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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화 (4/653)

남미에 떨어진 삼별초

경오(庚午, 1270)년 팔월 초.

바다가 매우 이상하다.

북적(北狄, 몽골)과 개성 변절자들과의 크고 작은 전투를 겪으며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삼별초의 함대는 칠십여 일간의 기나긴 여정 끝에 진도의 벽파나루 근처까지 도달했었다.

섣부른 몇 몇 병사들은 하선을 준비하기고 했던 터였다.

분명 맑은 날씨였다.

동이 트는 햇살은 밝았고 바다는 잔잔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짙은 물안개가 피더니 삽시간에 사방이 흐릿해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안개에 암초와 서로간의 충돌을 우려해 군선들의 속도를 줄였더니, 갑자기 크게 파도가 쳤다.

소선 몇 척이 바다에 가라앉았지만, 시계(視界) 확보가 되지 않아 떠오른 이들을 몇 명 구해줄 수조차 없었다.

한참동안 헤매다 안개에서 빠져나오니 서쪽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제장들 모두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출항을 한 시간대는 분명 지평선에 해가 걸리기 전 푸르스름한 새벽녘이었지만 이미 노을이 지려는 이 광경을 대체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냐.

주변의 섬들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보이지 않았고 넘실대는 파도와 갑자기 서늘하게 바뀐 바람이 찰갑 속으로 잔뜩 땀이 난 뜨거운 몸을 식혀주었다.

해가 이제는 정말 저물 것 같아서, 삼별초지유(三別抄指諭) 배중손(裵仲孫)은 서둘러 제장들을 호출했다.

지휘선에 그와 함께 타 있던 대장군 유존혁(劉存奕)과 장군 이신손(李信孫) 등등이 다급히 불려왔다.

“아무래도 괴이한 일이 일어났소.”

진도의 용장사에 터를 꾸리려던 삼별초의 수뇌부는 눈앞에 벌어진 기이한 사태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나긴 여정 동안 서해안의 다도(多島)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강화에서 진도로 온 그들이다.

하지만 저 멀리 펼쳐진 육지는 눈 씻고 다시 쳐다보아도 전혀 섬 같지가 않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거대한 육지.

그냥 내륙이었다.

심지어 주변에는 크고 작은 섬조차 없었다.

동계(東界, 동해안)의 해안이 이러할까.

“날이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지유께서는 어서 명을 내리시지요.”

중손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밤중에 선단을 움직이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우니 소선들은 저 해변에 배를 대도록 하고 대선들이 간단하게라도 접안할 시설을 만드는 것이 좋겠소.”

“예 지유.”

바람 부는 방향이 바뀌어 당혹해하던 선원들이 장군들의 호령에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저 멀리 보이는 육지로 향하도록 돛을 조정했다.

주변의 섬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했으나 파도가 거센 까닭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별초들이 겨우 해변에 도달했을 땐, 이미 해는 저물어 사방이 어두웠다.

소선들이 모래밭에 배를 대고 먼저 하선했다.

병졸들이 근처의 나무를 베어 횃불을 만들고, 하루를 묵을 군영을 건설하는 동안 삼별초의 수뇌부는 닻을 내린 큰 지휘용 누선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추격대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없소이다. 야습에 대비한 단단한 군영을 세우고 경계를 엄중히 해야 하오.”

좌승선(左承宣) 대장군(大將軍) 유존혁(劉存奕)이 다소 조급한 듯 말했다.

남하하며 몽골군과 고려군의 추격대를 몇 번 패퇴시키며 승전을 거두었으나 경계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패퇴시켰다 하더라도 피해를 입혔다 뿐이지 멸절시킨 것은 아니라 언제든지 공격을 해 올 수 있었다.

내륙과 떨어진 진도에 거점을 차리면 수군의 우위를 점한 별초에게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어딜 봐도 큰 내륙이다.

“하지만 항해와 전투에 군사들의 피로함이 큽니다. 군영을 세운 뒤 그들을 쉬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우승선(右承宣) 장군(將軍) 이신손(李信孫)이 그렇게 말했다.

중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제장들에게 하명했다.

“그동안 벌려놓은 거리가 있기에 적어도 이틀, 빠듯하게 잡으면 하루는 아무리 말을 타고 온다 하더라도 우리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를 소홀히 하지는 말되 항해에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하고 척후를 보낼 준비를 하라.”

“예 장군.”

명을 받은 지휘관들이 군막을 나서기가 무섭게, 한 교위(校尉)가 늙수그레한 노인 문신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장군, 이 분이 할 말이 있다 하여 이곳으로 대려 왔습니다.”

“말하시오.”

슬쩍 보니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 안방열(安邦悅)이다.

정 삼품으로 품계가 높으며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인사였으나,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느낌이 심해 중손으로서는 약간 꺼리는 기색이 있었다.

힐끔 눈 앞의 문신을 본 중손이 다시금 고려의 지형이 대략적으로 그려져 있는 지도로 시선을 이동한 채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비슷한 지형이 근처에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거리를 이동했겠는가.

분명 이곳 근처에 진도가 있어야 할 텐데.

방열은 중손과 주변의 칼을 찬 무장들의 흉흉한 기세가 자못 무서운지 자꾸만 침을 삼키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듣고 있으니 할 말을 하시오, 시간이 많지 않소.”

“....그것이.”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중손은 이어지는 방열의 말에 대경하여 군막을 박차고 나섰다.

등 뒤의 무장들도 놀라 웅성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병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 지휘관들이 우르르 나와 제각기 하늘을 쳐다보자, 몇 몇 초병들도 의아해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한참동안 머리를 들고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던 중손이 나직히 탄식했다.

“...정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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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저 멀리 끝없는 대해의 수평선 너머에 해가 떠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날이 밝음에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그들이었지만 이 상황에 대해 더욱 더 이질적인 느낌은 없어지지 않았다.

대형 군선의 접안이 완료되고 과선들과 민간의 소선들도 대충 모래사장에 대어 놓은 그들은 어설피 만든 군영의 모습이 채 갖추어 지기도 전에 논의를 하려 모였다.

한참의 침묵을 깬 중손은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 곳은, 우리가 알던 곳이 아니다.”

남쪽의 탐라나 그보다 더 멀다는 삼산(류큐왕국의 옛 시대)의 작은 섬들이 아니다.

이곳은 분명 거대한 대지였다.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북극오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전부 다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늙은 문신 안방열이 말하길, 가끔가다 보일 뿐 잘 보이지 않았던 별들은 잘 보이고, 항상 잘 보였던 별들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몰골은 추레하며 실권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품계가 높고 태사국(太史局, 천문관측기관)의 수장이다. 믿지 아니할 도리가 없었다.

해가 뜨고 있는 이상 방위를 구분하는 기준이 생겨 다행이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생긴 셈이다.

방위를 구분하는 방법이 힘들고 달도 밝지 않아 한밤에 척후를 보내라는 명령은 거두어 졌다.

어슴푸레하게 동이 트자 척후들이 출발했다.

사방으로 정찰을 나갔던 그들이 돌아와 고하기를,

군영 좌우측으로 달린 기수들은 끝없이 백사장이 펼쳐졌다 고했고,

군영 기준 북으로 간 기수는 거대한 평원과 수림(樹林)들 그리고 언덕 같지도 않은 야트막한 언덕들이 보였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중 누구도 개성의 주구들이나 북적의 무리들과 마주한 적이 없다 고했다.

아니 심지어 인적조차 없었다 한다.

고려의 강역은 산지가 많아 험준해 제아무리 평원이라 하더라도 지평선에 병풍처럼 산들이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끝없이 펼쳐진 평야는 본 적도 없었고 적응하기도 어려웠다.

신의군도령(神義軍都領) 김통정(金通精)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어찌되었던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에게 쏠리는 좌중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낸 그는 말을 이었다.

“정녕 이 곳이 고려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조정을 세우고 군세를 길러 북적의 무리들과 대항할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몽골의 무리들이 있는지 몰랐지만 없다고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출귀몰하며 공포스러울 정도로 빠른 그들의 기마술이라면 이곳이 내륙이라면 언젠가는 그들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곳이 고려가 아니라면?

어제 벌어진 괴이한 안개로 선단이 고려와 떨어진 거대한 대륙에 도착했다면?

우승선 이신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섣불리 속단할 수는 없지만 정찰인원을 크게 늘려 확실한 정보를 취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른 무장들도 듣다 한 마디 씩 거들었다.

“기왕 배도 같이 보내어 해안선을 따라 정찰하며 경작하기 좋은 큰 하천이나 비옥한 토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군영의 가장자리에 단단한 목책을 세워 방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한 번 말문이 트이자 수많은 의견들이 범람하였고 중손은 이마를 찌푸렸다.

“조용!”

그는 도집의 끄트머리로 바닥을 강하게 쳐 좌중의 이목을 모았다.

“한 번에 많은 일들을 번잡스럽게 하기엔 백성들의 무리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을 것이고 유사시의 전투에도 대처할 수 없다. 초병을 넉넉히 제하면 가용할 만한 인원은 어떻게 되느냐?”

천여 척의 배라고 전부 다 별초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절반 이상은 힘없는 백성과 아녀자들에 불과했다.

일부 장군과 병졸들의 가족들, 강화와 기타 고려의 군현(郡縣)에서 납치해 온 백정(白丁)들과 마중 나온 문, 무반 무리들의 처자들.

별초들의 가족이야 통제에 제대로 따르겠지만 납치당한 백관들이나 고향과 땅을 버리고 떠나와야만 했던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찌르고 있을 터였다.

진도로 가는 와중 영흥도에서 작은 전투가 일어날 적, 백정 천여 명이 자신들을 피해 이미 도망간 사태를 기억해야만 했다.

중손은 자신의 심복들을 불렀다.

“무엇보다 정보가 중요하다. 조 별장은 몸이 날랜 군졸들을 넉넉히 뽑아 인근의 마을이나 군락을 발견하여 정보를 취합하라. 심문을 할 수 있는 자들을 구해오는 것도 그대의 임무이다.”

“예, 장군.”

별장 조시적이 서둘러 천막을 나섰다.

“김 낭장.”

구석에 있던 낭장 김윤서가 군례를 올렸다.

“하명하소서.”

“그대는 배와 바다를 잘 아는 자이니, 빠른 소선 몇 척으로 해안가를 따라 정찰하라. 큰 하천의 물줄기를 찾는 것이 주된 임무이다. 혹여 고려의 군선을 발견한다면 즉시 퇴각하여 알려라.”

“예, 장군.”

"나머지 일은 저들이 정보를 취합한 뒤에 한다. 다만 언제든지 이곳을 뜰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진 말라."

"알겠습니다, 장군."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많은 수의 세곡선을 강탈할 수 있었지만, 물경 사만에 달하는 대인원이 식량을 소모하는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만약 정말 이곳이 고려와는 다른 대륙이라면 서둘러 파종을 해야 했다.

‘날씨가 차구나.’

중손은 주변에 북적들이 없다는 일차적인 보고에 다소 긴장이 풀어지며 새삼 주변의 기온이 낮아진 것을 체감했다.

그는 긴 생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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