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카타리나
넓은 동굴.
천장에는 종유석이 매달려있고 지면에는 석순이 솟아나 있었다.
또옥.
종유석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떨어지며 바닥에 물이 고인 부분에 떨어졌다.
비교적 편평한 공간도 많고 동굴 안에 물이 있어서 은신처로 삼기 적당한 공간이었다.
이곳을 점유한 다른 몬스터가 있었지만, 트란 산맥에서 힘으로 다른 몬스터의 공간을 빼앗는 것은 늘 일어나는 일이었다.
신기하게도 동굴 벽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작은 돌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작은 마정석이었다.
마정석 자체가 빛을 내지는 않지만, 어째서인지 마정석이 은은한 빛을 냈다.
동굴 안쪽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바닥에 앉아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바닥에 누워있었다.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 주변으로는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으며, 여러 개의 마정석이 박혀 있었다.
마정석은 하나하나가 대형 몬스터를 잡아야 나올만한 크기였다.
앉아있는 사람은 노인이었다.
쭈글쭈글한 주름진 얼굴, 검버섯이 잔뜩 핀 얼굴로 두 눈을 감고 무언가 중얼거리는 노인.
그는 베이론 왕국의 7서클 마법사 타지프였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있는 젊은 남자.
헬른 공작에게 크게 당했던 베이론 왕국의 소드마스터 라우 공작이었다.
그러고 보면 헬른성의 전쟁도 꽤 시간이 흘렀다.
타지프는 왜 트란 산맥에 있는 것일까?
타지프는 자신의 늙어가는 몸이 머지않아 멈출 거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늙었는데도 너무나 탱탱한 육체인 라우 공작의 몸이 너무 탐났다.
그리고 우연히 그 몸을 차지할 기회가 생겼다.
상처를 입은 라우 공작을 데리고 베이론 왕국으로 돌아간다면?
왕국의 유일한 공작이 부상을 입었으니 온갖 인물들이 공작을 치료할 테고 타지프는 당연히 라우 공작의 몸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타지프는 왕국과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죽음과 생명의 이질적인 기운이 넘치는 곳.
다양한 식물과 광물, 몬스터가 많아서 재료 수급이 원활한 곳.
마나가 고이는 마나의 맥이 존재해 고난이도 마법진을 발동하기 좋은 명당이 존재하는 곳.
타지프는 트란 산맥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소울 체인지를 위한 준비를 했다.
타지프가 주문을 외웠다.
“만악의 근원이시여, 어둠의 지배자시여, 여기 제물을 바치니 두 영혼을 바꿔주소서. 소울 체인지.”
바닥에 있던 마법진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휘이이익.
동굴 안을 회오리치는 바람.
다량의 마나가 회전하며 생긴 마나의 바람이었다.
마법진은 검은 구름을 토해내더니 두 사람의 몸을 덮었다.
꿀렁꿀렁.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검은 구름이 사라지고 앉아있던 늙은 타지프의 몸이 서서히 부서져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누워있던 라우 공작이 눈을 떴다.
라우 공작은 허리를 세워 몸을 일으켰다.
두 손을 눈높이만큼 들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미러.”
눈앞에 반투명한 거울이 나타났다.
이리저리 거울을 보며 얼굴을 살폈다.
덥수룩하게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매.
하얀 피부와 오뚝한 코, 다부진 입매.
“크크크크, 하하하하하하!”
라우 공작의 몸을 차지한 타지프는 동굴 안에서 한참을 웃었다.
라우 공작… 아니, 타지프는 동굴 밖으로 나왔다.
동굴 밖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타지프는 두 손을 펼쳐 햇살을 만끽했다.
즐거웠다.
푸르른 숲속을 뚫고 내리쬐는 햇살을 만끽하는 젊고 잘생긴 남자의 모습은 한편의 수채화 같았다.
“하하하하, 젊고 싱싱한 몸을 얻으니 기분이 날아갈 듯하군.”
하지만 타지프가 소드마스터의 몸을 차지했다고 해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소드마스터의 몸을 차지했다고 해서 소드마스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몇 번이나 얻어야 했다.
운이 좋으면 왕국에서 백 년에 한 명 배출된다는 소드마스터.
그 몸을 차지했다고 바로 오러 소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타지프는 원래 쓰던 7서클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원래 타지프의 몸속 심장에 있던 마나 고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몸을 바꿨으니 마나 고리도 없고 그렇다고 소드마스터도 아닌 상태.
부스럭.
타지프의 웃음소리가 너무 컸었나?
하이에나를 닮은 몬스터인 놀 한 마리가 풀숲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캬아아아아!”
타지프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놀.
오러 소드도 7서클 마법도 쓸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타지프는 놀이 가소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패럴라이즈.”
타지프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무언가.
반투명하고 흰 악령의 모습이었다.
악령은 놀의 몸을 휘감았다.
“크아아아!”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는 놀.
잠시 후 놀은 눈을 뒤집고 흰자를 보이며 혀를 내민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타지프는 7서클의 마법사이긴 했지만, 영혼을 다루는 소울 체인지는 쉬운 마법이 아니었다.
또한 어찌어찌 소울 체인지가 성공하더라도 소드마스터도 아니고 7서클 마법사도 아닌 애매한 상태가 될 것도 뻔했다.
이곳은 트란 산맥.
기껏 소드마스터의 몸을 얻고 몬스터에게 당한다는 것도 웃긴 일 아닌가?
그래서 그동안 준비한 것은 마족과의 계약을 이룬 흑마법사가 되는 일.
기존에는 스스로 마나를 쌓아 마법을 발휘했다면, 이제는 마족과의 계약을 통해 어둠의 마나를 얻어서 마법을 발휘한다.
또한 마족과의 계약은 영혼에 각인되는 것.
타지프의 몸에서 라우 공작의 몸으로 넘어간다 해도 변하지 않았다.
또한, 영혼을 매개로 하는 흑마법으로 완전히 전향하므로 인해 소울 체인지를 더 안정적으로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타지프는 신상을 구매한 사람처럼 라우 공작의 몸 곳곳을 확인했다.
“음… 조금 아쉽군.”
소드마스터의 신체를 얻었는데, 뭐가 아쉽다는 걸까?
“그때 헬른 공작에게 베인 부분이 완전치가 않아.”
검으로 배를 절반 이상 갈렸으니 일반적이었다면 죽었어야 할 부상이었다.
물론 타지프가 즉시 응급처치를 하고 치료했다면. 지금쯤은 완치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타지프는 소울 체인지가 준비될 때까지 라우 공작을 가수면 상태로 유지했다.
완치를 시키면 라우 공작이 깨어날 테니 자신이 그 몸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라우 공작을 치료하지 않고 가수면으로 유지한 기간이 길어서인지 타지프는 현재의 몸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마치 명품 신상을 구입했는데 커다란 흠집이 있는 느낌.
“재료를 구하러 가 볼까나.”
그래도 다행인 건 타지프가 키메라 연구를 지휘할 정도로 생체 마법에 조예가 깊다는 점이었다.
“힘줄로는 오우거의 아킬레스건을 쓰면 좋을 것 같군. 트롤의 심장도 필요하고, 핏줄도 있으면 좋겠는데, 이건 아무래도 마나 로드를 개척한 기사의 것이면 좋을 것 같군.”
흠집은 나 있지만 그래도 신상을 얻어 좋았는지, 즐거운 표정으로 산길을 내려가는 타지프였다.
“어둠의 악령이여, 오우거와 트롤을 찾아라. 에빌 스피릿.”
타지프의 몸 주위에 있던 악령들이 흘러나와 주변으로 흩어졌다.
옳지, 저 방향으로 가면 오우거가 있고 또 다른 쪽으로 가면 트롤이 있나 보다.
타지프는 걸음을 옮겨 오우거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오우거가 뭔가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감히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침입자를 느낀 것이었다.
“악령이여, 상대를 기절시켜라. 에빌 아네스테시아.”
쿵!
산맥의 폭군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오우거가 기절하여 쓰러졌다.
“커터.”
기절한 오우거의 다리에 커터질을 했다.
나름 오우거라서 그런지 한 번에 잘리지 않았다.
쓱쓱, 싹싹.
악령의 바람이 연이어 불며 오우거의 다리를 잘랐다.
그렇게 오우거의 다리를 잘라냈으니 이제는 힘줄을 뽑아내야 할 차례.
정교함이 필요했다.
“귀찮군.”
나름 7서클로 왕국 제일 마법사였던 타지프였다.
제자의 제자의 제자까지 있던 타지프가 이렇게 오우거 힘줄을 발라내는 작업을 하는 것도 수십 년 만이었다.
그래도 자신의 두 손으로 직접 오우거 다리에서 힘줄을 뽑아내고 있다 보니 영혼과 손의 대응 능력이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았다.
“아직 영혼과 신체에 약간의 괴리가 있군.”
보통은 걸음을 걸을 때 걸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걷지는 않는다.
익숙한 동작은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움직인다.
아직 타지프의 신체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터.
오우거의 힘줄을 얻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가니 트롤이 있었다.
오우거도 한 방이었는데 트롤 따위야.
“에빌 아네스테시아.”
트롤이 그대로 기절했다.
기절한 트롤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냈다.
바깥으로 꺼냈는데도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
흠집 나지 않게 조심조심.
자신의 몸을 위한 재료다 보니 절로 신중함이 깃들었다.
일단 구할 수 있는 것은 다 구했으니 이제 볼일은 다 보았다.
“응?”
그런데 희미하게 뭔가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사람의 기합 소리도 포함된 듯했다.
트란 산맥에서 사람?
호기심을 느낀 타지프는 걸음을 옮겨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트롤을 잡고 있던 여러 명의 기사를 발견했다.
“니야야앙!”
날카로운 울부짖음.
제리의 외침에 모두 시선이 돌아갔다.
언제 저기에 사람이 서 있었지?
나는 화면으로 참가자들의 단체 헌팅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건 누구지?
화면을 가까이 가져갔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때문에 눈 부분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슥.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는 건가?
어떻게 나를 볼 수가 있지?
화면으로 지켜보는 나를 인식하려면 최소 소드마스터 혹은 7서클이어야 했다.
저자가 그 정도의 인물인 건가?
“어?”
남자가 마치 나를 보며 피식하고 웃는 듯했다.
“리바이브.”
들썩들썩.
분명히 목을 날리거나 심장에 검을 박았던 트롤이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뭐지?
아무리 트롤이 회복의 대명사이지만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선을 넘었지.
하지만 그런 바람과 상관없이 죽었던 트롤이 몸을 일으켰다.
다섯 트롤의 부활에 팀원들은 진형을 갖추었고, 평가관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에 함께 진형을 갖추었다.
내가 샤샤, 제리, 용병으로 참가한 차민혁에게 쪽지를 보냈다.
[상대는 소드마스터 혹은 7서클 급이에요.]
내 쪽지를 받은 샤샤, 제리, 민혁이 더욱 긴장했다.
여기서 초인급이 왜 나와?
제리, 팬니르가 일선에 서고 알타르, 차민혁이 주문을 외웠다.
다시 어기적거리며 달려드는 트롤.
초점 없는 눈의 트롤이 손을 휘둘렀다.
쾅, 쾅, 쾅!
트롤 한 마리는 꾸얀과 르녹이 맡고 있었다.
살아 있을 때는 한 명이서 탱킹을 하던 트롤이다.
감독관이 도와주자 담당하게 된 트롤의 수가 줄었다.
둘이서 한 마리의 탱킹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막고 찌르기.
정석적인 방식으로 꾸얀이 트롤의 주먹을 방패로 막고 검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푹!
하지만 뭐랄까?
다시 살아난 트롤은 일말의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듯 연이어 공격을 가했다.
상처를 입은 후 회복하는 것이 아닌 상처 자체를 무시하는 트롤.
팬니르가 트롤 한 마리의 팔 한쪽을 날려 버렸다.
또 다른 트롤은 샤샤의 불화살에 맞아 머리통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할만해 보였다.
단지 죽지 않는다는 것.
고통을 무시한다는 것.
물론 그것 만해도 큰 무기이겠지만 이쪽도 닳고 닳은 기사들이다.
통증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조각조각 내버리면 어쩌겠는가?
관건은 트롤이 아니라 낯선 남자.
용병 차민혁이 트롤을 일으킨 낯선 이를 향해 마법을 날렸다.
“마나의 거친 폭발. 익스플로젼.”
알타르도 가세했다.
“멀티 파이어 애로우.”
콰과과광!
불꽃이 날아가고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어느새 자리를 이동해 회피한 남자가 주문을 외웠다.
“다크 필드, 에빌 아네스테시아, 텔레키네시스, 이스케이프.”
삽시간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쾅, 퍽, 쾅!
“빛이여. 주위를 밝혀라, 그레이트 라이트.”
“멀티 라이트.”
차민혁과 알타르의 라이트에 어둠이 밀려났다.
아직 움직이는 트롤이 세 마리.
제리가 한 마리를 절단내고 팬니르가 한 마리를 해체했다.
다른 트롤도 참가자들에 의해 토막이 나고 있었다.
“휴.”
트롤을 모두 제압했다.
그는 어디로 갔지?
주변을 돌아보니 그가 사라졌다.
나는 빠르게 화면을 움직이며 그자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들 무사하겠지?
어둠이 찾아왔었지만, 트롤에게 당한 멤버는 없어 보였다.
트란 산맥에 오르고서부터는 내 역할이 인원 체크였다.
샤샤도 있고, 제리도 있고, 감독관들은 모두 잘 있었다.
그리고 참가자들.
하나, 둘, 셋… 아홉! 아홉?
한 명이 빈다.
뭐야?
다시 인원 체크를 해보았다.
카타리나!
그녀가 사라졌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