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설마 나야?
트란 산맥의 몬스터를 단체로 잡는 시험.
일단 몬스터가 있는 장소를 향해 이동해야 했다.
제리가 영주관 공터에 모인 참가자들 앞으로 나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따라와랑, 낙오하면 탈락이당.”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통 뛰어가는 제리.
그런데 가벼운 발걸음과 다르게 속도가 상당했다.
앞에 나무가 있든, 바위가 있든 그게 나랑 뭔 상관이냐는 듯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낙오하면 탈락.
유유히 걸음을 옮기는 제리를 따라잡기 위해 참가자들이 정신없이 뛰었다.
어느새 일렬로 만들어지는 기다란 줄.
제리의 속도는 마나를 쓰지 않으면 따라잡기 어려운 속도였다.
순식간에 산악구보로 바뀐 시험.
우리의 운동 천재 소환수를 따라잡으려니 다들 발바닥에 불이 났다.
이거 이러다가 중간에 길을 잃는 참가자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혹시라도 처지는 인원이 있는 건 아닌지 하늘 높은 곳에서 계속 인원 체크를 했다.
그런데 넓은 공터에서 술래잡기하는 것도 아니고, 숲으로 우거진 곳에서 제리가 나 잡아봐라 하고 달려 나가는데 모든 참가자가 제리를 따라잡진 못할 수도 있었다.
하나, 둘, 셋…….
갑자기 벌어진 추격전.
결국 열 명의 참가자 중에서 두 명의 낙오자가 발생했다.
나는 두 명의 참가자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길래 샤샤를 보내주었다.
당황한 채 길을 찾다가 샤샤를 보자 반가우면서도 탈락을 예감해 우울해하는 참가자들.
나머지 여덟 명의 참가자는 제리를 놓치지 않고 제리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비록 한 시간 정도의 추격이었고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었지만, 트란 산맥에서 제리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일이었다.
트란 산맥에서 제리가 맘먹고 도망치면 팬니르도 찾기 어려울 테니까.
제리, 여덟 명의 참가자, 팬니르와 차민혁이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5분 정도 지나자 샤샤가 낙오한 두 참가자를 데리고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낙오했다고 너무 낙담하지는 마세요. 아직 평가는 끝나지 않았어요.”
낙오한 인원을 위로하는 샤샤.
그럼. 아직 평가는 끝나지 않았다.
“이곳은 트롤의 영역이당. 잠시만 기다리면 한 마리 이상 꼬셔서 데려오겠다. 준비들 하도록.”
휙하고 사라지는 제리.
트롤이 온다고?
서로들 눈치를 보는 참가자들.
평가관들은 딱히 뭐라고 지시하는 건 없었다.
그저 한 손에는 딱딱한 판 위에 올려둔 종이, 다른 손에는 펜을 들고 참가자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꾸얀이 나서서 말했다.
“곧 트롤을 데리고 온다는데, 우리끼리 잡아야 할 모양인가 봅니다. 임시로라도 대형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샤샤가 종이 위에 뭔가를 적었다.
힐끔 그 모습을 본 참가자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꾸얀이 말하고 나서 뭔가를 적는 폼이 마치 꾸얀 리더십 +1, 이런 것 같지 않은가?
아까 인성을 평가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트롤이 없는 지금도 평가 중인 것 같았다.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참가자들이 활발하게 토의를 펼쳤다.
“개인 시연이나 대련을 봤으니 개인의 무력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번 시험은 우리가 협동해서 몬스터를 잡기를 바라는 것 같군요.”
“그러면 우리가 열 명인데 역할을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요?”
“탱커, 딜러, 원거리 간략하게나마 이렇게 진형을 갖추는 건 어떨까요?”
“저는 탱커를 할게요.”
“저도요.”
“저도요.”
“저도요.”
저마다 방패를 들고 있는 참가자들이 말했다.
방패수로서 탱킹 능력을 뽐내고 싶은 것 같았다.
카타리나가 말했다.
“저는 방패를 들었지만, 탱딜 모두 가능해요.”
알타르가 웃으며 말했다.
“홀홀홀, 나는 이번에는 서포트를 해주지. 내 개인 무력은 보여줄 만큼 보여줬는데, ‘협동’하는데 필요한 능력은 아직 못 보여줬으니, 이번에는 서포트를 맡도록 하지. 다들 버퍼 들어오면 편안하게 받아들이시게나.”
흠칫!
다른 참가자들이 협동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는 알타르의 말에 새삼 놀랐다.
역시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건가?
그새 시험 목적을 파악하고 적용하려는 알타르의 말에 서로 자신이 탱커를 하겠다는 참가자들은 뜨끔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탱커 역할에 적합하지 않은 알타르가 말빨로 다른 평가자들을 휘두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노련했다.
꾸얀이 능숙하게 인원을 분류해 가며 말했다.
“자, 지금은 한 팀으로 협동하여 몬스터를 잡는 것이 목표입니다. 나중에는 정말로 한 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요. 탱, 딜, 딜탱, 원거리, 서포터 인원수 제한 없이 서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만 알려주기로 합시다. 그 외 희망 분야 없으시죠? 탱커 손들어주세요.”
르녹을 비롯한 다섯 명이 손을 들었다.
“딜 손들어주세요.”
딜러는 꾸얀을 포함해 세 명.
“딜탱?”
카타리나가 손을 들었고.
“마법사님은 서포터?”
알타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 하고 싶은 말 있으신 분 계신가요?”
카타리나가 말했다.
“이렇게 진형을 미리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몬스터의 질과 양에 따라 진형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이 멤버로 트롤 한 마리쯤은 탱커고 뭐고 필요 없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그냥 닥공도 나쁘지 않을 듯한데.”
“캬아아아아아.”
카타리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괴성이 울려 퍼졌다.
부스럭.
휙.
숲속에서 제리가 튀어나왔다.
제리가 참가자들 사이를 지나가며 물었다.
“준비됐냥?”
참가자들 사이를 지나간 제리를 뒤따라 다섯 마리의 트롤이 튀어나왔다.
이런.
다섯 마리는 너무 많지 않나?
평가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샤샤, 팬니르와 6서클 차민혁도 전투에 참여해야 할 수도 있었다.
꾸얀이 참가자들을 향해 외쳤다.
“마침 탱커가 다섯 명이니 한 마리씩 맡아주실까요?”
“그럽시다.”
“자, 저도 갑니다.”
다섯 탱커가 달려오는 트롤을 향해서 한 명씩 달라붙었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 피를 흘리며 분노로 인해 눈이 돌아간 트롤.
맨 앞에서 달려오는 트롤은 얼굴에 길고 나란한 칼자국이 그어진 채 분노하고 있었다.
트롤은 그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제리를 잡아야 했다.
그런데 그 길목을 웬 인간들이 막고 있었다.
“캬아아아아아!”
길을 막는 이에게는 죽음뿐.
트롤이 들고 있던 몽둥이를 휘둘러 참가를 가격했다.
쾅!
주우우욱.
방패로 막기는 했지만 트롤의 파괴력에 뒤로 밀리는 참가자.
역시 트롤은 상위 몬스터였다.
마나를 다루는 기사급이 아니라면 덤벼볼 엄두가 나지 않을 몬스터.
하지만 참가자 열 명은 모두 마나를 다루는 기사급.
혹시나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까 봐 샤샤는 활을 시위에 걸고 준비하고 있었다.
팬니르와 차민혁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평가관의 개입은 거절한다는 듯 최선을 다했다.
쾅!
트롤의 몽둥이가 방패에 직격하면 방패 뒤의 딜러가 어느새 몽둥이를 든 트롤의 손목을 검으로 긋고 있었다.
“전장을 휘감는 마나의 손길이여, 전사들의 힘이 되어라. 인핸스트 디펜스.”
탱킹을 하는 참가자들을 향해 알타르가 방어력 상승 버퍼를 넣어주었다.
쾅!
조금 전 트롤의 몽둥이질에 주르륵 뒤로 밀렸던 참가자가 알타르의 버퍼에 힘입어 뒤로 밀리지 않고 버텨내었다.
그 틈을 타서 딜러 역할을 맡은 참가자가 트롤의 몸에 검을 그었다.
주욱.
길게 상처가 난 트롤.
하지만 트롤의 진정한 능력은 공격력도, 방어력도 아니었다.
회복력.
아무리 칼로 그어도 회복해버리는 능력.
진정 트롤의 강력함은 그 회복력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쪽에는 트란 산맥과 맞닿은 디아론 영지의 고인물 마법사가 있었다.
“흉폭한 전장의 마나여. 적의 상처를 악화하라. 운드 어그래베이션.”
흑마법의 일종이며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익히지 않는 상처 악화 마법.
극강의 회복력을 자랑하는 트롤에게는 제격인 마법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적에게는 상처를 악화하는 마법이었을 운드 어그래베이션은, 트롤에게 그저 상처를 회복하지 않는 정도 수준에서 머물게 했다.
회복과 상처 악화,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인 정도.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트롤의 강력한 회복력을 멈출 수만 있어도 트롤의 최대 강점이 사라지는 것.
피를 철철 흘리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트롤의 외형은 괴물 그 자체였다.
“크라차차차!”
하지만 이쪽도 외형으로는 지지 않는 1번 참자가 르녹이 기합을 질렀다.
알타르는 맨 뒤에서 서포트 겸 전장을 지켜보며 열세인 쪽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 보니 탱커 다섯에, 딜 또는 딜탱이 네 명이므로 탱커 한 명은 혼자서 트롤과 싸워야 했다.
르녹이 믿음직해서일까?
탱커의 뒤에서 보조하던 딜러들은 트롤과 비슷한 소리와 외형을 보이는 르녹에게 트롤 한 마리를 통째로 맡겼다.
“크아아아아! 받아라!”
푹!
르녹의 찌르기가 트롤의 옆구리를 깊이 파고들었다.
얼핏 보면 엄중한 부상.
하지만 상대는 트롤이었다.
아무리 알타르의 마법에 의해 회복력이 둔화되었다지만, 찌르기 종류의 공격에 쓰러질 몬스터는 아니었다.
적어도 목을 베거나 심장을 도려내지 않으면 쓰러지지 않는 몬스터.
오히려 검이 트롤의 몸에 박혀 빠지지 않아 르녹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트롤의 몽둥이가 르녹을 향해 날아갔다.
“제길!”
빠지지 않는 대검을 포기하며 뒤로 물러나는 르녹.
그때.
르녹이 빠진 자리를 카타리나가 메꾸었다.
딜도, 탱도 가능하다는 카타리나.
이번에는 탱킹이었다.
카타리나는 짧은 메이스 하나를 뒤로 던졌다.
“받아.”
탁.
날아오는 메이스를 받아든 르녹.
메이스를 써본 적은 없었지만 이런 짧은 몽둥이형 무기는 다루기 어려운 무기가 아니었다.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이 누군가를 죽일 때 사용하는 무기는 무엇일까?
식칼? 장검? 창? 아니다.
둔기류.
그것도 길이가 비교적 짧은 둔기류가 가장 다루기 쉽고 상대를 제압하기 쉽다.
대형 바스타드 소드를 다루던 기사에게 짧은 둔기류가 주어진다면 무기에 대한 적응이고 뭐고 없다.
그냥 처음부터 내 무기려니 하고 쓸 뿐이다.
카타리나의 탱킹과 르녹의 딜.
대검이 몸에 박힌 트롤의 몽둥이질을 안정적으로 받아내는 카타리나.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게 가녀린 소녀의 등 뒤에 숨어 있다가 기회를 틈타 트롤의 마빡에 메이스를 휘두르는 르녹.
외형은 언밸런스했지만 이 조합도 신박했다.
어쩌다 보니 르녹 탱커에 카타리나 딜러 조합도 관찰해보았고, 그 반대 조합도 관찰할 수 있었다.
후자가 더 안정적으로 보이는 건 나만 그런 걸까?
참가자들이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트롤을 상대해서 그런지 이제 평가관들도 조금은 편안한 시선으로 관찰을 하고 있었다.
샤샤는 화살을 시위에 걸었지만, 그 방향을 땅으로 향하고 있었고 팬니르와 차민혁은 팔짱을 끼고 참가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샤가 팬니르를 보며 물었다.
“어때요?”
“트롤 다섯 마리에 익스퍼트 초급 기사 열 명이면 보통은 기사 쪽이 밀린다고 생각해야 할 거야. 하지만 저들은 열 명이 안정적으로 트롤 다섯 마리를 막아내고 있군.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잡을 기세야. 훌륭해. 특히 카타리나와 알타르 법사님을 빼고도 르녹과 꾸얀의 움직임이 인상적이야.”
6서클 마법사인 차민혁도 말을 이었다.
“저 마법사님과 만나서 얘기해 보고 싶네요. 운드 어그래베이션? 개인 시연과 대련 때는 일반적인 백마법과 원소계 마법을 사용했잖아요. 하지만 상처 악화 마법은 흑마법 계열이에요. 5서클이 도대체 마법의 베리에이션이 어디까지인 건가요?”
“그건 아마도 알타르 마법사님이 이곳에 오래 계셔서 그럴 겁니다. 이곳은 몬스터가 종류도 많고 수도 많은 곳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를 제압하기에 적합한 마법을 많이 고민하신 것이지요. 기사인 제가 봐도 저 마법은 딱 트롤 전용으로 준비하신 것으로 보이는군요.”
그 사이, 르녹이 메이스로 트롤 한 마리의 머리를 뭉개 버렸고 카타리나가 방패 칼날로 목을 날려 버렸다.
이제 피흘리는 트롤 4마리에 이쪽은 열 명.
한 번 기울어진 전세는 역전되지 않았다.
핏!
마지막으로 꾸얀이 트롤의 목을 가르자 트롤 다섯 마리가 모두 잡혔다.
짝짝짝!
나는 화면으로 그 모습을 보며 박수를 쳤다.
멋지다!
다 뽑아서 그냥 함께 꽃길만 걷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니야야양.”
제리가 소리를 질렀다.
왜?
또 다른 몬스터가 있나?
모두가 제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어?
누군가 서 있었다.
모두가 누군가를 바라보자 나도 화면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덮수룩하게 길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
앞머리가 길어서 눈까지 내려왔다.
신체 골격을 보면 남자였다.
훤칠한 키, 눈은 머리카락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뚝한 코와 단정한 입 그리고 깨끗한 피부와 갸름한 턱선.
눈 부근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남형이었다.
옷은 뭐랄까 허름하지만 고급스러운?
명품 실크 셔츠와 바지를 입고 땅을 몇 바퀴 구른 듯한 차림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누구길래 이렇게 트롤 앞마당에서 홀로 서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나만의 의문이 아닌 듯 참가자와 평가관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든 간에 저 파티를 위협하지는 못할 듯했다.
조금 전에 참가자들만으로 트롤 다섯 마리를 썰었고, 평가관까지 합세하면 오우거 몇 마리가 튀어나와도 썰어버릴 전력이었다.
나는 어디서 본 듯한 느낌에 가만히 서 있는 남자를 향해 화면을 확대했다.
누구세요?
스윽.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설마… 나야?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