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남미
남자와 기예라가 대화를 나누었다.
“여기 있었군요.”
“그래. 오랜만이야.”
“서울의 던전은 당신이 오픈한 건가요?”
“그래.”
남자는 순순히 시인했다.
“왜 그랬죠?”
기예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너도 내 상황을 잘 알지 않나?”
“하지만… 꼭 이랬어야 했나요?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는 것이지.”
“이럴 거면, 이럴 거라면 왜 돌아온 건가요? 차라리 돌아오지 말지 그랬어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운명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나는 그에 따라서 행할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꽤 훌륭했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르게 안정을 찾고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군.”
“그걸…그걸 말이라고 해요? 서울이라고요, 서울. 어떻게 당신이… 어떻게 당신 손으로 서울을 공격할 수 있어요? 어떻게…….”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의 나에겐 그게 옳았고, 지금의 나에겐 이것이 옳기 때문이다.”
휙.
남자는 작은 구슬 세 개를 던졌다.
콰아아아아!
구슬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며 세 마리의 몬스터가 나타났다.
온몸에서 검붉은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견이었다.
지옥의 문지기라는 케로베로스와 비슷했지만 머리는 하나였고, 몸집은 조금 더 날렵해 보였다.
크르르르르.
싸워야 할 때였다.
지옥견들이 달려들었다.
“뒤로 물러나요.”
콰각!
카나가 방패로 지옥견들을 막았다.
기예라는 차가운 표정으로 지옥견을 바라보았다.
“블리자드!”
기예라는 기분이 안 좋은 듯 시작부터 궁극기였다.
기예라를 중심으로 전방을 향해 눈폭풍이 생성되었다.
콰과과과!
눈과 얼음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그 얼음의 공격에 지옥견들은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나는 샤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샤샤야, 화살 한 대만.”
“여기요.”
“신성력 부여.”
화아악.
일반 화살이 신성력으로 충만한 화살이 되었다.
나는 다시 화살을 샤샤에게 주었다.
저쪽 지옥견들은 말 그대로 지옥에서 올라온 개니까 신성력에 치명타를 입을 것 같았다.
주욱.
샤샤가 활을 당겼다.
피잉!
퍼억!
치이이이익!
머리가 꿰뚫린 지옥견 한 마리가 고통에 몸부림을 치더니 블리자드에 휩쓸려 소멸되었다.
“샤샤야.”
샤샤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착.
화살이 내 손바닥 위에 다시 올려졌다.
그렇게 두 번을 더 해서 지옥견을 소멸시켰다.
S급 탱커가 수비를 하고, S급 마법사의 마법을 공격하는 와중에 신성력 화살까지 날아가니 아무리 지옥견이라고 해도 버티지는 못했다.
휘이잉.
블리자드가 멎고 황량한 운동장이 드러났다.
여기저기 블리자드로 인한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자는 없었다.
나는 기예라를 살펴보았다.
아직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블리자드가 불었지만 그자가 이 정도 공격에 휩쓸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지옥견을 풀고 자리를 피한 것 같았다.
잠시 멍하게 서 있던 기예라가 나를 보았다.
“잠시 얘기 좀 할까?”
우리는 운동장 스탠드에 앉았다.
기예라는 입을 앙 다물었다가, 콧바람을 세게 내었다가, 길게 내쉬었다.
나는 천천히 기다려 주었다.
“민준아, 한국에 S급이 누가 있는 줄 아니?”
갑자기 한국의 S급을 물어보다니 조금 의아했다.
“협회장님, 차지율, 노승민 그리고 누나죠.”
“흠…….”
기예라는 다시금 흠 소리를 내며 콧바람을 내뿜었다.
“그리고 한 명 더 있어. 아니, 있었어.”
누굴 말하는 것이지?
S급이 네 명이 아니고 한 명 더 있다니?
“설마 은둔자요?”
“그래. 아까 본 자가 은둔자야.”
“아…….”
그런데 한국의 S급 헌터가 서울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켰다고?
“20년 전에는 한국의 S급이 세 명뿐이었어. 협회장님, 나 그리고 그였지.”
20년 전이라면 천마와 오성이 아직 S급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일반인들을 잘 모르지만 20년 전에 S급 던전이 열린 적이 있었어. 그리고 그 던전 안에서 마족이 나왔지.”
“그랬군요.”
“민준도 알잖아. 던전을 한 번도 깨지 못한다면 결국은 브레이크가 발생한다는 것을.”
나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우리 셋은 힘을 모아 보스를 죽였어. 하지만 마족은 죽으면서 그에게 저주를 남겼어. 그가 자신과 같은 마족이 될 거라고 했지. 마족의 저주대로 그는 점점 마족화되어 갔어. 막을 수 없었지. 그는 자신이 위험하다며 서울에 있을 수 없다고 하곤 떠나버렸어.”
기예라가 20년간 마족을 추적한 것은 그를 찾고자 한 것 같았다.
나는 기예라와 그 사이에 개인사가 조금 더 있을 것 같았지만 묻지 않았다.
기예라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마족이 되었어. 아까 민준과 내가 요 밑에서 만났잖아. 나는 마족을 그리고 민준은 그 이상한 신의 하수인을 찾다가 함께 만났잖아. 그자는 마족이면서 그 신의 하수인이 된 모양이지. 하아…….”
기예라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그가 서울을 공격한 것은 변하지 않아. 그건 곧 우리와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뜻이야.”
나에게 하는 말인 듯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모습이었다.
* * *
두 달의 시간이 지났다.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할 것 같았던 은둔자는 어디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은둔자라는 별명처럼 어딘가에 은둔한 것 같았다.
서울에 상처는 많았지만 사람들은 아픔을 딛고 꿋꿋하게 일상을 이어갔다.
그리고 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온 장유환이 호들갑을 떨었다.
“길드장님, 이번에 남양주에 던전이 새로 열렸다는데 거기 한번 가보시죠. 경험치를 꽤 잘 주는 모양입니다.”
“그래요? 날짜를 한번 잡아 볼게요.”
“넵. 감사합니다. 충성!”
장유환은 장난스럽게 경례를 했다.
[스승님.]
알타르의 쪽지가 왔다.
[네.]
[스승님께서 며칠 전 보내주신 아이가 1서클을 열었습니다.]
지난번 서울 던전 브레이크 사태 때 우연히 만난 아이가 있었다.
예솔이라는 아인데, 마나와 신성력을 잘 구분하길래 찜해 두었다가 알타르에게 보냈는데 벌써 서클을 형성한 모양이었다.
[와, 잘되었네요.]
[네. 그런데 죄송하게도 스승님의 여동생님은 아직 서클을 만들지 못하셨습니다.]
재능이 없는 것을 누굴 탓하랴.
[괜찮아요. 되는대로 가르쳐주세요. 영재들 사이에 둔재를 끼워서 제가 다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열심히 지도하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나는 화면을 움직여 샤론성을 비추었다.
샤론 마을은 이제 새롭게 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성을 꽤 많이 쌓아올렸다.
영지의 마법사가 200명에 달하였고, 수천 명의 영지민들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구의 현대 건축기술을 동원하니 성을 쌓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트란 산맥을 내려오는 몬스터는 30m 높이의 거대한 성벽을 넘던가 아니면 돌아가야 했다.
공중을 날지 못하는 몬스터는 돌아가는 것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이 향하게 되는 곳은 자연스럽게 함정이었다.
함정을 피해서 성벽을 따라 돌아가도 영지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성벽은 샤론성에서 밤나무, 에린 마을을 지나 남쪽으로 서모너성까지 쭉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샤론성에서 남쪽으로도 성벽이 연결되어 파닐 마을을 감싼 후 다시 서모너성으로 연결되었다.
결과적으로 영지의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쌌다.
비용이 꽤 들었지만 꼭 필요한 공사였다.
수천 명의 영지민들을 공사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힘들었어도 충성도는 날이 갈수록 올랐다.
“일당으로 배급을 이렇게나 많이 해준다고?”
“파이? 이런 걸 파이라고 불러?”
“아! 폭신하고 달콤해!”
“영지의 공사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애미야. 오늘 영지 공사는 나도 나가야겠다.”
“어머니, 허리도 안 좋으신데 공사 일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 안 좋으니까 나가야지. 옆집 영감도 공사를 하면서 손가락을 살짝 다쳤는데 전신 큐어를 받았다고 하더구나. 평생을 달고 사는 고질병까지 고쳐주는 모양이야.”
“그래요?”
영지민들이 공사를 하는 동안 나도 놀지는 않았다.
신성력과 큐어를 함께 사용할 수 있으니 꽤 고위 치료사라고 할 만했다.
그리고 요즘 치료사 역할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아무래도 힐 스킬과 신성력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신성력은 언데드 계열에게는 최악의 상성이며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는 최고의 치료 효과를 주었다.
삶과 죽음의 본질에 닿은 것이 신성력인 것 같았다.
“디바인 홀리 큐어!”
나는 나에게 신성력이 포함된 큐어를 걸었다.
이렇게 가끔씩 큐어를 써주면 여드름 하나 없는 뽀송뽀송한 피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화면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비교적 넓은 경작지가 보였다.
[다니엘.]
[네, 영주님.]
[작물들은 잘 자라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제가 평생을 농사일에 관여했지만 이렇게 작물이 잘 자라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입니다. 영주님과 신수 님의 가호 덕분입니다.]
[그래요?]
나는 화면을 확대해 보았다.
[이건 마나초인가요?]
[네. 맞습니다.]
[그 옆에 건요?]
[이건 스테미너에 좋은 작물입니다. 스테미너 포션으로 사용할 수 있죠. 지구에서 비싼 값으로 팔린다기에 심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해주는 데 효과가 있다는 식물입니다.]
[다니엘!]
[네.]
[아주 기대가 큽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농업지구를 다니엘과 신수에게 맡기고 화면을 농장에서 조금 북쪽으로 옮겼다.
이곳은 산업단지가 들어선 지역이었다.
아직 공사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얼추 공장이 돌아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꾸얀.]
[네! 영주님 오셨습니까?]
[네, 공장은 잘 돌아가요?]
[넵! 지난 제국과의 전쟁에서 공급된 가죽들의 무두질은 모두 완료된 상태입니다. 그다음 1차 가공은 50%, 2차 가공까지 완료된 가죽들은 20% 정도입니다. 이제 기초 마법이 적용된 상태로 오늘부터 지구로 납품이 시작될 것입니다. 지구의 한상일 가신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오호, 잘되었군요.]
[네. 영지민들도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있습니다. 우수 사원부터 서모너성의 재개발입주권을 준다고 하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요? 어차피 다 줄 건데도요?]
[그래도 순서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조금 더 일찍 받거나 위치가 좋은 집을 받을 수 있는 차이가 영지민들이 더욱 노력하게 하는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산업단지 쪽은 꾸얀이 신경을 써주세요.]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샤론 마을에서만 공장을 돌릴 때는 알타르에게 공장장 역할을 맡겼다.
하지만 알타르는 6서클 마법사로 이래저래 할 일이 많았다.
공장을 처음 시작할 때는 영지 최고 수준의 마법사가 투입되었지만 이제 공장을 확장하는 단계였다. 인원도 대규모로 투입되니 최고 수준의 마법사는 다른 곳에 쓰고, 관리형 인재를 투입하는 것이 좋았다.
꾸얀은 기사이지만 머리가 좋아서 충분히 산업단지를 맡길 역량이 되었다.
이렇게 영지를 볼 때면 하루하루 달라지고, 발전해나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늘 오늘만 같으란 말이 이럴 때 쓰는 말 같았다.
하지만 오랜 평화를 원하지 않는 이들도 있는 것 같았다.
지이이잉.
스마트폰이 울렸다.
기예라의 문자였다.
기예라는 인터넷 링크 몇 개를 보내주었다.
첫 번째 링크를 열어보았다.
신문 기사였다.
다른 나라 글씨였다.
영어라면 어떻게 번역기라도 돌리겠는데 어느 나라 글씨인지도 모를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런데 사진이 이상했다.
괴기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삐쩍 마른 아이의 모습이었다.
다른 링크를 눌러보았다.
이번에는 영어였다.
간신히 읽어보니 무슨 마약과 집단적인 갱헌터의 모습이 나타났다.
에휴.
세상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이런 곳들이 있었다.
포탈이 열리고 각성자와 헌터가 등장한 세상이 되었을 때 국가의 시스템이 무너져버린 국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힘을 가진 자, 즉 각성자가 권력을 가졌다.
지역마다 군벌이 영역을 장악했다.
아마 A급 마법사인 장유환이 저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어디 자치구 하나쯤은 가지고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국가 시스템이 무너지고 힘이 곧 정의인 세상이 펼쳐지면 힘이 없는 자, 주로 일반인, 그중에서도 여성, 어린이들이 죽어가는 세상이 펼쳐졌다.
기예라가 보내준 링크에는 한글로 된 사이트도 있었다.
“언데드가 창궐하고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다. 그리고 대규모 식량 사태가 발생해서 굶어 죽는 아이들이 발생했다고?”
나는 갑작스런 불안감에 소파에 편안히 등을 기댔던 등을 떼어 바르게 앉았다.
“기예라, 외국, 언데드, 던전 브레이크, 아사자…….”
이런 키워드를 떠올리니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설마?”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