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선물함
“아, 이거 고민되네.”
다섯 개의 랜덤 뽑기가 좋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의 A급을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뽑을 것이냐. 그것 참 고민스러운 과제였다.
다섯 개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니 못 먹어도 고를 외치느냐, 아니면 가장 가지고 싶은 것 한 가지를 가지냐의 차이였다.
“알파야, 가지고 싶은 것 다섯 개를 고르면 안 돼?”
―설마 될 것 같아서 물으시는 겁니까?
“네 개는?”
―안 됩니다.
“두 개?”
―NO.
“거참 사람이… 아니, 시스템이 융통성이 없구만!”
그렇게 뽑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펄럭펄럭.
마족은 등에 달린 검은 날개를 이용해 날아오고 있었다.
알파와 투닥거리고 있었지만, 전장을 지켜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마족은 이쪽이 어느 정도 지쳤을 때까지 관망하다가 이제 슬슬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날아오는 것 같았다.
“와, 보스가 등장했네.”
나는 마족이 날아오는 모습을 보고 바로 쪽지를 날렸다.
[여러분, 마족이 날아오고 있어요!]
[어느 쪽이에요?]
[중앙과 북쪽의 중간 정도, 팬니르 님이 지키고 있는 위치 정도예요. 다른 분들도 이쪽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아요.]
성을 지키는 일은 일반 병사들에게 맡기고 S급들은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한 곳에 모여야 할 것 같았다.
[알았소. 모두 팬니르 경이 있는 위치로 오시오.]
[네!]
팬니르는 성벽 위에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무언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타다다닥.
옆에서 차지율이 빠르게 다가왔다.
순간 팬니르는 심상 속의 차지율과 현실 속의 차지율을 비교해 보았다.
심상 속의 차지율과는 꽤 오랫동안 함께 했다.
트란 산맥에서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심상 속의 차지율과 대련하는 데 사용했다.
차지율이 뛰어오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타아악, 타아악.
차지율의 한 걸음 한 걸음이 팬니르의 눈에 꽂혔다.
심상 속의 차지율이 검을 내지를 차례였다.
저 걸음걸이, 저 보폭, 저 무게중심.
익숙하다 못해 팬니르 자신의 모습 같았다.
휭!
카카카강!
팬니르가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검을 차지율이 받아내었다.
주르르륵.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검을 차지율이 간신히 받아내고 뒤로 한참을 밀렸다.
“팬니르!”
주위에서 팬니르를 불렀지만, 팬니르는 차지율만을 보고 있었다.
S급들과 소환수들이 모두 모였다.
다들 팬니르의 공격에 당황했다.
쿵!
성벽 난간 위에 마족이 내려앉았다.
마족은 몸무게가 묵직했는지 아니면 존재감이 묵직했는지 착륙과 함께 주변으로 가벼운 충격파가 지나갔다.
마족이 주위를 둘러보며 웃었다.
마족이 팬니르를 보며 물었다.
“크크크, 두 눈에 불타는 투쟁심이 보이는군. 그 투쟁심을 감출 필요가 없지. 원래 세상은 투쟁의 장이란다. 너도 알고 있었나 보구나.”
마족은 차지율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너도 마찬가지야. 싸우고 싶은데 왜 가만히 있는 것이지? 서로 싸워. 그게 너희가 원하는 것이잖아.”
“크윽.”
차지율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다.
그때, 까밀로가 외쳤다.
“홀리 크라이!”
화아아악!
까밀로의 주변으로 원형으로 파동이 퍼져나갔다.
“크억!”
팬니르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감싸고 숨을 가쁘게 쉬었다.
차지율도 숨을 헐떡거렸다.
“헉헉.”
마족이 까밀로를 보며 인상을 썼다.
“넌 누구를 따르는 녀석이지? 이상하군. 이 동네 아이가 아닌 것 같은데?”
까밀로가 다시 한번 외쳤다.
“홀리 크라이! 정신 공격이에요! 모두 마나를 이용해 머리를 보호하세요.”
마족이 아쉬운 듯 인상을 썼다.
“크크크크, 기대한 것 이상이구나.”
헬른 공작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너는 마족인가?”
“그래, 마족을 알고 있나?”
“그렇다. 너희는 오래전 지하 세계로 추방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리 모습을 드러냈는가?”
“크크크크크, 네 입으로 말하지 않는가?”
“…….”
“오래됐으니까. 이제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세계에 영원한 건 없는 법이지. 안 그런가? 자네들도 마찬가지야. 지금 나와 대적하려고 함께 서 있는 자네들. 그렇게 한 편으로 있는 건 나 때문이란 생각을 하지 않나? 내가 없었다면 서로 경쟁하고 반목했을 것을.”
“궤변이다. 이미 너의 수는 통하지 않는다.”
“그래?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수많은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주저앉았다.
눈이 풀린 채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까밀로의 외침에 이어 마나로 머리를 보호해서 이곳에 모인 S급과 소환수들은 괜찮았지만, 상당수의 병사들이 마족의 영향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나는 그 모습을 화면으로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
“팬니르는 왜 갑자기 차지율을 공격해?”
당황스러웠다.
마족은 함부로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때 까밀로의 쪽지가 도착했다.
[준, 디바인 스킬. 모두에게, 빨리]
까밀로가 디바인 스킬을 모두에게 줄 것을 부탁했다.
“디바인 프로텍션!”
“디바일 홀리 큐어!”
나는 지금 마족을 포위하고 있는 인원이 모두 소환수 아니면 용병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디바인 스킬을 뿌려댈 수 있었다.
“디바인, 디바인, 디바인…….”
마족의 인상이 더 찌푸려지는 것 같았다.
까밀로의 요청, 마족이 싫어하는 듯한 모습.
신성력을 부어주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어라?
마족이 고개를 들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분명했다.
이건 나를 째려보는 것이었다.
“알파, 물러나!”
오드아이였을 때부터 화면 건너의 나에게 공격을 가하던 녀석이었다.
오드아이를 벗어나 더 강해 보이는 마족의 형태에서 어떤 공격이 날아올지 몰랐다.
창고 안과 바깥을 오가며 물류와 마나를 보충해주고 있었는데 마침 지금은 창고 바깥쪽 벽에 화면을 띄우고 있던 순간이었다.
푸캉!
화면 바깥으로 기운이 뻗어 나왔다.
나는 놀라서 뒤로 한참을 물러났다.
웅성웅성.
내 뒤쪽에서 마나 충전을 위해 모여 있던 알바생들도 갑자기 허공에서 폭발 비슷한 것이 일어나자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웅성거렸다.
“알파야, 우리 편 뒤쪽으로 화면을 이동해. 그리고 마족이 가까이 오면 물러나고.”
―네, 알겠습니다.
화면은 아군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사제는 싸울 때 뒤쪽에 위치하는 것이 진형의 기본이었다.
화면 자체도 공격을 당할 수 있으니 나도 진형을 따라야 했다.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마족이면 다냐? 디바인… 디바인… 디바인…….”
나는 마족이 신성력을 싫어하는 것을 파악하고 열심히 공격대에게 신성력을 부어주었다.
힐러보다 사제가 더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힐러의 역할도 했지만 필요할 경우는 사제도 겸할 수 있었다.
“교황 할배가 나 얼마나 예뻐하는지 모르지! 내가 용돈을 5조를! 받는 사람이야!”
용돈은 아니었지만, 갚긴 할 것이지만 아무튼 마음만은 그런 느낌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팬니르와 차지율이 아까 정신 공격에 더 열이 받았는지 선공을 날렸다.
슈칵!
슈칵!
어라?
묘하게 둘이 닮았다.
한 명이 왼쪽을 공격하면 다른 한 명이 오른쪽을 공격하고 또 잠시 후에 아래를 공격하면 다른 이가 위를 공격하고 둘이 짠 것처럼 합이 잘 맞았다.
보기 좋았다.
헬른 공작이 크게 외쳤다.
“마족의 말이 틀렸소. 둘은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야. 그렇지 않으면 이런 검로가 나올 수가 없지!”
그렇게 말하며 헬른 공작이 검무에 동참했다.
한명 한명이 마족과의 전투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어느 격투에서나 그렇듯 10 대 1의 전투였지만, 실제로 동시에 공격을 할 수 있는 인원은 열 명 전부가 아니었다.
네댓 명이 다였다.
그리고 마족은 능력이 S급 이상이었던지 네댓 명의 S급의 공격을 거뜬히 받아내고 있었다.
“크와왁!”
마족이 두 팔을 뻗으며 둥근 모양으로 어둠의 마나를 퍼트렸다.
어둠의 마나는 일반 마나보다 묵직했다.
그 마나의 공격이 대부분의 공격대를 뒤로 날려 버렸다.
휘리릭.
착.
공격대의 대부분이 뒤로 날아가 착지했다.
“쿨럭!”
입가에 핏물을 머금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10대 1로 싸우면서 아니, 나까지 포함해서 11대 1로 싸우면서 S급의 입가에 핏물을 머금게 하는 마족의 강함이 놀랐다.
그런데 뒤로 날아가지 않은 헌터가 한 명 있었다.
“까밀로…….”
까밀로는 의연했다.
커다란 망치를 방패 삼아 마족의 기운을 막아냈다.
줄기줄기.
까밀로의 몸 주변으로 신성력이 뻗어 나오는 것 같았다.
아까 정신 공격을 깨뜨린 것부터 나에게 신성력을 부어달라고 요청한 것까지 마족에게 가장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까밀로도 S급이었지만 그동안 공격력은 차지율이나 헬른 공작에 비해 한 끗 아래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면이었다.
“역시 상성이 중요해!”
전투는 상성을 따져야 했다.
나는 큰 결심을 했다.
“알파야.”
―네, 민준 님.
“뽑기 카드를 내가 원하는 것으로 한 장 선택하겠어.”
―알겠습니다.
주르륵.
A급 스킬 카드의 종류가 나열되었다.
이 중에서 한 가지를 내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다.
“우와.”
끌리는 이름의 스킬들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이동]
[투명인간]
…
순간이동 아니면 투명인간, 둘 중에 한 가지를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질래?
어린 시절부터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었다.
그 스킬들이 여기 다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버튼을 누르려고 올라가는 오른손을 간신히 왼손이 막을 수 있었다.
―민준 님?
“어.”
―왜 떨고 계십니까?
“아니야.”
촤르르륵.
더 많은 스킬들이 지나갔다.
* * *
샤샤는 체력이 부족함을 느꼈다.
비록 마나 각성제를 마시기는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오늘만 벌써 마나 각성제를 다섯 병을 마셨다.
이제 마나 각성제를 마셔도 한 등급 위로 올라간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부족한 마나를 보충하는 마나포션 느낌이 들 뿐이었다.
10대 10으로 제국군과 대장전을 붙을 때도 할 만했다.
성으로 몰려오는 수인화된 제국군들이 몰려올 때도 버틸만했다.
비록 수인화된 제국군들은 마족의 영향 아래 고통을 잊었는지, 화살이 팔다리에 박히면 소용이 없어서 심장이나 머리에 정확히 꽂히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그 정도는 집중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족은 조금 버거웠다.
샤샤가 보기에 마족은 S급이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콰당탕!
“큭.”
카나가 마족에게 버티다가 그 힘에 못 이겨 몇 바퀴를 굴렀다.
카나는 탱커였고 힘만큼은 여느 S급 못지않았다.
그런데도 저렇게 나뒹굴었다.
“으윽.”
팬니르, 차지율, 헬른은 딜러의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마족에게 여러 번 검격을 날렸지만 그만큼 마족에게 당한 횟수도 많았다.
힐을 주기적으로 받아서 몸은 회복이 되었지만, 마족의 손톱에 찢겨 어느새 갑옷은 넝마가 되었다.
10대 1이었어도 승부의 분위기는 마족이 우세하고 있었다.
반전의 카드가 필요했다.
그 카드는 기예라가 가지고 있었다.
푹!
어느새 마족의 뒤로 돌아간 기예라는 하얀 빛이 줄줄 흐르는 단검 하나를 마족의 어깨에 박아넣었다.
사아아악.
마치 서리가 낀 배추처럼 마족의 검은 몸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이십 년을 준비했다.”
기예라의 자신감 넘치는 말과 함께 마족이 얼어붙고 있었다.
“크아아악!”
하지만 마족도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괴성을 지르며 어둠의 마나를 크게 분출했다.
“물러나! 페이즈 2야!”
아직 단검이 어깨에 꽂혀 있었다.
단검이 박힌 팔은 완전히 얼음이 되었고 나머지 몸통 전체에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하지만 넘쳐 흐르는 어둠의 마나가 마치 보호막처럼 뻗어 나와 공격대는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스칵!
꽁꽁 얼어붙은 마족의 팔이 땅에 떨어졌다.
마족이 스스로 어깨에 단검이 박힌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내었다.
“크크크크 제법이야.”
마족이 하나 남은 왼팔을 휘두르며 싸웠다.
쾅! 쾅! 쾅!
팔이 하나뿐이었지만 여전히 강력했다.
그런데 다행인 점은 팔이 하나로 줄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팔을 잘라 내어도 단검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 몸에 서리가 끼었고 스피드도 줄었다는 것이었다.
“타앗!”
“마족아! 받아라!”
쾅!
마족이 휘두르는 팔을 까밀로가 정면에서 망치를 들고 막았다.
“도와드릴게요!”
카나가 바로 옆에 붙어 힘을 보탰다.
치지지직!
까밀로의 신성력에 의해 마족의 팔에 스파크가 튀었다.
카나 역시 신성력이 포함된 보호막이 있어서 마족과 신성력이 반발하여 스파크가 튀었다.
“크아!”
마족이 힘을 더 주어 까밀로와 카나를 밀쳤다.
아직도 몸에 서리가 가득하고 심지어 한쪽 팔이 잘린 채 이렇게 힘을 내다니 놀라웠다.
“크크크크”
마족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뚝, 뚝, 뚝.
얼어붙었던 발이 녹아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예라의 회심의 일격이 조금씩 무력화되고 있었다.
그때 샤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샤샤야.]
“아! 민준 님.”
[샤샤야, 선물함을 열어봐.]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