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각성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반가운 마음이 들면 버선발로 뛰어나간다던가?
내 몸도 저절로 움직여 마중을 나갔다.
깔끔한 회색 정장을 입은 남성분이 커다란 상자를 수레에 실어 끌고 왔다.
“금세 만들었네요. 감사합니다.”
“아니요. 저희가 더 감사하죠. 이렇게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도록 저희 업체를 선택하시고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업체에서 나온 직원이 상자를 열어보았다.
액체가 담긴 투명한 유리병이 많이 있었다.
“우선 여기 붉은색 액체가 최상급 마나 각성제입니다. 모두 다섯 병입니다.”
그냥 마나 각성제도 아니고 최상급 마나 각성제였다.
최상급 마나 각성제는 S급 몬스터의 마정석을 재료로 만들어졌다.
말이 S급 몬스터의 마정석이지, S급 몬스터의 마정석은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나는 중국에서 데빌 페어리를 잡는 데 포함되었고, 일본에서는 화룡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마정석의 부스러기도 얻을 수 없었다.
그저 돈을 받았을 뿐이었다.
S급 마정석은 돈이 있다고 해도 일개 B급 헌터가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지구에서는 그랬었다.
하지만 샤론에서 나는 일개 헌터가 아니었다.
나는 한 지역의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갖고 있으며, 마을에 내 모습이 커다랗게 조각되어 있는 영주였다.
솔직히 하늘에서 내 모습의 조각상을 볼 때면 많이 민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S급 마정석을 이용해 만든 최상급 마나 각성제를 받아보니 새삼 그 신분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받은 최상급 마나 각성제는 드레이크 퀸의 마정석을 재료로 만든 각성제였다.
붉은색 액체가 담긴 최상급 마나 각성제를 들어보았다.
형광등 불빛이 비쳐서 찰랑거리며 반짝였다.
“이건 어떻게 섭취해야 하나요?”
“마나 각성제는 자신의 단계 이상의 마나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물건입니다. 마법사라면 한 서클 이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사들도 마나에 있어서는 한 단계 이상의 등급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속 마나에 집중할 수 있고 올라간 서클이나 등급을 연습해볼 수 있는 장소에서 섭취하는 편이 좋습니다. 또한, 섭취자를 지도하거나 단계를 이끌어줄 수 있는 지도자가 있으면 더 좋습니다.”
나는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을 때 이것을 마셔야 할지 고민해 보았다.
“어떤 분들은 마나 각성제를 실전용으로 사용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네?”
“마나 각성제를 마시면 일시적으로 경지가 상승하고 스킬 활용이 좋아지고 마나가 급상승하니까 평상시 잡지 못했던 몬스터도 잡을 수 있게 해주거든요.”
“아…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그렇죠. 하지만 저는 안전한 방법을 권해드립니다. 일시적으로 강해지긴 하지만 안정적인 환경에서 경험해 보는 것이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그 아래 주황색 병들은 상급 마나 각성제입니다. 오늘 일차로 스무 병을 가져왔는데, 앞으로 팔십 병을 더 가져와서 총 백 병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그 아래 노란색 병들은 중급 마나 각성제입니다. 오늘 백 병을 가져왔고 앞으로 사백 병을 더 가져오겠습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사실 중급 마나 각성제만 해도 상당히 비싼 것이었다.
지금은 상급과 최상급이 있으니까 이렇게 바닥에 깔려있지, 일반 헌터마켓에만 가도 고급스러운 병에 금테를 두르고 진열장 안에 잠금장치로 보관되는 녀석이었다.
내가 단순한 B급 헌터 일만 했다면 중급 마나 각성제 하나를 사려고 해도 몇 달 치 모은 돈을 써야 했을 것 같았다.
직원이 돌아가고 난 후 나는 알타르를 불러보았다.
“스승님, 부르셨습니까?”
“풍요와 대지의 신전에서는 뭐래요? 라이칸스롭을 우리가 싹 잡아 주었잖아요. 혹시 성물은 안 준대요?”
알타르는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음… 아직 준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녀가 보기에는 아직 성물의 가치만큼 저희가 도움을 주지는 않은 것으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도 함께 턱을 긁었다.
“하긴 그러네요. 라이칸스롭 300마리 잡는 것과 성물의 가치를 비교한다면 성물 쪽이 더 무게감이 있어 보이긴 하네요. 그러면 한 3천마리는 잡아야 하려나요?”
“음… 제가 성녀님과 말씀을 나눠 볼 때는 적을 많이 죽이는 것도 좋지만 뭔가 변화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아, 변화! 하긴 신의 말씀에 변화를 대비하라고 했죠.”
그런데 변화를 어떻게 대비하라는 건가?
무기를 줄까?
식량을 줄까?
뭘 알아야 그것에 맞춤식으로 대응을 하지 그냥 변화에 대비하라고 하면 개개인의 능력을 키워놓는 수밖에 없었다.
천마 길드의 강트레이너님을 용병으로 삼아서 파견을 보낼까?
아마 체력은 확실하게 늘 것이었다.
아니면…
문득 시선이 아직 내 앞에 놓인 박스를 향했다.
설마… 신이 이걸 달라는 건가?
내가 마나 각성제를 만들어서 효과를 볼 생각을 하는 것을 신이 미리 알았던 건가?
설마… 아니겠지?
신이 나 같은 헌터 삥을 뜯으려고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알타르 님.”
“네, 스승님.”
“아끼다 똥 될 것 같아요.”
“네?”
“아니면 죽 쒀서 신 주던가요.”
“예?”
나는 최상급 마나 각성제를 한 병 들어서 뚜껑을 깠다.
딸깍.
화악~
“와!”
나도 마나를 느낄 수 있는 헌터였다.
이건 정말 오리지날 레알이었다.
“알타르 님, 이거 향이 아주 죽이네요.”
“마나의 향기가 아주 짙습니다. 글리제의 세상에서도 이렇게 짙은 마나 향기는 맡기 어렵습니다.”
“최상급이 다섯 병이 있으니까 저, 소환수 셋 그리고 알타르 님까지 마시면 되겠어요.”
“네?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알타르는 괜찮다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거 원래 마법사들이 주 고객이에요. 기사들이 마셔도 좋지만 마법사들이 마시면 아주 그냥 난리 나요. 6서클 싫어요?”
“6…”
알타르는 6서클이라는 말에 잠시 대답을 못 했다.
서클 올리기 싫은 마법사가 어디에 있으랴.
만년 4서클이던 알타를 5서클로 올려 준 게 나였다.
다들 벽에 막혀서 못 올라가는 서클을 일단 한번 올려주는 것이 마나 각성제였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었다.
그 어려운 처음을 올라가게 해주는 것이 마나 각성제였다.
“일단 지금 제가 먼저 마셔볼게요. 호위 좀 서주세요. 그리고 알타르 님은 마시고 나서 바로 6서클 마법 써봐야 하잖아요. 마법서 구매하고 나서 드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한 손에 든 병 속 빨간 액체를 바라보았다.
“후우.”
숨을 한번 깊게 쉬고 입에 털어 넣었다.
꿀꺽꿀꺽.
짜릿했다.
높은 도수의 술을 마신 것처럼 내 식도 어디까지 각성제가 들어가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후끈.
몸이 더웠다.
“몸속에서 마나를 돌려보세요.”
귓가에 들려오는 알타르의 조언에 나는 마나를 몸 곳곳으로 움직여 보았다.
마나가 흘러가는 부위가 빵빵하게 팽창하는 느낌이 들다가 마나가 다른 부위로 움직이면 다시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오른발, 단전, 왼발, 다시 단전, 몸통을 한 바퀴 회전해 양쪽 팔과 머리 위까지 마나를 돌려보았다.
한번, 두 번, 세 번….
몸을 쥐었다 놨다 하며 꽉 차는 느낌과 시원한 느낌이 번갈아 오갔다.
그 느낌에 중독되어 눈을 감고 한참을 마나를 돌렸다.
‘띠링!’
머릿속에서 알림이 들렸다.
―잠시 동안 레벨이 50 증가합니다.
―잠시 동안 모든 스킬 레벨이 두 단계 상승합니다.
내 레벨이 지금 68레벨이었다.
그런데 잠시였지만 레벨이 50이 오르면 백 레벨을 훌쩍 넘어버리는 경지였다.
그 정도면 등급으로는 A+ 은 될 것 같았다.
“이제 스킬을 써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힐.”
사아아악.
손끝에서 힐 스킬이 방출되었다.
힐 스킬은 워낙 많이 사용해봐서 알 수 있었다.
방금 나간 힐은 정말 고위급 사제의 힐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힐이 이 정도라니.
하긴 잠시 동안은 A+급 힐러의 힐이었다.
“디바인 홀리 큐어.”
“디바인 프로텍션.”
“바인드”
그리고 나의 정체성이기도 한 스킬을 외쳐보았다.
“얘들아, 소환!”
어라?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지금까지의 소환은 내가 소환을 외치면 알파가 소환수들에게 의견을 묻고 소환수들이 동의하면 소환되었다.
물론 내가 소환을 외치면 거의 자동으로 동의했기 때문에 별다른 시간 지연 없이 소환이 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소환은 의견을 묻고 절차를 밟는 과정이 아니었다.
뭐랄까?
그냥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손을 빼는 느낌이었다.
원래 내 손을 꺼내듯, 의식하지 않아도 몸의 일부분은 나와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화아악.
샤샤, 제리, 카나가 소환되었다.
“어?”
“냥?”
소환수들도 뭔가 달라짐을 느낀 것 같았다.
제리가 물었다.
“이 느낌 뭐냥?”
내가 제리를 보며 씨익 웃었다.
“왜? 느낌이 어떻길래?”
“그냥 민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당. 왠지는 몰라도 뒤돌아서도 알 수 있을 것 같당.”
“나도 그래. 나도 너희가 느껴져. 나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소환수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너희와 뭔가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야. 나 이제야 소환이 뭔지 알게 된 것 같아.”
“민준 님, 축하드려요. 한 단계 성장하신 것 같아요.”
“그래. 민준 축하해. 나도 네가 느껴져. 와, 이거 이러면 소환술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달려가지 않을 수 없겠는걸.”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경지에 올랐냥?”
“응, 약빨이야.”
아쉽고 섭섭했다.
이런 경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약빨이 끝나면 소환수들과 연결된 느낌이 지워질 거라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내 수준보다 높은 어떤 경지가 있다는 것을 직접 느껴봤다.
이제 오늘의 느낌이 목표가 되어 힘껏 훈련하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얘들아 우리 같이 대련할까?”
앞마당에 나와서 연습으로 대련을 하려했다.
그러다 제리와 눈이 마주쳤다.
“제리, 일 대 일 한판?”
원거리 화살을 쏘는 샤샤와 싸우기도 좀 그렇고 카나를 꺾으려면 강한 힘을 써야 했다.
제리와는 빠르게 치고받는 대련의 묘미가 가장 클 것 같았다.
“냥, 나를 운동 천재라고 불렀던 것 잊었냥?”
“크크크, 제리야. 아무리 최고의 운동 선수라고 해도 약빤 선수한테는 안 되거든?”
그렇게 제리와 일 대 일을 시작했다.
휙, 휙, 휙.
민첩한 제리가 빠르게 발톱을 날렸다.
대련이다 보니 발톱에 마나를 씌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몸속 마나를 운용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제리는 날카로운 양쪽 앞발을 빠르게 움직였고 고양이는 액체라는 이론처럼 말도 안 되는 각도로 몸을 움직였다.
쉭, 쉭, 쉭.
제리의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파바바박
나의 주먹이 제리를 향했다.
쾅쾅쾅.
나는 제리의 발톱을 피했고, 제리는 내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막아야만 했다.
“냥.”
“하하하, 제리야 이번 판은 내가 이길 것 같은데?”
“냥!”
제리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주위를 눈으로 둘러보았지만 없었다.
투명제리였다.
하지만 나는 제리가 어디 있는지 느껴졌다.
슉.
뒤에서 날아오는 발톱을 머리를 옆으로 제껴서 피한 다음 찔러들어온 팔을 그대로 잡아 업어치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각도로 팔을 틀어 착지하는 제리였다.
내가 제리의 한쪽 팔을 잡고 있었고 둘 다 씨름하듯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제리와 눈을 마주쳤다.
씨익.
“바인드, 바인드, 바인드, 바인드.”
“냥!”
제리가 바인드에 묶여 꽁꽁 감싸졌다.
태어날 때부터 동물 그 자체인 운동 천재 투명 제리를 힐러 겸 소환술사인 내가 이기다니 기적이었다.
50렙 정도 올리면 나도 일 대 일로 제리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이 대 이, 알타르를 껴서 삼 대 이로 겨뤄보기도 했다.
나는 약빨이 떨어질 때까지 대련을 즐겼다.
* * *
“막아!”
“마을 주민들을 보호해!”
“오른쪽!”
밤나무 마을을 지키고 있던 디아론의 기사인 안톤은 갑자기 들이닥친 몬스터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우거다!”
기사들은 수가 제법 되었지만, 마을 주민들을 보호하며 싸워야 했고 몬스터가 내려오는 범위가 넓어서 한 곳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붉은 달이 뜨고 이틀이 지났지만 붉은 달은 머리 위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냥 떠 있는 붉은 달은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했고 몬스터들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몬스터 웨이브 정도는 아니었지만, 밤나무 마을로 오크들이 백여 마리 정도가 몰려왔다.
기사단이 밤나무 마을에 주둔하고 있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안톤은 기사단을 지휘하여 마을 주민을 보호하며 오크의 절반 정도를 해결했다.
그때 오우거가 나타났다.
거대한 나무를 뿌리째 뽑아 막대기처럼 들고 오는 오우거.
아무래도 저 오우거로부터 달아나고자 오크들이 밀려왔던 것 같았다.
“제길”
안톤은 일 대 일로 오우거와 싸울 자신은 없었다.
팬니르 대장은 없고, 기사단의 절반은 마을 주민들을 보호해야 했다.
애초에 절반만 출동했던 기사단원은 다시 그 절반만으로 오우거와 오크 무리를 대적해야 했다.
안톤은 부담감이 심했다.
오우거가 대형을 짜고 있던 기사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대형의 중심을 향해 손에 들고 있던 대형 통나무를 내려찍었다.
“쾅!”
“크윽.”
기사들이 동심원 모양으로 피하며 대형이 흩어졌다.
똘똘 뭉쳐서 싸워도 될까 말까였는데 무너진 대형에 안톤의 수심이 깊어졌다.
그때였다.
치치치칙
―거의 다 왔습니다.
샤론에서 지원군이 온다는 무전이 도착했다.
휙.
잠시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 명이었다.
안톤도 샤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나타난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기사 꾸얀과 르녹이었다.
꾸얀과 르녹은 나름 훌륭한 기사였다.
하지만 안톤은 꾸얀과 르녹이 잘해봐야 자신과 동수라고 생각했다.
안톤은 저 둘이 도와주러 왔다고 해서 오우거를 상대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꾸얀과 르녹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투명한 유리병에서 주황색 액체를 마셨는데 혹시라도 남은 액체가 있을까 봐 탈탈 털어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나서는 저벅저벅 이쪽으로 걸어왔다.
오우거도 기사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걸어오는 꾸얀과 르녹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저들도 오우거를 보고 있을 텐데 걸음걸이에 자신감이 넘쳐 보았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