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가짜
까닥까닥.
손가락을 움직였다.
슈우욱!
내 손가락의 지시에 맞춰서 화면이 빠르게 날며 서모너 영지를 비췄다.
저 멀리 배경처럼 트란 산맥이 보였다.
트란 산맥은 멀어질수록 희미해지며 끝이 보이지 않는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내 영지지만 멋졌다.
화면은 영주관에서부터 출발했다.
영지의 가장 북서쪽이고 트란 산맥 입구이이며 이 세계에서는 나름 한국스러운 샤론 마을이 보였다.
화면을 빠르게 이동해서 샤론 마을에서 동쪽으로 가면 샤샤의 고향이기도 한 밤나무 마을이 있었고 그보다 동쪽으로 가면 샤론보다 규모 면에서는 조금 더 큰 에린 마을이 나왔다.
에린 마을 쪽이 규모가 조금 더 크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밤나무나 에린이나 비슷한 모습이었다.
몬스터 사냥, 텃밭 가꾸기 몇 마리의 가축 사육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산골 마을의 모습이었다.
에린 마을에서 화면의 방향을 남쪽으로 틀면 구 디아론성, 현 서모너성이 나왔다.
서모너성은 특이한 모양이었다.
성의 하부에는 커다란 돌을 쌓았고 상부는 콘크리트로 보강했다.
옛것과 현대의 조화가 어우러지고 있는 성이었다.
성은 무려 두 겹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높이도 높고 튼튼해 보여 안정감을 주었다.
까닥까닥.
화면이 서모너 성에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파닐 마을이 있었다.
마을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파닐 마을은 조금 편평한 지형이어서 그런지 농업도 활발했고 심지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파닐 마을과 서모너 성의 남쪽에는 프란시아를 관통하는 강이 흘렀다.
이곳은 아직 상류지역이라서 강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먹을만한 물고기들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영지를 한 바퀴 둘러보는 모습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았다.
소환수, 참모들, 부길장, 한국대 도시공학과 서교수가 모여 회의를 했다.
한국대 도시공학과 서교수가 준비한 자료를 펼쳤다.
“영지가 참 아름답군요.”
“그렇죠? 저도 이거 보는 낙에 살아요.”
“서모너 영지는 트란 산맥에서 몬스터를 헌팅해서 그 사체를 가지고 영지에서 가공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도시의 성격을 규정하겠습니다.”
끄덕끄덕.
모두 동의했다.
“그렇다면 행정의 중심은 지금의 샤론 마을이 적격인 것 같습니다. 서모너성이 있다고 해서 헌터들이 서모너성에서부터 영지를 지나 트란 산맥을 올라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서교수의 의견에 참모들과 소환수들이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러면 샤론 마을이 더욱 중요해지니 방어를 위한 시설을 더욱 갖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샤론을 몬스터 사체의 공급지, 중앙에 몬스터 사체를 가공할 공장, 그리고 현재 서모너성을 거주지로 개발하도록 합니다. 이들을 연결할 도로도 정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외부 마을들을 보면 둥근 형태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를 연결하는 순환도로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도로 곳곳에 몬스터 대비 장치가 있어야 해요.”
“샤론처럼 지하 벙커를 곳곳에 만들었으면 해요. 이곳은 언제 몬스터들이 또 준동할지 모르는 곳이거든요.”
조금씩 영지의 설계가 구체화되고 있었다.
“지금 이야기 나온 것들이 모두 반영될 수 있게 설계를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최종 설계가 나오면 바로 공사에 들어가도록 할게요. 공사를 할 때 장비는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지만, 사람은 용병 수 제한이 있어서 두세 명만 넘어갈 수 있어요. 대신 영지에서 2서클 마법사 200여 명, 일반 주민 수천 명을 동원할 수 있어요.”
“그렇군요. 요즘 공사는 기계가 다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그 정도면 할 만합니다.”
회의가 끝나고 민아를 불렀다.
“민아야, 지원팀 일은 할 만해?”
“학교에서 배우는 거랑 달라서 재밌어. 그리고 내가 오빠의 동생이지만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어. 낙하산이긴 한데 어차피 잠깐 일하는 거 알아서 다들 잘해 주셔.”
“그래. 이제 프란시아에 전쟁도 끝났는데, 가서 마법 좀 배워.”
“그래도 될까?”
“그럼, 거기 가면 너 백작의 여동생이야.”
“와.”
“너 잘되라고 하는 것도 있지만 만약, 던전 브레이크라도 터지면 저서클이라도 마법을 쓸 수 있어야 아이템 빨로라도 스스로 헤쳐나오지. 내가 없을 때 부모님 케어해 드리면 더 좋고.”
“알았어. 오빠도 예전 브레이크 생각해서 그러는구나?”
민아는 예전에 던전브레이크에 휩쓸렸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에 동해 던전 브레이크에 참여했다.
알게 모르게 나도 던전 브레이크에 대한 걱정이 생긴 것 같았다.
“아무튼 스스로 굳세지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알타르 님에게 말 잘해뒀으니까 잘 배워. 그리고 길리언이라고 꼬마가 있는데, 네 선배야.”
“선배?”
“어려도 3서클이니까 잘 배워.”
“와, 똑똑한가 봐.”
“그럼. 어떻게 지금 가볼래?”
“그래, 좋아.”
“그럼 당분간 출퇴근하던지, 아니면 아예 거기서 지내든지 알아서 해.”
“응.”
민아를 알타르에게 보낸 수 나는 간만에 디아론 백작에게 연락을 드렸다.
디아론 백작은 용병이 된 후,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디아론 백작님, 안녕하세요?]
[오오, 서모너 백작. 반갑소.]
[편히 말씀하세요. 그곳 생활은 편안하세요?]
[새로 온 지 얼마 안 되어 정신이 없지만, 커다란 성과 넓은 곡창지대를 보니 마음이 푸근해지고 있소.]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아, 이곳이 곡창지대이긴 하지만 이번 전쟁으로 인해서 식량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다오. 혹시 식량을 구매할 수 있겠소? 내 값은 마정석으로 치룸세.]
나는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당연히 됩니다. 마정석을 보내주시면 지구에서 바로 판매하여 식량으로 교환해 보내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 쌀, 밀, 옥수수 다 드셔보셨는데,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쌀이 좋소.]
[네.]
[아, 그리고 식량뿐만 아니라 건축 재료도 공급받았으면 하네.]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식량과 건축 재료라면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종류였다.
예전 베이론의 왕성을 차지하고 있는 디아론 백작이었다.
성의 규모로 보나 소드마스터를 보유한 기사단의 힘으로 보나 프란시아 왕국의 동쪽 지방에서 가장 잘나가는 백작이었다.
나한테 식량을 받아서 영지민들에게 풀어버리기라도 하면 지지율이 치솟는 것은 보나마나였다.
강력한 무력과 영지민들의 지지까지 얻는다면 디아론 백작이 동쪽의 패자가 되어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나도 며칠 전에 서모너 영지에 쌀 맛을 보여줬었다.
디아론 백작도 쌀을 푸는데 나는 쌀로만 될까?
확 맛의 신세계를 보여줘?
쌀, 밀, 옥수수 등 기본 곡류는 물론이고 한국에서는 각종 식재료가 넘쳐흘렀다.
쩝, 그렇다고 공짜는 아니니 지름신을 조절해야 했다.
* * *
민준의 부모님은 TV를 보고 있었다.
뉴스 앵커가 국회의원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쟁점이 되는 인물을 인터뷰한다. 쟁점뉴스입니다. 저희 쟁점 뉴스에서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법안을 상정한 정박수 국회의원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정 의원님.”
정장에 금테안경, 반쯤 희끗한 머리를 8 대 2로 빗어 넘긴 정 의원이 답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정 의원께서는 이번에 나눔을 금지하는 법안을 상정하셨습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네, 연말연시, 특히 크리스마스를 즈음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지 못하게 하는 법안입니다.”
민준의 부모님은 순간 자신들이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제대로 들었나 하는 의심을 했다.
뭔가 반대로 말한 듯했지만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면 잘못들은 소리는 아니었다.
“앵커님도 아시다시피 얼마 전 S급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고 많은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일손도 많이 필요하지요.”
“그렇죠.”
“그렇게 일손이 많이 필요한 곳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을 안 하고 무료로 밥을 먹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민준의 부모님은 서로 대화를 나눴다.
“저게 뭔 소리야?”
“멍멍 소리?”
“그렇구만.”
“언제는 멍멍 안 그랬나?”
“그래도 오늘은 선을 넘은 것 같아서.”
“채널 돌려. 드라마나 보게.”
며칠 후 민준의 부모님은 다시 TV 뉴스를 보았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쟁점뉴스입니다. 지난 월요일 저희 쟁점 뉴스에서는 정박수 의원님을 인터뷰했었는데요. 안타깝게도 정 의원님께서 오늘 오전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민준의 부모님은 서로 대화를 나눴다.
“타살일까?”
“왜?”
“지난번에 말하는 걸 보니 타살일 가능성이 높아 보여서.”
“하긴, 나 같아도 확 그냥…….”
* * *
과학수사연구소의 수석 법의관은 눈앞의 사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는 후배 법의관이 있었다.
“어때 보여?”
“시반의 상태를 보면 일주일 정도 되어 보입니다. 신기한 것은 손끝, 발 쪽에 시반이 몰려 있는 것으로 보아 죽은 후 서 있는 자세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보이지?”
선임의 표정이 복잡해 보여서 후배 법의관이 물었다.
“뭔가 걸리는 게 있습니까?”
“많이 걸리지. 이 사체 말야. 정박수 의원이야.”
“어디 높은 데서라도 전화가 왔나요?”
“아니, 문제는 이 사람이 오른 아침에 생방송으로 TV에 나왔다는 거야. 즉, 이 사람은 오늘 아침까지 살아있었어.”
“네? 아니 그러면 이 사체의 흔적은 어떻게 설명이…….”
“내 말이.”
* * *
동서 형님이 나를 불렀다.
“헌터 협회에서 의뢰가 들어왔어.”
“의뢰요? 어떤 의뢰요? 길드 차원으로 뭘 하래요?”
“아니 연락이 길드로 들어온 것이긴 한데 콕 찝어서 우리 길드장님에게 온 의뢰야.”
“저요?”
“그래.”
“뭔데요?”
“응, 그게 조금 애매하긴 한데, 검시관들이 사체를 보면 언제 죽었는지도 안다고 해. 그런데 분명히 금방 죽었는데 사체만 보면 죽은 지 한참 된 거라는 것이지.”
“분명히 방금 죽은 사체인데 살펴보면 한참 전에 죽어 있었다고요?”
“그래.”
“그게 말이 돼요?”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안 되지.”
“그럼요?”
“우리 쪽 세계에선 가능하니까.”
“설마, 언데드?”
“그러니까 너처럼 신성력 많은 헌터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겠어?”
지이이잉.
동서 형님의 전화가 울렸다.
“네, 네, 네…….”
동서 형님이 전화를 끊고 나를 보았다.
“왜요? 제 전화였어요?”
“그래, 헌터 협회인데 너보고 국가 곡물 보관센터라는 곳으로 와달래.”
슈우욱.
나는 비행차량을 타고 헌터 협회에서 의뢰한 장소로 이동했다.
화르르륵!
비행차량으로 날아오며 멀리서 봤을 때도 화염과 검은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차량 안에서 샤샤가 나를 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국가 곡물 보관센터라는 곳이래. 곡물을 쌓아두는 곳이지.”
“그런데 불이 나면 어떡해요? 곡물이 많이 타버리는 것 아니에요?”
“그렇지.”
“이렇게 큰 곡물 저장 센터에 화재가 발생하면 주민들이 굶게 되는 거 아니에요?”
“하하, 걱정 마. 프란시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큰일이겠지. 하지만 우리나라는 달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산량 과잉이라고 벼를 갈아엎는다는 뉴스도 나고 그랬어.”
“그래요?”
“그럼.”
슈우욱.
비행 차량이 착륙하고 소환수들과 함께 헌터 협회 직원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세 분이신가요?”
“네.”
샤샤, 카나, 나까지 셋이었다.
제리도 비행 차량을 타고 함께 왔지만, 제리는 이미 고양이가 되어 곳곳을 누비며 홀로 정보를 얻으러 갔다.
그냥 고양이인 채로도 충분히 정보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드론제리, 투명제리, 액상화제리까지 하면 제대로 된 타겟을 알기만 하면 정보를 못 얻을 수가 없었다.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곡물을 타겟으로 범죄를 벌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곡물을 타겟으로 한 범죄라고요?”
이상한 범죄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얼마 전부터 곡물에 병충해가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처럼 쌓아둔 곡물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누군가 곡물을 없애려고 합니다.”
“에이 우리나라가 얼마나 먹을 게 많은데, 창고 몇 개 불탔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헌터 협회 직원은 나를 설득하지 않고 보여주었다.
“저기 보세요. 사람들은 이익에 민감하거든요. 제가 보기엔 이미 달라지고 있어요.”
TV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농산물 가격 인상.”
“서울역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 폐지.”
“더 이상 나눌 음식은 없다. 각자도생.”
“현장르포. 절망 속에서 굶는 이들.”
지금이 몇 년도인가?
먹을 것에 대한 공격이라니 황당했고, 그러한 공격이 이 시대의 대한민국에 유의미한 타격을 입힌다는 것에 더 어이가 없었다.
“저희가 나름 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 화재 사건에 대한 참고인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민준 헌터님이 신성력이 있으시다고 하니, 신성력을 조금 뿌려 보시죠. 혹시 걸리는 게 있을 수 있으니까요.”
저벅저벅.
협회직원이 문을 연 곳에는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다들 이곳 직원인 것 같았다.
이들에게 신성력을 한 움큼씩 뿌려 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카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한 사람을 정확히 가리켰다.
카나가 자신 있게 말했다.
“민준, 저 사람이 가짜야!”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