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록파괴자-44화 (44/156)

# 44

Chapter 14 - 과거의 에이스, 현재의 에이스 (5)

5회 말 무사 1,3루 상황의 위기를 맞이한 세혁은 3루 주자를 슬쩍 보고는 1루 주자인 유성을 확인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딜레이드 스틸은 없겠군.'

1루의 유성은 빠르지만 3루의 철민은 느리다.

하지만 실책이 나올 가능성이 있었기에 마냥 방심 할 수는 없었다.

'녀석들이 대충 하지는 않겠지만...'

긴장할 필요는 있었다.

게다가 대비해야할 경우의 수가 많았다.

'런앤히트, 페이크 번트 앤 슬래시, 스퀴즈.'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작전만 3가지였다.

그대로 강공으로 나올 가능성도 있었지만 일단 범위를 좁혀보기로 했다.

그래서 포수를 마운드로 불렀다.

"6번이 제일 골치 아프네. 앞뒤의 5,7번도 쉬운 상대는 아니고 말이야."

"어떻게든 막아봐야겠지."

코치들이 경기에 관여하지 않기에 거의 모든 사인은 포수가 내린다.

1,2학년팀도 약간의 보조는 있지만 강혁이 대부분의 사인을 내는 상황이었다.

"니가 말한 3가지 중 앞의 둘은 뭐가 되었든 타구를 때려내야해. 제구에 좀 더 신경 쓰면 그 부분은 걱정 없어. 그렇게 되면 가장 큰 문제는 스퀴즈야."

"하지만 3루나 타자나 느리지."

"그래, 오히려 저쪽의 리스크가 더 커."

"그럼 어쩌지?"

"간단해. 작전을 쓸 엄두도 못 내도록 찍어누르면 돼."

"...그렇네."

과연 그가 3년간 믿고 공을 던져온 친구다운 간단한 결론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재개된 경기.

팡!

세혁의 공은 앞선 타석보다 더 날카로웠고, 더 정확했다.

그것으로 강혁에게 삼구삼진을 뽑아내며 가장 중요한 위기를 넘겼다.

그 사이에 유성이 단독 도루로 2루에 위치하면서 1사 2,3루가 되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유성이 3루에 있었다면 짧은 희생 플라이에도 들어올 가능성이 있었기에 주의했겠지만 유성은 2루에 있었다.

"누가 라인업을 짠건지 모르겠지만 느린 주자 사이에 저렇게 되었으니 녀석도 곤란하지."

나머지 타자는 8,9번 타자.

즉, 앞선 타자들과 달리 힘을 빼고 던질 수 있는 타순이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세혁은 힘을 빼지 않았다.

대신 빠른 템포로 승부를 걸어서 7개의 공으로 나머지 2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대단하구만."

"완벽한 위기였는데 세 타자 연속 삼진이라."

"무리하는거 아닌가?"

"글쎄... 무리다 싶으면 미래고에서 알아서 교체 해줄테니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볼때 괜히 투구수를 늘리기보단 3구씩 딱딱 끊겠다는 의도일꺼야."

"과연... 어중간하게 투구수 아낄려는거보단 바로 찍어 눌러서 끝내는게 좋기는 하지."

결국 5회 말의 가장 좋은 찬스를 잃어버린 미래고 1,2학년은 바로 6회 초 수비로 전환했다.

보통 위기 뒤의 기회, 기회 뒤의 위기가 찾아오지만 유성은 3학년의 하위 타순을 손쉽게 처리하며 위기는 커녕 작은 여지조차 내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6이닝 무실점인가..."

"안타 1개가 끝이고 말이야."

"오히려 기회는 1,2학년 팀이 더 만들었군."

예상 외라면 예상 외의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결국 점수를 못 냈기에 신경 쓸만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저 1,2학년 팀의 박유성이 키로군."

"멀티 히트에 2도루까지 했는데 점수가 안 나왔으니 큰걸 노릴 타이밍이기도 하지."

"그렇게 본다면 다음 타석은 장타력 테스트겠군."

지금의 타순이라면 7회 말 공격때 다시 기회를 잡을 것이다.

세혁도 6회에 다시 1번부터 시작되는 상위 타순에게 미리 준비 해온 또 다른 패턴으로 승부를 걸었고, 손쉽게 삼자범퇴를 다시 한번 완성 시켰다.

"오늘 양쪽 타선 모두 그냥 혈이 막혔는데요?"

"많아도 3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1점 경기네요."

"그러게. 그나마 1점을 뽑아낼 확률이 높은건..."

7회 초 수비를 위해 다시 마운드로 향하는 유성이었다.

그런 유성을 보다가 투구수 기록을 보면서 그는 잠시 고민했다.

두 투수가 모두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가운데 투구수는 이제 70구에 근접한 상태였다.

이닝당 10구가 조금 넘는 수준에서 모든 이닝을 마무리 할 정도로 두 선수는 공격적이면서도 타자를 압도하는 피칭을 펼쳤다.

당연히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코치들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좋기도 하면서도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둘 다 100구 제한을 걸었지만 이런 경기라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몰랐다.

"일단 7회 끝나고나서 불펜 준비 시키겠습니다."

미리 이야기해둔 100구 제한이 있었고 지금의 페이스라면 8,9이닝 정도는 던질 수 있다.

그래도 선수 보호 차원에서 7회부터 불펜을 준비 시키기로 한 투수 코치였다.

겨우 양팀의 불펜이 몸을 풀기 시작했을때 유성은 7회 초에 2번째 안타를 허용하였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경기는 7회 말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번 이닝이 다시 한번 기회일텐데..."

딱!

"그러네."

그동안 침묵하던 4번 타자가 안타를 때려냈다.

하지만 바로 다음 타자인 철민이 병살을 치고 말았다.

"아오..."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하지마. 잘 때린 타구를 선배님이 잘 잡은거라서 어쩔 수 없잖아?"

"네."

그렇게 단숨에 2아웃이 만들어지고 타석에는 유성이 배트를 휘두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병살을 잡아낸 이후 공은 내야를 한바퀴 돌았고 이내 세혁에게 다시 돌아왔다.

'이제 마지막일려나...'

넥스 히어로즈의 스카우터가 지켜보고 있는것은 좀 전에 확인했다.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시에 100구의 제한을 떠올렸기에 그가 유성과의 4번째 타석을 맞이하기는 힘들었다.

"아직 힘이 남아있을때라서 다행인가?"

투구수는 이제 70구를 넘겼다.

아직 여력은 남아있었고, 유성에게 2안타에 2도루까지 헌납하였으니 그것을 갚아줄 필요가 있었다.

팡!

3번째 타석에서 사용한 패턴은 간단했다.

1,2번째 타석에서 포심 위주의 피칭을 했다면 3번째 타석은 변화구 중심의 피칭으로 포심을 타자들의 뇌리에서 감추게 하는 것이었다.

6회에 삼자범퇴를 만든것도 이번 이닝에 병살을 만든것도 그로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성에겐 그런 방식이 힘들지도 몰랐다.

'안 해보는 것보단 낫겠지만...'

초구는 체인지업.

과감하다면 과감한 승부구였다.

유성도 변화구는 생각했지만 체인지업을 그대로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넣을줄은 몰랐다.

자신이 몇번 써보기는 했지만 다른 투수가 이렇게 나올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 다음인데...'

스트라이크 하나를 그냥 주고 말았으니 투수에게는 선택지가 늘어났고, 반대로 타자는 선택지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유성은 아예 하나를 더 지켜보기로 했다.

팡!

'슬라이더.'

유성과 지훈이 워낙 특이해서 그렇지 세혁은 3개의 구종으로 고교을 정복했다.

그리고 세혁의 슬라이더는 명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변화가 심한 구종이었다.

'역시 이런건 치기 힘들단 말이지...'

프로에서 세혁은 그렇게까지 눈에 띄는 활약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프로에서 이 슬라이더는 리그 최고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덕분에 세혁은 몇년간 필승조로 활약하기도 했다.

'슬라이더에 초점을 맞추기에는 155km의 포심이 거슬린다는게 문제네.'

타이밍상 포심이 올 확률이 높지만 변화구가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예상대로 스트라이크 존에서 살짝 빠지는 변화구가 들어오며 유성은 간신히 2S-1B로 승부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군."

"가장 잘 치고 있는 녀석이기도 하고 상대 투수이기도 하니깐."

"라이벌...이라기엔 2살 차이가 좀 크군."

"1/8이지만 우리 구단에 올 가능성도 있으니깐."

프로에 8팀이 존재하기에 그렇게 이야기를 했겠지만 저정도 유망주라면 앞 순위에서 지명 받을게 분명하다.

그렇다며 앞 순번을 차지 하지 못하면 지명 확률은 그보다 낮아지게 된다.

'억지로 지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지.'

물론 넥스 히어로즈가 최근 수년간 계속 하위권에 머물고 있기에 아예 최하위를 노리라는 요구가 불가능 한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구단주는 선수단 운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었다.

딱!

이후 1개의 볼과 1번의 파울이 더 기록되며 볼카운트는 2S-2B에 승부는 6구째로 이어졌다.

'포심, 체인지업에 하마터면 당할뻔 했네.'

유성이 체인지업은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었기에 세혁 입장에선 던질 공이 둘로 줄어들었다.

과감하게 스트라이크 존에 찔러 넣기에는 오늘 유성의 타격감이 너무나 좋았기에 무리 할 수도 없었다.

"그나저나..."

오늘 경기에 앞서서 청백전을 치루면서 경기 감각을 회복했지만 그걸로는 모자랐는지 슬슬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승부를 길게 끌고 가는 것은 더 이상은 무리였고, 여기서 끝을 보는게 좋았다.

딱!

그러나 유성은 끈질기게 150에서 155km 사이를 오가는 포심을 계속해서 걷어내고 있었다.

슬라이더를 다시 꺼내볼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다시 한번 포심을 던졌다.

팡!

승부가 길어지기 시작하자 공이 살짝 벗어나며 볼이 되었고, 이젠 풀카운트가 만들어졌다.

오늘 경기 첫번째 풀카운트 승부에 세혁은 한숨을 쉬며 마지막 공을 준비했다.

'슬슬 끝낼때가 되었나보군.'

"여기로군."

"응?"

더 이상 승부가 길어지는 것은 좋지 않았기에 세혁은 유성을 처음 상대할때부터 쏟아붙고 있던 체력을 모두 때려 넣었다.

단 하나의 공으로 승부를 끝내기 위해서 그 공에는 세혁의 투혼이 담겨 있었다.

'왔다.'

3학년들이 유성에 대해 분석할때 유성도 세혁과 3학년에 대해 분석했다.

자신과 비슷한 유형이었기에 분석이 쉬운 감도 있었지만 아쉬운 감도 있었다.

미래를 아는 유성의 입장에서 그가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 어느정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유성은 오늘 경기에서 세혁의 한계를 끌어올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 날아오는 공은 세혁의 한계였다.

딱!

정확하게 공을 맞추었으나 미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타구가 날아가는 것을 슬쩍 본 유성은 달려가면서 배트를 보았다.

'금이... 갔어?'

나무 배트에 금이 가있었다.

일단 달려야했기에 유성은 배트를 얌전히 내려두었고, 달리면서 다시 타구의 위치를 확인했다.

하지만 외야수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한곳을 보고 있었다.

"허... 선배를 뛰어 넘는 괴물인가..."

"그것도 새로 갱신된 최고 구속의 공을 그대로 넘겨버렸네요."

전광판에 기록된 구속은 156km.

기존 최고인 155를 뛰어 넘은 것이었다.

80구 가까이 던진 7회에 이런 구속이 나온 것도 놀라운데 그걸 그대로 홈런으로 맞받아친 유성에 감탄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이스를 도는 유성은 감탄이 나왔다.

'저 선배도 과거와는 달라지겠네.'

순식간에 베이스를 모두 돈 유성이 홈플레이트를 밟는 순간 스코어는 1대0으로 1,2학년팀이 리드를 잡기 시작했다.

혼신의 1구를 던졌음에도 홈런을 맞은 세혁은 여러 생각을 하는듯 고개를 젓다가도 한숨을 쉬며 마운드 근처를 잠시 방황했고, 포수는 물론 내야수들이 모두 모여서야 겨우 진정했다.

"미안, 그걸 쳐버릴줄 몰랐는데..."

"아니. 넌 최고의 공을 던졌어."

"거짓말이나 띄워줄려는게 아니라 정말 대단한 공이었어. 그냥... 저녀석이 잘한거야."

벤치에서 거의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유성을 보며 3학년들은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세혁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동료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경기에서 후회를 남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7회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이후 유성과 세혁은 남은 2이닝에서도 무실점을 기록하며 그대로 9이닝 완봉승과 완투패를 기록하며 길었던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3학년의 시대가 종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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