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소원
디아론 백작은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똑똑.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카나가 들어왔다.
“카나 왔니?”
아빠의 질문에 카나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근데 아빠, 날 왜 카나라고 불러? 얼마 전까지 카타리나라고 불렀잖아.”
실제로 디아론 백작은 어렸을 때만 애칭으로 카나라고 부르고 카타리나가 조금 자란 이후로는 늘 카타리나라고 불렀었다.
“왜? 다른 이들은 카나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렇게 부르면 안 되니?”
카나가 팔짱을 끼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샘내는 거야?”
“허허.”
디아론 백작은 카나를 보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빠, 이거.”
카나가 아빠에게 준 것은 초대장이었다.
디아론 백작은 초대장을 열어보았다.
[존경하는 디아론 백작님께.]
샤론 영지의 영주인 킴 준남작입니다. 그동안 존경하는 디아론 백작님께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얼마 전 마법사 알타르가 수도에서 성물을 대여하러 갔을 때 디아론 백작님께서 보증을 서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
샤론 영지의 축제에 디아론 백작님을 초대합니다. 팬니르 등의 여러 기사들과 함께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백작님을 존경하는 킴 준남작 올림.
“호오.”
디아론 백작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카나야, 축제에 가면 재미있는 것이 있나?”
“그럼. 공연으로 행진도 해.”
“행진?”
“어, 나도 나와.”
딸이 참여하는 공연이라니 이건 놓칠 수 없었다.
“알았다.”
디아론 백작은 축제 날짜에 맞추어 팬니르가 이끄는 기사단과 함께 샤론 영지를 방문했다.
샤론 영지로 향하는 길은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원래 샤론에 가까워지면 길이 험해서 말에서 내려야 했다.
하지만 샤론 영지와 가까워지는데도 도로가 깔끔해 말에서 내릴 필요가 없었다.
점점 더 깔끔해지는 도로가 인상적이었다.
“허어, 이거 샤론에 도착하기도 전에 감탄하게 만드는군.”
분명히 산골 마을이었는데 이처럼 길을 깔끔하게 닦다니, 영지민들을 혹독하게 다룬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고, 자신이 모르는 어떤 놀라운 방법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방법을 사용했다면 그 방법을 얻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영지를 두르고 있는 성벽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튼튼해 보였다.
이런 외진 곳에 이렇게 튼튼한 성벽을 쌓다니 놀라웠다.
디아론 백작은 직접 성벽에 다가가 성벽을 두드려보았다.
쿵쿵.
돌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암석을 이은 이음매가 없었다.
암석을 쌓아 성벽을 쌓았을 텐데 어떻게 이음매가 없는지 의아했다.
“이거 영지에 들어가기도 전에 놀라버렸군. 차이세?”
“네, 백작님.”
“자네는 이 돌이 뭔지 아는가?”
행정관 차이세도 샤론 영지의 모습을 꼭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따라왔다.
차이세는 성벽을 자세히 보고 만져보고 두드려보았다.
행정관 일을 하면서 성벽을 짓고 고치는데 십 년 넘게 관여했다.
차이세는 전문적인 건축가는 아니지만, 성벽을 어떻게 짓는지는 잘 안다고 자신했다.
“저도 처음 보는 종류의 건축입니다. 이건 마치 암석을… 만든 것 같지 않습니까?”
“뭐? 암석을 만들어?”
“이음매가 없고 알갱이가 일정합니다. 아주 자세히 보면 알갱이가 모래와 점토입니다. 이건 마치 어린이가 고운 모래와 점토를 이용해서 쌓은 모래성을 암석으로 바꾼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면 역시 마법인가?”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성벽은 어지간한 몬스터는 기어 올라가지 못하게 수직으로 높았으며, 마을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성벽의 군데군데에 감시탑을 두어 보초를 두고 있으니 몬스터 웨이브급의 많은 수 또는 재앙급 몬스터 정도의 강력한 개체가 아닌 다음에는 샤론의 성벽을 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디 한번 안으로 들어가 보세나.”
영지 안으로 들어간 디아론 백작 일행은 영주관으로 안내되었다.
“허어.”
낯선 외국을 방문하면 그곳의 독특한 건축양식이 눈길을 끌게 마련이었다.
디아론 백작은 커다란 네모난 블록을 이리저리 끼운 듯한 영주관을 보며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디아론 백작이 영지 내로 들어오자 샤샤와 카나가 백작을 맞이했다.
“백작님,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영주관에 백작님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행정관님과 기사단장님도 영주관으로 오르시지요. 일반 기사님들은 영주관 뒤쪽에 따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간 백작이 침대와 화장실 시설에 감탄하는 사이, 영주관 뒤쪽으로 돌아간 기사들은 충격과 경악을 했다.
“이건 뭡니까?”
“카라반이에요.”
“그게 뭐죠?”
“작은 집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있을 건 다 있어요.”
기사들이 줄지어 서 있는 카라반에 조별로 배정되었다.
“우와, 여긴 물도 있는데?”
“화장실도 있어.”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여기 바퀴를 봐. 이건 마차로 끌어서 이동할 수 있는 집이라고.”
“아!”
디아론 백작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초대되었다.
수도에서 왕국 수석마법사인 스피오크도 왔고, 헬른성의 캐이믹 백작 또한 당도했다.
가망 멀리는 삼각성에서도 온 이도 있었다.
삼각성에서도 지난 베이론 왕국과의 전쟁에서 도움이 컸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해주었다.
초대된 사람들은 대부분 샤론 영지의 신선한 캠핑 물품과 건축양식 등에 놀라워했다.
“어떻게 집을 들고 다닐 생각을 할 수가 있죠? 심지어 집 안에 뭐든 다 있는데? 침실은 물론이고 화장실도 있어!”
“나는 샤론의 건축양식이 가장 놀라워!”
“잠… 잠깐만, 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은 뭐지? 장난감이 불빛도 나오고 소리도 나오고 변신에 합체까지 하는데? 도대체 저런 장난감은 누가 만든 것이지?”
초대된 손님들은 순서를 정해 지구로 소환되었다.
나는 오성급 호텔 연회장을 빌려 그들을 맞이했다.
“스피오크 님, 와주셔서 감사해요.”
호텔 전문 직원들이 서빙을 하며 소환된 이들을 맞이해 주었다.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연회장은 이걸 먹어도 되나 싶은 비주얼의 음식들을 내어놓았다.
“샤론 영주께서 이리 불러주니 고맙네. 내 이렇게 아름다운 음식은 처음 보는군. 요리장이 누구인가? 꼭꼭 숨겨두지 않으면 내 돌아갈 때 프란시아 수도로 데려갈 거라네, 허허.”
얼떨결에 글리제로 납치당할 뻔한 호텔 요리사였다.
“지난번 S급 몬스터인 데빌 페어리 때 스피오크 님께서 도와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어요. 너무 감사해요.”
“허허, 다 돕고 사는 거 아니겠소.”
“그래서 제가 스피오크 님에게 선물을 뭘 할까 고민했어요. 사실 스피오크 님이 이미 왕국 수석 마법사이시니, 어지간한 건 원하시는 대로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허허, 괜찮다오. 내가 선물을 받자고 전투를 한 건 아니라네.”
“그래요? 그럼 안 드려도 되나요? 이거 접히는 마나 회로인데요?”
“뭐라고 했소?”
“프란시아 왕국은 아직 마법진을 단단한 판에다가 쓰곤 하더라고요.”
“음, 그래야 마법진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지.”
“이거 접혀요. 폴더블, 좋죠?”
나는 마법진을 이리저리 접어보며 보여드렸다.
스피오크의 눈이 점점 커졌다.
“1에서 5서클까지 100세트이고요, 6서클도 세 개 얹어두었습니다.”
접히는 마법진 세트를 받은 스피오크는 마법사의 탐구욕에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허허, 이거 생각지도 못한 귀한 물건을 받네그려. 참으로 고마우이. 다음번에도 또 어려운 몬스터가 있으면 꼭 불러주게나.”
디아론 백작은 소환되자 연회장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샤론 영지에는 감탄할 것이 천지로군. 이렇게 화려한 연회장은 수도의 연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야. 샤론 영주가 한 차원 높은 귀족가의 품격을 보여주는구만, 허허.”
그럼, 별이 다섯 개짜리 호텔 연회장인데다가 제일 비싼 코스로 예약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샤론 영주. 부모님은 잘 계신가?”
“네, 건강히 잘 계십니다.”
내 부모님이 건강하시다는 데 디아론 백작의 표정이 밝아지다니, 그런 생각을 해주시는 것 자체가 감사했다.
“다른 형제들은 없고?”
“아, 여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흠… 여동생이 시집은 갔는가?”
“아니요. 아직 시집은 안 갔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집 안 간 여동생이 있다는 말에 디아론 백작의 표정이 어두워지셨다.
왜 그러시지?
“그래, 아무튼. 내 샤론 영지를 눈으로 보고 깜짝 놀랐네. 아니 지금도 놀라고 있는 중이야.”
디아론 백작은 연회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긴, 이런 연회장은 나도 놀랍다.
“그리고 그 성벽 말일세. 그건 어떤 방법으로 만든 것인가? 높고 단단한데 꼭 돌을 만든 것 같지 뭔가? 아주 놀랍더군.”
“아, 돌을 만든 것이 맞습니다.”
“돌을 만들었다고?”
디아론 백작은 성벽을 만든 재료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나는 나름대로의 지식을 동원해 설명해드렸다.
“그러니까 쇠기둥으로 기본 뼈대를 만든 다음에 물에 갠 가루를 부으면 그것이 굳어 돌이 된다는 말인가?”
“네,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허허, 그럼 그 기술을 디아론 성곽에도 써줄 수 있겠는가?”
“당연히 가능합니다.”
나는 평소 받은 것이 많은 디아론 백작님께 늘 감사하다며 저렴한 가격에 디아론 성곽도 철근콘크리트 작업을 해주겠노라 약속했다.
글리제에서 지구로 넘어온 것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사람들도 축제에 초대되었다.
“엄마, 아빠, 민아야. 샤론 영지에 축제하는데, 구경 올래?”
“너무 좋지!”
엄마 아빠 민아도 샤론의 축제를 구경하러 왔다.
영지민들은 엄마 아빠가 나타나자 화들짝 놀랐다.
“비상이야!”
“영주님의 부모님이셔!”
“긴장해!”
주민들은 더욱 각잡힌 모습으로 공연을 보여주었다.
차지율 헌터와 강 트레이너도 초대했고, 동서 형님, 나리, 관장도 당연히 샤론의 축제에 참가했다.
늘 고생만 하며 나를 도와주는 사무실 직원들도 샤론을 구경시켜 주었다.
한상일이 샤론 영지에 가서 자신들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뭐랄까, 지구에서 사장님의 직원이에요.”
“영주님의 세상에서 영주님을 보필하고 있다는 말이세요?”
“그렇죠.”
“아, 가신님들이시구나. 어서 오세요.”
졸지에 가신이 되어버린 상일과 홍민이었다.
그래도 상일과 홍민은 멋진 샤론의 경치를 보며 지구에서 늘 받던 물건의 생산자를 보게 되어 좋았다고 말했다.
“여기가 샤론의 공장이군요. 직접 제품을 생산하는 분들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저희는 지구에서 여러분들의 제품을 납품받아 판매하는 사람들이에요. 함께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요?”
“네, 좋아요.”
생산자와 도매업자를 만나게 하니 생산적인 대화가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핫바에 매운맛을 넣자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한국 입맛에는 매운맛이죠.”
“원래 몬스터 고기가 매운맛이 있는데, 그 맛을 중화시킨 거예요.”
“그래요? 그러면 그 맛을 조금 살려볼 수 있을까요?”
여러 사람을 초대하다 보니 며칠만 진행하려고 했던 축제는 열흘이 넘게 진행되었다.
축제의 마지막 날.
초대한 손님들은 모두 돌아갔다.
나는 화면으로 영지를 둘러보았다.
마을 중앙부에는 축제 기간 동안 소원을 적는 나무가 있었다.
자신의 소원을 적고 나무에 붙여두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소원을 적고 기도를 하는 갈리나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갈리나 할머니에게 용병 제안을 했다.
할머니는 잠시 놀랐지만, 용병 제안을 받아들이셨다.
[안녕하세요?]
[영주님, 안녕하십니까?]
[뭐하고 계세요?]
[네, 소원을 적고 기도를 올리는 나무가 있어서 그리하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보니 작은 종이들이 많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종이들은 한글로 적혀 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많아 보였다.
어차피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된 게시판이었다.
나는 한글로 된 소원은 직접 읽고 내가 모르는 프란시아 왕국어로 적힌 글들은 갈리나 할머니에게 읽어달라 부탁했다.
소환수들이 적은 소원도 있었다.
왠지 그들의 속마음을 읽는 기분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친밀도를 올려야 하는 입장에서 마침 먹음직스러운 건수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