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갸악
차지율이 누구인가?
국내에 5명뿐이라는 S급 헌터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강한 길드를 꼽을 때, 한 손에 꼽히는 천마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차지율은 깔끔한 외모와 천마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신분, 그리고 S급 헌터라는 실력으로 인해 방송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어지간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천마 길드는 특히 근접전 위주의 헌터들이 선망하는 길드였다.
말을 키우려면 제주도로 보내고, 딜탱을 키우려면 천마로 보내라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천마 길드는 탱커나 근접 딜러가 강했다.
보유한 헌터가 강하려면 원래 강한 헌터를 스카웃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가입한 헌터들을 잘 키워줘야 오랫동안 강한 길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천마 길드는 근접 물리 계열 헌터를 키우는 데는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길드였다.
오래전 길드 가입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때, 강해지고 싶으면 천마 길드로 오라던 홍보 문구가 생각났다.
그런 길드의 길드장이 뜬금없이 사무실에 방문했다.
나는 이제 중소기업 사장이 정도가 되었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대기업 회장님이 방문한 셈이었다.
나는 주로 글리제에서 활동하니, 딱히 천마 길드와 얽힌 것이 없어서 굽신거릴 필요는 없지만, 갑자기 나타난 S급에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차지율과 함께 사무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래도 손님이 왔는데 뭐라도 내어드려야 했다.
“일단 이거 한잔 드세요.”
“잘 마시겠습니다.”
꿀꺽.
차지율의 눈이 살짝 커졌다.
“피토니라고 지구의 음료가 아니에요. 처음 맛본 사람들은 그렇게 깜짝 놀라곤 하죠.”
“오호, 이거 귀한 대접을 받았군요.”
한상일이 피토니를 깎아서 예쁘게 담아왔다.
슬쩍 차지율을 바라보고 다시 나를 보며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것이 뭔가 큰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하긴 직원 입장에서 사장이 갑자기 대기업 회장님과 독대하고 있으니 회사가 성장할 기대를 할 법도 했다.
하지만 막상 나는 차지율이 왜 왔는지 몰랐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헌터 게시판 구인란에 용병을 모집한다고 올리셨죠?”
“네.”
“용병에 관심 있어서 왔습니다.”
“정말요?”
헌터 게시판에는 구인, 구직란이 있었다.
일회성 파티에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기도 하고, 장기간 함께 던전을 돌 멤버를 구하기도 했다.
나는 용병 스킬을 고등급 헌터에게 써보고 싶어서 구인란에 용병 구함이라고 글을 올렸었다.
동서 형님, 나리, 종구 등이 있어서 중간급 헌터들이나 일반인들은 여러 번 해보았는데, A급 이상 헌터를 용병 계약해서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소환수도 그렇지만, 용병들도 몬스터를 사냥하면 그 경험치가 나에게 분배된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레벨의 용병이 몬스터를 사냥할 때와 나보다 고레벨의 용병이 몬스터를 사냥할 때, 어느 쪽이 나에게 더 경험치를 더 많이 주는지 아직 몰랐다.
고레벨 몬스터가 경험치를 많이 주지만, 파티원과의 레벨 차이가 너무 심하면 저레벨 헌터의 기여율이 떨어져 저레벨 헌터에게는 경험치를 얼마 주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레벨 차이와 기여율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구인란에 글을 올렸지만, 등급이 높은 헌터를 원한다고 해서 그런지 신청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샤론 길드와 저희 천마 길드가 앞으로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우호요?”
“네, 길드 간에 서로 돕자는 것이지요. 우호의 의미로 MOU를 맺으면 어떻겠습니까?”
“MOU요?”
조직 간의 양해 각서를 쓰자는 말이었다.
MOU라는 것이 뭔가 법적인 구속력은 없지만, 잘 지내보자는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MOU라 하면 어떤 내용을 약속하자는 건가요?”
“함께 던전을 돌자. 서로 협력하자. 뭐 그런 상징적인 의미죠. 사실 MOU라는 것이 실제로는 저희끼리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는 없죠. 다만 MOU를 맺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다른 길드에게 제가 찜해두었음을 알리는 의미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아, 나 찜 당하는 건가?
“그런데, 왜요?”
차지율이 나를 찜한다는 게 나쁠 이유는 없지만 왜 S급이 나를 찜한다는지 의아하긴 했다.
“일단 용병이라는 것 자체에 흥미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샤론 길드는 뭐랄까. 조금 특별하더군요. 헌터 마켓에 올린 음식들은 저도 구매해서 먹어 보았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스텟 자체를 높여주는 음식이란 점이 꽤 놀라웠습니다.”
하긴 맛도 능력도 뛰어난 음식이었다.
헌터 마켓에 올린 음식들은 처음에는 사람들이 잘 몰랐지만, 이제는 올리는 족족 팔려나갔다.
그래서 슬슬 가격을 올릴까 하던 참이었다.
“일단 제가 여기 온 가장 큰 이유는 용병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 온 건데, 저에게 용병을 걸어주시겠어요?”
S급 용병이라니,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알파야, 이분에게 용병 계약을 제안해 줘.”
―네.
차지율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알파의 귓말을 듣는 것 같았다.
[차지율 님과 용병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되셨죠?”
“네,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들리는군요. 마법인가요?”
“음, 마법이라기보다는 시스템? 본인은 도우미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용병의 기능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우선 선물함부터 열어 보시죠. 선물함이라고 해보세요.”
“선물함.”
차지율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선물함을 살피는 것 같았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물건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호오, 인벤토리가 제법 크네요. 저희 길드에도 아공간 아이템이 두 개가 있는데, 그것들보다 용량도 크고 좋네요.”
차지율은 선물함을 인벤토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거 인벤토리 아닌데요?”
“네?”
“선물함이에요.”
“그게 뭐죠?”
“제가 선물을 넣어줄 수 있어요.”
나는 테이블에 있는 빈 찻잔을 차지율의 선물함에 넣어주었다.
“인벤토리는 본인이 물건을 넣고 빼고 하는 것이죠. 선물함은 인벤토리의 기능도 되지만 제가 선물을 넣어줄 수 있는 특징이 있어요.”
“멀리서도 가능한가요?”
“그렇죠?”
“얼마나 멀리서, 얼마나 많은 양이 가능하죠?”
이 사람도 선물함의 전략적인 요소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하긴. 선물함이 없었으면 예전에 헬른성에서의 전투가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다.
그때 수천 명의 보급을 샤샤와 제리가 책임졌으니, 선물함이 보급과 관련된 부분에서만큼은 대단한 기능이라 할 수 있었다.
“지구 바깥 다른 세상에도 전달할 수 있고요, 선물함에 쌓인 물건을 비워주기만 하면 제가 계속 넣을 수 있어요. 제가 소환수들하고 대량의 물건을 이동시키는 연습도 제법 했죠.”
“그렇군요. 아주 좋네요. 그럼 저를 던전으로 이동시켜주실 수 있나요?”
“그럴까요? 잠시만요. 알파야, 화면 좀.”
나는 지금 소환수들이 뭘 하고 있나 살펴보았다.
샤샤, 제리, 카나, 동서, 나리, 르녹, 꾸얀이 열심히 사냥 중이었다.
사냥조들이 오늘도 열심히 사냥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어이쿠.
마침 나의 레벨도 올라 흐뭇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여러분~]
[네, 민준 님.]
[네, 오빠.]
[야옹.]
내가 부르자, 가지각색의 대답이 들려왔다.
[저기 지금 용병 한 명 더 보내드릴게요. 천마 길드 길드장님이신데 S급이에요.]
[헉.]
[헐.]
[와우!]
돌아보니 차지율은 화면을 보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지구 바깥 글리제라는 아주 먼 세상이에요. 구체적으로는 프란시아 왕국의 트란 산맥. 쉽게 말하면 제 개인 던전이랍니다.”
“와, 이거 샤론 길드, 알고 보니 실속 길드였군요.”
“하하, 그런가요? 일단 용병 경험해 보시죠. 알파야, 차지율 헌터님을 샤샤에게로 보내드려.”
―네, 알겠습니다.
파앗!
차지율이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트란 산맥으로 소환된 차지율 앞에는 여러 헌터들이 사냥을 하고 있었다.
화면으로 보긴 했지만, 이렇게 소환되어 직접 보게 되니 신기했다.
“타앗!”
“파이어 애로우!”
“냥!”
차지율은 잠시 몬스터를 잡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궁수가 몬스터의 급소에 정확히 화살을 꽂아 넣고 있었으며, 방패를 든 헌터는 칼날이 달린 방패를 던져 몬스터를 도륙했다.
“오호.”
순간 자신도 기척을 한 박자 늦게 파악한 어쌔신이 몬스터의 배후에서 클로를 찔러 댔다.
차지율쯤 되면 한두 동작만 보아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익스퍼트 최상급도 두어 명 있는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샤론 길드는 놀라웠다.
어떻게 이런 길드가 지금까지 소문이 나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아마도 이곳 개인 던전 위주로 활동해서 그럴 것 같았다.
자신이 보아도 이렇게 뛰어난 점이 많은 길드인데, 다른 헌터들과 교류가 많았다면 벌써 소문이 났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몬스터를 다 잡고 나자 차지율과 인사를 나누었다.
“꺅! 안녕하세욧! 팬이에요.”
나리가 얼굴이 빨개지며 소리쳤다.
“네, 반갑습니다. 차지율이라고 합니다.”
“와, S급.”
“저희는 몬스터 사냥 중이었어요. 함께 하시나요?”
“네, 좋습니다.”
그때, 차지율의 귓속에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2시 방향에 트롤이 두 마리가 있네요.]
“차지율 헌터님! 팬 서비스 좀 해주세욧. 군림보! 군림보!”
나리가 뒷짐을 지고 스텝을 밟는 시늉을 했다.
“하하, 알겠습니다. 머릿속에서 소리가 들리니 좋네요. 민준 헌터님이 커맨더이신 건가요? 용병을 보내고, 화면으로 보면서 지시를 내리는군요. 아주 좋네요. 2시 방향으로 가시죠.”
2시 방향으로 조금 걷자 트롤 두 마리가 보였다.
“캬아아아악!”
자신들의 영역에 나타난 인간들을 보며 화가 난 트롤이었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S급이 마중을 나갔다.
차지율이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뒷짐을 지고 트롤의 머리 위쪽으로 공중에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분명히 허공인데 평지처럼 걷듯이 아니 빙판 위를 스케이트 타듯이 활보했다.
뿌각!
뿌드득!
차지율이 트롤의 머리 위쪽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트롤이 뭉개지고 있었다.
이건 싸움이라기보다는 그냥 밟아 죽이기였다.
역시 천마의 걸음으로 유명한 군림보였다.
“꺅! 오라버니, 멋져욧!”
언제 나리의 오라버니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지율은 편안하게 트롤 두 마리를 눌러 죽이고 돌아왔다.
[차지율 헌터님, 수고하셨습니다. 힐이 필요 없으시겠지만, 테스트 차원에서 힐도 넣어 드릴게요.]
화아악!
[민준 헌터님, 선물함도 테스트해볼 수 없을까요? 가급적 부피가 큰 것으로 하나 보내주세요.]
[네, 보냈어요.]
차지율은 선물함에서 커다란 소파를 꺼냈다.
이건 조금 전까지 사무실에서 차지율이 앉아있던 소파였다.
[훌륭하네요. 저를 지구로 다시 불렀다가 이곳으로 보냈다가를 몇 번 왕복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차지율은 꼼꼼하게 용병 스킬을 점검했다.
그렇게 테스트를 마치고 다시 나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안 되겠습니다. MOU가 아니라 지분 교환을 해야겠습니다.”
“네?”
“각각 5%씩 교환하죠.”
“천마 길드 지분 5%와 샤론 길드 지분 5%를 맞교환하죠. 지금은 천마 길드가 규모가 크지만, 샤론 길드도 알짜군요. 서로 지분을 교환하면 어중이떠중이들은 근처도 못 올 겁니다. 제가 곧 샤론 소속이라는 뜻이니까요.”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차지율은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중국 산둥반도에 S급 던전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던전의 보스는 방어 무시 궁극기를 보유하고 있죠. 그 궁극기는 막을 수도 없고, 꽤 먼 거리까지 나가기 때문에 싸움을 하다가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레이드가 세 번이나 실패했죠. 지금까지의 생존자는 생명력 자체가 큰 탱커뿐이었습니다. 지금은 보스가 보이면 도망 다니면서 꾸준히 몹을 정리해 던전 브레이크만 면하고 있지만, 아슬아슬합니다. 그런데 민준님의 용병 스킬을 경험해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싸우다가 보스의 궁극기가 나올 것 같으면 저를 소환해 주시고, 궁극기가 지나가면 다시 제가 가서 싸웁니다. 그런 방식이라면 방어 무시 궁극기도 회피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설명한 방법이 가능할 것 같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차지율의 아이디어가 가능할 것 같았다.
“아, 네. 소환수가 함께 가서 쌍으로 소환하고 소환 취소하고 해야 할 것 같고. 또, 지구는 제가 화면으로 보지 못하고 쪽지만 할 수 있긴 한데, 어쨌든 말씀하신 방법이 가능은 합니다.”
내 긍정적인 답변에 차지율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제가 너무 첫 만남에서 들이대는 것 같지만, 용병을 경험해 보니 신세계군요. 저희 두 길드의 지분 교환을 긍정적으로 고려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네.”
“천마 길드가 왜 강한지 아십니까? 제가 S급이기도 하지만 A급들도 줄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례지만, 민준님의 레벨이 얼마시죠?”
“네, 46이요.”
“부지런히 올려야겠습니다. 그래도 A급은 되어야 S급 던전에 들어가죠.”
“S급 던전에… 제가요?”
차지율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일단 추궁과혈부터 하죠. 자랑은 아니지만, 추궁과혈 때문에 들어오는 신입 헌터들도 많습니다. 처음 추궁과혈을 받는 헌터들은 스텟이 10 정도 오릅니다. 여기 소파에 엎드리시죠.”
“예?”
어쩌다 보니 나는 소파에 엎드려 마사지를 받는 모양새가 되었다.
S급 헌터의 마사지라니 이런 호사를 받아도 되나 싶었다.
“추궁과혈!”
추궁과혈이 스킬이었어?
고개를 돌려본 차지율의 열 손가락에 마나가 어렸다.
“조금 아플 수도 있습니다. 갑니다.”
우두둑!
“갸악!”
아프다는 말은 왜 마지막에 하는 거냐고!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