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다음은?
타지프는 디아론성에 좀비를 풀고 결계 속에서 암흑의 마나가 충만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며칠을 기다려도 암흑의 마나가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어디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암흑의 마나가 되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좀비는 전염성이 강해서 이 정도 퍼트렸으면 벌써 난리가 났어야 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 것은 좀비를 죽이면 그것도 나름대로 하나의 죽음이라서 약간의 죽음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마련인데 그런 기운마저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건 마치 좀비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 같았다.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교황국의 성녀 정도 되는 인물은 좀비를 치유하거나 죽음의 기운이 흘러나오지 않게 완전히 승화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설마 이곳에서 성녀라도 탄생한 건가?
“이 영지는 뭔가 이상해.”
수도나 소드마스터 급의 초인이 머무는 영지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이 영지는 뭔가 이해가 안 되었다.
“윽.”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마족과의 계약기반으로 암흑의 마나를 받는 것이지만, 그것도 대가가 필요했다.
무작정 마계에서 받기만 하다가는, 이렇게 젊은 육체를 빼앗아놓고 마족에게 몸과 영혼을 빼앗겨버릴 수도 있다.
스스로 충당할 수 있는 건 충당하고 제물도 충분히 있어야 했다.
하지만 뭔가 시작부터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타지프는 나름 현자라 불리는 7서클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답에 가까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군. 디아론 영지는 그가 머무는 영지였군.”
타지프는 디아론 영지가 공간을 넘어 보는 자가 머무는 영지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설명이 되었다.
“클클클, 그래. 그 정도 되는 인물이 머무는 곳이라면 그럴 수 있지.”
타지프는 결계를 열고 일어났다.
“잘 있게나. 내 이곳 영지는 넘어가겠네. 하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넘어가지는 않을 걸세.”
타지프는 디아론 영지를 포기하고 남동쪽으로 이동했다.
디아론 영지에서 동쪽으로 가면 프란시아의 수도가 있었다.
아무리 타지프라고 해도 수도는 위험했다.
7서클의 스피오크와 소드마스터 헬른 공작이 머무르고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전력이 있을 것이었다.
어둠의 마나를 얻으려 하다가 괜히 덜미를 잡히는 수가 있었다.
타지프는 디아론 영지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 수도를 우회하고 다시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일주일 후.
저 멀리 디아론성보다 더 커다란 성이 보였다.
다그닥. 다그닥.
그때 길을 걷는 타지프의 옆으로 마차가 다가왔다.
“헬른성으로 가시는 분이신가 보죠?”
마차에 탄 누군가가 타지프에게 말을 걸었다.
타지프는 말을 건 쪽을 바라보았다.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의 앞자리에는 허름한 밀짚모자를 쓴 나이 든 마부가 말을 끌고 있었다.
마부가 앉은 자리의 뒤쪽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지붕이 없는 마차에 앉아있었다.
성에서 먼 농지까지 이렇게 마차를 타고 오가며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었다.
마차의 농부 중에는 여성이 더 많았는데 그중 한 명이 말했다.
“빌리! 마차 좀 천천히 몰아봐. 성으로 가시나 보죠? 걸어가시면 한참 걸려요. 타세요.”
아낙들은 타지프의 얼굴을 보며 다 들리도록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어머, 어머. 봤어? 봤어?”
“어머, 얼굴 봐. 너무 잘생기셨다.”
타지프는 순간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던지 떠올려 보았다.
적어도 수십 년 동안은 없었다.
왜 예전부터 라우 공작이 허세가 넘치고 재수가 없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신선한 느낌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크크크크크.”
“호호호호호호, 웃음도 호탕하셔라~”
너무 웃겨서 다 낫지 않은 옆구리가 결릴 정도였다.
자신이 헬른성에 뭘 하러 가는지 이들이 알까?
타지프가 웃으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손에서 검은 구름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머, 재주꾼이신가 봐요. 그렇죠?”
검은 구름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비컴 좀비즈.”
* * *
“34개.”
“40개요.”
“35개.”
“40개라니까요.”
이익!
디아론 백작은 좀비 치료 주문서의 가격을 놓고 카타리나와 줄다리기를 했다.
“아빠, 아빠니까 내가 싸게 해드리는 거예요. 아빠 솔직히 물어볼게요. 한 번 언데드가 되었는데, 그걸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어요?”
없지. 하지만 없다고 답하면 카타리나의 언변에 말려들 뿐이다.
“있다.”
“있다고요?”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있어. 저기 교황국의 성녀님은 언데드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신다고 하더구나.”
“와! 그럼 이게 무려 성녀님 수준이라는 것이군요!”
말이 그렇게 되나?
“아빠, 영지에 발생한 좀비는 다 치료했잖아요. 지금 좀비 사태가 끝나지 않았다면, 저도 이렇게 아빠와 실랑이를 하지 않았죠. 당연히 영지민이 우선이죠. 하지만 영지에 좀비도 없는데 치료 주문서를 원하시는 건 결국 아빠도 미래를 위한 투자용이시라는 거잖아요. 그럼 투자할 때 과감히 투자를 하셔야지요.”
“지금 좀비가 더 나오지 않은 것은 맞다. 허나 며칠 지났다고 좀비 사태가 끝났다고 단정하긴 이르지. 밤나무 마을도 그렇고, 이곳 성에서도 발생했다. 여분이 없다면 몰라도 이렇게 눈앞에 있는 것을 확보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오게.”
마법사 징크가 들어오며 말했다.
“헬른성의 캐이믹 백작에게서 무선통신이 들어왔습니다.”
무선통신? 마법통신구가 아니라 무선통신이면 소환술사라는 자가 설치해준 그 장치다.
그 장치로 인해 디아론 영지, 수도, 헬른, 삼각성은 쉽고 편하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무슨 일이라고 하던가?”
“헬른성에서도 좀비가 퍼진 모양입니다.”
“허어, 거기도 좀비가 퍼졌나 보군.”
“그런데 캐이믹 백작이 저희 영지의 소문을 들은 모양입니다.”
“소문?”
“예, 저희 영지에도 좀비가 퍼졌었는데, 모두 사람으로 완치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더군요. 자기들도 도와달라고 합니다.”
소문 한번 빨랐다.
그런데 도와달라고 해봤자 치료 주문서는 아직 카타리나의 손에 있었다.
“카타리나야 어쩌겠느냐?”
“잠시만요. 마스터에게 물어볼게요.”
카타리나가 허공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
“알았어. 그럼 마스터에게 ‘카나 좀 소환해 줘’라고 전해줘.”
잠시 후, 카타리나가 백작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백작은 잠시 생각을 했다.
카나는 카타리나가 어릴 때 부르던 애칭이었다.
킴 준남작은 카타리나를 카나라고 부르며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작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타리나에게 소환수의 모집 시험에 참여하라고 한 건 백작 자신이었다.
작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이 큰 영주와 우호의 증표로서 딸을 보내는 큰 그림.
좀비 치료 주문서만 보더라도 자신의 생각은 분명히 옳았다.
혈맹보다 더 튼튼한 안보가 또 어디 있을까?
디아론 백작은 모든 일은 분명히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나…….”
그런데 왜 기분이 씁쓸한 걸까?
* * *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나에게 카타리나의 쪽지가 왔다.
[민준~]
[어, 카나야, 왜?]
[헬른성에서도 좀비가 나타났대. 연락이 왔는데 도와달래.]
[좀비 치료 주문서가 얼마나 남았지?]
[지금 40장.]
[그래, 그럼 이리 와서 나 줘. 제리한테 배달하라고 할게. 그리고 추가 주문도 해야겠네.]
[알았어. 카나 좀 소환해줘.]
“카나 소환.”
화아악.
카타리나가 소환되었다.
“민준, 여기.”
카타리나가 디아론성에서 쓰고 남은 좀비 치료 주문서를 건넸다.
“제리야~”
“냥.”
창고 어디선가 제리가 나타났다.
“제리야, 드론으로 배달 좀 해야겠다.”
“어디로 가냥?”
“응, 헬른성에 좀비가 퍼졌대. 아무래도 같은 종류의 좀비일 것 같아. 좀비 치료 주문서를 헬른성으로 보내줘야 할 것 같아. 헬른성은 가봐서 알지? 나도 화면으로 보면서 따라갈게.”
나는 제리를 글리제로 보내고 병원에 연락해 좀비 치료 주문서를 추가 주문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주문이라서 그런지 병원에서는 빨리 줄 수 있다고 했다.
“상일 씨.”
“예.”
“병원에서 네 시간이면 좀비 치료 주문서를 만들어줄 수 있다고 하거든요. 빨리 받아와야 할 것 같아요. 급해서 그런데 부탁 좀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사무실 한쪽에 늘 켜져 있는 화면을 보았다.
“알파야, 제리 쫓아가.”
―네.
위이이잉.
화면상에서 드론 제리가 글리제의 하늘을 시원하게 날았다.
드론 제리는 가끔 흔들거렸는데, 그 때문에 화면으로 보면 마치 3D 1인칭 롤러코스터를 타는 모습 같았다.
카타리나는 글리제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화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와, 꼭 내가 저 이상한 기계를 타고 날아가는 것 같아. 제리는 대단하네. 하늘을 날고.”
“카나, 제리가 하늘을 날아서 부러워?”
“아니야. 나도 기사 과정일 때, 플라이 마법을 경험해 봤어. 마법사가 플라이를 걸어주면 하늘을 날아서 적에게 침투하거나 빠져나오는 것이지.”
기사라고 하더니 헬기 레펠 비슷한 걸 해본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화면을 보니 멋지네. 평생 살아온 왕국이지만,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다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조금 더 위로 올라가 볼까?”
“응?”
“새로운 장소에 가면 높은 곳에 올라가 그 장소를 파악하라. 너 기사 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훈련받았다며?”
나는 줌아웃을 해서 화면을 점점 위로 올렸다.
드론 제리는 점점 작아져서 점이 되었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커다란 산과 강도 점점 작아져 점과 실이 되었고 또 그 실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검은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둥글고 연갈색으로 보이는 글리제.
글리제가 작은 유리구슬이 될 때까지 화면을 위로 올렸다.
나는 그 갈색 유리구슬을 손으로 가리켰다.
“예쁘지? 이게 네가 사는 글리제야.”
응? 카나가 가만히 있어서 살펴보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긴. 옛날에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면 유언비어 유포죄로 처형당하던 시절이 있다던데, 처음 자신의 행성을 보면 신기하겠지.
“민준. 나 소름 돋았어.”
“이해해.”
카나는 글리제를 보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민준은 신이야?”
쿨럭.
신이라니?
“아냐, 높은 곳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야. 나는 소환술사, 카나는 소환수.”
잠시 카타리나가 충격에서 회복할 시간을 준 후 다시 제리를 중심으로 화면을 맞추었다.
제리는 열심히 동쪽으로 이동했다.
몇 시간 후, 제리가 헬른성에 도착했다.
띠링!
[여기 캐이믹 백작이란 사람에게 좀비 치료 주문서를 넘겼당.]
[어, 잘했어. 거기서 조금 있어 봐. 추가 주문서 들어오면 선물함으로 넣어줄게.]
[알았당.]
[제리야. 치료 주문서가 좀비에게 잘 적용되는지 확인해볼래?]
[알았당.]
잠시 후, 제리의 쪽지가 왔다.
[치료 주문서가 좀비에게 잘 통한당. 주문서 한 장이면 좀비 한 마리가 사람으로 돌아온당.]
[오케이, 땡큐.]
“카나야,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아? 좀비 말야. 지금 제리가 들고 간 치료 주문서는 모든 좀비를 치료하는 게 아냐. 특정 좀비를 샘플로 해서 치료 주문서를 만든 거야.”
“특정 좀비?”
“그래. 밤나무 마을에 좀비가 나타났을 때, 그걸 샘플로 치료 주문서를 주문 제작해서 복사해서 쓰고 있어. 그런데 밤나무 마을 좀비로 만든 치료 주문서가 디아론 백작성의 좀비들에게 잘 적용되었어. 그런데 그건 거리가 가깝기도 하니까 밤나무 마을에서 생긴 좀비가 디아론성까지 퍼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 그런데 치료 주문서가 헬른에서도 잘 들어. 그 말은 밤나무 마을과 디아론, 헬른 백작성의 좀비가 같은 종류라는 것이지.”
“그게 무슨 뜻이야?”
“조금 의심이 된다는 거지. 밤나무에서 디아론으로 그리고 다시 헬른. 밤나무 마을에서 디아론까지야 그렇다 쳐도 헬른은 제법 거리가 있어. 중간에 수도도 있지만 그건 생략. 뚝 떨어져서 헬른에 같은 종류의 좀비가 나타난다? 뭔가 냄새가 나지 않아?”
“아! 누군가 동쪽으로 가고 있구나!”
“그런 것 같아. 밤나무 마을에서 디아론으로, 수도는 건너뛰고 다시 헬른.”
“수도는 왜 건너뛰었을까?”
“나는 수도를 건너뛰었다는 게 제일 부자연스러웠어. 좀비가 자연적으로 퍼진 거라면 수도에도 퍼졌어야지. 거기에 사람이 제일 많은데. 안 그래? 누군가 인위적으로 좀비를 퍼트리는데 그 퍼트리는 작업을 하기가 수도는 좀 부담스러웠던 거지.”
“아, 좀 만만한 데만 퍼트리면서 간다? 그러면 다음번 예정지도 알 수 있겠네?”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있지. 헬른에서 동쪽이면?”
나는 말보다는 눈으로 보여주었다.
헬른성을 비추고 있던 화면을 축소하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헬른의 동쪽에 세모난 모양의 성이 있었다.
“어떤 놈이 좀비를 퍼트리면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면 놈의 다음번 예정지는 이곳일 가능성이 크지.”
카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삼각성이야.”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