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 ⓒ마늘맛스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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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다시 건국하라.
그것도 남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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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iversal Kingdoms
사람이 근본이 없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이는 해외축구의 근본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투명한 파티션에 몸을 숨기고, 그저 하염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상민은 문득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벌써 여덟시 십오분 전
야근을 하기 위해 남은 몇 명의 다른 부서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퇴근을 한 상태였다.
초과근무수당은 둘째 치고 업무효율이 나오지 않아 그냥 집에 가기로 했다.
실연의 아픔을 일로 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잘 되진 않네.
영화나 책 보면 막 일에 몰두해서 잊어버리던데.
그래, 어떻게 노잼으로 슬픈 생각을 잊을 수 있겠냐.
압구정에서 옥수로 올라가는 3호선 라인.
이어폰을 끼고 지하철 가장 앞 칸 벽에 기대어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한강 위 서울 야경의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역동적인 도시는 밤이 되면 더욱 화려하게 빛났다.
아 살기 힘들다.
상민은 태생부터 근본이 없는 사람이었다.
보육원 출신이며 당연히 물려받을 재산은 커녕 친척도 없던 사람이었다.
나름대로 머리는 있어 한국에서 한 손에 꼽히는 대학에 들어갈 순 있었다.
아 그건 머리보다는 수험생 시절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의 근성 덕분이었다고 해 두자.
가정형편과 높은 학점 덕분에 장학금을 꽤 많이 받았고 과외와 알바도 하며 생활비정도는 해결했으나 사회 초년생 시절이 되어보니 모아놓은 것은 쥐뿔도 없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서울에 전세가 아닌 매매로 집 한 채 가지기란 여전히 요원해 보였다.
그러한 경제적 서러움보다는 인간관계에 대한 불신이 더욱 마음이 아팠는데.
마음 터놓고 고충을 이야기하며 위안을 받을 부모도, 형제도 거의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발버둥치고 살았는지 카톡엔 많은 단톡방들이 있었고, 쉴 틈 없이 알림이 갱신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이게 바로 군중 속의 고독인가 하는 그거냐.
여자친구, 소현과의 이별 자체는 그리 슬프지 않았다.
오래 사귄 사이라 이별 뒤 공허함이 큰 것은 큰 것이고 사실 언젠가 이렇게 끝을 맞이할 걸 예상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가 새삼스레 부각되어 더욱 슬퍼진 것뿐이었지.
이제 서른, 결혼 적령기의 남자 중 자신은 아마 그 계급 피라미드의 아랫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을 테니까.
김상민.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인 김씨에, 상민이란 이름도 흔하다.
심지어 한자는 더욱 웃긴데 좀 그럴싸한 한자가 아니라 상민(常民)이라는 한자였다.
아니 어떤 사람이 자식 이름을 이따구로 짓겠냐고.
천민이 아니니 감사하며 살라는 건가.
그를 버리고 간 부모는 저딴 이름만을 남기고 무소식이다.
어디 뒤졌는지 살았는지 관심은 없지만.
결국 다른 사람에게 내면을 보여주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은 그 마인드 문제였다.
날 때부터 버려졌다는 근본적인 문제.
그래서 남들에게 무의식적인 자기방어기제로 상처를 입히고 마는 것이지.
마스크 뒤로 한숨만 나온다.
상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체념은 익숙한 편이다.
‘아 마음도 뒤숭숭한데, 헬스장에서 쇠질 좀 하다 갈까?’
아니다.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긴 했다.
하체는 내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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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하여 샤워를 대충 하고 팬티만 입은 채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배달 어플에서 대충 치킨과 생맥주를 시키고 누워서 핸드폰으로 빈둥대었다.
매일 가는 커뮤니티들을 눈팅하자 제법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다.
오늘이 출시일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애가 탄 인간들도 여럿 보인다.
한동안 그것들을 보며 대충 상상의 회로를 굴리고 있자, 초인종이 울렸다.
예능을 보며 치킨을 다 먹고 핸드폰을 확인해도 아직 10시가 안되었다.
그는 손을 깨끗이 씻고 세수를 한 뒤 맥주 한 캔을 들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다.
상민이 온종일 바랐던 것.
10시 정각에 공개된다.
얼터너티브 히스토리(Alternative History) - 유니버셜 킹덤즈(Universal Kingdoms)의 발매가.
아 갓겜이여.
이 게임을 몇 년을 기다렸던가.
이 게임의 제작사 Contradiction Games, 즉 모순사의 게임과 DLC 전부를 소장한 특등급 한우가 바로 그였다.
외국 개발 현황을 번역해서 자신이 자주 가는 사이트에 올리기도 했으니까 굉장한 열성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여러 모드 제작자기도 했다.
그가 이 게임에 환장하는 이유는 역덕의 기질이 있기도 했지만, 바로 게임 자체가 근본에 대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역사 속 인물들과 나라들로 플레이하는 대전략 게임은 그의 로망을 자극하는 것들이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중세시기를 다룬 유로피안 킹즈는 자신의 가문을 이끌고 세계 역사를 바꾸는 스토리였는데 단연코 그의 최애 게임이었다.
시리즈 플레이 시간만 만 시간이라면 유킹은 거의 절반에 달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이 얼터너티브 히스토리 시리즈는 중세의 유로피안 킹즈(European Kings), 근대의 임페리얼 렐름(Imperial Realm)과 세계대전을 다룬 월드워즈(World Wars) 등 크게 여러 가지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번 작은 여태껏 나온 게임들의 시대를 전부 다루는 궁극의 타이틀이었다.
9시가 넘어가며 플랫폼에서 미리 다운로드가 가능해진 모양.
서둘러 다운로드를 한다.
그래픽에서 꽤 진보했는지, 용량은 그가 봤던 다른 어떤 모순사 시리즈보다도 컸다.
거의 시중에 나온 오래된 RPG 게임과 비슷한 용량이 아닌가.
대전략 게임의 특성상 이 방대한 데이터는 정말 기대가 되었다.
한참을 게임 게시판과 갤러리를 탐방하며 온갖 호들갑을 떨 동안 설치가 완료되고 열시가 딱 되자 접속이 가능해졌다.
기본적으로 모순사 게임 시리즈는 싱글 플레이를 기반으로 한다.
아직 이 게임에 익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멀티플레이는 몇 주는 지나서야 할 수 있겠지.
한국어 지원은 현재 기본적인 알파모드만 지원 중이고 나머지는 개발 중이라니 이 부분은 감안하고 해야 했다.
상민은 나름대로 명문대 출신에 학점도 높다. 영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 ♬♪♩
로딩 음악소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단 브금은 합격.
이번 작은 1인칭 플레이가 기본이었다.
다만 1인칭 플레이의 시작점이었던 유로피안 킹즈에서 보여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복잡함을 가지고 있었다.
상민은 개발자들에게 절로 경외심이 들었다.
머리털 수북이 빠졌을 거 같은데.
시리즈의 장점만 섞었다고 자부하던데. 그것이 과연 옳은 지는 잠시 뒤에 결판이 나겠지.
마음 한편엔 스멀스멀 버그와 최적화에 대한 불길함이 느껴졌지만 갓겜에 대한 기대감으로 꾹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