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한걸음
프란시아 국왕은 다가오는 적을 맞이하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정녕 이곳을 사수할 수는 없는 것인가?”
신하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의견을 말했다.
“소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겠습니다.”
“전하, 디아론에서 일전을 겨루소서.”
“자네는 프란시아 왕궁을 버리자는 건가? 정녕 이곳을, 프란시아의 왕성에 몬스터의 더러운 발을 들이고자 하는 것인가?”
“그럼 자네는 적들이 단순한 몬스터 웨이브라고 생각하는가? 마왕의 발호일세. 제국을 제패한 서모너 김 백작마저 연달아 두 개의 성을 내주었단 말일세.”
“어찌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날 생각을 한단 말인가!”
“누가 싸우지 말자고 했는가? 제국의 지원군이 디아론을 향하고 있다지 않는가. 전장을 디아론으로 하자는 말일세.”
국왕도 전략적인 부분만 생각한다면 물러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적은 강력했고, 디아론으로 지원군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전략만으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전으로 부관 하나가 급하게 달려오며 보고했다.
“전하! 적들이 밀려오고 있사옵니다.”
“하아… 알겠네. 나가보세.”
국왕은 적을 볼 수 있는 지휘부의 망루에 올랐다.
수만 마리 이상의 몬스터 대군이 보였다.
드레이크들이 곳곳에 섞여 있었다.
멀리서 봐도 덩치가 아주 큰 몬스터였다.
국왕은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서모너 김 백작의 말대로 물러나야 하는지 아니면 희망을 갖고 버텨봐야 하는지 망설였다.
불안한 마음에 지휘관에게 물었다.
“퇴로는 열려 있는가?”
“서모너 김 백작이 일천 명 정도는 공간이동으로 디아론으로 바로 이동 가능하다 합니다. 또한 기차라는 물건을 한 대 마련해 두었습니다. 디아론으로 가던 것인데, 말과 수레를 모두 징발하여 이곳에 있는 병력을 태울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럼 언제라도 후퇴는 가능한 건가?”
“그렇습니다.”
그때 일렬로 나란히 도열한 몬스터들의 가운데가 쩍 하고 벌어졌다.
그 모습이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몬스터의 사열을 받으며 누군가 걸어 나왔다.
캭캭거리던 몬스터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그가 지나는 길에 몬스터들이 넙죽 엎드려 있었다.
몬스터들은 물론 프란시아 왕성에서도 그를 주목했다.
“저자는?”
국왕의 물음이 있었지만 사령관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처음 보는 인물이기도 했지만 왠지 눈으로 정확하게 그 모습을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피오크?”
국왕의 물음에 7서클 마법사 스피오크가 마법을 일으켰다.
“진실의 모습을 꿰뚫는다. 아이오브트루.”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하, 인지장해이옵니다. 저 역시 저자의 모습을 꿰뚫어볼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마왕이 직접 등장한 모양입니다.”
쿠쿠쿠쿵.
하늘의 색이 달라지며 대기가 요동쳤다.
순간적으로 공기의 냄새가 달라졌다.
삐이이이이.
성벽 위의 병사들은 고통스러워하며 귀를 막았다.
“그레이트 실드!”
스피오크의 도움으로 국왕은 간신히 쓰러지지 않았다.
압도적인 존재감에 양쪽 진영 모두의 집중을 받으며 마왕이 손짓했다.
휙.
그저 한 번의 손짓이었다.
거대한 마법진을 불러일으킨다거나 거창한 준비가 없었다.
바사삭.
하지만 그의 손짓 한 번에 프란시아 왕성에서 과자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프란시아 왕성은 일반적인 성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굳건히 지킨 한 나라의 왕성이었다.
국가의 자원이 집중되었고 나라의 자존심이기에 오랜 세월 동안 공을 들였다.
단지 미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7서클 왕실 마법사가 머물며 다양한 보강 마법을 걸어둔 성이었다.
과자처럼 부서지는 성벽 위의 병사들은 부서지는 성벽과 함께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레비테이션!”
“플로팅!”
“플라이!”
떨어지는 병사들에게 여기저기서 도움의 마법이 날아들었다.
바사삭!
바사삭!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 블록으로 성을 만들고 이제 재미가 없어진 듯 부숴버리는 듯했다.
금세 성벽 전면부는 뭐가 있었냐는 듯 휑한 평지가 되어버렸다.
“캬아아아!”
“크아아앙!”
뻥 뚫린 입구가 생기자 몬스터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전… 전하!”
국왕은 마른침을 삼켰다.
제국을 제패한 서모너 김 백작이 왜 성을 두 개나 빼앗겼는지 이제야 이해했다.
디아론성으로 물러나라는 충고를 듣고 왜 망설였는지 후회되었다.
“후퇴하라!”
국왕의 입에서 후퇴 명령이 나왔다.
“전군 후퇴한다!”
국왕의 판단은 한 타이밍 늦었지만 기사들은 모두 준비하고 있었다.
“최후 수비조! 성문 앞으로!”
“비행 차량 탑승조는 즉각 탑승한다!”
“폭발조! 성벽 폭발을 준비한다!”
“움직여!”
나는 프란시아 왕성이 부서지는 모습을 화면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후퇴 명령이 떨어졌네.”
나와 함께 화면을 보던 샤샤가 안타까워했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알파야! 저기 열 명씩 디아론성으로 옮겨.”
빠르게 후퇴가 이루어졌다.
이미 후퇴 작전을 두 번이나 펼쳤기 때문에 다들 민첩하게 움직였다.
딸깍.
샤샤는 마나 포션을 까서 내 앞에 차례차례 놓아두었다.
내 마나에 S급 마정석 두 개 그리고 배부를 때까지 마시는 마나 포션 그리고 마나 공유로 샤샤의 마나까지 땡겨 왔다.
처음에는 천 명 정도 이동시키고 헉헉거렸지만 이제 이 짓도 익숙해져서 천오백 명까지 이동이 가능했다.
약 천여 명의 수비조가 뒤를 막는 동안 대부분의 병력이 후퇴했다.
그다음 내가 수비조를 디아론으로 옮겼다.
프란시아의 병력은 대체로 무사히 후퇴했다.
프란시아 왕성의 전투는 그렇게 서로 간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종료되었다.
나는 디아론성으로 이동한 카나에게 직접 마왕을 본 소감을 물었다.
[카나야?]
[네, 민준 님.]
[마왕을 직접 보니 어때?][흠… 제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니 더 잘 알 것 같아요. 저건 마스터급이 아니에요. 제 경지를 아득하게 넘었어요.]
[휴, 그렇구나. 디아론성에서 제대로 붙어보려고 하는데. 어려울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우리 쪽 병력이 훨씬 많아도?]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오러 유저급들이 아무리 많아도 마스터 한 명에게 안 되잖아요.]
[헐. 그 정도야?]
[뭐랄까. 지금까지 제가 알던 세상의 법칙을 위반하는 존재 같아요.]
S급인 카나가 긴장했다.
나는 비행 수송선 군단을 이끌고서 디아론성으로 향했다.
현재 상황을 디아론 백작과 공유했다.
[서모너 킴 백작, 아니 이제는 제국의 황제라 불러야 하오?]
[아닙니다. 그냥 서모너 영주라 불러주세요.]
[알겠소.]
내가 제국을 점령하면서 족보가 조금 꼬였다.
[디아론 백작님, 상황을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마왕군이 디아론성을 향해가고 있어요.]
[음… 언제쯤 도착할 것 같소?]
[아마 내일 정오 무렵에는 도착할 것 같아요.]
[그러면 제국군은 언제 도착할 것 같소?]
[지금 열심히 날아가고 있지만 마왕군보다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음… 알았소. 올 때까지 내 열심히 버티고 있겠소.]
[그래도 팔라딘 500과 주요 S급들은 모두 디아론성에 있으니 버틸 만하실 거예요.]
하루가 지났다.
디아론성을 향해 마왕군이 밀려왔다.
예상했던 적이 올 때가 되어서 왔지만 직접 그 모습을 본 디아론 백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성벽 너머를 지켜보았다.
까맣게 밀려오는 몬스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원군.
이 성은 디아론 백작이 지켜내야 했다.
“전군! 전투 준비를 하라!”
“오늘은 후퇴하지 않는다!”
“프란시아의 운명은 오늘 이 자리에서 결정짓는다!”
부대장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지금까지의 성들은 후퇴를 위해 최소 병력으로 작전을 펼쳤지만 디아론 성벽 위에는 빼곡하게 병사들이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프란시아 왕궁이 순식간에 부서진 것을 알고 있던 터라, 스피오크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성녀와 함께 대단위 보호마법을 발동했다.
“하드니스!”
“스트롱 월!”
성벽 자체를 강화했다.
“그레이트 베리어!”
지이이잉.
성 전체를 뒤덮은 초대형 실드가 펼쳐졌다.
성벽이 과자처럼 부서지는 일을 막으려 했다.
그레이트 베리어가 펼쳐지자 조각상 모양의 마족과 여성체 마족이 먼저 나섰다.
슉슉!
조각상 마족은 단단한 몸 자체로 공격을 했다.
푹!
온몸을 던져 다이빙하듯 베리어를 찔러 들어왔다.
여성체 마족은 공간계 마법인 비눗방울을 날려왔다.
출렁출렁.
넓은 범위를 풍선처럼 감싸는 초대형 실드를 펼치고 있지만 그러한 실드는 마족의 공격에 출렁거렸다.
하지만 마법사 수십 명이 모여서 어찌어찌 막아내고 있었다.
촤아악.
갑자기 몬스터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몬스터 사이의 길을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디아론 성벽 위에서는 마치 몬스터들의 사열을 받는 것처럼 다가오는 자를 처음 보았지만, 모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이 전쟁의 시작이며 끝이었다.
파스스스스.
그자의 손에서 작은 점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붉은 점은 점점 그 밝기가 커졌다.
마치 작은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휙!
그 빛 덩어리가 그자의 손을 떠나서 디아론 측에서 두른 초대형 실드로 다가왔다.
슈우우욱.
퍼어어억!
빛나는 점은 실드를 뚫고 성벽의 관측탑마저 부수고서 하늘 위로 날아갔다.
“실드가 뚫렸어!”
“이럴 수가!”
단 한 번의 공격에, 실드에 지름 수 미터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조각상 마족과 비눗방울 마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서 구멍을 헤집고 점점 벌렸다.
파사삭!
결국은 초대형 실드가 깨져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백병전이었다.
“쳐라!”
“준비해!”
성벽 위의 병사들은 사기가 높았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보고 있던 디아론 백작은 전황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단 하나의 절대자가 승부의 무게추를 기울게 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때였다.
“북쪽이다!”
“뭐지? 북쪽 하늘에 뭔가 나타났다!”
저 멀리 북쪽 하늘에서 새까맣게 몰려오는 비행체가 보였다.
“하늘에 뭔가가 많이 떠 있어!”
“아! 저건 샤론 영주의 비행 차량이야!”
“지원군이다!”
수천 대의 비행 차량이 북쪽 하늘에서 다가왔다.
그 모습에 전투 중인 디아론 성벽 위에서도, 성벽 아래의 몬스터들도 북쪽을 바라보았다.
기이이잉.
착.
비행 차량이 전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대규모로 착륙했다.
제국의 지방 영지군에서 고르고 고른 이들로만 이루어진 15만 명의 지원군이었다.
그 지원군의 선봉에는 내가 있었다.
마왕군에게 샤론, 서모너, 프란시아성을 쉽게 내준 이유는 전장을 이곳으로 정하기 위해서였다.
세 곳의 성을 내주며 적의 병력을 갉아먹고 우리는 가장 강력한 성에서 최대의 인원이 집결했다.
이곳에서는 반드시 승리를 거둬야 했다.
나는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마나를 일으켜 목소리에 마나를 실었다.
15만 명이 내 목소리를 들으려면 마나를 쥐어짜야 했다.
“가자!”
내 목소리가 전장을 덮었다.
그러자 15만 제국군이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땅이 흔들렸고.
“와아아아!”
함성이 퍼졌다.
하지만 그때 몬스터의 무리에서 한 인영이 떠올랐다.
뭔가 흐릿하게 막힌 것처럼 그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자가 마왕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느덧 마왕의 시선은 디아론성이 아닌 우리를 향해 있었다.
휘릭.
마왕이 손짓했다.
콰과과과광.
좌에서 우로 흔드는 손짓에 맞춰서 땅거죽이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8서클 어스퀘이크야!”
지난번 서모너성에서 알타르, 기예라, 스피오크가 며칠간 걸쳐서 준비한 회심의 마법인 어스퀘이크였다.
손짓 한 번.
15만 제국군을 멈춰 세우는 데 필요한 동작이었다.
본능이 알려줬다.
저자와의 대결이 곧 이번 전쟁의 결과라는 것을 알았다.
마왕이 다시 손짓했다.
꾸우욱.
15만 병력을 짓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윽! 대단위 중력 증가마법이야!”
마왕은 마왕이었다.
단 한 수에 15만을 멈춰 세웠고, 이제는 이들을 무릎 꿇리려 하고 있었다.
“이익. 질 수 없지!”
아무리 마왕이 앞에 있다고 해도 15만 명을 이끌고 와서 겁먹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척.
나는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내 걸음에 맞춰서 바로 옆의 샤샤가 걸음을 내디뎠다.
“같이 가요.”
나와 샤샤의 눈이 마주쳤다.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다.
“냥.”
제리도 한 걸음 내디뎠다.
“그래. 다 같이 가자.”
적은 마왕이지만 우리에게도 S급들이 차고 넘치고, 무한 힐을 받는 500의 팔라딘이 있었다.
이제 몬스터 따위는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물량이라면 이쪽이 위였다.
“갑시다!”
“고고!”
“라져!”
“냥!”
오늘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