천이 묶인 장대에 높이 걸리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이토록 허무하게 죽을 순 없었다.
현실 부정과 갈 곳 없는 분노를 거쳐 수용의 단계에 들어선 상민은 정신을 부여잡고 지금 현 상황을 파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