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마정지
예티는 몸에 얼굴이 있었다.
몸통에 얼굴이 있다고 해야 할까?
사람으로 치면 쇄골 부근에 새까만 눈동자가 있고 명치 부근에 옆으로 길게 찢어져 있는 입이 있었다.
그리고 두 팔이 아주 두꺼웠다.
팔씨름을 위해 태어난 듯 넓은 어깨, 굵은 팔, 굵고 커다란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혹한의 환경에서 생활하는 몬스터답게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었다.
흰색과 회색이 섞여 있는 털로 손바닥과 발바닥을 빼고 모두 털이 수북했다.
그런 예티 다섯 마리가 탐사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탐사대는 산을 오르느라고 대형이 일자로 늘어져 있었다.
그래서 몬스터를 막기 위해 평상시에 잘 사용하는 방진을 펼치지 못했다.
방진을 세울 틈도 없이 처음부터 백병전을 벌여야 했다.
“타앗!”
제리가 가장 먼저 튀어 나갔다.
주황색 로브는 약간 헐렁했는지 허리를 벨트로 조였다.
로브의 모자를 뒤로 벗어넘겨 제리의 보라색 머리가 보였다.
보라색에 세모난 귀를 한번 쫑긋하게 움직인 후, 달려가며 자세를 낮췄다.
제리의 빠른 움직임에 주황색 로브가 펄럭거렸다.
경사진 눈밭 위를 뛰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빠르기.
파파팟!
빠른 움직임에 눈발이 휘날렸다.
가장 앞의 예티와 맞붙을 찰나.
제리가 소리를 질렀다.
“캬아아아아!”
이에 마주 소리를 지르는 예티.
“쿠어어어어어!”
곧 있을 충돌을 생각했는지 예티도 크게 주먹을 휘두를 자세를 갖추었다.
오른손을 뒤로 뺐다가 제리를 향해 크게 휘둘렀다.
휭!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 이동한 것인지.
하늘을 향해 누워서 예티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제리.
하늘을 향해 누웠지만, 머리를 더 뒤로 젖혀서 정수리가 등에 닿아 있었고 두 눈은 또렷하게 예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제리의 유연하고 민첩한 몸놀림이 한 폭의 액션영화 같아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우와!”
화면에서는 8K 고화질 리얼 액션이 보이고 있었다.
예티는 순간적으로 제리의 위치를 놓쳐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는 예티.
하지만 그때는 이미 제리가 예티의 등 뒤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콰직!
주우욱.
제리는 마을 암석 벽에 엑스자 모양의 흔적을 남기듯 예티의 등 뒤에 깊은 상처를 만들었다.
“쿠에엑!”
예티는 등 뒤의 고통에 주먹을 뒤로 휘둘렀다.
부웅!
하지만 제리는 언제 그곳에 있었냐는 듯 다시 자리를 이동했다.
신출귀몰.
전후좌우 허공을 넘나들며 상대를 기만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원래는 권투에서 유명한 말이었다.
하지만 제리는 진정한 벌은 허공을 날아다녀야 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하늘은 원래 발로 밟는 거라는 듯.
허리는 원래 뒤로 접히는 거라는 듯.
회전하려면 기본 720도는 돌아야 한다는 듯.
모든 물체는 땅으로 떨어진다는 물리학의 법칙을 무시하고, 신체는 관절의 가동 범위 이내로만 움직여야 한다는 생물학을 법칙을 무시했다.
판타지에서 혼자만 무협을 쓰고 있었다.
“쿠에에엑!”
제리에게 당하는 예티가 괴성을 질렀다.
그 모습에 다른 예티들이 합세하였다.
일 대 일로 안되니까 쪽수로 상대하시겠다?
제리는 코웃음을 쳤다.
제리는 카리스마를 풀풀 피워대며 기다란 클로 같은 발톱을 대각선으로 늘어뜨리며 기다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 귀에는 들리는 듯했다.
어서 와.
혼자서도 다 상대할 기세.
하지만 탐사대의 다른 인원들도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쪽수는 이쪽이 더 많았다.
샤샤의 활이 불을 뿜었다.
“파이어 애로우.”
털이 많은 예티.
추위와 물리 공격에는 제법 강한 예티지만 불 공격에는 취약했다.
상급 기사 안톤의 메이스가 예티를 향했다.
“받아랏!”
메이스는 원래부터 타격을 위한 무기이다.
빠르게 한 점을 찌르거나 베는 무기가 아니라 그냥 두드려 패는 무기다.
힘과 힘!
가죽이 두껍고 덩치가 크고 맷집이 좋은 딱 예티같은 몬스터를 위한 무기가 메이스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메이스가 몬스터 뚝배기를 깨기 참 좋은데 예티는 머리가 몸에 있어서 깰 뚝배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뚝배기가 몸에 있으면 몸에 있는 대로 메이스가 예티를 향했다.
퍽, 퍽, 퍽.
두툼한 가죽이 쫀쫀하게 패는 맛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안톤은 예티와 게임을 하는 듯했다.
너 한 번, 나 한 번.
누구 한 번씩 때리는 죽빵 때리기 게임.
두 발을 땅에 딱 붙인 안톤은 메이스 한번을 날리고 방패로 예티의 주먹을 막았다.
제리, 안톤, 샤샤.
셋의 전투 스타일이 너무나 달랐다.
화려한 보법을 선보이는 제리.
보법이 뭔가요? 발은 원래 땅에 딛는 거라는 듯 사나이의 뚝배기 대결을 벌이고 있는 안톤.
그리고 몬스터와 왜 가까이 가나요?
멀리서 슉슉 하면 되는데?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절대 예티의 일정 거리 이하로 다가가지 않은 샤샤.
저마다의 스타일로 전투에 임했다.
하지만 탐사대의 최고수는 팬니르였다.
팬니르는 예티의 주먹이 휘둘러지는 거리에 멈춰 섰다.
예티의 사정거리 이내다.
부웅, 부웅.
예티는 옳다구나 하며 팬니르에게 주먹을 난사한다.
팬니르 쯤 되는 인물이 상대의 간격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슉슉슉슉슉.
하지만 마치 아웃복서가 상대의 주먹을 피하듯 예티의 주먹이 팬니르의 얼굴을 스친다.
예티의 주먹과 팬니르의 얼굴은 깻잎 한 장 차이.
자꾸 피하기만 하자 화가 난 예티가 괴성을 지른다.
“쿠어어어어.”
그 순간!
예티가 괴성을 지를 때.
그 타이밍을 맞춰서 팬니르의 검이 예티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파앗!
단 한 번의 찌르기.
그리고 숨을 거둔 예티.
겉으로 보이는 상처 하나 없이 예티를 잡았다.
그렇게 오늘도 팬니르는 최고급 통짜 예티 가죽을 생산했다.
* * *
예티와의 대결을 마치고 다시 행군이 이어졌다.
행군, 전투, 행군, 전투.
힘겨운 과정을 겪었지만, 탐사대는 결국 마정지에 도착했다.
제리가 말했다.
“이곳이 마정지예요.”
트란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조금 내려온 위치.
팬니르는 주변을 살폈다.
일단 등 뒤에 산봉우리를 두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숲의 바다.
그리고 저 너머에 지평선이 펼쳐져 있다.
높은 산 위에서 보니 주변 경관이 아름다웠다.
샤샤가 제리에게 말했다.
“올라오느라고 힘들긴 했지만, 여기서 이렇게 보니 꽤 멋있네.”
“그러게. 여긴 한 번 와본 적 있는데 다시 오니 더 멋있네.”
그렇게 경치 구경을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사냥꾼 쟝, 마법사 알타르 등은 바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곳은 트란 산맥의 마나의 발원지.
마나의 시작이며 맥이다.
트란 산맥 전체로 마나가 퍼져나가는 장소.
그 말은 역설적으로 트란 산맥에 어둠의 마나를 퍼뜨리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드마리스 족장은 무언가 흑마법을 이용해 트란 산맥에 암흑 마나를 퍼뜨렸다면, 이곳부터 확인해봐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 외쳤다.
“여기 뭔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가 나왔나?
있었다!
무언가 깎아낸 듯한 인위적인 흔적.
그리고 깎아낸 주변 바위 사이에 박혀있는 무언가.
저건 뭐지?
수상했다.
마법사 알타르가 흔적을 살폈다.
탐사대에 알타르가 포함된 이유.
탐사대가 험한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가 바로 저것 때문일 수도 있었다.
마법사 알타르는 가방 속에서 이런저런 약품들을 꺼냈다.
뭔가를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했다.
심각한 얼굴로 한참을 조사하던 알타르가 결론을 냈다.
알타르는 팬니르에게 보고했다.
“이 지역은 암흑 마나 수치가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저기 바닥에 뭔가를 박아 넣은 것 같습니다. 저것을 뽑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바닥에 박힌 뭔가를 뽑아라.
알타르의 요청이었다.
탐사대가 그 험한 과정을 거쳐 여기 온 이유가 무엇인가?
트란 산맥의 몬스터 웨이브의 원인을 알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가능성이 큰 것이 흑마법이었다.
그리고 이제 수상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흑마법의 여부를 판단할 중요한 과정.
탐사대는 얼른 힘을 합쳐 바닥을 부쉈다.
서서히 드러난 바닥의 물체.
바닥을 부수자 나타난 것은 기다란 봉이었다.
길이는 2m 정도 지름 한 뼘 정도의 기다란 쇠 봉이었다.
그런데 그 긴 봉에는 복잡한 모양의 마법진이 적혀 있었다.
팬니르가 물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마법진을 다 해석하진 못했지만 이곳의 마나에 변형을 주는 마법진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마법진?”
“네, 이 쇠봉이 이곳 마정지의 마나에 꾸준히 영향을 주는 것이지요. 이곳에 어둠의 마나를 섞으면, 자연스레 트란 산맥 전체로 그 영향이 퍼져나갈 테니까요. 이것을 영지로 가져가서 더 자세히 알아보면 자세한 마법진의 원리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이것을 설치했는지도 알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이 봉에 적힌 마법진을 연구하면 조금 힌트가 나올 수는 있으나 장담할 수 없습니다.”
누가 그랬을까?
마법진이 새겨진 봉.
보나 마나 인간이다.
다른 왕국일까?
제국일까?
분명한 건 프란시아 왕국에 적대적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대장님, 이쪽도 좀 봐주십시오.”
사냥꾼 쟝이 또 뭔가의 흔적을 발견한 모양이다.
여길 자세히 보십시오.
쟝은 희미한 뭔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쪽 가운데 부분의 색이 다르지요? 둥글고, 이 흔적은 사람이 모닥불을 피운 것 같습니다.”
마법진으로 도배된 봉 말고도 모닥불의 흔적도 있다.
이건 사람이다.
누굴까?
어떻게 하지? 밑도 끝도 없이 알아볼 수는 없는데.
샤샤는 나에게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들을 전해주었다.
[민준 님, 땅속에서 마법진이 그려진 금속 봉이 나왔어요. 이 장소가 마나가 흘러가는 발원지라고 해요. 그래서 이곳의 마나에 어둠의 마나를 섞어서 트란 산맥 전체에 흩어지게 했나 봐요. 나쁜 놈들인데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 뭔가 범행 증거를 잡긴 했는데 누가 그런 건지는 못 찾았다는 말인가?]
[네, 맞아요.]
그래?
범행 도구와 수법을 알았는데 범인은 모르겠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CCTV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저 산꼭대기에 CCTV가 있을 리도 없잖아.
CCTV라.
뭐 지금이라도 달면 된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범인은 반드시 범행 장소에 다시 나타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CCTV를 설치하고 누군가 찾아오는지 관찰하면, 잘하면 걸릴 수 있다.
나는 샤샤에게 말했다.
[샤샤야, 지금이라도 이 장소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하면 좋을 것 같아. 혹시 범인이 다시 이 장소에 나타나면 그때 추적할 수도 있으니까.]
[네, 알겠어요. 대장님께 말씀드릴게요.]
누군가 나타나면 그 모습을 기록하고, 누군가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장치가 필요하다.
나는 헌터 마켓에 이런 기능이 있는 물건이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일명 마캠.
마법 캠코더 혹은 마법 영상 기록장치라고 부르는 물건이 있다.
그리고 마법 알람.
알람을 설치해두면 누군가 침입해 왔을 때 설치자에게 알람을 보내준다.
[샤샤야, 거기서 좀 기다려달라고 말해줄래? 내가 영상 기록장치와 알람 장치를 구매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서 그래.]
[네, 알겠어요.]
나는 직원들에게 부탁해서 마법 영상 기록장치와 알람 장치를 구매해달라고 했다.
직원들은 몇천 원 더 비싼 빠른 택시를 타고 헌터 마켓에 다녀왔다.
마법 캠코더 3개와 알람 장치를 사 왔다.
샤샤와 제리를 모두 소환했다.
“자, 이게 마법 캠코더라고 화면을 기록하는 장치야. 사용법을 알려줄게.”
한참을 연습한 끝에 샤샤와 제리가 영상 기록장치와 알람 장치를 이해했다.
샤샤와 제리가 탐사대로 돌아갔다.
샤샤와 제리는 마법 캠코더와 알람 장치를 마정지에 설치했다.
영상장치는 눈에 잘 안 띄게 은밀하게 숨겨 두었다.
두 장치 모두 적어도 6개월은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고성능 마정석을 이용해서 배터리 기간이 상당히 길었다.
그렇게 마정지에 관찰 카메라와 알람을 설치하고 내려오는 길에 다시 드리마스 부족을 찾았다.
족장은 마정지에 박혀있던 긴 금속봉을 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마정지에 이런 것을 박아 두었다면 다른 마나의 맥들도 확인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나의 맥.
마정지 만큼은 아니지만 마나가 중간중간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탐사대는 트란 산맥을 돌며 마나의 맥을 조사해야 했다.
두 달.
산맥을 다니며 마나의 맥을 살펴보는 데 두 달이 걸렸다.
행군하고 몬스터를 잡고, 행군하고 다시 몬스터를 잡았다.
마나가 모이는 맥을 찾아다니며 혹시라도 설치해두었을 금속 봉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
탐사대는 다섯 개의 금속 봉을 뽑아올 수 있었다.
이만하면 탐사대의 역할은 할 만큼은 했다.
이제는 집으로 가봐야 할 때.
금속 봉을 박은 놈들만 생각하면 아주 그냥 이가 빠득빠득 갈린다.
누군지 걸리기만 해라.
드디어 길고 긴 탐사가 끝났다.
하산이다.
하산하는 걸음은 올라갈 때보다 몇 배는 즐겁고 가벼웠다.
부스럭.
수풀을 헤치고 머리가 쏙 나왔다.
산적 같은 얼굴.
그가 외쳤다.
“와! 디아론 성이 보인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