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힐러
하얗게 서리가 낀 채로 얼어붙은 켄타우로스가 누워있었다.
용암에서 올라온 화룡을 얼리느라 노승민 헌터의 로봇 켄타우로스까지 얼어붙었다.
불 계열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법사들이 얼른 노승민 헌터를 녹여주었다.
켄타우로스가 어느 정도 녹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하나씩 몸을 분해하여 아공간으로 들여보냈다.
기잉. 철컥. 철컥.
마지막 덩어리까지 들어가자 손가락을 호호 불며 노승민 헌터가 나왔다.
“아리가또!”
일본 헌터들이 여기저기서 노승민 헌터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다.
스케이트를 타도될 것 같은 얼음벌판 위에서 90도 인사를 건네는 일본 헌터들을 보니 인사성 하나는 기가 막힌 것 같았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마나가 소진되셨거나 육체적으로 다치신 분이 있는지 점검해 주시기 바랍니다. 화룡의 사체는 일본 수거팀에서 수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디캠에 있는 영상을 바탕으로 공평하고 섭섭하지 않게 보상해드리겠습니다. 또한 고생하신 모든 헌터님들을 위한 일정이 준비되어 있으니 참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려 삼백이 넘는 헌터들이었다.
몬스터 레이드는 공헌도를 따지기 때문에 공헌도 계산만도 한참 걸릴 것 같았다.
내 공헌도는 어느 정도일까?
어그로 핑퐁과 용암 끄기, 켄타우로스와 화룡을 함께 얼린 채 켄타우로스만 꺼낸다는 작전도 소환이 없었다면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공헌도를 너무 세세히 따지면 서로 기분이 상하기 때문에 보통은 기본 공헌도 + 가중치를 주곤 했다.
내 가중치는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국 헌터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그곳으로 노승민 헌터가 다가왔다.
“민준 헌터님, 감사합니다.”
“아, 감사라뇨. 노승민 헌터야 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설마 숨을 참고 계신 건 아니었죠?”
“하하, 그럼요. 로봇 안에 생명유지 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달에 가서도 지낼 수 있을 정도랍니다.”
“가보셨어요?”
“하하, 아니요.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일본 측에서 한국 헌터만을 위한 호텔을 마련했답니다. 저는 몇 번 가본 곳인데, 도쿄에서 멀지도 않고 온천이 아주 잘 되어 있는 곳입니다. 바로 한국으로 안 가실 거면 며칠 관광도 하다가 가시죠?”
일본에 와서 온천이라니!
이건 못 참지.
“완전 좋은데요!”
다섯 시간 후, 나는 뜨끈한 온천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야외 온천이라 몸은 뜨끈한데 얼굴은 살짝 찬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화룡을 잡은 후, 숙소 배정도 받고 밥도 실컷 먹었다.
온천에 몸을 담가 등 따시고 배부르니 잠이 솔솔 왔다.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 수중 호흡 스킬 같은 게 있으면 물속에 폭 잠겨서 잠들어 버릴 텐데 그게 살짝 아쉬웠다.
“민준 헌터님.”
저편에서 윗옷을 벗고 반바지 차림에 흰색 수건으로 양머리를 만든 노승민 헌터가 걸어왔다.
“아 예, 어서 오세요.”
노승민 헌터가 물속으로 들어왔다.
“앗, 뜨거라!”
나는 그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S급 헌터도 온천물이 뜨겁나요?”
“그럼요. 뜨거워도 화상을 입지 않는 것이지 뜨거움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죠. 오히려 감각은 일반인보다 더 예민하잖아요. 그리고 저는 다른 육체형들만큼 튼튼하지는 않답니다.”
“에이, 그래도 S급인데.”
“순수 육체만 보면 A급이랑 비슷해요.”
노승민 헌터가 내 얼굴을 지긋이 보았다.
“얼굴이 조금 붉어지셨는데 더우신가요?”
덥긴 더웠다.
“네, 더운데 나가고 싶지는 않네요. 바람이 조금 더 불었으면 좋겠는데.”
“그래요?”
내 말을 들은 노승민 헌터가 아공간을 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휘이이이잉!
“휴대용 에어컨이에요.”
“오오! 시원해요.”
몸은 뜨겁고 얼굴은 차가우니 더 좋았다.
물속에 몸을 잠그고 머리만 나온 노승민 헌터가 말했다.
“민준 헌터님. 천마랑만 어울리시지 말고 저희와도 협업하시죠.”
“네?”
“이번 화룡 레이드를 겪고 나서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왜 차지율 헌터가 민준 헌터님과 지분 교환을 했는지를 말이죠. 물속에서 화룡과 레슬링을 하면서 점점 얼어가는데, 민준 헌터님의 힐이 따박따박 들어오더라고요. 화룡을 껴안고 얼어가고 있을 때, 힐이 들어오니 그렇게 안심이 될 수 없더라고요.”
“아…….”
“제가 지분이 별로 없어서 천마처럼 지분 교환을 하자고 말씀은 못 드리지만, 솔직히 천마 지분 5% 해봤자 얼마 안 되잖아요. 시가총액 얼마 되지도 않는 길드 5%보다는 저희와 어울리시면 아주 흡족하게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정치인들도 사우나에서 헐벗은 상태로 툭 까놓고 이야기한다 해서 사우나 정치라는데, 웃통을 까고 천마랑 놀지 말고 자기랑 놀자는 말을 하니 이게 정말 정치인가 싶었다.
천마 길드를 보며 얼마 안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솔직히 프로는 돈으로 증명하는 것이죠. 꼭 많은 돈이 필요해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에서 금액은 곧 가치의 증명이죠. 저랑 다니시면 얼마를 원하시던 그 이상을 받으실 겁니다.”
“저는 B급인데 과분하네요.”
“하하, 그러지 마시고 로봇 소환수 하나 키워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네?”
뜨억!
이건 정말 흔들렸다.
로봇 소환수?
나도 10m짜리 켄타우로스를 받을 수 있는 거야?
“정말이에요?”
“물론이죠. 요즘은 로봇도 꽤 지능이 높답니다. 아니면 저처럼 직접 로봇을 움직여도 되고, 이미 소환수가 계시니 로봇의 내부에서 조종해도 되지요. 보니까 소환수들이 다 아공간을 갖고 있던데 저처럼 보관하고 사용하고 하면 되겠네요.”
정말 흔들리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천마와 오성 중에서 꼭 한쪽을 골라야 하는 건가요? 다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건가요?”
“하하하, 물론 됩니다. 저도 차지율 헌터와 사이가 나쁘지 않아요. 다만 저는 샤론과 저희가 앞으로 교류를 잘했으면 해서 드리는 말이었어요.”
“네, 그렇군요.”
“일단, 한국에 돌아가시면 던전에서 타고 다닐만한 차 한 대 보내드릴게요.”
“차요?”
“네.”
노승민은 자본주로 나를 유혹하고는 다시 뜨거운 온천물을 즐겼다.
나도 하늘을 보고 기대어 누워 찰랑이는 온천물을 뒤통수로 느끼며 하늘을 보았다.
도쿄의 하늘도 서울처럼 별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두세 개 정도 별이 보였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상쾌했다.
* * *
내가 그렇게 온천에 누워 뜨끈함을 즐길 시간 동안 언론에서는 난리가 났다.
여동생 민아와 민아 친구 가영이는 기사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아야, 이것 좀 봐.”
가영이가 가리킨 화면에는 일본의 S급 몬스터 레이드에 관한 기사가 줄줄이 있었다.
[오성의 기갑 전사 화룡의 불을 끄다.]
[일본 S급 몬스터 잡은 한국 S급.]
기사들은 이렇게 오성의 노승민 헌터에게 초점을 맞춘 기사가 절반쯤 되었지만, 또 절반은 느낌이 달랐다.
[오성과 샤론 일본 S급 레이드하다.]
[샤론의 소환술 그 효용가치는?]
[S급 몬스터를 가지고 노는 B급 헌터?]
가영이는 그중에서 ‘S급 몬스터를 가지고 노는 B급 헌터’라는 제목의 기사를 클릭했다.
[어제 오후 4시 무렵 일본의 S급 몬스터 화룡 레이드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화룡은 지난주에 여러 번 발생한 일본의 지진의 원인이며, 일본의 S급 헌터 세 명이 포함된 레이드에서도 실패한 몬스터였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등에 도움 요청을 하였으며,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오성의 S급 노승민 헌터와 샤론의 B급 김민준 헌터 등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모두들 S급 노승민 헌터에 주목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B급 김민준 헌터였다.
김민준 헌터는 소환 스킬을 이용해 일명 ‘어그로 핑퐁’을 가능케 하였다.
어그로 핑퐁이란 마치 탁구처럼 한쪽에서 몬스터를 공격해 몬스터가 이에 반응하면 사라지고, 반대편에서 몬스터를 공격하는 행위를 반복해서 몬스터가 이쪽저쪽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전술이다.
또한 화룡은 지표면으로 용암을 분출하게 했는데 용암 위의 화룡은 체력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김민준 헌터는 물을 소환하여 용암을 꺼버리는 두뇌 플레이 또한 보여주었다.
이처럼 샤론의…….]
인터넷 댓글들도 난리였다.
└ㅋㅋㅋㅋ B급이 S급을 가지고 놀았대.
└제목이 딱히 틀린 이야기도 아닌 듯. 어그로 핑퐁을 했으면 갖고 놀았다고 써도 됨.
└소환술 장난 아니네. 어그로 관리도 하고, 물도 소환하고.
└용암도 끄는데 앞으로 가뭄 걱정 안 해도 됨?
└물값은 내야겠지.
└저거 도쿄 앞바다에서 퍼온 바닷물이래.
└바닷물을 소환한 거구나.
└그럼 한강 물 소환하면 되지.
└막판에 얼어붙은 기갑 전사 소환한 부분에서 완전 감동.
└기갑도 소환 믿고 아래 들어가서 싸운 것 같은데.
└B급이어도 스킬의 효용에 따라 전투에 도움이 되는 정도가 완전 다르네.
“너희 오빠 장난 아니다.”
가영의 칭찬에 민아도 싫지는 않은 듯했다.
“제법이긴 하네.”
지이이잉.
그때 민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힐끔 보니 모르는 번호여서 받지 않자 곧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헌터저널의 손요한 기자라고 합니다. 민아 님의 오빠이신 김민준 헌터님과 관련하여 연락을 드렸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기자의 연락이었다.
민아는 자신의 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연락을 했을까 궁금했다.
지이이잉.
[민아야, 나 지유. 너희 오빠 일본에서 대단했나 보더라. 요즘 어떻게 지내?]
[민아야, 나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나라인데, 오랜만이야.]
[안녕, 나 유치원 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민아는 자신의 인맥이 이렇게 많았나 새삼 깨달았다.
* * *
다음 날 아침, 일본식 호텔 조식 뷔페를 먹으러 갔다.
입구에서 안내하는 직원이 일본인답게 인사를 했다.
직원은 어색했지만, 조금은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아녀하세요. 혼자시가요? 자리가…….”
“아니요. 일곱이요.”
“아, 그러시무면 이쪼그 자리로.”
나는 자리로 걸어갔다.
“알파야, 다 소환.”
샤샤, 제리, 카나, 알타르, 르녹, 꾸얀이 소환되었다.
함께 싸우고 혼자만 먹어서야 되나.
일본 호텔의 조식은 한국과 큰 차이는 없었다.
샤샤가 음식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뭔가요?”
샤샤는 한국 사람이 다 되었는데 뭘 모르나 싶어서 바라보니 낫토였다.
“아, 그건 낫토라고 일본 청국장 비슷한 거야. 그냥 먹어도 돼.”
“그래요?”
“어,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좋아하지는 않고, 호불호가 갈려. 도전?”
내 눈빛을 받은 샤샤가 외쳤다.
“도전!”
샤샤가 낫토를 접시 위에 담았다.
어라?
나와 샤샤가 대화를 하다가 샤샤가 접시에 낫토를 담으니 카나도, 알타르, 르녹, 꾸얀도 낫토를 담기 시작했다.
“샤샤 님이 도전하시는데, 저희가 뺄 수는 없죠.”
어? 이게 아닌데.
“별맛은 없는데 밋밋하고 끈적이고 미끈거리네요.”
“옆에 날달걀이 있어서 같이 넣었더니 꼭 슬라임 씹는 기분이에요.”
그 모습을 보며 제리가 씨익 웃으며 생선 가시를 바르고 있었다.
제리의 식판에 낫토는 없었다.
배부르게 아침을 먹고 샤론 팀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관광하고 싶다고 하니 승합차가 바로 준비되었다.
“안녕하세요.”
서비스 좋게 통역도 준비되었다.
긴자 거리를 걸어보고, 애니메이션 거리라는 곳도 가보았다.
인간형으로 변한 제리가 걷고 있었는데 만화 캐릭터 분장을 한 학생들이 제리를 보며 스고이를 외쳤다.
지나가다 보니 화재의 흔적도 있었다.
무슨 신사라고 하는데, 이번 화룡이 난리를 칠 때 불에 탔다고 한다.
기왕 간 김에 이틀을 관광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도 화룡을 레이드해 주어서 고맙다는 행사가 있었지만, 한국에 들어오니 더 난리였다.
하지만 이미 중국에서의 경험이 있어서 이제는 능숙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이러다 기자들 없으면 섭섭해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스마트폰을 열어 밀렸던 문자들을 답장해주고 사무실에 왔다.
“어? 사장님 오셨어요.”
“이번에도 큰 건 하셨더라구요.”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네, 별일 없었죠?”
“사무실 일은 루틴대로 하면 되고 결재받을 건 올려두긴 했어요. 그런데 아침에 어떤 손님이 다녀가셨어요.”
“누군데요?”
“힐러 연합에서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자리에 뭘 적고 가셨어요.”
나는 내 자리에 올려진 명함을 보았다.
명함에는 힐러 연합 대표 홍경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명함을 들자 명함 아래 종이에 메모가 적혀 있었다.
[힐러 연합 대표입니다. 김민준 헌터님께 교황청을 대신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연락주세요.]
“교황청?”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