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큰손
죽음의 신전에 새하얀 빛이 내리쬐었다.
신전의 원래 주인이었던 리치는 그 하얀 빛에 맞서 어둠과 죽음의 마법을 끌어내려 애썼으나 힘에 부치는 듯했다.
죽음과 삶, 언데드와 성녀의 대결은 암흑과 빛의 대결인 듯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
사아아아.
그런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신성력의 승리인 것 같았다.
성녀가 마나 각성제를 마셨을 때까지만 해도 성녀가 만든 방패와 리치가 만든 검붉은 기운이 비슷해 보였지만 나의 신성력이 가미되자 성녀의 방패가 리치의 기운을 압도했다.
치치치직.
성녀의 기운이 리치에게 닿았다.
타닥타닥.
그리고 기운이 닿은 부분은 마치 몸이 폭죽이 된 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비명을 지르던 리치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뽑아 땅에 꽂았다.
그리고 리치가 주문을 외우자 팔을 땅에 꽂은 부분부터 땅바닥이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성녀가 외쳤다.
“피해요!”
“저건 뭐죠?”
“죽음의 영토예요. 죽은 자만이 밟을 수 있는 영역이에요. 산 자는 저 영토를 밟으면 안 돼요.”
리치의 한쪽 팔을 대가로 만든 마법답게 상당히 강력한 듯했다.
죽음의 신전을 내리쬐는 빛에도 검은 영토는 여전히 검은 빛을 유지했다.
잠시 한숨 돌린 듯한 리치는 하나 남은 손으로 수인을 맺더니 바닥에서 뭔가를 뽑아올리기 시작했다.
꾸물꾸물.
뭔가 커다란 덩치가 계속 솟아올랐다.
다 솟아오르고 보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트윈 헤드 오우거였다.
내 창고에도 트윈 헤드 오우거가 있었는데 그 녀석과 크기와 형태가 상당히 비슷했다.
하지만 창고에 있던 녀석과 다르게 피부색이 검은색이었고 온몸에 문신처럼 붉은 글씨로 새겨진 마법진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검은 오우거가 공격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어억!”
어느새 검은 오우거의 손에는 거대한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마법으로 소환한 몽둥이처럼 보였다.
붕.
몽둥이가 공격대를 향하자 카나가 가장 먼저 맞섰다.
쾅!
주르륵
나름 리치가 팔 한 짝을 바치며 소환한 녀석이라서 그런지 제법 힘이 쎘다.
“디바인 홀리 큐어”
“디바인 프로텍션”
나는 얼른 카나에게 힐과 보호막을 주었다.
검은 오우거는 일반적인 오우거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것 같았다.
또한 화살에 맞거나 검상을 입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언데드 특유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하지만 이쪽은 약빨로 등급 업 상태의 공격대였다.
공격대 한명 한명이 상급 기사 수준이며 우리 소환수들은 그보다 더 높은 단계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알타르가 화염 마법을 일으켰고, 샤샤의 화살에서 마나의 생명체가 꿈틀거리며 날아갔다.
제리는 대전사의 모습이 되어 오우거의 등짝에 줄기줄기 발톱 자국을 내었다.
조금씩 검은 오우거의 피해가 누적되어 쓰러뜨리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내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어! 쟤 튄다. 알파야! 따라잡아!”
―네.
화면이 리치를 따라갔다.
장거리 텔레포트를 쓰지 않는 이상 알파를 따돌릴 수 없었다.
오케이, 잡았다 요놈.
[얘들아! 직진! 거기서 3시 방향, 달려!]
내가 방향을 컨트롤해주자 소환수 등이 정확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성녀님 한방 터트릴 준비 좀 다시 해주세요. 소환했다가 다시 리치 옆으로 보내드릴게요.]
리치는 7서클이 자존심도 없는지 달아났지만 이내 곧 카나에게 따라잡혔다.
스칵.
카나의 검이 리치의 어깨를 베었다.
리치는 뻥 뚫린 해골 눈으로 카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카나는 리치조차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성녀님, 준비요.]
[네!]
“알파야, 성녀 소환, 다시 카나 옆으로 보내드려!”
성녀가 사무실로 소환되었다가 즉시 카나 옆으로 보내졌다.
카나를 째려보다가 갑자기 카나 옆에서 나타난 성녀로 인해 리치가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파앗!
성녀가 다시 신성력을 터트렸다.
리치 입장에서는 바로 코앞에서 터진 신성력 공격이었다.
재빨리 기운을 끌어올려 막아보려 했지만 힘들어 보였다.
[디바인 홀리 큐어.]
[디바인 홀리 큐어.]
나는 성녀에게 신성력을 보태주었고 리치는 어느새 밝은 빛에 온몸이 노출되었다.
타다다닥!
치이이익!
리치는 고통스러워했지만, 단말마를 외치며 끝내 사그라들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싸!”
오호! 7서클을 잡는 데 일조했더니 경험치가 짭짤했다.
성녀가 쪽지를 보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베슬을 찾아야 해요.]
신전 중심으로 돌아온 일행은 신전 곳곳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리치의 베슬을 찾기 위함이었다.
알타르가 마법을 발현했다.
“뷰 마나 포스!”
마나가 뭉친 지역이나 물건을 찾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알타르의 마법에도 리치의 베슬을 찾지는 못했다.
성녀가 다시 신성력을 뿌렸다.
“죽음과 어둠의 기운을 몰아낼 지어라. 홀리 라이트.”
단순히 신성력으로 만든 빛이었지만, 성녀의 신성력으로 비추니 사방이 아주 훤했다.
죽음의 신전에는 누런 돌로 만든 신전이었다.
석탑으로 만든 계단이 있었고 곳곳에 석관이 있었는데 석관의 뚜껑은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석관의 주인이었을 언데드들은 몸의 일부만 남아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그런 공간에 성녀의 신성력이 다시 뿌려졌다.
치치칙.
얼마 안 남아있던 언데드의 몸의 일부분도 승화하여 사라졌다.
공간 자체가 성녀의 신성력과 반발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알타르의 마법이 다시 발현되었다.
“뷰 마나 포스! 앗! 저깁니다.”
알타르의 마법이 리치의 베슬을 찾아내었다.
리치의 마법으로 감춰둔 것 같지만 성녀의 신성력으로 죽음의 기운을 걷어내자 알타르의 마법에 보인 것 같았다.
베슬을 발견한 곳은 평범한 돌판 아래였다.
베슬은 마정석이었다.
나는 화면으로 베슬을 보자 나도 모르게 외쳤다.
“대박!”
이건 정말 대박이었다.
드레이크 퀸의 마정석을 보았었지만, 그건 드레이크 퀸의 몸속에 있던 마정석을 꺼낸 것이었다.
말 그대로 원석이었다.
그런데 리치의 베슬은 달랐다.
최고 수준의 보석 세공사가 최선을 다해 세공한 느낌이었다.
반짝이면서도 영롱한 빛을 내는 빨갛고 투명한 광택을 내는 축구공보다 큰 리치의 베슬은 영혼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설마 리치가 아직 살아있는 건 아니겠지?
성녀가 베슬을 쥐고 다시 한번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화아악!
“됐습니다. 이제 리치의 영혼까지 승천했어요. 이제 이건 단순한 마정석일 뿐이에요.”
공격대의 절반은 남아서 잔당을 소탕하기로 하고 절반은 성녀와 함께 풍요와 대지의 신전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성녀가 너무 오래 본진을 비우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성녀와 일부가 복귀하고 나머지는 잔당 소탕을 벌였다.
소환수와 알타르는 잔당 소탕 작전에 합류했다.
나는 화면으로 잔당 소탕 중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소리 내었다.
“와, 리치의 마정석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네.”
리치의 마정석을 포함한 전리품들에 대한 분배는 전투가 끝나고 다시 하기로 했다.
눈앞에는 잔당 소탕 중인 소환수와 공격대의 모습이 있었지만 아까 본 마정석이 아른거렸다.
경매에 올리면 얼마나 나갈까?
S급 마정석을 갈아서 각성제로 만들어 마시고 있는 나조차 탐이 나는 마정석이었다.
성녀와 반땅하자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욕이 샘솟았다.
이거 리치의 마법이 아직 남아있는 건가?
물욕이 샘솟게 하여 성녀와 분란이 일어나게 하는 마법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석은 원석대로 좋았지만, 정밀하게 세공된 가공품을 보니 정말 매력적이었다.
리치가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싶었다.
리치의 베슬은 리치의 생명의 근원을 담아두는 것이었다.
베슬이 무사하다면 리치는 시간은 걸리지만 재생될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생명을 담는 그릇을 얼마나 정성 들여 가꾸었을지 눈앞에 선했다.
달리 말하면 7서클 마법사가 생명을 걸고 다듬은 마정석이라는 뜻이었다.
지이이잉.
스마트폰이 울렸다.
힐끔 보니 마나 각성제를 가져왔던 영업사원이 한 시간 후에 도착한다는 문자였다.
문자를 받고 소환수들이 죽은 자들의 사원을 마저 돌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니 한 시간은 금방이었다.
똑똑.
“네, 어서 오세요.”
업체 직원은 고급스럽게 포장된 마나 각성제를 한 상자 들고 들어왔다.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일일이 확인시켜 주었다.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제가 마정석을 더 구할 데가 있을 것 같아요.”
업체 직원은 눈빛이 빛났다.
“아이고, 길드장님. 뭘 원하십니까? 다 맞춰 드리겠습니다.”
“음… 마나 각성제 말고 다른 물품은 또 없나요? 헌터의 능력을 키워주는 물건으로요.”
직원은 박수를 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고! 당연히 있습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마나 각성제 말고도 헌터 전용 영양제, 보조제를 출시하고 있습니다. 자, 쉽게 생각해서 근육을 만드는 보디빌더라고 생각해보세요. 마나 각성제 드셔 보셨죠? 일단 마나 각성제는 남성 호르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강한 근육을 만들 수 있겠죠. 그런데 보디빌더들이 호르몬만 있으면 되냐? 아니죠. 단백질을 엄청 먹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헌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나 각성제로 임시적으로 등급을 올렸으면 그 등급에 맞는 몸을 얼른 만들어야 하겠죠. 아시겠지만, 고등급 헌터로 넘어가려면 몸속 마나로드 한올 한올이 튼튼해져야 합니다. 보디빌더에게 근육을 만들라는 명령어가 호르몬이고 근육을 만들 재료가 단백질이듯, 각성제로 등급을 올린 후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몸을 만들 수 있게 단백질 역할을 하는 보충제를 섭취해 줘야 한다는 것이죠.”
누가 영업하는 사람 아니라고 다다다다 설명을 하는데 듣다 보니 대충 맞는 말 같았다.
“그래서 결론이 뭐죠?”
“마나로드 보충제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충제요?”
“네, 그럼요.”
직원은 언제 준비했는지 카달로그를 펼쳤다.
“요게 저희 회사에서 만드는 보충제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가끔씩 마나 각성제 마시고 꾸준히 보충제를 먹으면 보디빌더 몸이 되듯 헌터의 마나로드가 만들어진다는 뜻이었다.
천마 길드의 강 트레이너님이 갑자기 떠올랐다.
왠지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물론 강 트레이너님의 말처럼 약과 보충제에만 매달리면 안 되겠지만, 당장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여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기사들에게 각성제와 보충제를 먹여서 일정 수준을 상승시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보충제 100인분, 아니, 400인분 주세요.”
“감사합니다.”
폴더 인사를 하는 직원이었다.
“그런데 기간은…….”
“일단 일 년 치 정도 줘 보세요.”
“감사합니다.”
폴더 인사가 더욱 깊게 접혔다.
나는 직원을 보내고 난 후, 다시 성녀에게 용병 제안을 한 후 말을 걸어 보았다.
눈앞에 마정석이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마정석을 전부 받아올지 고민한 후 말을 걸었다.
[성녀님?]
[네.]
[마나 각성제의 효과가 어땠습니까?]
[정말 훌륭했어요. 최고예요.]
나는 성녀에게 쪽지를 보내며 화면으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성녀는 화면 너머의 나를 정확히 바라보았기 때문에 거의 화상채팅 하는 기분이었다.
성녀는 각성제에 정말로 만족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마음 나도 잘 알았다.
[그럼… 성녀님, 풍요와 대지의 신전 기사들에게 마나 각성제를 정기적으로 주는 건 어떻습니까? 아마 뛰어난 성취를 보일 겁니다.]
성녀의 눈이 더 커졌다.
[와,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성녀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분위기 좋았다.
[그리고 저희 세상에서는 보충제라는 것도 쓰이곤 합니다. 각성제가 일시적으로 마나를 상승시키는 것이라면 보충제는 기본적인 몸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마나를 유지할 몸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순간적인 마나량 상승은 말 신기루일 뿐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래서 꾸준히 보충제를 먹고 훈련하여 마나를 담을 수 있는 몸을 만들고, 가끔씩 각성제를 먹어 높은 경지를 체험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 세계에서 사용하는 경지 상승의 비법이지요.]
[아, 비법!]
좋아, 잘 넘어오고 있었다.
성녀니까 성녀에게 접합한 맞는 말로 제안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성녀님, 저는 말이죠. 신께서 말씀하신 변화에 대한 준비가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분명 신께서는 세상이 변할 테니 준비하라고 하셨죠?]
[네, 정확합니다.]
[기사단이 높은 단계로 강해지는 것만큼 정확한 준비가 또 있을까요? 저는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변화가 오던지 내가 강해지는 것 이외에 더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요? 어떤 변화인지 안다면 그것에 맞는 준비를 하겠지만, 어떤 변화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익스퍼트 중급 기사단이 익스퍼트 상급 기사단이 되는 것 이외에 더욱 철저한 준비가 또 있겠냐는 말입니다.]
좋았어, 내가 말해놓고도 말이 잘 나왔다.
[음… 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풍요와 대지의 기사단을 제가, 중급에서 상급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오오, 말씀만 들어도 든든하군요.]
[그런데 성녀님, 마나 각성제는 마정석을 원료로 합니다. 높은 등급의 각성제는 높은 등급의 마정석이 필요하죠. 리치의 마정석을 주시면 아까 드셔보신 것보다 훨씬 높은 등급의 각성제가 나올 겁니다.]
[아… 마정석이요. 조금 생각해볼 시간이 있을까요?]
어라? 살짝 한 발 빼는데?.
이럴 때는 상대가 고민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몰아쳐야 할 때였다.
[신께서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시간 여유가 있을까요? 당장 하늘에는 붉은 달이 떠 있습니다. 그리고 몬스터 신전은 우리를 습격했고, 우리는 또 죽음의 신전을 습격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신가요? 참고로 마정석을 각성제로 만드는 데도 시간이 제법 필요합니다. 얼른 만들어 먹어야 또 다른 신전을 쳐서 풍요와 대지의 신전이 신성교국의 제일 신전이 되어야죠. 신성교국의 연합장으로는 성녀님이 딱입니다.]
[…….]
[이게 다 신을 위한 겁니다.]
[알겠어요.]
나는 허공에 승리의 어퍼컷을 몇 방 날렸다.
내 말빨도 나쁘지 않았다.
[성녀님, 분명 풍요와 대지의 신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네, 그럴 거예요.]
몇 시간 후 성녀는 커다란 수레를 끌고 사무실로 넘어왔다.
씨익.
성녀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더 큰 미소로 답했다.
수레를 보니 알 수 있었다.
성녀는 큰손이었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