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보고 시퍼요
땅에 있던 바위가 마치 자신이 구름인 양 하늘에 떠 있고, 하늘에 있던 구름과 공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혼동하며 땅을 채웠다.
불과 번개와 칼바람 속에서 용병들과 데빌 페어리는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팟!
또 화면이 나갔다.
상황팀이 분주해졌다.
“17번 화면 정지됨! 드론 더 빨리 날려!”
끊임없이 나가떨어지는 근접 드론을 대체하기 위해 상황팀도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헬리콥터를 먹잇감으로 주고 달아나려는 작전은 취소되었다.
우리는 다시 약 20km미터를 달아난 후, 다시 지휘부를 갖추었다.
다행인 점은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드론 카메라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차지율 헌터님, 디바인 프로텍션은 안 깨졌나요? 힐은요?]
[디바인은 아직 안 깨졌습니다. 힐만 조금씩 넣어주세요.]
“힐! 힐! 힐”
용병과 쪽지로 의사소통을 하며 필요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었다.
“근접 카메라 세 대 다시 보급되었습니다.”
화면으로 보니 잠시 대치가 소강상태인 것 같았다.
데빌 페어리는 처음의 뽀얗던 피부가 거칠고 메말라 보였다.
등 뒤에 달려 있던 나비 같던 검은 날개는 어느새 물에 젖고 드문드문 깃털이 빠진 새의 날개처럼 보였다.
데빌 페어리를 둘러싸고 있던 검은 구름 역시 처음보다 그 양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우리 용병들도 겉모습은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데빌 페어리가 손으로 할퀴는 듯한 공격을 많이 해서 통커 헌터의 갑옷은 성한 구석이 없었으며, 천마 역시 한쪽 어깨 보호대가 언제 없어졌는지 허전한 상태였다.
뒤늦게 참여한 스피오크 마법사 역시 목에 두른 뽀송한 털 목도리의 털이 군데군데 뜯겨나갔다.
데빌 페어리가 이제는 검은 연기로 가릴 생각도 없는지, 입 모양을 크게 보이며 외쳤다.
“ζάρια!”
궁극기였다.
지이이잉.
챙그랑.
디바인 프로텍션이 궁극기를 방어해주다가 깨져 버렸다.
용병들은 어느 정도 데미지를 입었는지 한 걸음씩 물러났다.
“디바인 홀리 큐어! 디바인 홀리 큐어! 디바인 홀리 큐어!”
나는 이번엔 센 치유를 넣어주었다.
홀리 큐어 세 방을 넣어주고 언제든지 마시라는 듯 내 앞에 진열되어 있는 마나 포션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디바인 프로텍션을 용병들에게 걸어주었다.
화면에 집중했다.
처절한 싸움의 끝이 보였다.
데빌 페어리의 궁극기는 짧으면 7분, 길면 10분 이상의 쿨타임을 갖곤 했다.
하지만 데빌 페어리는 불과 2분 만에 다시 궁극기를 사용했다.
그런데 마음만 급한 모양이었는지 궁극기를 사용하고 스스로 내상을 입은 듯 피를 쏟았고, 우리 용병들의 디바인 프로텍션은 깨지지 않았다.
미완성 궁극기였던 것 같았다.
이에 위기를 느꼈는지 데빌 페어리가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날개를 집중 공격당했기 때문에 멀리 달아나지 못했다.
슈칵.
결국 천마의 검이 데빌 페어리의 목을 지났다.
검은 연기가 목과 몸통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모니터로 용병과 데빌 페어리의 대결을 보던 상황 팀에서는 데빌 페어리의 목이 떨어지자 승리의 환호를 외쳤다.
내 귓가에는 그런 환호 소리보다 더 듣기 좋은 소리가 들렸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소리가 진동했다.
와, 대체 레벨 몇 개 오른 거야?
S급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 했더니 경험치가 장난이 아니었다.
잠시 후, 레이드에 참여한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스피오크 님, 고마워요.”
스피오크는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미소를 지었다.
부잣집 여사들이 좋아할 것만 같던 뽀송했던 털목도리의 털이 듬성듬성 빠져있자 조금 미안해졌다.
“스피오크 님, 목도리는 제가 비슷한 것으로 하나 맞춰드리겠습니다.”
“하하, 이거 자체 회복 기능이 있어서 내일쯤이면 원상복구 될걸세.”
“그렇군요. 아무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악마계열을 잡는 손맛을 보아 나도 좋았다오.”
나는 내 목에 걸린 성물이라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귀한 것을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어요.”
스피오크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렌탈이네.”
“아… 약정이 어떻게 되나요?”
“성물은 수도에 있는 수도원에서 빌린 것이라오. 수도원에서는 두 개의 달이 진 후, 다시 뜨는 기간 동안 성인 몸무게만 한 대형 포대로 3천 포대를 달라고 하는데, 두 개의 달이 뜨는 주기를 이곳 시간과 비교해보니 3~5년 정도 된다고 하네. 어떻게 괜찮겠나?”
지난번에 헬른성에 보낸 쌀이 얼마였더라?
햅쌀도 아니고 묵은쌀이라서 그리 비싸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3천 포대?
S급 보스를 잡는데 톡톡한 효과를 거둔 아이템이다.
글리제 쪽에서는 과감하게 3천 포대를 부른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글리제처럼 식량값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쌀은 며칠 내로 보내드릴게요.”
“참고로, 디아론 백작님이 연대 보증을 서셨는데,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네.”
아니, 이 아저씨가 부모 형제도 안 서준다는 연대 보증을 서 주다니!
감동이다.
“감사합니다. 제가 꼭 보답하겠습니다.”
스피오크가 돌아가고 중국 헌터들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데빌 페어리를 잡은 날은 중국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자고 나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고 하던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정말로 단 하룻밤 만에 나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호텔의 손님은 나와 천마 그리고 이번 작전에 동원된 인원들뿐이었다.
정부 측에서 통 크게도 호텔 전체를 대여한 것 같았다.
그래서 호텔에서 왔다갔다 할 때도 다른 손님과 마주치지 않았다.
아침 조식을 먹는데 힐끔거리는 직원들의 눈빛을 보았다.
나는 그 눈빛을 혹시 내가 필요한 것은 없는지 확인하는 서비스 정신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방에 돌아와 TV를 켜보니 온갖 채널에서 내 얼굴이 나왔다.
호텔 직원들의 눈빛이 서비스 정신이 아님을 깨달았다.
직원들은 직장이라서 나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올 때는 조용히 왔지만 갈 때는 시끄러웠다.
중국 방송에서는 헬기로 탑승하는 인원들을 일컬어 7인의 결사대라고 불렀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우리가 데빌 페어리를 사냥하기 위해 출발하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끊임없이 방송에 나왔다.
막판에는 스피오크가 데빌 페어리를 잡았지만, 방송에서는 뉘앙스가 조금 달랐다.
언제 찍었는지 7인의 결사대가 훈련하는 모습, 밥 먹고 이야기하고 농담하는 모습까지 편집의 힘을 빌려 장엄한 서사시가 되었다.
영웅 만들기인 것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뭐 그런가 보다 했다.
중국인 두 헌터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고, 한국인인 나와 천마 역시 귀국하러 공항을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가 몰렸다.
“셰셰!”
“셰셰!”
“셰셰!”
천마와 내가 집에 가기 위해 도착한 공항에는 수많은 인파가 있었다.
통역이 나에게 중국인들이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차지율 헌터는 익숙한 듯 쿨하게 비행기로 향했다.
나는 너무 많은 사람이 환호해주자 나도 손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와아아아!”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마이크를 쥐여주었다.
얼떨결에 마이크를 잡으니 수많은 군중이 나를 주목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마이크를 잡고 나직하게 말했다.
“아아.”
원래 마이크를 처음 잡으면 다들 ‘아아’ 이렇게 마이크 테스트를 하지 않나?
내가 ‘아아’라고 말하자 중국인들도 그렇게 하는지 수많은 인파가 나의 목소리에 조용히 집중해주었다.
중국인들이 내 말을 기다리고 있으니 왠지 중국어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중국어를 말해주었다.
“니하오, 셰셰, 짜이찌엔!”
“와아아~!!”
짜이찌엔을 외침과 동시에 손을 흔들어주니 시민들도 함께 손을 들며 만세 파도타기가 만들어졌다.
비행기 안에서 차지율 헌터가 말했다.
“데빌 페어리를 잡는데 우리가 큰 역할을 했으니 그 사체와 마정석의 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사체와 마정석은 자기들이 갖기로 하고 우리에게는 돈을 주기로 했습니다.”
“아…….”
“끝까지 마정석을 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중국 정부가 또 체면 때문이라도 그렇게는 해주지 않을 것 같아요.”
“아, 체면.”
그래, 이들은 그게 중요하다고 들었다.
“그래도 돈은 잘 받기로 했습니다. 일단 샤론 길드 몫으로는 삼천억입니다.”
“네? 삼천억이요?!”
“네, 샤론 길드의 몫으로 그만큼이고 저희 쪽으로는 또 따로입니다.”
내 입장에서는 정말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니 S급 던전 브레이크를 해결하고 우리나라만 한 영토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생각하면 또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와, 삼천억이 커 보이지 않다니, 나도 이제 간덩이가 커진 모양이었다.
스피오크에게는 삼천 포대를 넘기기로 했는데 삼천억을 받고 삼천 포대를 넘기려니 뭔가 양심에 찔리는 것 같았다.
디아론 백작님도, 스피오크 님에게도 성의 표시를 크게 해야겠다.
차지율 헌터가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던전 브레이크가 터져서 급하게 투입이 되었는데요. 앞으로도 이렇게 S급 던전 레이드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민준 헌터님의 소환수들도 합동훈련을 받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나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소환수들을 소환했다.
차지율 헌터의 제안에 소환수들의 의견을 듣기 위함이었다.
“강해진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카나는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이번 몬스터와의 대결을 통해 제가 민준 님을 지키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느꼈어요. 저, 열심히 할게요.”
샤샤다웠다.
나는 제리를 바라보았다.
“야옹.”
꼭 이럴 때만 야옹이다.
“훈련 싫어?”
“더 강해져야 하는 건 맞당.”
강해지곤 싶은데 훈련은 싫다는 듯했다.
하지만 막상 하면 또 잘할 것 같았다.
앞으로 나뿐만 아니라 소환수들도 합동훈련에 동참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지이이잉.
전투에 집중해야 해서 스마트폰 국제로밍을 하지 않았었는데, 신호가 잡히는 걸 보니 비행기의 위치가 이제 한국 통화권 내로 들어온 것 같았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전화기가 계속 울렸다.
[민아 – 오빠, 중국이야?]
[엄마 – 민준아, 어디니?]
[우철이 ― 한국 왔냐?]
[안녕? 나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민준아! 나 기억나?…]
[안녕하십니까? 저는…]
공무원 시험 준비로 사그라들었던 내 인맥이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는지 놀라울 정도로 연락이 왔다.
파파파파팍!
공항 출국 게이트를 나오자 눈부시게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들이 질문 세례가 날아왔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
나의 침대는 정말 오랜만에 나를 반겼다.
뭐 있은 것 없지?
모르겠다.
풀썩.
나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 * *
샤론 영지의 영주관 1층에 여러 인원들이 모여있었다.
다들 수심에 가득한 얼굴이 뭔가 심각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예전 샤론 마을의 촌장인 다니엘이 조용한 분위기를 깨며 입을 열었다.
“우릴 잊으신 걸까?”
그 말을 들은 주민들은 다니엘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샤샤 님은 잠깐씩 왔다가 가시잖아요?”
“샤샤 님은 뭐라고 하셔?”
“영주님이 바쁘시다는 말씀밖에 안 하셨어.”
“그러면 말 그대로 바빠서 영지를 못 보시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다니엘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영주님의 부모님들이 다녀가신 후로 영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크음.”
“으음…….”
다니엘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준비가 부족했나 봅니다.”
“영주님은 결국 치료사의 길로 가시는 걸까요? 이대로 우린 잊히는 걸까요?”
꼬마 마법사 길리언도 영지의 회의에 참여했다.
평범한 꼬마라면 이런 어른들의 회의에 참가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길리언은 영주님의 총애를 받아 영주님과 대화를 많이 해봤기 때문에 혹여나 영주님의 마음을 알까 해서 회의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길리언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게 되었다.
어른들의 말은 앞으로 영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거란 말이었다.
길리언은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영주님은 언제 오세요? 보고 시퍼요.”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