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도플갱어
깔끔하고 세련된 공간.
여러 개의 방에는 각각 십여 명의 사람이 지낼 수 있을 만큼 넓었고, 개인 침대, 식사 공간, 화장실과 샤워실은 물론 여가를 보낼 수 있을 만한 공간도 꾸며져 있었다.
산뜻하고 세련된 느낌과 달리 이곳은 지하 8층 생존을 위한 벙커였다.
포탈과 몬스터가 출몰하는 세상에서 지하 벙커는 생존 수단으로 인기가 많았다.
대운 대학교 근처의 지상 5층 지하 8층짜리 빌딩.
한 기업이 소유한 건물인데 지하 5층부터는 벙커 형식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이 시설의 장점으로는 다른 몬스터의 탐지를 피할 수 있는 마력장을 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곳 벙커는 외부의 탐지에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아주 우연히 그 벙커 내부에 포탈이 열렸다.
그리고 헌터 협회의 포탈 에너지 측정 장치는 벙커 내부에 포탈이 발생했음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벙커 속에서 한참을 방치된 포탈이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불쑥 몬스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크고 툭 튀어나온 눈알, 옆으로 쭉 찢어진 커다란 입, 미끈거리는 푸른색 피부를 가진 이족보행 몬스터인 리자드맨이었다.
“쿠에에엑!”
리자드맨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점액질이 입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창과 검 같은 냉병기를 소지한 채 꾸역꾸역 포탈에서 쏟아져나온 리자드맨들은 벙커 내부를 돌아다니더니 결국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벙커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기는 어렵지만,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기는 쉬운 구조였다.
지하 8층에서부터 한 층씩 지하 5층까지 올랐다.
지하 5층에서 지하 4층으로 가는 길은 조금 복잡했지만, 리자드맨들은 지하 4층으로 올라왔다.
지하 4층은 주차장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주차장에 주차하려던 사람들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2m 이상의 이족 도마뱀 몬스터에 경악할 뿐이었다.
“꺄악!”
부아아아앙!
쾅!
쾅!
리자드맨을 피하려고 주차장에서 급가속을 힌 탓에 주차장의 차들이 충돌했다.
삐이삐이삐이.
“꺄악!”
“캬아아아악!”
자동차 경보음과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리자드맨의 괴성이 뒤섞였다.
* * *
“오늘은 지난달 테셋 문제 딱 스무 개 풀기입니다. 그리고 다 풀면 오늘 발제자인 가영이가 풀이를 할 겁니다. 날카로운 질의응답 부탁드려요.”
경제 동아리 회장인 곽영진 선배의 진행에 사람들이 가영이를 바라보았다.
가영이는 사람들이 쳐다보자 부끄러워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제가 잘 몰라도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용, 저 던전학과 1학년인 것 아시졈? 경제학과도 아니라고요. 히힛.”
“와, 문제 너무 어렵다.”
“3번 문제 뭐임?”
곽영진 선배는 사람들을 주목시키며 다시 이야기했다.
“자자, 우리 동아리는 스펙과 친목을 모두 잡는 게 목표라는 거 아시죠? 이따가 끝나고, 먹자골목에서 뒤풀이 있습니다. 스펙도 친목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죠?”
사각사각.
다들 문제를 푸느라 연필 굴러가는 소리만 났다.
민아는 힐끔 같은 과 동기이자 대학에서 사귄 제일 친한 친구인 가영이를 보았다.
가영이는 동아리 회장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훗, 가영이는 스펙 보다는 친목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았다.
하긴 곽 선배는 얼굴이 아주 잘생기지는 않지만, 리더십 있고 키가 컸으며 몸이 좋았다.
떡 벌어진 어깨에 튼실한 팔근육을 보면 가영이가 얼굴을 붉히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리고 경제 동아리 회장답게 판단력이 뛰어나 보였다.
민아가 알기로는 가영이는 곽 선배와 단둘이 몇 번 밥도 같이 먹고 술도 마셨다.
아직 정식으로 사귀지는 않지만 썸 타는 사이.
한창 좋을 때였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조용한 동아리방에 동시다발적으로 스마트폰이 울렸다.
“던전 브레이크?”
“어디 브레이크 터졌어?”
“잠깐만!”
“우리 학교 정문 근처야!”
웅성웅성.
갑작스런 문자에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리더십 있고 판단력이 뛰어난 곽 선배가 사람들을 이끌었다.
“오늘 동아리는 여기서 끝낼게요. 정문 근처에서 발생했으면 후문 쪽으로 피해야 할 거예요. 이동합시다.”
타다닥.
던전 브레이크라니!
사람들은 짐을 챙겨 강의실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민아도 얼른 가방을 챙겨 가영이와 함께 대열에 합류했다.
그렇게 건물을 나가려는 순간, 건물 입구에 뭔가가 서 있었다.
“캬아아아악!”
크고, 징그럽고, 이상하게 생긴 몬스터였다.
“윽!”
몇몇 사람들이 당황해서 넘어졌다.
그리고 어떻게든 일어나서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민아와 가영이는 곽 선배를 쫓아 뛰었다.
“캬아아아악!”
멀리 뒤쪽에서 괴성이 들렸다.
달려가던 곽 선배가 코너를 돌더니 어느 문 하나를 열었다.
사람들이 우루루 따라 들어가자 찰칵하고 곽 선배가 문을 잠갔다.
주변을 돌아보니 제법 넓은 공간에 쇠로 된 선반이 있었고, 뭔지 모를 각종 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창고로 쓰는 곳 같았다.
지이이이잉.
민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오빠였다.
“쉿!”
곽 선배가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민아는 얼른 전화를 끄고 오빠에게 도와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오빠… 도와줘.’
민아는 오빠를 애타게 찾았다.
창고 안에서는 십여 명이 있었지만, 숨소리 빼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영이는 곽선배의 그림자가 된 듯 꼭 붙어 있었다.
곽 선배가 손가락으로 반대쪽 창문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책상 몇 개를 계단처럼 쌓아서 창문으로 나갈 탈출구를 만들었다.
쾅!
갑자기 바깥에서 뭔가가 문에 충돌했다.
사람들은 재빨리 창문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쾅!
창문을 오르던 민아는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떨어졌지만, 주울 수 없었다.
사람들이 창문으로 빠져나올 무렵 쾅 하고 문이 떨어져 나갔다.
“달려!”
* * *
천마 길드의 헬리콥터 안에는 조종수를 제외하고 일곱 명이 있었다.
갑옷을 입고 검과 도끼를 든 모습이 헬리콥터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전형적인 헌터의 모습에 믿음이 갔다.
강 트레이너도 한 명의 야만 전사의 모습이었다.
시끄러운 헬리콥터 속에서 강 트레이너가 조용히 말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마나를 담았는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김민준 헌터 동생을 구출하는 것입니다.”
“크윽.”
훈련 때 징징댄 것 취소였다.
강 트레이너에게 가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아를 무사히 구해주신다면 강 트레이너님의 가족에게도 올 명품으로 도배를 시켜드릴 마음을 먹었다.
“동생의 이름이 뭐죠?”
“김민아입니다.”
“사진이 있나요?”
나는 스마트폰을 뒤져서 간신히 가족사진에 포함된 민아의 얼굴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 외 특징이 있을까요?”
“머리카락은 어깨보다 조금 더 내려오고 안경은 쓰지 않았어요.”
“옷차림은요?”
“그건 몰라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 같아도 못 찾을 것 같았다.
그런 내 걱정을 느꼈는지 강 트레이너가 위로를 해주었다.
“여기 이 친구들 수색과 인명 구조에 특화된 인재들입니다. 믿어주세요.”
“감사합니다.”
옆에 있던 다른 길드원이 소리쳤다.
“3분 남았습니다.”
강 트레이너는 작은 종이를 나와 길드원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민준 헌터님은 탑승 훈련만 했지, 착륙 훈련은 하지 않았네요. 하지만 잘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이건 찢어서 발동하는 실드입니다. 따라 하세요. 뛰자마자 찢는다.”
“뛰자마자 찢는다. 알겠습니다.”
드르르륵!
헬리콥터의 문이 열렸다.
저 앞쪽에 대학 캠퍼스의 전경이 보였다.
이곳저곳 화재가 발생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흡사 전쟁이라도 난 듯한 모습이었다.
도로는 충돌한 자동차로 인해 아수라장이었고 곳곳에 몬스터들이 보였다.
“크으.”
저 아래에서 민아를 찾아야 했다.
“자, 준비하세요.”
헬리콥터는 속도를 줄이거나 레펠용 줄을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준비하시고, 다섯을 세면 뛰어내립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지금!”
파파파파팍!
천마 길드원 일곱은 한 몸인 것처럼 달려 나갔다.
“익!”
반 박자 늦은 것 같았지만, 나도 과감히 허공에 몸을 띄웠다.
낙하산 없는 스카이다이빙은 정말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일단 찢었다.
부우욱.
지이이잉.
실드가 내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지면이 빠르게 다가오자 본능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쾅, 쾅, 쾅…….
땅에 박히듯 강하게 충돌했다.
꾸우우욱.
급정거하는 자동차의 안전벨트에 붙들린 것처럼 몸이 실드의 껍질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쩌저적.
실드에 금이 갔다.
쨍그랑!
실드가 깨졌다.
하지만 나에게 미친 충격은 겨우 1m에서 떨어진 정도뿐이었다.
나머지 충격은 모두 실드가 흡수하고 깨져버렸다.
“소환수, 용병 다 소환!”
화아아아아악!
샤샤, 제리, 카나, 알타르, 르녹, 꾸얀까지 풀템을 갖추고 나타났다.
든든했다.
“제 여동생이 인근에 있을 거예요. 이름은 김민아, 찾아주세요.”
알타르가 주문을 외웠다.
“살아있는 생명의 위치를 알릴지어다. 파인드 라이프!”
천마 길드원들도 생명 탐지 장치를 꺼내 들었다.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리는 다시 드론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갔다.
수색에 나선 인원들은 주변에서 발견되는 리자드맨을 때려죽이며 전진했다.
일반 리자드맨은 B급 던전의 필드 몬스터로 C급 수준이었다.
천마 길드의 수색대원들에게도, 그리고 나의 소환수와 용병들에게도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천마 길드원은 일단 학생회관 안을 확인하기로 했고, 소환수들은 주변을 수색했다.
수색하다 보니 구석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흑흑, 헌터야! 살았어!”
“이 중에 김민아 씨, 있습니까?”
“아… 아니요.”
“일단 이쪽으로 내려가시면 헌터들이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 * *
민아는 어디로 달려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곽 선배만 따라서 달릴 뿐이었다.
어느새 인원은 흩어졌고, 어쩌다 보니 곽 선배와 가영이, 민아만 남아있었다.
그렇게 달리던 중 그만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
“헉헉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앞에는 키보다 높은 벽이 있었다.
“뒤돌아가야 해.”
곽 선배의 말을 듣고 뒤를 돌았다.
“캬아아아악!”
그런데 저 앞에 손에 삐뚤빼뚤한 칼을 들고 있는 괴물이 골목 입구를 막고 있었다.
앞에는 괴물, 뒤에는 막다른 벽이었다.
그때 곽 선배가 점프해서 막다른 길의 벽 끝을 잡았다.
그리고 울룩불룩한 팔근육으로 벽 위에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민아와 가영이는 곽 선배를 향해 손을 뻗쳤지만 곽 선배의 시선은 괴물을 향하고 있었다.
꿀꺽.
곽 선배가 침을 삼켰다.
“캬아아아악!”
순간, 담 아래에서 곽 선배를 올려다보는 가영이와 그런 가영이를 내려다보는 곽 선배의 눈이 마주쳤다.
흔들.
잠시 눈빛이 흔들리던 곽 선배는 그대로 담 저편으로 사라졌다.
곽 선배를 향해 손을 뻗치고 있던 가영이는 그대로 굳었다.
“아…….”
가영이는 몬스터에 대한 공포와 버려진 충격에 그저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도마뱀처럼 생긴 괴물은 막다른 길에 몰린 먹이라는 듯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주춤주춤.
민아는 괴물을 보며 뒷걸음질 치다가 등을 벽에 부딪혔다.
덜덜 떨고 있는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타닥.
괴물이 달려오더니 손에 든 칼을 휘둘렀다.
“꺅!”
쾅!
눈을 질끈 감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쾅!
뭐지?
민아와 가영이의 주변에는 반투명한 막이 감싸고 있었다.
“카륵?”
쾅! 쾅! 쾅!
그래도 반투명한 막은 부서서지 않았다.
실드였다.
“민아야, 이 실드는?”
“가방! 가방에 실드가 내장되어 있다고 했었어!”
민아의 등에는 어느새 내용물이 비워진 가방이 활짝 열린 채 매달려있었고, 그 가방에서는 실드와 이어진 빛이 이어지고 있었다.
쾅! 쾅!
하지만 괴물 세 마리가 소리를 듣고 합류했다.
민아와 가영이는 괴물 네 마리에 둘러싸였다.
쾅! 쾅! 쾅!
뒤쪽은 벽이고 앞쪽에서는 실드를 두드리는 괴물들이 있었다.
실드를 믿고 어떻게 빠져나가 보려 했지만, 완력으로는 한 걸음도 밀어낼 수 없었다.
쩌저적.
계속 내리치는 타격에 실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
쨍그랑!
결국 실드가 깨져버렸다.
“민아야!”
“가영아!”
민아와 가영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몬스터의 마지막 일격을 기다리며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몬스터의 공격이 없었다.
민아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떠보니 보라색 털을 가진 등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누가 민아냥?”
* * *
나는 제리의 연락을 받고 골목으로 달려갔다.
샤샤, 카나, 꾸얀, 르녹, 알타르 역시 골목에 함께 도착했다.
골목 끝에서는 리자드맨 네 마리가 제리와 싸우고 있었다.
제리는 탱커보다는 어쌔신에 가까웠다.
이렇게 누군가를 보호하며 앞을 지키는데 적절하지 않았다.
제리의 뒤에서는 두 여학생이 주저앉아 있었다.
도와주려고 내가 바인드를 날리기도 전에 소환수와 용병들의 공격이 날아갔다.
피이이잉!
샤샤의 화살이 리자드맨 한 마리의 머리를 꿰뚫었고.
파파파팍!
카나의 칼날 방패가 리자드맨 한 마리를 반으로 갈랐다.
화르르륵!
알타르가 한 마리를 불태웠으며, 르녹과 꾸얀의 검이 서로 먼저라는 듯 리자드맨 꼬치를 만들었다.
리자드맨 네 마리 정도는 순삭이었다.
“하아, 드디어 찾았네.”
나는 동생을 크게 불렀다.
“민아야!”
내 목소리에 두 소녀가 달려왔다.
풀썩.
그리고 민아가 내 품에 안겼다.
나는 내 품에서 훌쩍거리는 민아를 다독여 주었다.
“그래, 민아야. 무서웠지?”
민아가 내 품속을 더욱 파고들었다.
“그래, 많이 무서웠구나.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
흠칫!
그런데 순간 살기가 느껴졌다.
남은 몬스터인가?
고개를 드니 민아가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입 모양이 뭔가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내 품속에 민아가 있는데, 저건 또 무슨 민아인가?
저건 설마?
“도플갱어?”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