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대출
휘이잉.
창고가 워낙 커서 그런지 아니면 출입문을 열어놔서 그런지 창고 안에 바람이 불었다.
펄럭펄럭.
내 가슴의 찢어진 T셔츠가 펄럭거렸다.
가슴은 시원했지만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구에 있다고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앞으로는 화면을 볼 때도 프로텍션을 걸고 봐야 하겠네.”
제국의 군세는 백만대군이고 그들의 강자는 다른 세상에 있는 내 옷까지 잘랐다.
내 옷을 잘랐다는 건 최소 S급이었다.
베이론 성에 있던 부대의 턱수염, 오드아이, 두 번째 부대의 여자, 세 번째, 네 번째의 대장, 그리고 다섯 번째 부대는 아예 결계로 막혀 들어가지도 못했다.
결계로 막았다는 것도 S급으로 가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최소 여섯은 S급이었다.
더 있을지도 몰랐고 그들이 단지 S급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실력인지도 알지 못했다.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 같았다.
“상일 씨?”
“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요.”
돈이 있어야 전쟁도 할 수 있었다.
싸우려면 일단 예산부터 짜봐야 했다.
길드 사무실에 있던 동서 형님도 불러 모았다.
“형님!”
사무실에서 한상일, 나홍민, 길드 삼총사를 앉혀두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타다다다닥.
“자, 예산을 짜 볼게요. 상일 씨, 동서 형님 예산안 짜는 것 좀 같이 봐주세요. 자재부도 길드 관리도 예산이 모자라면 안 되잖아요.”
“네.”
“그래.”
“일단 창고의 마정석은 S급을 빼고 전부 마나각성제 또는 포션으로 만들도록 할게요.”
동서 형님이 깜짝 놀랐다.
“와, 그렇게 많이? 양이 어머어마하던데 어디 전쟁이라도 났어?”
내가 이래서 동서 형님이 좋다.
외모는 곰인데 눈치가 참 빨랐다.
“네. 전쟁이 났어요. 프란시아 왕국이 침략당할 것 같아요.”
“뭐! 안 돼. 샤론 영지는 샤론 길드의 밥줄이야.”
크으. 역시 단번에 핵심을 짚는 능력.
나 대신 길드를 관리할 인재다.
“그래요. 그래서 제가 이러고 있는 거예요. 밥줄이 끊기면 안 되겠죠?”
있는 예산 없는 예산 박박 긁어모았다.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이 개인이 보기에는 천문학적이었지만, 앞으로 나갈 돈도 생각해야 했다.
수십 명을 뽑는다고 공지를 날렸는데 월급 줄 돈이 없다고 하면 낭패였다.
마나각성제, 힐링포션, 마나 포션, 무기, 식량 구매량을 계산해 보았다.
길드에서 쓴다면 충분했지만, 백만대군 앞에서 과연 충분한가 하는 생각해보니 부족해 보였다.
종구가 사무실 창문을 열었다.
펄럭.
가슴에 잘린 T셔츠가 펄럭였다.
그래, 부족했다.
여기서 지면 T셔츠만 잘리는 것이 아니라 쫄딱 망하는 것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네, 민준 헌터님, 전화를 다 주시고 어쩐 일이세요?
“노승민 헌터님.”
―네.
“돈 좀 꿔주실 수 있으세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노승민 헌터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부자였다.
―얼마나 필요하세요?
“제가 샤론에서 소환수들을 불러오는 것 아시죠?”
―그럼요.
“그 샤론은 프란시아 왕국의 작은 영지예요. 그런데 그 프란시아 왕국에 전쟁이 나려고 해요. 국가 간의 전쟁이라 필요한 금액이 상당할 것 같아요.”
―렇군요. 지금 어디 계시죠?
“네, 제 사무실이에요.”
―2시간 안에 제가 갈게요.
“이리로요? 고맙습니다.”
* * *
프란시아 왕국의 국왕은 신하들을 모아두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들을 내어 보시오.”
대전에 모인 신하들 중 붉은 옷을 입은 신하가 나서며 대답했다.
“네, 폐하. 소신 글레이몬이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신의 목을 치는 선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 프란시아를 적대하는 것을 넘어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신하는 말을 하면서 더욱 화가 나는 듯 목에 핏줄을 세우며 무릎을 꿇고 외쳤다.
“저희에게는 백전불패의 용사 헬른 공작님과 대마도사 스피오크 님이 있습니다. 또한 두려움을 모르는 병사들과 난공불락의 삼각성, 헬른성이 있습니다. 신 또한 최전방에 서서 목숨을 걸겠습니다. 결사항전하시옵소서!”
그 외침에 대전이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외침을 듣자 곧 파란 옷을 입은 신하가 나와 말했다.
“폐하, 신 모리스입니다. 사신의 목을 쳤다는 것은 분명 우리를 능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폐하,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결사항전하자는 글레이몬의 말에 저 역시 가슴이 뛰기는 하지만, 지금 이곳의 결정은 곧 프란시아의 존망을 좌우합니다.”
모리스는 한 발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더니 말했다.
“적의 수가 최소 수십만이라는 첩보가 있습니다. 또한 베이론이 며칠 버티지도 못하고 항복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제국에는 십이지성이라며 열두 명의 마스터 혹은 대마법사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나갔던 사신이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번이 안되면 두 번, 세 번 화친을 청해야 합니다. 자존심에 국가의 운명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에 붉은 옷을 입은 신하가 말했다.
“폐하, 이미 사신의 목을 베었다는 것은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다는 표현입니다. 필경 또다시 사신의 목을 벨 것입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 국력을 모아 준비하셔야 합니다.”
“폐하, 제국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제국은 영토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습니다. 그들이 추가로 영토를 원할 리 없습니다. 필경 다른 요구사항이 있을 것입니다. 자존심을 접고 화친하소서.”
“모리스! 그들이 프란시아의 이름을 버리라고 하면 버릴 텐가!”
“내가 이름을 버리라고 했는가! 지금 코앞에 수십만의 적군이 있는데, 그러면 화가 난다고 다 죽을 셈이란 말인가!”
“죽긴 누가 다 죽어? 자네는 프란시아의 용맹을 모르는가!”
“베이론이 며칠 만에 무너진 것 모르는가? 그 베이론은 우리를 먼저 공격하던 곳이란 말일세. 자신감과 만용의 차이를 모르는가!”
신하들의 논쟁을 보는 국왕도 심기가 어지러워졌다.
그때 국왕의 옆에서 대신들의 논쟁을 지켜보던 대마법사 스피오크가 나서며 말했다.
“폐하, 소신이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오오, 스피오크. 어서 대마도사의 현명한 의견을 주게나.”
“폐하, 두 의견을 모두 받으시지요. 한 번이 안 되면 두 번, 세 번 사신을 보내, 그들의 칼이 우리를 향하지 않게 한다면 그것은 외교의 승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으니 전쟁을 준비하시지요.”
“으음…….”
국왕은 결국은 전쟁의 가능성이 높다는 말에 침음을 흘렸다.
“폐하, 그리고 샤론 영주를 불러야 합니다.”
“샤론?”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호명되자 국왕이 의문을 가졌다.
“예, 폐하. 소신이 샤론에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샤론 영주와 그 휘하의 기사들의 무력 자체는 사실 평범한 자작가 수준입니다.”
“자작가?”
“예, 폐하. 자작가 정도의 수준은 되어 보였습니다. 후하게 잡아주면 조금 소규모 백작가와도 싸워볼 만한 수준입니다. 허나 그 정도 무력으로 제국과의 전쟁에 영향을 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끄덕.
국왕도 지금 상황에 기사 몇백 명 더하고 빼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마법으로도 하지 못하는 일을 그는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고, 규모가 커질수록 샤론 영주는 더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 자, 마법 이상의 마법을 부리는 자. 그가 이 전쟁의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 * *
“민준 헌터님.”
“노승민 헌터님, 반갑습니다.”
노승민 헌터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쪽은 우리 길드 재무 이사, 이쪽은 법률고문이에요.”
“아, 네.”
안경을 쓰고 마른 얼굴의 깐깐해 보이는 재무 이사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얼마가 필요하시죠?”
도발적인 질문에 나도 모르게 응답했다.
“얼마가 가능한데요?”
노승민 헌터가 끼어들었다.
“제가 샤론이 큰 위기에 처해있고, 대규모 금액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길드 차원에서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재무 이사가 나에게 물었다.
“샤론 지분 46%에 1조 어떻습니까?”
샤론에서는 전쟁이 벌어진다는데 내 앞에서는 돈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조는 마음에 들었지만, 지분을 너무 많이 요구하는 것 같았다.
“잠시 내부 회의를 해 보겠습니다.”
“그러시죠.”
나는 오성 사람들을 잠시 내버려 두고 동서, 종구, 나리, 상일, 홍민을 불렀다.
그리고 전쟁 상황과 오성의 제안을 이야기했다.
“와, 1조라니. 상상이 안 가는데요.”
“오빠, 그러면 샤론 길드가 2조라는 거잖아요. 오빠가 생각할 때 그 정도 가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따른 거 아닐까요?”
“그런데 46%면 그래도 길드 경영권은 지키는 거 아냐?”
“아니야, 예전에 길드 차원에서 지분 교환을 했었어. 그래서 46%가 넘어가면 과반수 이상으로 오성이 샤론을 지배하게 돼.”
“헐, 그럼 너무 심한 거 아냐? 앞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잖아.”
다른 곳에도 문의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천마 차지율에게 전화를 했다.
“차 헌터님?”
―네, 민준 님. 안녕하세요.
나는 지금 프란시아, 샤론의 전쟁 발발 가능 상황과 필요한 금액을 불렀다.
―1조가 필요하시다고요?
“아, 정확한 금액은 아니고 오성에 물어보니 1조 정도에 지분을 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몇 퍼센트나요?
“46%요.”
―샤론 길드의 지분 46%에 1조요?
“네.”
―양아치네.
“네?”
―기다리세요. 제가 갈게요.
“아… 네.”
전화를 끊었다.
“민준 오빠, 뭐래요?”
“어, 나리야. 차지율이 이리로 온대.”
차지율과 전화를 끊고 나는 힐러 연합에도 전화를 걸었다.
힐러 연합에서도 한국 지부장이 이리로 온다는 대답을 받았다.
한 시간 후.
“지분 46%에 1조 드립니다.”
“우린 지분 30%에 1조.”
“지분 46%에 3조 드립니다.”
1조에서 몇 초만에 3조로 금액이 오르자 다들 오성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안경 쓴 오성의 재무 이사는 꿋꿋했다.
아니 한 번 더 외쳤다.
“46%에 5조.”
5조라는 숫자에 장내가 술렁였다.
솔직히 나도 5조에는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그때, 잠시 어딘가와 통화를 하던 힐러 연합 지부장이 말했다.
“5조. 무이자 대출 10년.”
술렁술렁.
무이자 10년이라면 그냥 마음껏 써보라는 뜻이었다.
힐러 연합은 지분을 원하지도 않았다.
“천마와 오성에게는 죄송하지만, 힐러 연합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오성의 재무 이사는 썩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힐러 연합 지부장에게 물었다.
“그런 큰 금액을 결정하시다니 놀랍네요. 솔직히 무이자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저도 놀랐습니다. 하지만 제 결정이 아닙니다.”
“그러면?”
“네, 교황님께서 결정하셨습니다.”
교황의 결정이라는 말에 천마와 오성도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저도 잘은 모릅니다. 다만…….”
“다만?”
“교황님께서는 현재만을 보고 판단하지는 않으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민준 헌터님의 미래를 믿으실 겁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 다 해. 뭐 이런 뜻일 겁니다.”
“아… 하고 싶은 것 다 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부자는 노승민이 아니었다.
교황이었다.
직원은 씩 웃으며 한마디 더 했다.
“그리고 까밀로가 이쪽으로 온다고 합니다.”
“아!”
차지율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5조 무이자에 S급 지원까지. 민준 헌터, 하고 싶은 것 다 해. 크크!”
나는 힐러 연합 한국 지부장에게 물었다.
“까밀로까지 보내주시다니. 교황께서는 왜 이렇게 저에게 잘해주실까요?”
내 질문에 오히려 지부장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걸 모르냐는 눈빛이었다.
“제가 본 사람 중에서 그렇게 신성력을 줄줄 흘리고 다니시는 분은 교황님 다음에 민준 헌터님 뿐입니다. 마치 뭐랄까, 참 표현하기 애매하고 죄송하지만 살아있는 성물 같습니다.”
“아……!”
아 맞다. 나는 성물을 꿀꺽한 몸이었다.
어쩌면 저들이 보기엔 내가 성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몇 시간 후.
헌터넷에 공지가 올라왔다.
[마나 충전 알바 구함]
샤론 길드에서 마나 충전을 할 알바님을 모십니다.
0,000명
일당 2서클 250만 원, 3서클 500만 원, 4서클 1천만 원.
7백 장의 지원서가 도착했다.
샤론 영지에 150명이 마나를 충전해주고, 지구에서 700명이 마나를 충전해준다.
나는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오늘부터 마나 충전을 위해 700명을 모두 불러 창고 뒤쪽 공터에 자리를 마련했다.
부르르르.
띠이, 띠이, 띠이.
창고 앞으로 대형 트레일러가 쉴새 없이 도착했다.
“어디서 오셨어요?”
“RY유통에서 왔어요.”
“네, 이쪽으로 이동하시면 돼요.”
부르르릉.
“거긴 어디서 오셨어요?”
“베이지 마탑에서 왔어요.”
“아, 마탑은 이쪽입니다.”
초대형 창고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물량전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디아론 백작에게 용병을 걸고 계속 소통하고 있었다.
디아론 백작이 쪽지를 보냈다.
[샤론 영주, 국왕 폐하께서 부르시네.]
[네, 알겠습니다.]
“알파야, 가자.”
슈우욱.
화면이 프란시아 왕궁을 향했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