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켄타우로스
이어폰으로 지휘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룡 주변의 마나장 수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다들 물러나!”
“일단 공격하지 말고 뒤로 물러나.”
“보호막들 새로 입혀.”
지잉.
화룡이 뭔가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고, 화룡의 마나장 수치가 크게 증가한다는 말에 전방의 탱커들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마법사와 버퍼들이 전방의 탱커들에게 서둘러 보호막을 입혔다.
“페이즈 2는 뭐가 나오지?”
“몰라, 아직 경험해본 적 없어.”
땅에 네 발을 굳게 박은 화룡의 모습에 모두가 긴장했다.
거대화? 광폭화? 강한 범위공격?
지휘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아니었어도 화룡의 행동이 뭔가 달랐다.
마나장의 수치가 크게 올랐다니 뭐가 되었든 강력한 한 방이 날아올 것 같았다.
화룡이 가만히 있자 헌터들은 더욱 뒤로 물러났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다시 몇 분이 흘렀다.
“뭐지?”
“글쎄? 왜 가만히 있지?”
잔뜩 준비하고 있는데 공격이 날아오지 않자 조금은 이상해하고 있을 타이밍이었다.
드드드드!
“땅이 흔들린다!”
“제길, 땅을 통한 범위공격인가 봐!”
쿠쾅쾅쾅!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화룡이 있는 곳에서 헌터들이 있는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지면이 마구 갈라졌다.
그 와중에 상대적으로 순발력이 떨어지는 몇몇 헌터들이 휩쓸렸다.
“레비테이션!”
“리버스 그래비티!”
법사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을 피하거나 주변 헌터들을 도왔고, 나도 샤샤와 카나와 함께 몸을 피했는데 갈라진 지면 사이로 떨어지고 있는 헌터가 보였다.
“소환.”
파앗!
“예스, 예스, 예스.”
내 옆으로 바로 소환된 헌터가 계속 예스를 외치고 있었다.
띠링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예스를 외치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뭘요.”
“여기 한 명 빠졌어!”
저쪽에서 누가 빠졌다는 외침이 들렸다.
나도 얼른 가서 소환해주려 했는데 한국 헌터가 아니었다.
타국 헌터는 계약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았다.
다행히 약 10m 아래에서 검을 벽에 박아 버티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는 부글부글 마그마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부유 마법 가능한 법사 없습니까?”
떨어진 타인을 띄울 수 있는 마법사를 찾고 있었지만, 화룡이 일으킨 갈라짐의 범위가 넓어서 헌터들의 질서가 무너진 상황이었다.
“바인드.”
나는 바인드 마법을 외쳤다.
그동안의 훈련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스킬로 만들어진 끈은 내 손의 통제를 완전히 따르고 있었다.
주욱.
무려 10m 이상 늘어나는 줄.
덥석!
하늘에서 내린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는지 절벽 아래 헌터가 내가 내린 줄을 잡았다.
“읏차!”
매달렸던 이도 헌터인지라 약간의 도움만 있어도 충분했다.
지지할 끈이 있자 두 번의 당김 만으로 스스로 올라왔다.
“컵쿤나크랍!”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헌터가 대충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단검을 꽂아 벽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허리에 찬 완드를 보니 힐러나 버퍼 계열이라 순간적인 대응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주변에선 뭐 하는 거람? 버퍼와 힐러는 보호해줘야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느새 헌터 부대가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거 위험했다.
하나로 똘똘 뭉쳐도 시원찮을 판에 둘러 나뉘어져 있으면 각개격파를 당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은 나만 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화룡은 둘로 나뉜 헌터 무리 중 숫자가 적은 집단을 향해 날아갔다.
나와 반대쪽 무리였다.
[민준 헌터님, 어그로 끌러 한 번 더 가보겠습니다.]
[네, 민지혜 헌터님까지 두 분 용병 해두었어요.]
거대 켄타우로스는 어깨 위에 민지혜를 태우곤 화룡을 향해 뛰었다.
“블리자드!”
로봇 켄타우로스 위에서 전방으로 블리자드를 뿜어대는 모습은 고대 신화 속 모습 같았다.
“와, 내가 봐도 멋지네.”
하지만 화룡은 블리자드를 뿜어대는 로봇 켄타우로스를 상대하지 않고 수가 적은 헌터 집단을 집요하게 노렸다.
“저거 생각보다 똑똑한데? 어그로가 안 끌려.”
물러나며 수비를 하며 소규모 헌터 집단, 이를 계속 공격하는 화룡, 어그로를 끌어보려 하는 켄타우로스였다.
“민준, 내가 나가볼게.”
카나였다.
“카나?”
“지금 어그로가 안 끌리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
“나에게도 도발 스킬이 있잖아. 이거 한번 써보고 싶었어.”
카나에게도 도발 스킬이 있었다.
탑급 탱커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킬이 도발이다.
몬스터의 시선을 붙들어서 동료를 보호하는 스킬이다.
자신감 넘치는 카나의 시선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 번이라도 공격받으면 바로 소환인 거 알지?”
“한 번도 허용하지 않을게.”
카나가 손으로 방패를 탕탕 쳤다.
[노승민 헌터님, 제 소환수에게 도발 스킬이 있는데 함께 공격하면 어떨까 해요.]
[좋습니다. 얼른 보내주세요.]
“카나야, 저기 로봇 켄타우로스에게 말해 두었으니까 얼른 올라가 봐.”
끄덕.
카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달려 나갔다.
타다다닥.
지면이 엉망진창이었지만 A급 탱커인 카나에게 이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카나가 오고 있는 것을 아는지 로봇 켄타우로스가 오른쪽 뒷다리를 곧게 뻗어 몸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해주었다.
타다다닥.
카나가 켄타우로스의 몸 위를 타고 올라갔다.
왼쪽 어깨에는 민지혜, 오른쪽 어깨에는 카나를 태운 켄타우로스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블리자드!”
“도발!”
그리고 켄트우로드의 검격.
소수 헌터들을 노리던 화룡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 도발은 못 참지.
쉽게 참을 수 있었으면 도발이라고 하지 않았을 거고, 또 몬스터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도발을 참아내는 건 도를 닦는 수양이 깊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였다.
어그로가 잡힌 걸 확인하자 켄타우로스가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그사이 소수 헌터 집단 사이의 절벽 위로 거대 석벽이 놓였다.
일본 헌터의 스킬이었다.
헌터들은 다시 한쪽으로 모였고, 노승민 헌터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아니, 양쪽 어깨에 미녀를 올려둔 켄타우로스를 보니 그리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단 헌터 부대가 편제를 다시 갖추자 나는 켄타우로스를 소환해서 뒤로 물렸다.
갑자기 또 켄타우로스가 사라지자 화가 난듯한 화룡은 괜히 땅을 긁으며 화를 내었다.
그래도 지능이 있는지 화룡도 섣불리 다시 덤비지 않고 흐르는 용암 위에 자리를 잡았다.
뭐 하는 것이지?
―화룡의 체력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지휘부에서 화룡의 체력이 회복된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스카우터기를 이용해 분석하니 정확할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봐도 노승민 헌터에게 칼침 맞았던 부위가 서서히 낫고 있는 것 같았다.
저거 용암 위에서 싸우면 체력 무한이란 뜻이잖아.
저걸 어떻게 이겨?
이거 골 때렸다.
지난번 데빌 페어리는 공격기가 너무 세서 문제더니 얘는 체력 무한이라 당황스러웠다.
이걸 어쩌지?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지 헌터 부대원들이 술렁이는 것 같았다.
기껏 고생해서 어그로 핑퐁하면서 체력을 줄여 놨는데, 체력 회복이라니 이를 어찌해야 하나?
―저 용암을 먼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용암을 어떻게 하라고?
민지혜 헌터를 힐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민지혜에게도 조금은 무리인 듯했다.
“비라도 내리면 꺼지려나…….”
누군가 비를 기원했다.
비라…….
“샤샤, 카나야, 우리가 물을 뿌려볼까?”
조금은 당황하는 샤샤와 카나에게 작전을 설명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화룡은 느긋하게 용암 위에 올라타 체력을 충전하고 있었고, 그런 화룡을 공격해봐야 줄어드는 것은 헌터들의 마나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괜히 그러다 한 명씩이라도 잡히면 헌터 부대의 손해였다.
지금은 무리해서 들어갈 타이밍이 아니었다.
“노승민 헌터님, 조금 이따가 봬요.”
“네, 좋은 작전이 되길 빕니다.”
나는 전장을 이탈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지휘부는 나에게 바로 헬리콥터 한 대를 붙여주었다.
나는 지면 가까이 내려온 헬리콥터를 바인드로 잡아 올라탔다.
타다다다.
불과 몇 분만에 작전지역 전체가 보였다.
도쿄 바로 앞에는 바다가 있었다.
강렬한 헬기의 하강풍에 바다가 요동쳤다
하지만 나도 B급, 아니 등급 테스트를 다시 하면 A급이 나올지도 모르는 헌터였다.
과감하게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첨벙.
물속에 빠졌던 나는 곧 수면으로 올라왔다.
“푸우!”
“제리, 카나, 샤샤, 알타르, 르녹, 꾸얀 선물함 열기.”
눈앞에 여섯 개의 선물함이 보였다.
이 선물함에 선물을 넣으면 소환수와 용병들이 선물을 꺼낼 수 있었다.
“알파야, 선물함에다가 바닷물 계속 넣어.”
―알겠습니다.
선물함에 바닷물을 한가득 선물해주었다.
이 작전을 위해 카나와 샤샤는 샤론 영지에 들러 선물함을 비워두었다.
선물함 하나라도 보태기 위해 제리, 알타르, 르녹, 꾸얀도 소환했다.
민지혜 등의 다른 헌터들도 있었지만, 선물함 컨트롤이 익숙한 우리 기사들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일본의 화룡 레이드를 보고 있던 시민들은 잠깐의 전투 소강상태를 긴장하며 바라보았다.
“왜 안 싸우고 있는 거야?”
“글쎄, 지진이 난 다음이라 놀라서 그런가?”
“잠깐만 지금 해설이 나오잖아.”
해설에서는 화룡이 용암 위에서 체력을 회복하고 있어서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설명이 나오고 있었다.
“와, 저거 저 용암 위에서 체력 무한이란 거네?”
“저걸 어떻게 이겨?”
“그래서 헌터들도 공격을 못 하는 거였구나.”
“그럼 어째?”
화면 속의 용암은 서서히 흘러서 헌터 부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헌터 부대원들은 그 속도에 맞추어 뒤로 물러났다.
그때 우리의 로봇 켄타우로스가 홀로 앞으로 나아갔다.
쿵쿵.
묵직한 걸음걸이를 하며 홀로 앞으로 나가는 켄타우로스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왜?”
하지만 자세히 보니 켄타우로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여섯 명의 인원이 켄타우로스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켄타우로스가 마치 수문을 연 댐이 된 것처럼 물을 방류하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치이이이익.
물과 용암이 만나 거대한 수증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헬기의 화면으로는 자연재해에 대항하는 인간의 노력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무려 여섯 개의 수문에서 물이 쏟아져나왔다.
쏟아지는 물은 끝이 없었다.
사람들은 저렇게 많은 양의 물을 쏟아내는 스킬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했다.
물을 만들어내는 아쿠아 계열의 스킬은 흔하지만, 문제는 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화룡도 당황했는지 켄타우로스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켄타우로스는 뒤로 물러났고 그 사이에서 거대 나무와 석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물을 뿜는 켄타우로스를 지키는 것이 이 레이드의 키가 될 것임을 헌터들도 화룡도 직감하는 듯했다.
애초에 데빌 페이리처럼 극강의 공격력을 갖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체력 무한이라는 장점이 있었지만, 공격력은 S급 세 명이면 막아낼 만했다.
쏴아아아아.
물은 끝이 없었다.
수문이 열린 댐은 용암을 끄고 이제는 강물과 호수를 만들고 있었다.
갈라진 지면이 있던 곳에서는 이미 간헐천처럼 부글거리는 물만이 존재했다.
―반격하세요.
지휘부에서 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나는 내 소환수와 용병들에게는 뒤로 물러나라고 쪽지를 보냈다.
싸울 사람 많은데 괜히 다치면 안 되지.
타다다다다.
헬기가 머리 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민준 헌터님, 탑승하세요.
휘리릭.
착!
바인드를 이용해 헬기에 올랐다.
헬기에 오르자 TV 화면을 통해 상황을 보여주었다.
켄타우로스의 허리까지 오는 호수에서 켄타우로스와 화룡이 레슬링을 하고 있었다.
마치 물뱀과 말이 싸우는 것 같았다.
내가 쪽지를 보냈다.
[노승민 헌터님, 물속으로 들어가세요. 그리고 민지혜 헌터가 그 물을 얼려버리거나 일본 헌터들이 뚜껑으로 막아버리세요. 노승민 헌터님은 제가 소환으로 빼 드릴게요.]
[넵, 알겠습니다.]
즉석에서 짜낸 작전이었지만 노승민 헌터가 내 말을 잘 들어주었다.
S급 켄타우로스가 내 말을 잘 듣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뿌듯했다.
켄타우로스가 화룡을 꼭 껴안더니 두 손, 네 발로 화룡을 껴안고 좌로 누웠다.
물속에 잠긴 켄타우로스와 화룡.
그 위에서 민지혜가 수면을 얼리기 시작했다.
빙결 마법을 쓸 수 있는 법사들은 다 달려들어 물을 얼리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물이 얼기 시작했다.
[노승민 헌터님? 괜찮으세요?]
[네, 할만합니다.]
나는 꾸얀을 소환 취소해서 샤론으로 돌린 후 노승민 헌터에게 용병을 걸었다.
“디바인 홀리 큐어, 디바인 프로텍션, 힐, 힐, 힐.”
[오오, 체력이 오르네요. 감사합니다.]
화룡과 함께 얼음 속에 갇히면서도 보호막이 생기고 체력이 오르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쿵!
화룡의 꿈틀거림에 얼음이 절반쯤 깨졌다.
하지만 용암 위가 너의 영역이었듯 물속에서는 우리가 한 수 위였다.
“힐, 힐, 힐, 힐, 힐…….”
어느새 나는 헌터 부대로 복귀했고 샤론에 다녀온 카나는 수북하게 마나포션을 내 앞에 쌓아두었다.
꿀꺽꿀꺽.
“힐, 힐, 힐, 힐, 힐…….”
[노승민 헌터님, 어떻게 되어가요?]
이미 지표면은 대부분 얼음 호수였고, 그 한 가운데 거대 나무와 석판이 꽝꽝 언 채 호수 가운데 놓여 있었다.
[이제 놈도 거의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30분이 지났다.
“힐, 힐, 힐, 힐, 힐… 우욱.”
마나 포션을 먹다가 토해본 적이 있는가?
마나 포션을 하도 많이 마셔서 토할 것 같았지만 지금 얼음 밑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노승민 헌터의 체력을 올려줄 이는 나 뿐이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예! 잡았구나!
“소환!”
무언가를 껴안고 있는 자세 그대로 얼어붙은 켄타우로스가 소환되었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