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법칙
나는 차지율 헌터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협회장님이요?”
―네, 협회장님이 민준 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네요. 한번 가시죠. 저와도 관련 있는 일이니 함께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협회에서 일감을 따오는 것도 아니고 다이렉트로 협회장과 만남이라니.
뭔가 큼직한 일감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 알겠어요. 언제 가면 될까요?”
―내일 시간 되시나요?
“네, 좋습니다.”
다음날 헌터 협회 1층에 도착했다.
지이이잉.
차지율 헌터의 문자였다.
[어디세요? 저는 협회 1층 로비입니다.]
잠시 두리번거리니 저쪽에 앉아 있는 차지율 헌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니 차지율 헌터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문득 이런 자연스러운 만남이 새삼 놀라웠다.
이건 꼭 친구들끼리 만나는 모습 같지 않은가?
S급 헌터와 아무렇지 않게 연락을 주고받고, 심지어 어떨 때는 천마가 ‘밥 먹었삼?’ 이러면서 되도 안 하는 썰렁한 말을 건넸다.
차지율 헌터는 천마로서 검에는 극의에 이른 사람이지만, 유머 쪽은 그다지 재능이 없어 보였다.
차지율 헌터가 걸어왔다.
저 걸음걸이.
처음에는 자신감 넘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저 바른 걸음걸이였다.
검의 끝을 보고 있는 사람이니, 얼마나 바른 자세로 걸을까.
처음에는 차지율 헌터라는 사람 이전에 S급이자 대형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후광에 눈이 부셨나 보다.
하지만 이제 내 눈에 그런 후광은 보이지 않고 함께 S급 몬스터를 잡은 전우라는 개념이 생겼는지 그렇게까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마가 말했다.
“민준 헌터님, 올라가시죠.”
“네.”
헌터 협회장실에 도착했다.
협회장실의 문이 열리고 S급 아니 S+급으로 알려진 협회장이 우릴 반겼다.
구릿빛 피부, 약간 각진 듯한 얼굴에 진한 눈썹이 인상적인 협회장은 겉보기에는 50대의 모습으로 보였다.
하지만 협회장은 그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았다.
아마 나이가 아흔 살이 넘는다고 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협회장의 주특기는 커맨더였다.
커맨더는 버퍼 계열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역할이었다.
일반적인 버퍼가 동료의 공격력, 방어력 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면 커맨더는 전장의 지휘관 역할을 하며 전체적인 전력을 높였다.
협회장은 S급답게 동료의 공격력, 방어력을 크게 상승시키는 버퍼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며, 전장에서 동료들과의 시각, 청각, 후각을 공유하고 뛰어난 지력을 바탕으로 유기적인 전술 운용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협회장의 지휘를 받던 사람들은 그의 리드를 따르게 되고, 자연스레 헌터 협회장이 되었다고 했다.
TV에서 협회장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했고 협회장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내가 아는 바가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민준 헌터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협회장, 이승원입니다.”
“네, 협회장님.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괜히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이승원 협회장은 수십 년째 대한민국 최고 무력 기관의 수장을 맡았고, 그 세월 동안 국가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지금도 어지간한 연예인은 이상의 인지도를 가졌다.
대한민국 헌터계의 산 증인이자 역사였다.
영광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하하,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모습은 사람 좋은 아저씨일 뿐이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준 헌터님과 지율 헌터님이 중국에서 데빌 페어리를 잡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차지율이 내 자랑을 했다.
“여기 민준 헌터님이 없었다면 칭다오시 근처도 가지 않았을 겁니다.”
협회장도 거들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제가 데빌 페어리를 잡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더군요. 한 가지는 민준 헌터님의 소환 스킬. 이건 뭐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겠죠.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데빌 페어리의 약점을 파악해서 대처한 점입니다. 상성에 맞춘 공격. 이게 자료를 자세히 보다 보니 민준 헌터님의 작품임을 알게 되었어요. 제가 소환까지만 해도 꽤 준비를 잘해갔구나 하고 있었는데 상성을 맞춰버리는 데서 제가 놀랐지 뭡니까.”
“협회장님도 놀라셨는데, 저는 오죽했겠습니까? 다른 헌터들은 다 방어 무시 공격에 맥을 못 췄는데, 민준 헌터가 걸어준 실드로 방어가 가능했습니다. 그게 데빌 페어리에게는 결정타였죠.”
협회장이 깊은 눈동자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민준 헌터님은 전투 초기에는 상성을 못 맞추었잖아요. 그러다 중간에 상성을 맞추었죠. 차라리 처음부터 상성을 맞추었다면 준비를 잘 해갔구나 하고 생각했을 텐데, 희한하게 중간부터 상성을 맞추었어요. 그런데 어째서 저는 그렇게 상성을 맞춘 것이 우연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두 헌터의 칭찬과 분석에 내 밑천이 탈탈 털릴 것만 같았다.
“아시다시피 제가 소환수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그 소환수들 역시 다른 세상에서 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데빌 페어리에 대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앞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네요?”
“네, 그런데 항상 이렇게 상성을 잘 맞춘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데빌 페어리가 그쪽 세계에서는 대응법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포탈로 이어지는 세계가 다양하니, 저를 도와주는 세계에서 다른 몬스터에 대한 대응법이 없다면 도움을 받을 수 없겠죠.”
“그렇군요. 그래도 소환만으로도 다양한 작전을 펼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민준 헌터님, 잘 아시다시피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대운 대학교에 브레이크가 터졌고, 중국에서도 칭다오시에서 S급 브레이크가 터졌습니다.”
두 던전 브레이크라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예전 창석필 박사는 지구상의 던전의 수와 등급의 곱인 총량은 항상 일정한 값을 유지한다는 창의 법칙을 발표했었죠.”
그런 법칙이라면 나도 배워서 알고 있었다.
던전을 완전히 폐쇄하면 어디선가 같은 수준의 포탈이 열리므로 던전은 완전 폐쇄보다는 보스를 클리어한 채 관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그 법칙이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내가 학창시절 때부터 배워왔던 법칙이 무너진다는 소리에 그게 무슨 소린 가하고 협회장을 바라보았다.
“사실 창의 법칙은 예외가 있습니다. 처음 포탈이 발생하고 약 5년간의 던전은 그 수와 등급이 현저히 낮았습니다. 창의 법칙에 위배됩니다. 하지만 초깃값이고, 자료가 부족해서 창의 법칙에서는 제외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간을 제외하고는 사십 년간 창의 법칙이 유지되었죠.”
협회장이 잠시 우리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최근 던전 계단 이론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던전이 열린 후 초기 5년 동안은 낮은 단계, 그 후 수십 년간 높은 단계를 마치 계단처럼 유지했다는 이론입니다.”
“계단이라면…….”
“네, 사실 예전부터 있던 이론이지만 창의 법칙에 눌려 무시되었죠. 하지만 최근 던전 브레이크를 잘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현재 창의 법칙에 위배 될 정도로 던전의 총량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학창 시절에 교과서로 배운 이론이 바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다음 단계의 계단에 도착할 때까지 던전의 총량이 늘겠죠. 그때까지 혼란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아…….”
“그리고 사실 다음 계단에 안착할지 안 할지도 모릅니다. 계단 이론은 겨우 두 계단의 선례밖에 없으니까요.”
“그럼?”
“네, 던전의 총량이 언제 멈출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멈추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죠.”
아니,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우리는, 지구는, 인류는?
내가 경악한 표정을 보이자 협회장이 나를 안심시켰다.
“물론 최악의 경우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많은 연구진은 던전의 총량이 지금의 두 배 정도에서 멈출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피해가 크겠지만, 두 배 정도는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협회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어떻게든 막아낸다는 말입니다. 제대로 막지 못하면 인류의 존속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많은 던전 브레이크가 터질 겁니다. 높은 확률로 우리나라에서도 S급 던전이 발생할 것이고 막지 못하면 칭다오시 사태가 벌어지겠죠.”
나는 그저 입을 벌린 채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평생 내가 살아온 세계의 법칙이 달라진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민준 헌터님, 그리고 지율 헌터님. 다음 주에 비공개 국제 헌터 연합회의가 있습니다. 주요 회의 안건은 던전 총량 증가와 그에 따른 S급 던전에 대한 대응책 논의입니다. 함께 가시죠.”
* * *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추었다.
차창 밖으로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가 건물이 많은 사거리였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평범한 건물과 그 옆을 지나는 사람들,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도 한다.
거리에는 무언가를 홍보하기 위한 간판들이 즐비했고, 상가 1층은 온갖 먹거리를 판매하는 식당으로 가득했다.
이런 평범한 일상이 사라진다는 것인가?
나는 마치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을 혼자만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저들은 몇 시간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던전의 총량은 항상 일정하다는 세상의 법칙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던전은 관리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부터 나온 부산물은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었다.
가끔 다치거나 죽는 헌터들이 있지만, 그것은 마치 파병 간 군인의 일부가 다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헌터들은 위험을 감수하지만, 그 대신 부유하게 살아가므로 위험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이 평온한 거리의 모습이 얼마 후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말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던전은 왜 증가하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포탈은 왜 열리는 것일까?
나는 새삼스레 누구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법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떠오르며 눈시울을 훔쳤다.
사무실에 도착해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알파야.”
―네.
“넌 누구야?”
―저는 시스템의 도우미입니다.
“그 시스템이 뭔데?”
―시스템은 시스템입니다. 저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포탈은 왜 열려?”
―저도 알지 못합니다.
“던전의 양이 증가할 거라는데 아는 게 있어?”
―죄송합니다. 저도 알지 못합니다.
“하아…….”
알파도 나를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 이 사태의 근본을 알지는 못했다.
“알파야, 샤론 영지 띄워서 한 바퀴 루틴 돌려줘.”
―네.
사무실 벽에 화면이 뜨고 샤론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났다.
기분이 우울했는데 샤론을 한참 보고 있자 힐링이 되었는지 기분이 조금은 괜찮아졌다.
“알파야, 샤샤는 어딨어?”
―트란 산맥에 올랐습니다. 오늘 사냥조인 것 같습니다.
소환수와 기사급들은 순번을 정해서 사냥과 천마 길드 훈련소를 번갈아 다녔다.
“샤샤에게 쪽지 좀 보내봐.”
[샤샤야.]
샤샤에게 곧 쪽지가 왔다.
[네, 민준 님!]
[뭐 해?]
[아, 사냥했어요. 방금 트롤 한 마리를 잡았어요.]
트롤이면 나름 꽤 센 몬스터인데, 이제 트롤 정도 잡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누구랑 있어?]
[기사급은 저, 르녹, 꾸얀이 있고요, 사냥꾼 쟝 아저씨를 포함해서 사냥꾼 조는 열 명이 있어요.]
[바빠?]
[아니요. 지금 트론 사냥은 다 끝났고 다른 사냥감 찾는 중이었어요. 하나도 바쁘지 않아요.]
하나도 안 바쁘긴, 아마도 내 쪽지에 부대를 정지시켰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샤샤야, 궁금해서 그러는데 프란시아에서는 주기적으로 몬스터 웨이브가 터지잖아. 마을이 점령당하고 피난 간 성의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몰아치잖아.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러는데, 그럴 때 기분이 어때?]
샤샤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겁이 나고 무서워요. 하지만 혼자가 아니잖아요. 함께 헤쳐 나가려는 마음이 크죠. 그리고 이제는 민준 님도 계시잖아요. 지난번 웨이브에서는 민준 님이 지켜보신다는 생각에 늘 마음이 든든했답니다.]
[샤샤야, 그런데 너랑 나랑 싸우면 내가 져. 등급만 봐도 너는 A급이고 난 B급 헌터잖아. 그래도 든든해?]
[민준 님,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내 옆에서 끝까지 나와 함께 싸워줄 사람, 나를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의미죠.]
그런 건가.
[샤샤야, 지구에서 앞으로 S급 던전 브레이크가 종종 발생할 거래. 그리고 그런 장소에 아마 나도 가야 할 것 같아. 너도 함께할 거지?]
[민준 님, 그게 저의 사명이랍니다.]
나를 지키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한 대답이 있을까?
[정말 고마워.]
일주일 후.
나는 미국으로 출발했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