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뉴욕
“캬아아악!”
“쿠오오오!”
“크아아아아!”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은둔자의 뒤로 괴성을 지르는 몬스터들이 있었다.
인간보다 서너 배 커다란 키를 가진 인간형 몬스터, 사자쯤은 앞발로 눌러 죽일 것 같은 사족 보행 몬스터, 그나마 뱀 형태의 몬스터는 이해가 갔지만 지하실 문을 어떻게 통과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 몬스터들은 운둔자의 명령을 받는지 은둔자 뒤에서 걸어왔다.
지하실에서 몬스터들이 꾸준히 올라왔다.
몬스터들의 거친 호흡 소리, 이상한 진동 소리가 들렸다.
훅 하고 들어온 몬스터들의 역한 냄새가 퍼졌다.
나는 제리를 보며 물었다.
“잘 찍고 있지?”
“물론이당.”
이게 다 국제 헌터 연합에 알릴 자료였다.
저벅저벅.
은둔자가 우리 앞으로 10m 정도까지 다가왔다.
그를 향해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곳을 마족의 땅으로 만들려고 하는 건가?”
은둔자는 잠시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곳은 주인이 없는 땅이다.”
“서울 브레이크는 서울에 주인이 없어서 일으킨 것인가? 당신도 한때 인간이라고 들었다. 왜 그런 것이지? 그대는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 아니었나?”
“흠…….”
은둔자는 잠시 말이 없었고 그의 뒤쪽에 있는 몬스터들만 괴성을 질렀다.
잠시 생각하더니 은둔자가 말했다.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입장이 달라지는 법이지.”
“그대는 인간과 적대하고 싶은 것인가?”
“인간과의 적대라… 그래, 그것도 좋겠지. 적대하고, 패배하고, 절망에 빠지는 것도 겪어봐야지.”
“하아… 아무튼 적대하겠다는 뜻으로 알겠다. 그런데 저 달, 글리제에서도 저렇게 붉더니 이곳에서도 은둔자 당신의 등장과 함께 붉게 보인다. 저 달이 붉은 것은 당신, 마족이 한 일인가?”
“후후후. 색이 그렇게 중요한가?”
“뭐?”
“색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닌가?”
“내용도 바꾸었나?”
“달빛은 널리 행성을 비춘다. 나는 그저 수조에 담긴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렸을 뿐이다.”
“내 귀엔 그 말이 달빛에 무슨 짓을 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맞는가?”
“후후후. 좋을 대로 생각하라.”
“다시 한번 묻겠다. 그대는 인간을 적대하려 하는가?”
“지구에 인간만이 살아가야 하는가? 오래전부터 포탈이 열렸고, 세상엔 너무나 많은 세계와 생명이 있음을 알지 않는가? 그런데 지구에는 인간과 가축이 대부분임을 알고 있는가? 극히 편향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 말은 마족과 인간이 공존해야 한다는 뜻인가?”
“저자를 보라. 함께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
은둔자의 시선에는 흑마정석을 박은 사람이 서 있었다.
“은둔자여, 그 말은 궤변이다. 저자는 흑마정석이 주는 힘에 취해 마족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을 노예화시키려 하는가? 그건 인간과 공존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은둔자여, 마족은 이곳을 마계화시키려 하는가?”
“흑마정석을 박으면 더욱 기나긴 삶을 보장받게 된다. 보라. 이곳의 인간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네가 저들의 삶을 구원할 것인가? 저들은 나에게 기대는 삶을 선택했을 뿐이다.”
대화가 평행선을 달렸다.
인간과 마족이 각자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는데 무엇을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마족의 발호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으면 해보거라.”
은둔자가 오른발을 들어 땅을 굴렀다.
쿵.
그 소리가 신호가 되었는지 마계화된 땅 자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꾸물꾸물.
검은 땅이 점점 밀려왔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우리는 땅 위에 서는 것 자체로 디버프를 받았다.
“캬야아아!”
어느새 지하실에서 올라온 몬스터는 얼핏 보아도 50마리가 넘었다.
지하실에 저렇게 많은 몬스터가 있었나?
제리가 지하실을 촬영했을 때는 한 마리도 없었다.
몇 마리 정도가 올라왔다면 촬영하지 못한 공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뱀 같은 것은 둘둘 말면 덩치가 버스보다 큰데 지하실에 숨어 있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몬스터를 소환하는 문이 있는 것 같아요.”
저렇게 다수의 몬스터를 뱉어내는 것은 원래 포탈이 하는 일이었다.
“스승님, 아까 영상에서 연못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연못이 포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땅 자체를 마계화시키고, 주민들을 노예화하고, 포탈을 열어 몬스터들을 소환하는군요.”
“시간이 길어지면 마계화된 땅도 넓어지고 몬스터와 마족의 노예가 더욱 쌓일 겁니다. 그럼 이곳을 탈환하기 더 어려워지겠죠.”
“그래요. 지금, 우리가, 여기서, 싸우는 게 최선이에요.”
차지율, 기예라, 카나. S급만 셋이 있었다.
무려 S급이 셋이나 있는 전력이 싸워보지도 않고 뒤로 물러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디바인 프로텍션!”
모두에게 신성력이 담긴 보호막을 걸어주었다.
“디바인 홀리 큐어!”
마계화되어 확장되어가는 땅 자체에 치유력을 부었다.
치이이익!
내가 신성력을 부은 곳에서는 검은 땅이 침범하지 못했다.
적어도 내가 신성력을 부은 곳에서라면 디버프를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들도 괴성을 질렀다.
“캬아아아!”
하지만 이쪽도 몬스터의 수에 겁먹을 등급은 아니었다.
“와라!”
“다 덤벼!”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한 마리 한 마리의 덩치가 지하실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컸다.
제리가 발톱을 길게 뽑았다.
아까 한 방 맞은 것이 분한 것 같았다.
“좁은 지하실에서 어떻게 올라왔냥? 너희 다 풍선이냥?”
“캬아아아!”
농담이 먹히지 않는 몬스터였다.
“풍선이 아니라 스펀지인가 봐.”
하지만 농담은 우리끼리 통하면 충분했다.
“가로 베기!”
“멀티 파이어 에로우!”
“오러 칼날 방패!”
“파이어 플레임!”
우리의 헌터들이 각자의 기술들을 펼쳤다.
“디바인! 디바인! 디바인!”
나도 끊임없이 신성력을 퍼부어주었다.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카나를 향해 돌진했다.
상대 몬스터들 중에서 덩치가 제일 커 보였다.
“캬아아아!”
입을 쩍 벌리니 입의 크기가 카나의 키의 두 배는 되었다.
카나를 삼켜버리려는 듯했다.
콰악!
하지만 카나는 S급 탱커였다.
왼발로는 뱀의 아래턱을 밟고 오른손으로 위쪽 입을 받쳤다.
치이이이익!
그러자 뱀의 입속에서 독액이 발사되어 카나에게 뿌려졌다.
카나는 왼손에 든 방패로 독액을 막았다.
“큐어! 큐어!”
나는 얼른 큐어를 뿌려주었다.
피잇!
어느새 날아간 샤샤의 화살이 뱀의 눈에 꽂혔다.
“캬아아아!”
뱀은 괴로워하며 몸을 흔들었지만 카나는 땅에 뿌리박은 듯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았다.
“타앗!”
차지율이 카나가 받치고 있는 쩍 벌린 뱀의 머리 쪽과 턱 쪽이 연결되는 곳에 검을 찔러 넣고 몸통 쪽으로 휘둘렀다.
촤아악!
그리고 카나와 차지율이 눈을 마주치더니 카나는 아래턱을, 차지율은 위턱을 잡고 뱀을 그대로 찢어버렸다.
쭈아아악!
뱀이 위아래로 찢어졌다.
“우리 편! 잘한다!”
나는 그 모습에 얼씨구나 하여 응원을 해주었다.
“디바인! 디바인! 디바인!”
처음엔 신성력만 퍼부어주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자 디버프를 받는 상태에서 수적으로도 열세라 내 근처까지 오는 몬스터도 있었다.
하지만 나도 공격기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마나량 만큼은 어디 가서 꿇리지 않을 정도였다.
마나를 주먹에 둘렀다.
주먹에 마나로 이루어진 펀치가 생겼다.
“와라!”
피부가 없는,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사족 보행 몬스터가 다가왔다.
꿈틀꿈틀하는 근육의 움직임이 기괴하지만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에게 점프했다.
“마력 펀치!”
쾅!
근육 덩어리 몬스터는 사자보다 몇 배나 컸지만 나의 마력 펀치는 마나 그 자체로 이루어진 것이라 단순 물리적인 힘 이상이었다.
근육 덩어리 몬스터가 충격을 받아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근육 덩어리도 만만치 않았다.
폭발적인 근육의 움직임을 생생히 보여주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의대 실습용으로 보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력 펀치!”
쾅!
때리면 넘어지고, 일어나서 다시 달려들고의 반복이었다.
그사이 두 마리의 근육 몬스터가 내 근처에 더 다가왔다.
“디바인 프로텍션.”
내 몸 자체에 보호막을 걸었다.
“마력 펀치!”
한 마리를 쳐내는 사이에 다른 양쪽에서 두 마리가 달려들었다.
어쩔 수 없이 한 마리를 더 걷어내며 마지막 한 마리는 보호막에 맡겼다.
치이이익!
어라?
그런데 마력 펀치로 날려버린 몬스터보다 보호막에 부딪힌 몬스터가 데미지를 더 크게 입은 것 같았다.
마력 펀치는 근육 덩어리를 몽둥이로 때린 느낌이라면 보호막에 부딪힌 몬스터는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신성력이 포함된 보호막이 마력 덩어리 펀치보다 뚜렷한 데미지를 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실험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디바인 홀리 큐어.”
치이이익!
“캬아아아!”
마치 염산이나 끓는 물을 부은 것처럼 제자리에서 발광을 했다.
나를 공격할 생각도 못 하고 고통스러워했다.
“신성력에 많이 취약한데?”
나는 다시 우리 헌터들에게 신성력이 포함된 보호막을 걸어주었다.
“디바인 프로텍션.”
그리고 치열하게 싸우는 곳의 몬스터들에게 신성력이 포함된 큐어를 걸었다.
차지율이 오른손에 들린 검으로 인간 상체에 뱀의 하체인 나가 한 마리의 몸통에 검을 꽂아 넣었고, 왼손으로는 문어 같은 몬스터의 머리통을 쥔 채 두 발로 골렘 목에 헤드록을 걸고 있었다.
차지율은 원래 검사라서 저렇게 육체형으로 싸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계화된 땅 위에서 싸우다보니 디버프로 인해 검술만으로는 싸우는 데 한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디버프엔 디버프였다.
“디바인 홀리 큐어!”
치이이익!
차지율에게는 버퍼를, 몬스터들에게는 디버프를 주는 큐어였다.
화상을 입은 듯 정신을 못 차리는 몬스터들은 차지율에게는 잘 차려진 밥상이었다.
서걱!
서걱!
차지율은 한 마리 한 마리 정성껏 몬스터의 목을 딴 후 나를 보았다.
“땡큐!”
기예라의 마법도 화려했다.
“아이스 봄!”
디버프를 당하고 있어서 저마다의 궁극기를 쓰지는 못하는 것 같았지만 한 클래스 아래의 마법이라고 해도 만만한 마법이 아니었다.
몬스터의 눈앞에서 수박만 한 얼음덩어리가 수류탄처럼 터졌다.
강하게 터져나가는 얼음 폭탄의 조각들은 하나하나가 주먹만 했다.
그리고 그 조각난 얼음 조각들은 얼음인지 유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카로워서 몬스터들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찢어버렸다.
아이스 봄에 당한 몬스터의 상처를 보니 폭탄 조각이 지나간 방향 그대로 상처가 나 있었다.
민무늬 피부의 몬스터를 얼룩말처럼 줄무늬 몬스터로 만들어버리는 마법이었다.
알타르도 뒤지지 않았다.
“멀티 워터 스피어!”
원래 알타르는 화염 계열을 즐겨 썼지만 기예라와의 상성을 고려한 듯 물 계열을 사용했다.
덕분에 얼음과 물의 상호 보완적인 공격에 더욱 큰 타격을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싸운 후 몬스터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수십 마리의 몬스터에, 디버프를 받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이쪽의 전력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전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은둔자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예라를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은둔자 찾기는 기예라의 전공이었다.
“은둔자는요?”
“사라졌어.”
“누가 은둔자 아니랄까 봐 사라지는 건 잘하네요.”
주변을 둘러보니 마계화된 땅이 확장되는 것은 멈춘 상태였다.
우리는 뒷정리를 했다.
치이이익!
마계화된 땅은 신성력으로 줄여야 했다.
“지하실로 가볼까?”
“그래요. 지하실도 확인해봐야죠.”
혹시 몰라 다 함께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문틀까지 다 부서져 있었다.
“아까 몬스터들이 넘어오면서 문까지 부서진 것 같네요.”
“그러게. 아까 그 몬스터들이 풍선은 아니었던 걸로.”
지하실 연못이 사라져 있었다.
알타르가 인상을 썼다.
“흠… 스승님, 아무래도 이 연못형 포탈을 폐쇄한 채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포탈이 남아 있었다면 더 문제였을 것 같은데 그래도 다행이네요.”
지하실 바깥으로 나가 마계화된 땅을 더 청소했다.
은둔자가 없어져서 그런지 아까 신성력을 부었을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청소되었다.
제리는 카메라맨이 되어 곳곳을 촬영했다.
“카나야, 이거 마계화된 흙도 조금 포장할까?”
“왜요?”
“국제 헌터 연합에 가져가게. 연구 전문 헌터들에게 이 흙을 주면 우리보다 더 잘 분석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군요, 얍!”
카나가 마계화된 땅을 가로세로 2m 정도로 자르더니 통째로 떼어 들었다.
“선물함.”
슉 하고 땅을 선물함에 넣어 버렸다.
그렇게 어느 정도 정리됐을 무렵, 알타르가 기절한 사람 한 명을 허공에 띄워 들고 왔다.
“스승님, 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자세히 보니 몸 곳곳에 흑마정석이 박혀 있었다.
“데려가야죠.”
“어디로요?”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뉴욕으로 갑시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