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준비한 대로
지우개 달린 연필.
연필을 만든 것도 아니고 지우개를 만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우개 달린 연필은 놀라운 발명이었다.
그저 알타르가 마침 5서클에 올랐기에 샤샤의 화살에 부가 기능을 넣어줬을 뿐이었다.
또 화살에 부가 기능을 넣다 보니 겸사겸사 대형 화살에도 이런저런 기능을 넣었을 뿐이다.
화살은 크기가 작아서 많은 기능이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발리스타용 대형 화살은 크기가 크기 때문에 이런저런 마법진을 새길 공간이 충분했다.
공간이 있길래 넣었을 뿐이었다.
아니 원래 미사일에 유도 기능은 기본이 아닌가?
요즘 나오는 미사일 중에서 유도 기능 없는 미사일도 있나?
그리고 유도 기능을 넣었는데도 공간이 남으니까 어쩔 수 없이 매운맛도 좀 준비했다.
전기, 불, 바람, 폭발, 독, 포획, 저주.
빨주노초파남보 골라 먹는 재미가 있듯.
이번에 날아오는 발리스타의 대형 화살에는 어떤 마법이 숨어있을지 추측해보는 재미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조금 과했나 보다.
1+1=2를 넘어 3이라는 개념.
이곳에는 없는 개념이었나보다.
띠링!
[민준 님, 적군이 뒤로 물러나고 있어요.]
그래, 보고 있다.
쟤들도 눈이 있으니 봤겠지.
대형 화살에 유도 기능이 있어서 피하지 못했던 모습.
그리고 막으면 전기, 불, 독이 퍼지는 모습.
지금 저기 한때 기사였던 고기 꼬챙이가 되어버린 것에서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불꽃과 검은 안개는 두려움을 자아내기 충분했나 보다.
그래도 한 번에 뒤로 물릴지는 몰랐는데 저렇게 뒤로 빠지는 것도 적군의 판단과 움직임도 과감하고 빨랐다.
“으음…….”
그런데 기분이 조금 뭐 했다.
샤샤가 몬스터를 잡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열심히 응원했을 뿐인데, 인간과 인간의 전쟁이라니… 이래도 되나 싶었다.
왠지 저 기사의 죽음에 내가 깊이 관여한 느낌이었다.
인간을 죽였다는 데서 오는 낯선 이질감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저긴 전쟁 한복판이다.
이미 나는 샤샤와 제리의 편에 섰고 전쟁은 돌이킬 수 없다.
헌터 주제에 비폭력 운운하는 것도 코미디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게 지금의 기분을 털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럼 쟤네들이 또 뭔 짓을 벌이고 있는지 봐야겠다.
“알파.”
―네, 민준 님.
“쟤들 뭐 하는지 염탐하러 가자.”
―네, 갑니다.
슈우욱
화면이 이동했다.
어디 보자.
일단 아까 있던 위치에서 한참 뒤로 병력을 물리고 있었다.
기사는 이 시대의 최고의 무기이다.
그런데 그런 기사를 무력화시키는 무기가 있다?
대책 회의를 하겠지.
헬른성 앞 베이론 부대의 지휘부.
베이론 부대는 저 멀리 헬른성이 작게 보이는 곳까지 물러났다.
베이론 부대의 지휘관.
회색 머리카락, 한 뼘은 되는 수북한 수염을 멋스럽게 길렀다.
하지만 그 멋스러운 수염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저 무기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부관으로 보이는 이가 대답했다.
“보기엔 발리스타 같았습니다. 쏘는 무기가 성벽 위에 있던 게 보였고, 발사된 대형 화살의 모양도 발리스타가 맞는 것 같습니다.”
지휘관이 주먹을 쥐며 물었다.
“그래, 그런데 발리스타 따위가 왜, 어떻게 우리 기사를 죽일 수 있던 거지?”
발리스타는 멀리서 날아온다.
파괴력은 있을지언정 그걸 보고 피하지 못할 기사는 없었다.
그게 이 시대의 상식이었다.
“제가 보기엔 대형 화살이 마법 기능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법 기능을 갖춘 발리스타라니 사령관은 인상을 팍 썼다.
부관이 말을 이었다.
“기사가 회피하려 했으나 대형 화살이 기사를 따라갔습니다. 아마 유도 기능을 넣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속성 마법도 발휘된 것 같았습니다.”
발리스타에 마법을 부여할 생각을 하다니 기가 막혔다.
마법사가 직접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대형 화살에 마법이 깃들게 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지휘관이 물었다.
“마법사가 쏜 건가?”
“아닙니다. 발사 자체는 발리스타로 한 듯합니다. 대형 화살 자체에 마법을 심어둔 것 같습니다.”
쾅!
“그러면 더 문제이지 않은가!”
지휘관이 여러 참모를 돌아보며 말했다.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헬른성 정도는 점령했으면 좋겠다. 대책을 마련하라!”
현재 베이론의 부대는 선발대였다.
선발대가 헬른성을 점령하면 공적은 선발대의 지휘관의 몫이다.
하지만 본대가 도착한 다음 헬른성을 점령하면 공은 본대의 사령관이 갖는다.
지휘관은 공을 세우고 싶었다.
참모 한 명이 나서며 말했다.
“일단 유도 기능과 속성 마법이 있는 발리스타라고 가정하겠습니다. 기사 혼자 막을 수 없으니 기사와 마법사가 팀을 이뤄야 할 것 같습니다. 발리스타가 날아오면 한두 번 정도는 기사가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마법사가 보호해주거나 디스펠을 사용하여 마법 기능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참모가 말했다.
“지금 장난해? 기사와 마법사가 호흡을 맞추라고 시키면 호흡이 절로 맞나? 기사의 속도에 마법사가 따라가지도 못할 거야. 게다가 그렇게 모여 있으면 ‘여길 쏴주세요’ 하는 셈이라고.”
또 다른 참모가 말했다.
“기사가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지휘부이죠. 지휘부를 중심으로 저 발리스타가 폭격한다면 지휘부가 타격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런데 저게 몇 발이나 있을지 모르잖소. 어차피 병력은 우리가 많은데, 그거 한 방 맞았다고 쫄지 말고 공성 한 번 제대로 해봅시다. 어차피 저것들은 한 점을 타격하는 무기잖소. 다수의 병력에 적합한 무기는 아니란 말이오.”
“본대에서는 연락이 없소? 라우 공작님이나 타지프 님은 언제 오는 거요?”
“본대는 이제 슬슬 출발하고 계실 것이오.”
“그런데 한 대 맞았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소? 어차피 공성하긴 할 거잖소. 실드나 한 번 걸고 기사들은 2인 1조만 해도 될 것 같은데. 전쟁이라는 게 한 명도 안 죽을 수는 없는 거잖소. 그냥 밀어붙입시다.”
한참을 토론한 후 지휘관이 결론을 내렸다.
“내일 동이 트면, 기사들에게 실드를 한 번씩 걸어주고 공성전을 벌이기로 한다. 기사들은 2인 1조를 이루도록 한다. 기사와 마법사들에게 각별한 준비를 하기 바란다. 이상.”
오호! 그렇구나!
나는 몰래카메라가 된 듯 그들의 회의를 엿보고 있었다.
알파가 나에게 말했다.
―내일 해가 뜨면 일제 공격을 할 모양입니다.
“오케이, 라저.”
나는 샤샤에게 내용을 전해주었다.
[샤샤야. 내일 해가 뜨면 일제 공격해 올 거래. 기사들은 2인 1조이며 실드를 하나씩 두르고 온다네. 기사를 타겟으로 하는 것도 좋지만, 오늘 기사가 잡혔다고 기사들을 보호하고자 어떻게든 할 모양인데… 그러면 신경이 기사에게 쏠렸을 때, 차라리 마법사나 공성 장비 쪽을 노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네, 백작님께 말씀드릴게요.]
자, 그럼 지금부터 내일 아침까지는 상대 쪽에서 일으키는 큰 접전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럼 한 바퀴 돌며 빈틈을 찾아봐야겠다.
“알파.”
―네, 민준 님.
“한 바퀴 둘러보자고.”
베이론과 프란시아의 경계부를 지그재그로 훑어보았다.
혹시 모를 기습 부대를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베이론 왕국까지의 절반 정도를 날아가니 소규모 부대 하나가 오고 있었다.
조금 확대해 보았다.
뭐지?
수백 명의 병력.
그리고 수백 대의 수레.
아하, 보급 부대다.
대단치 않은 호위 병력과 함께 움직이는 보급 부대.
그래. 이런 걸, 바로 이런 걸 잘라서 먹어줘야 하는데!
저 부대 자체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하늘에서 보니 나 좀 잡숴주십쇼 하는 것 같았다.
일단 루틴은 돌아야 하니 베이론 왕국 근처로 가보았다.
“오오!”
여기 더 큰 부대가 모이고 있었다.
저건?
키메라다.
여기가 본대구나.
지금 헬른성에 온 병력도 많았는데 여기 준비하고 있는 병력은 더 많고 더 다양했다.
본대에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지난번 그 마법사 검버섯 할배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가까이 가기 좀 그랬다.
나는 그들을 멀리서 지켜본 뒤, 다시 헬른성 방향으로 화면을 돌렸다.
아까 그 보급 부대가 헬른성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부대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할배는 본대에 있겠지?
가까이서 본 병력은 대부분 일반 보병, 마법사로 보이는 인원은 거의 없었다.
수레에는 식량으로 보이는 것들이 실려 있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얘들 지나가는 길에 미리 함정을 설치한다거나, 매복한다거나 기습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있으니 언제 어디를 공격할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방법.
어떻게?
병력을 다 죽이는 게 아니고 음식만 못 먹게 해도 될 것 같았다.
음식에만 불을 질러?
저기까지 어떻게 가지? 누가 가지?
삼각 성은 포위되었고.
헬른성도 코앞에 적이 있다.
그것도 헬른성에 있는 병력보다 몇 배 많다.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보급부대가 여유롭게 이동할 수 있겠지.
나는 뾰족한 방법이 있는지 또 인터넷을 한참 동안 검색했다.
안 되면 검색하라.
그런 말… 없나?
* * *
다음날.
날이 밝았다.
둥―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렸다.
어제 신무기를 공개하여 잠시 기세가 올랐지만, 병력의 수만 보자면 적이 4배 이상 많았다.
원래 3배의 병력으로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정석.
베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이곳은 지나가며 점령해야 하는 곳일 뿐이었다.
당연히 정석보다 많은 병력이 도착했다.
베이론의 기사들은 2인 1조로 팀을 이룬 상태.
징, 징, 징.
마법사들이 기사들에게 실드를 한 겹 씌워줬다.
기사들이 짝을 지어 있으므로 실드만으로 발리스타 두 발, 기사의 실력으로 두 발쯤 막아낸다면, 한 팀당 다섯 발이 쏟아져야 기사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만만하지 않았다.
완전하진 않지만, 하루 만에 대략적인 대비를 해왔다.
그런데 그건 알까?
저 실드에 쓰인 마나는 원래 파이어볼과 같이 공격용 마법에 쓰여야 할 마나였다.
그러면 헬른성의 피해가 더 컸겠지.
딱 열 발의 발리스타로 적에게 수비를 강요하는 행위.
꽤 효율적인 장사다.
쿠루루루루.
그리고 공성전 무기의 꽃인 투석기가 등장했다.
투석기 하나에 병력 열에 마법사 하나가 붙어있었다.
투석기는 시소의 한쪽이 길고 반대쪽은 짧은 모양이었다.
긴 쪽 끝에 날아가는 바위를 얹고 짧은 쪽에는 무거운 추를 매달았다.
무거운 추가 내려가면 그 힘에 의해 긴 쪽 끝에 얹은 바위가 날아가는 구조.
과거 지구에서도 쓰였을 법한 모양이지만, 이곳에는 마법이 존재했다.
날아가는 바위가 보통 바위가 아니었다.
투석기의 힘으로 수백 미터를 날아가는 불덩이나 폭발 마법을 던지는 셈이었다.
또, 무거운 추의 무게를 마법으로 더욱 무겁게 하여 더 멀리, 더 강하게 보낼 수 있었다.
쿠르르르르.
투석기가 자리를 잡았다.
멀다.
일반 보병의 화살은 닿지 않을만한 거리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에서 베이론의 병력이 준비했다.
하지만 헬른성도 만만치 않다.
어제 본 발리스타는 오늘 실드를 두른 기사가 아니라 투석기를 향해 조준하고 있었다.
또한, 수많은 병력이 빈틈없이 헬른성 성벽 위에 진용을 갖추었다.
바깥쪽으로 툭 튀어나온 한쪽 성벽.
공격 용도로 쓰이는 장소였다.
그 툭 튀어나온 성벽 가장자리에 샤샤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등장한 성벽 위의 발키리.
높은 성벽 끝은 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 바람결에 하늘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모습은, 그대로 촬영해 영화 예고편에 써도 될 것 같았다.
샤샤가 들고 있는 화살.
그 화살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한발 한발이 마법 화살이었다.
화살이 꽂히면 폭발하거나 불바다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전기가 지져져 독연이 피어오른다.
마법 화살.
샤샤가 쓰는 고가의 마법 화살을 위해 돈을 물 쓰듯 쓰고 있지만 원래 전쟁이란 그런 것 아닌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돈을 쏟아붓는 행위.
나는 전쟁의 본질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까짓 화살값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제리.
제리는 무기를 강화해주기 어려웠다.
자신의 신체가 곧 무기이고 권기가 발톱까지 둘러져서 새로운 무기보다는 자신의 발톱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샤샤는 한발 한발이 마법 화살인데 제리를 차별할 수는 없었다.
고민고민하다가 제리에게는 아이템을 좋은 것 걸쳐 주었다.
【어쌔신 레저리크의 가죽 망토 】
▷ 등급 : 최상급
▷ 공격속도 증가 : 20%
▷ 기척 감소 : 50%
▷ 방어력 : 250
▷ 내구도 : 150/150
▷ 스킬 은신 : 주변과 95% 이상 동화되어 은신합니다.
적의 공격을 받거나 적을 공격할 시 스킬이 취소됩니다.
일단 등급이 최상급이다.
은신 스킬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공격 속도 증가와 기척 감소가 기본으로 깔린다.
지난번에도 동물형 아이템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 좋은 것으로 인간형으로 골랐다.
제리에게는 딱 알맞은 아이템.
안 그래도 운동 천재인데 더 빠르게, 더 은밀하게.
그리고 적에게 마법사들이 많다지만 우리도 마법사들이 있었다.
알타르가 후배 마법사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넵.”
“누워라.”
마법사들이 하늘을 보고 누웠다.
“소환술사님께 경례.”
마법사들이 누운 채 주먹을 가슴에 붙였다.
헐, 저건 뭐 하는 거임?
이…건 아닌 것 같아. 이러지 마.
마법사들을 미치광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표현이 저런 행동 때문에 나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는 병사들이 알타르네들을 보며 수군거린다.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다행이다.
쟤네들은 내 얼굴 모른다.
알타르가 말했다.
“모두 일어나. 물약을 마신다.”
꿀꺽.
마법사들이 물약을 마셨다.
잠시 동안 한 서클 위의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물약.
지구에서 넘어간 물약, 메이드 인 코리아였다.
그리고 국산 금속제 마법진을 바닥에 놓고 마법진에 마나를 주입할 준비를 했다.
준비된 마법은 파이어 레인.
무려 6서클 마법이다.
하긴, 얼마 전까지 4서클이던 알타르가 무려 6서클을 시전하려고 하다니 저런 오두방정 경계를 할 법도 했다.
파이어 레인이 발휘되면 송이송이 불꽃 송이가 비처럼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불꽃 송이에 맞으면 화르륵 불이 번질 것이다.
물론 기사들은 불꽃 송이를 마나가 담긴 검으로 베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실드를 이용해 불꽃 송이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 병력들은 불꽃 송이를 벨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양학용 대규모 범위 마법 파이어 레인.
딱 지금 필요한 마법이었다.
뿌우우우우우우―
전쟁의 신호를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쳐라!”
“와아아아아아아아!”
두두두두두두.
수만의 군세가 해일이 되어 밀려온다.
그 군세가 박차는 땅의 울림이 먼저 전달되어 몸을 떨리게 한다.
이제는 그저 준비한 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싸울 뿐이었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