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1라운드
헬른성의 앞마당.
베이론의 선발대가 잠시 물러난 공터에는 지난 삼일간의 처절함이 널려 있었다.
베이고 찔리고 그을린 주검.
셀 수 없이 많은 화살과 부서진 병장기.
군데군데 커다란 돌덩이들이 나뒹굴고 지면 곳곳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러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공간.
다그닥, 다그닥.
기사 이십 명이 말을 타고 그 공간을 달렸다.
이제 막 언덕 위에 도착한 헬른 공작은 말을 타고 달려오는 병력을 내려다보았다.
공작의 부대에 가까이 다가온 기사들은 말을 멈춰 세웠다.
이히히히힝.
말은 투레질하며 멈추었다.
기사 이십 명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바로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로 착지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충! 공작님을 뵙습니다.”
절도 있는 모습.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잘 키웠군.
헬른 공작은 마음에 들었다.
맨 앞에서 대표로 인사하는 기사를 자세히 보니 낯이 익었다.
예전에 몇 번 본적이 있는 기사였던 것 같았다.
헬른성에 자주는 못가지만, 몇 년에 한 번 갈 때면 기사들이 한 수 배워보려고 줄을 서곤 했는데 그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말을 타고 있는 공작이 팔을 뻗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대표 기사가 얼른 공작 근처로 다가왔다.
대표 기사는 공작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며 말했다.
“공작님, 적의 선발대는 오늘 아침 베이론 방향으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적의 본대와 합쳐져 수가 늘었습니다.”
젊은 모습의 공작.
공작의 뽀얀 피부 때문에 얼핏 보면 귀족가 도련님에게 기사가 예의를 표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헬른 공작은 헬른성을 다스리는 캐이믹 헬른 백작의 아버지.
그리고 이곳에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공작이 물었다.
“적의 수는?”
“적의 수는 현재 약 10만으로 추정 중입니다. 그중에 기사는 약 5,000명, 마법사들은 3,0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라우와 타지프도 있는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적의 소드마스터인 라우, 그리고 적의 7서클 대마도사 타지프.
그 둘의 여부는 전장의 승부를 가를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기사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손바닥 한 뼘 정도의 길이에 한 손에 착 쥐어지는 크기의 검은색 물체였다.
한쪽에는 손가락 하나 정도로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고, 네모난 부분의 상단에는 뭔가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뭔가 볼록한 버튼 같은 것들이 여러 개 있었다.
“공작님, 이것을 받으십시오. 근거리에서 통신할 수 있는 장치입니다.”
아, 그때 그 수인족이 설치한 장치와 비슷한 건가?
기사가 설명했다.
“말씀하실 때는 이곳을 누른 채 말씀하시면 됩니다. 말씀을 다 하신 후에는 눌렀던 손가락을 떼시면 상대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호오, 이건 또 뭔가?”
공작은 신기해하며 무전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공작은 나지막하게 말해봤다.
“들리는가?”
눌렀던 손가락을 뗐다.
치치치칙.
―네, 공작님 캐이믹입니다. 잘 들리십니까?
공작은 아들의 목소리를 듣자 씩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들린다. 캐이믹.”
캐이믹이 무전으로 공작에게 물었다.
―네, 공작님. 적들은 잠시 후방으로 물러났습니다. 공작님의 부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안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야외에 숙영지를 꾸리시겠습니까?
헬른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헬른 공작이었다.
“북문과 붙어서 야외에 숙영지를 꾸리겠다.”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호응하겠습니다.
역시 척하면 척이다.
헬른성 안으로 5만 군사가 굳이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비효율적인 방식.
성을 수비하는데 추가로 5만 명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들어가 버리면 수성 그 이상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럴 때 막말로 베이론은 헬른성을 무시하고 그냥 가버리면 그만이다.
베이론과 자웅을 겨루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래도 상대보다 수가 적으니 지형을 이용해야 했다.
성벽에 붙어서 진형을 갖추면 한쪽은 성으로 인해 방어가 되며, 성에서부터 지원사격을 얻을 수도 있다.
이른바 공성탑 옆에 달라붙기다.
그때, 공작의 무전기를 보던 스피오크가 다가왔다.
프란시아 유일의 7서클 대마도사 스피오크.
그가 무전기를 보며 말했다.
“오호, 신기하군요.”
“그대에게도 신기한가? 통신탑도 보지 않았소?”
“그건 그거고, 이건 또 다르지 않습니까? 이건 휴대용이군요. 들고 다니면서 딱히 주문을 외우거나 마나를 주입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군요. 제가 잠시 봐도 되겠습니까?”
호기심 많은 마법사.
나이가 많아도 저 호기심은 줄지를 않나 보다.
저렇게 궁금한 게 많아야 대마법사가 되는 건가?
스피오크가 무전기를 받아 이리저리 관찰하였다.
그러더니 이런저런 마법을 사용한다.
“사물의 정보를 내게 알려달라, 인폼!”
“복잡한 관계를 분석할지어다, 아날리시스.”
“내부를 볼지어다, 클레어보이언스.”
스피오크는 각종 분석 마법을 사용하더니 혼자 놀라 감탄하고 있었다.
“호오.”
“와아.”
“이야.”
그러더니 갑자기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 물었다.
“아니!!! 이…이것을 만든 자가 누구인가?”
기사가 대답했다.
“디아론 백작가에 있는 소환술사로 알고 있습니다.”
“디아론 백작가?”
“그렇습니다.”
공작이 물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오?”
“그렇습니다. 투시로 관찰해보니 내부의 구조가 매우 복잡합니다. 거기까진 그렇다 치지만 작은 판 하나를 보았는데 엄청났습니다. 대단한 판이었습니다. 작은 판 위에 엄청나게 작은 금속 선을 이어 그렸습니다. 정말 놀라운 기술입니다.”
“그런가?”
스피오크는 손을 휘둘러 대형 마법진 하나를 소환했다.
지름이 약 10미터 되는 크기의 둥근 원 안에 복잡한 글씨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공작이 뭘 하는 건가 하며 바라보았다.
“공작님, 이 마법진을 모래 한 톨에 그리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 정도인가?
이쯤 되니 공작도 호기심이 생겼다.
“공작님, 이 무전기에는 그런 수준의 그림이 그려진 판이 있습니다. 아마 이 기물의 핵심 기능이겠지요. 정말 놀라운 물건입니다.”
공작이 기사에게 물었다.
“이 물건을 만든 자가 디아론 백작가의 소환술사라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알겠다, 나중에 볼 기회가 있겠지.”
공작이 부대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이동.”
공작의 부대가 북문 옆에 진형을 갖췄다.
프란시아의 병력이 얼추 자리를 잡았을 무렵 베이론의 부대도 점점 이동하여 프란시아 병력과 나란한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6만 대 10만.
프란시아는 성벽에 의지한 진형을 갖추고 베이론이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론의 진형.
지휘부에는 사령관이자 소드마스터인 라우 공작이 있었다.
소드마스터임을 자랑하는 듯 라우 공작 역시 젊고 건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적당한 길이로 자른 짙은 갈색 머리카락.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매.
하얀 피부와 오뚝한 코, 다부진 입매.
미남이었다.
라우 공작은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고 그 위에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로브는 검은색 부드러운 실크 재질이었는데 목둘레와 로브의 밑단 끝에는 하얀 털들이 풍성하게 달려 있었다.
지금 당장 패션쇼에 올라가도 어색하지 않을 듯했다.
라우 백작은 증손자까지 있지만, 지금도 종종 귀족들의 파티에 가서 여인들을 홀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라우 공작은 프란시아의 진형을 바라보았다.
“후후후. 성벽 옆에 딱 붙어있군.”
공작 옆에서 쭈글쭈글하고 축 처진 피부의 검버섯 할배, 마도사 타지프가 말했다.
“한번 붙어 보시겠습니까?”
“놀러 온 것도 아닌데, 그럼 한판 붙어 봐야지.”
“그러면 우선 키메라 부대를 앞세워보시면 어떨까요? 이번 전쟁을 위해 나름대로 준비 좀 해봤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키메라 부대의 능력을 한번 보여주시오.”
타지프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갤리미스, 키메라 부대를 준비해라.”
트란 산맥의 마정지에서 보았던 얼굴, 갤리미스가 대답했다.
“네, 스승님.”
나는 두 부대가 진형을 조율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야~ 장관이네! 장관이야.”
멋졌다.
며칠 동안 공성전을 지켜볼 때도 멋있었는데 이제는 병력이 몇 배로 늘었다.
병력을 배치하는 모습을 보니 야외에서 백병전이 일어날 것 같았다.
소환술사라 참 다행이었다.
내가 저 세계의 평범한 기사나 병사였으면 저 수많은 병력 중 한 명이 되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겠지?
나는 드론으로 내려다보는 정도의 거리에서 적의 병력 배치를 꾸준히 관찰했다.
너무 가까이 가면 또 그 검버섯 영감이 있을 것 같았다.
“어?”
키메라다.
나는 바로 쪽지를 날렸다.
[샤샤야, 키메라가 준비되고 있어.]
[네, 준비할게요.]
이래서 정찰이 중요한 거다.
키메라가 오는지 몰랐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하지만 나는 전쟁이 벌어지기 한참 전부터 베이론 왕국 곳곳을 둘러보며 키메라의 존재를 알아냈고, 그에 맞춰 키메라에 대한 준비를 해왔다.
자, 저길 보라. 샤샤가 뛰어다니며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키메라가 전선 앞으로 이동하자마자 이에 맞춰 준비한다.
준비된 자가 이긴다.
뿌우우우우―
크고 긴 파이프의 소리와 함께 베이론의 군대가 진격했다.
수만 명의 군대가 이동하는 모습은 몇 마리의 연체동물 같았다.
나는 화면의 줌인과 줌아웃을 부지런히 하며 베이론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병력들은 몇 개의 덩어리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병력이 이동할 때는 병사들이 파도를 치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베이론과 프란시아의 의도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베이론의 진형은 좌익과 중앙은 다가오지 않고 우익 부분만 살짝 우회하여 프란시스의 좌익으로 들이닥쳤다.
성벽에 붙어있는 쪽은 다가가지 않고, 성벽과 떨어진 곳만 공격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내가 샤샤에게 쪽지를 날렸다.
[키메라 부대가 성벽 반대편, 우리 쪽 좌측 부대 쪽으로 가고 있어.]
키메라 부대가 전면에 등장했다.
“크캬탸탸캬탸캬!”
“쿠르르라라라!”
“쿠엑, 취익, 추익!”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짬뽕도 아니고 짬짜면도 아닌, 이것저것 섞여 누더기처럼 꿰맨 몬스터.
가장 앞서 달려오는 키메라를 보았다.
일단 하체가 말이었다.
켄타우로스인가?
그런데 상체는 오크다.
원래 켄타우로스는 말의 하체에 날렵한 인간형 상체를 가졌다.
그런데 그 인간형 상체 대신 오크를 달아놨다.
게다가 오크의 팔 대신 크랩의 집게손을 달았다.
이건 뭔 조합인가?
말의 하체로 달려가서 오크의 상체로 집게손을 휘두르려는 건가?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퀄리티가 별로였다.
한눈에 봐도 꿰맨 자국이 분명했다.
좌우 균형이 맞지 않아서 기우뚱거린다.
조악한 퀄리티.
하지만 그 조악한 퀄리티가 더 혐오스럽고 끔찍하게 다가왔다.
말의 안정적인 하체와 오크의 근육을 가진 상태에서 크랩의 집게팔을 휘두르면 비록 조잡하게 만들었더라도 그 파괴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옆의 키메라들을 보았다.
오크, 나가, 고블린, 트롤, 렛맨, 늑대인간, 예티…….
참 골고루도 섞었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 찾는 재미가 있을 지경이었다.
내가 키메라를 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던 사이에 디아론 백작가의 기사들이 좌측으로 이동해 부대의 선두에 섰다.
앗, 팬니르다!
팬니르가 중후한 중저음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말했다.
“화살 걸어.”
키메라가 점점 다가왔다.
“준비.”
기사들이 시위를 당긴다.
“발사.”
슈슈슈슈슉!
대부분 커다란 덩치를 가진 키메라.
기사들이 키메라에 화살을 맞추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 화살을 맞고 키메라가 어떤 반응을 하냐가 문제였다.
평범한 화살이라면 오크만 해도 콧방귀를 끼며 달려올 것이었다.
하물며 미노타우르스라던지, 트롤과 같은 몬스터 앞에서 활을 들고 있는 것은 샤샤 정도가 아닌 다음에야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퍼퍼퍼퍽!
일선에서 달려오던 키메라들이 화살에 맞았다.
화살이 몸에 박히든지 말든지 무시하고 계속 돌진하는 키메리들.
반응이 없는 건가?
그런데 키메라들이 몇 걸음 더 다가오더니 돌연 거꾸러지기 시작한다.
“키에엑?”
키메라들이 멈춰 섰다.
“쿠에에에에엑!”
부르르르르!
제자리에서 바들바들하며 떨고 있는 키메라.
“오오오~”
효과 죽인다.
그래 널 위해 준비했다.
키메라가 올지 뻔히 알고 있었는데 그냥 화살을 준비했겠어?
급성 거부반응이라는 마법이 담긴 마법 화살이었다.
파는 데가 없어서 주문 제작했다.
키메라 전용 무기를 파는 데가 어디 있겠어?
키메라들아, 많이 아프지?
저기 나가의 하체를 가진 키메라가 꿈틀거린다.
급성 거부 반응은 자기 몸이 아닌 물질에 대해 몸이 거부하는 것이다.
저기 봐라.
키메라를 조잡하게 꿰맨 부분들이 부풀어 오르거나 진물이 흐르고 있다.
다시 이선에서 튀어나오는 키메라들을 향해 급성 거부반응 마법 화살이 꽂혔다.
바들바들.
이선에서 튀어나온 키메라들도 정신을 못 차렸다.
이 정도면 첫 접전은 우리가 이긴 것 같은데?
검버섯 할배 표정을 보고 싶긴 했지만, 가까이 가진 않으련다.
이제 기사들이 키메라에 접근해서 썰고 있다.
제자리에서 바들거리고 있는 몬스터들을 써는 것쯤이야.
띠링!
어? 제리에게 쪽지가 왔다.
[이제 시작이당.]
내가 알파를 불렀다.
“알파야, 제리에게로!”
삼각성으로 화면을 넘겼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