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준비
안톤은 눈앞에 보이는 장면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긍이 갔다.
샤론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샤론은 안톤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물건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당장 음식만 해도 샤론은 특별했다.
안톤은 예전에 먹어보았던 초코로 시작하는 음식을 떠올렸다.
검고 폭신한 빵 사이에 흰색 쫀득한 크림이 들어있던 음식이었다.
안톤은 나름 백작가의 상급 기사여서 고급 음식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 음식은 씹을 새도 없이 그저 입속에서 사르르 녹았었다.
맛있다는 감탄보다는 이건 뭐지? 어떻게 맛이 이럴 수가 있는 것이지? 이런 맛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었다.
샤론은 무기도 달랐다.
전투에서 발리스타를 이용해서 상대 기사를 잡을 때 안톤은 같은 기사로서 긴장감과 두려움을 느꼈으며, 만약 자신에게 발리스타의 대형 마법 화살이 날아온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얼마 후 대형 마법 화살이 다연발로 쏟아지는 모습을 보며 대응 방법을 고민하기보다는 그저 황당해했을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샤론은 사람도 달랐다.
안톤은 처음 샤샤를 보았을 때를 잊지 못했다.
샤샤는 어딘지 모르게 순박한 시골 소녀의 모습과 뛰어난 궁술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데 허공을 보며 뭐라 뭐라 하며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모습에서는 안톤은 저건 또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던 시골 소녀가 지금은 발키리가 따로 없게 달라졌다.
그리고 디아론 백작의 셋째 딸인 카나의 팔을 고쳤을 때는 안톤은 너무 놀라 말을 잊을 지경이었다.
안톤이 샤론에 대한 상념을 이어가는 동안 꾸얀과 르녹이 오우거에게 다가갔다.
“타앗!”
르녹은 상당히 덩치가 큼에도 불구하고 메뚜기처럼 몸을 가볍게 날려 오우거에게 달려들었다.
“르녹!”
그리고 그런 르녹을 꾸얀이 소리쳐 불렀다
화르르륵.
르녹은 바스타드 소드를 사용했다.
온몸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대검.
그런 대검에 연녹색 마나의 불길이 어렸다.
“아!”
상급 기사인 안톤은 저 불길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안톤은 르녹의 수준에 감탄했다.
저 커다란 검에 마나의 불꽃을 피울 수 있는 수준이라면 팬니르 대장과 싸워도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수준이었다.
콰직!
촤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르녹의 검은 오우거가 들고 있던 나무통을 가르고 오우거의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기다란 검상을 남겼다.
줄줄.
오우거의 몸에 피가 흘렀다.
오우거의 힘줄은 고급 활의 줄을 만드는 데 사용되고 오우거의 가죽은 방패로 사용하기도 했다.
오우거의 가죽으로 만든 신발은 찢어지지 않아 귀족가에 팔리는 명품이었다.
그런 오우거의 몸통이 단 한 번의 칼질로 갈라져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다음 차례는 꾸얀이었다.
“얍!”
르녹이 크게 한 방을 날렸다면 꾸얀은 오우거의 다리를 집중 공략했다.
푹푹.
꾸얀의 검이 오우거의 발목을 공격했다.
꾸얀의 검도 오우거의 다리를 뚫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오우거는 다리를 공격하는 꾸얀을 제지하려 했지만, 르녹이 다시 대검을 들고 점프를 해서 정면을 공격했다.
오우거는 르녹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크와와왁!”
애써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오우거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합공이었다.
안톤은 저 둘의 합공이라면 팬니르 대장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촤아악!
푹푹.
쿵!
오우거가 쓰러졌다.
“끄아악!”
그리고 곧 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안톤은 이렇게 빨리 오우거가 잡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분명히 꾸얀과 르녹의 수준을 알고 있었는데, 짧은 시간 사이에 놀라운 실력 상승을 보인 둘이 놀라웠다.
둘을 보며 놀란 건 안톤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다른 기사들도 멍하니 꾸얀과 르녹 그리고 이제는 사체가 되어버린 오우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오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오크들도 제자리에서 멈춰 오우거 사체와 오우거를 그렇게 만든 둘을 바라보았다.
“크아아악!”
갑자기 르녹이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오크들도 소리를 질렀다.
“취이익!”
그러더니 오크들이 산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우거를 피해 산 아래 마을로 도망 온 오크들은 오우거를 가볍게 잡는 기사들을 보자, 다시 기사들을 피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안톤은 이제 머리가 아파옴을 느꼈다.
오크는 저렇게 달아나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오크는 원래 성질이 더러워서 자신이 불리해도 덤비는 몬스터였다.
오우거와 오크는 워낙 포식자와 피식자의 차이가 확실해서 오크들이 달아나는 것이지, 인간을 피해 달아나는 몬스터는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고함 소리로 오크를 물리치다니 황당한 일이었다.
어느새 몬스터는 사라지고 기사들만 남았다.
안톤은 꾸얀과 르녹에게 다가가 감사를 표했다.
“꾸얀, 르녹 님. 이렇게 도와주어 감사합니다.”
“헤헤. 안톤 님, 괜찮습니다. 이웃 영지끼리 서로 도와야지요.”
르녹이 헤실거리며 대답을 했다.
그런데 꾸얀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꾸얀은 인상을 쓴 채 오우거의 사체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런 꾸얀을 보며 르녹이 물었다.
“왜?”
“음…….”
꾸얀이 인상을 쓰자 괜히 찔린 르녹이 물었다.
“왜 또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오우거를 잡은 건 잘하긴 했는데…….”
“했는데 왜? 내가 대검으로 오우거를 쫙 갈라버렸는데 왜?”
“그러니까 쫙하고 가죽이 갈라져 버렸다는 거지.”
“응?”
“르녹, 우리 영지의 특산품이 뭐야?”
“아!”
르녹이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그래. 우리 샤론의 특산품은 핫바와 가죽 제품이잖아. 성체 오우거 가죽이면 완전 상등품인데 이거 뱃가죽을 대각선으로 쫙 갈라놨네. 에고. 오우거 가죽이면 최상품이 될 수도 있었는데 어디 보자. 하나, 둘, 최상품 가방 세 개가 날아갔네.”
꾸얀은 오우거 뱃가죽을 만지작거리며 손대중으로 치수를 재었다.
“내가 아까 소리쳐 부르는데도 그냥 신나게 날아가서 몸통에 흠집을 쫙 내버리더라.”
영지 공장에 가죽을 넘겨야 함을 까먹은 르녹이 벅벅 머리를 긁으며 머쓱 해했다.
* * *
나는 꾸얀에게 그동안의 일들을 보고받았다.
붉은 달이 뜨고 샤론 마을의 함정으로 오크들이 내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밤나무 마을에는 오우거까지 내려왔다고 했다.
꾸얀과 르녹이 마나 각성제 덕분에 오우거를 가볍게 해치웠다고 했지만, 나는 샤론이 충분히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러다 붉은 달이 하나 더 뜨고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예전에 미뤄두었던 공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 책상과 서랍을 뒤졌다.
“어디다 뒀더라. 여기 있다.”
사무실 한켠에 꽂아두었던 벙커 업체의 카달로그를 다시 꺼냈다.
나는 벙커 업체에 연락했다.
“여보세요? 네, 벙커를 만들고 싶어서 전화 드렸어요. 여기요? 샤론 길드예요. 저요? 저는 길드장이고요.”
벙커 업체 실장이라는 분이 30분 만에 도착해 브리핑했다.
“일단 용병부터 가입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오우! 머릿속에서 소리가 들리는군요.”
“네, 실장님. 여기 화면을 보시죠.”
나는 벙커 업체의 실장님에게 샤론 영지를 보여주었다.
“오우, 아름다운 마을이군요. 어? 저건 뭐죠?”
내 조각상이었다.
“그냥 예술 작품입니다.”
“길드장님을 닮았네요.”
“아닙니다.”
“닮…담장이 멋진데요? 담장도 멋지고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네요. 산맥이 아주 멋집니다.”
역시 영업하시는 분답게 눈치도 빠르고 화제 전환도 부드러웠다.
중요한 건 예술 작품이 나와 닮았냐가 아니라 벙커를 나에게 팔 수 있느냐였다.
“저는 벙커가 여러 개가 있고 서로 연결되고 복잡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 동네가 저렇게 평화로워 보여도 몬스터가 매우 많은 곳입니다. 상위 몬스터가 나타나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벙커를 만들었으면 해요.”
나는 샤론 마을을 내려다보며 내가 원하는 구조와 위치, 깊이와 크기, 필요한 편의 시설 등을 이야기했다.
“일단 마을 인원은 약 400명이고, 성인과 아이가 반반 정도 됩니다. 남녀 성비도 비슷하고요. 그리고 후각이 뛰어난 몬스터도 많답니다. 그 점도 신경 써주세요.”
벙커 업체 실장님은 테블릿을 보여주며 설명을 했다.
앉은 자리에서 바로 3D 모형 샘플을 돌려가며 직관적으로 이해시켜 주었다.
“일단 소규모 벙커는 열 명 정도 들어가는 공간에 화장실 별도로 만들고 지하 1층 깊이로 파면 어디 보자… 한 2억이면 됩니다. 지상에 건물이 있으면 그 아래에 방 두 칸 정도 크기로 지하실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거주 공간과 화장실은 물론 분리되어 있고요, 공기 정화, 전파 통신을 할 수 있습니다.”
지하 1층이라는 말에 나는 S급 몬스터를 가정하자는 말을 했다.
“지하 1층으로 S급이 와도 버틸 수 있을까요?”
“S급이라… 사실 S급 정도의 몬스터라면 단순한 몬스터가 아닙니다. 인간 이상의 지능이 있을 수도 있죠. 몬스터의 종류에 따라서 어떤 벙커도 제 역할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정신계로 조작을 해버리면 무용지물이니까요. 단지 물리적인 능력만 있는 S급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러면 지하 5층은 되어야겠네요. 진도 8 이상의 내진설계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결과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와!”
놀라운 가격이 나왔지만, 나는 벙커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예전에도 벙커를 설치할까 말까 고민만 하고 미뤘었는데, 지금 또 미루면 언젠가 후회할 것만 같았다.
업체 실장님과 한참을 토의했다.
“여기서 함정을 만들어 이쪽으로 떨어뜨린다는 것이죠?”
“네, 여기서 화염 마법이 발동될 수 있게 설치를 하면 좋겠네요.”
“여기는 중력이상을 걸고 이곳에는 컨트롤 타워를 설치한다는 것이죠?”
토의하면 할수록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어느새 업체 실장님의 테블릿에는 베트남 전쟁의 베트공들이 숨어서 살았다는 비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 이쯤이면 됐다.
“진행해 주세요.”
샤론의 안전을 위한 벙커 공사를 의뢰한 다음 나는 헌터 마켓으로 쇼핑을 하러 갔다.
“어서 오세요. 마법 상회입니다.”
“네, 6서클 마법 좀 보려고 왔습니다.”
“본인이 쓰실 건가요?”
“아뇨, 선물용이에요.”
“선물 받으시는 분은 몇 서클인가요?”
“지금은 5서클인데, 마나량이 많고 최상급 마나 각성제를 쓸 거예요.”
“와, 최상급! 마법을 익히는 방식은 어떤 방식을 원하시나요? 마법 금속판, 피부 각인, 스킬북, 아이템 아니면 마법서?”
마법은 익히는 방법도 다양했다.
우선 마법진이 그려진 마법 금속판은 지금도 샤론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금속판에 6서클 마법을 각인한 다음 마나를 불어 넣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마법을 바로 사용할 수 있고 가격도 싸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알타르를 5서클로 올린 방법도 이 방법이었다.
하지만 금속판은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를 해결한 방법이 피부 각인이었다.
몸에 문신으로 마법진을 각인하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각인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외관상 비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스킬북은 강제 기억 방식이었다.
스킬북을 익히면 기억주입 마법에 의해 저절로 뇌리에 박혀 자연스럽게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가격이 비싸지만 가장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마법진을 무기나 보석류에 각인하는 아이템을 착용하거나 마법서에 적힌 마법을 공부해서 익히는 방법도 있었다.
“일단 아이템 쪽으로 생각 중이에요.”
“그러시군요. 마법의 종류는 여기 책을 보시면서 골라 보세요.”
6서클 마법의 종류가 나와 있는 카달로그를 받아 보았다.
공격 마법, 방어 마법, 치유, 버퍼, 제작, 정신계, 소환, 암흑, 공간계열 등 종류가 참 많았다.
6서클이면 지구에서도 A급 대우를 받았다.
글리제에서도 6서클은 마스터 바로 아래 등급이니까 디아론 백작가였다면 기사단장인 팬니르 정도의 대우를 받는 셈이었다.
“종류가 참 많네요.”
“그럼요. 6서클이면 마도사라고도 불리는데, 익히지 못할 마법이 없죠. 기네스북에는 6서클 마법사가 익힌 마법의 수가 1,300개가 넘는다고 해요.”
“와, 1,300개요?”
“그렇죠. 그런데 단지 할 수만 있느냐와 잘하느냐는 다른 문제죠. 대부분은 선택과 집중을 하죠.”
직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타르는 사용할 줄 아는 마법이 많았다.
왕년에 용병 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활 마법을 익혔다고 했다.
내 용병스킬 말고, 진짜 오리지날 용병 생활을 하려면 만능이 되어야 했을 것이었다.
나는 알타르의 성장 방향을 고민했다.
알타르는 공격 마법으로 파이어 레인을 썼다.
솔직히 화염계 마법사는 전투 시 가성비가 좋았다.
불처럼 적은 마나로 높은 공격력을 보여주는 게 없었다.
그래서 파이어 볼트나 파이어 볼을 못 쓰는 마법사가 거의 없었다.
뒤적뒤적.
카달로그를 뒤적이다가 제작 계열에 눈길이 갔다.
알타르는 샤론 영지에 있는 공장의 공장장이기도 했다.
공장장이면 제작 마법이었다.
그리고 카달로그를 넘겨보니 소환, 치유 등이 있었다.
소환이나 치유 마법은 일단 내가 있으니 제외했다.
암흑 마법도 내 신성력과 상극이니 제외고 공간 마법도 6서클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제대로 공간 마법 쓰려면 7서클은 되어야 했다.
솔로 플레이를 하며 잔뜩 짐을 들고 다니는 헌터가 작은 인벤토리라도 만들면 신세계를 경험하겠지만, 장갑차도 들어가는 선물함 놔두고 어설픈 공간마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가장 기본이 되는 공격 마법, 아니면 공격은 소환수들이 있으니 집단전에서 도움이 되는 버퍼 마법, 그것도 아니면 공장장이니까 제작 마법 정도를 골라 보았다.
내가 고민하며 인상을 쓰고 있자 직원이 물었다.
“어떤 점이 고민이신가요?”
“공격 마법을 줄까, 버퍼 마법을 줄까 아니면 제작 마법을 줄까 고민이에요.”
충분히 생각하고 고르라며 나에게 시간을 준 직원은 문득 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샤론 길드장님 아니세요?”
“어? 저 아세요?”
“네, 저희가 이 바닥 정보는 또 빠삭하게 알아야 하니까요.”
“그러시구나.”
“그러면 방법이 있네요.”
“네?”
직원은 씩 웃으며 말했다.
“뭐 줄까 고민하시는 거죠?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무려 길드장님께서 선물하시는 건데 다 사시면 되죠. 샤론 길드 이름으로 구매하시면 할부도 해 드립니다.”
“아.”
다 사라고?
왜일까?
분명 뻔히 보이는 영업인데 마음에 드는 멘트였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