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소환수 제안
억겁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
누군가… 아니, 무언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세로로 갈라진 무언가.
마치 파충류의 눈과 비슷했다.
그것은 순수한 악이며 공포였다.
온몸이 꽁꽁 묶인 나를 연쇄 살인범이 칼로 쓰다듬는듯한 느낌.
나는 그것의 시선에 노출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눈동자가 흔들리며 눈앞이 어지러웠다.
눈은 풀려 눈꺼풀이 반쯤 내려왔다.
삐익―
귀에서 이명이 들린다.
[술사의 보호를 위해 행성 간 연결이 차단됩니다.]
[연결이 차단되었습니다.]
어지러워서 바닥에 쓰러졌다.
주르륵.
입에서 피가 흘렀다.
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다음날.
나는 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괜스레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냥 내 방이다.
“아 무슨 꿈이 이렇게 지저분하냐. 개꿈도 이런 개… 으악!”
깜짝 놀랐다.
바닥에 딱딱하게 굳은 피가 한가득이다.
“뭐야, 이건.”
그러고 보니 내 옷에도 피가 잔뜩이다.
뭐지?
어떤 피지?
누구 피지?
화장실에 있는 거울을 보니 입 주변도 피다.
피가 묻은 곳은 내 입, 내 옷, 내 주변.
방바닥의 피는 내 것인가 보다.
내가 왜 피를 흘렸지?
어제 서린이와 헤어지고 집에 와서 울다가 각성한 것밖에 없는데…….
“각성? 맞다! 나 각성했지! 지금 피가 문제가 아니네. 각성해서 흥분해서 코피를 흘렸나?”
맞다. 무슨 도우미가 있었는데.
“야! 나와봐.”
방은 조용했다.
“도우미!”
조용한 방에서 시계 소리만 들렸다.
째깍째깍.
“도우미님 나와주세요.”
…
“멋지고 잘생기고 훌륭한 도우미님?”
“저기요?”
“여보세요?”
“헬로?”
뭐지? 왜 안 나오지? 아! 이름을 정확히 불러야 하나? 이름 틀리면 이제 능력 쓸 수 없는 건가? 그러면 안 되는데.
맞다! 알 뭐였는데.
“알…트?”
아무 일도 나타나지 않았다.
“알마?”
…
“알약? 알라신? 알리바바? 알랭드롱? 알러뷰, 알러지, 알씨, 알씨ㅂ…….”
―알파입니다.
뭐야 마지막에 욕하려니까 나온 것 같은데?
“알파?”
―네, 민준 님. 좋은 아침입니다.
진짜였다.
꿈이 아니었다.
헤어지고, 각성하고, 센 놈 불러 달라고 해서 그 누군가와 아이컨택을 한 것까지 다 진짜였다.
놀란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피부터 닦아야겠다.
쓱쓱.
바닥을 걸레로 닦으며 물었다.
“알파야, 그런데 어제 누굴 보여준 거야?”
―마왕입니다.
헐…….
마왕이라니, 그 마왕이 내가 생각하는 그 마왕인가? 악의 화신이며 보통 어린이 동화책이나 판타지 유형의 게임에서 최종 보스로 등장하는 그 마왕을 말하는 거야?
“그… 내가 상상하는 그 마왕?”
―어떤 상상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야, 마왕을 소개시켜 주면 어떻게 해!”
―저는 민준 님이 글리제에서 최강의 개체를 보여달라고 해서 보여드렸을 뿐입니다.
“에휴, 너 바닥에 이 피 안 보여? 뒈질 뻔했잖아.”
마왕이랑 상견례를 하다니 살아있는 게 다행이다. 막 노예 생활하다가 죽는 거 아니야? 아니지, 죽으면 언데드로 부려지거나 영혼까지 뽑아서 탈탈 털릴 뻔했다.
대화를 하면서도 피는 열심히 닦았다.
“알파야. 그런데 넌 뭐 이런 청소 같은 건 못 해주나?”
―죄송합니다만, 저는 실체가 없습니다. 명색이 소환술사이시니 소환수를 불러서 청소를 시키시던지요.
“그래? 그런 것도 가능할까?”
―소환수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요. 이제 경험해서 아시겠지만, 괜히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민준 님이 죽을 수도 있는 개체도 있고. 비글 같은 강아지를 소환수로 삼으면 청소가 아니라 난장판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아, 사람만 되는 게 아니라 동물도 소환수가 가능해?”
―네, 물론 해당 개체가 계약에 응해야 합니다.
“오오, 완전 멋진 동물 타고 다니고 그러면 멋있을 것 같아. 왜 백호라든지, 아니면 멋진 늑대라든지 말야. 기대되는데. 좋아, 다시 글리제와 연결해줘.”
―네, 글리제와 연결 시작합니다.
화아악!
방안 가득 어제 보았던 커다란 구멍이 다시 열렸다.
아름다운 우주, 그리고 그 가운데 글리제라 부르는 행성이 있었다.
“와, 이 장면은 다시 봐도 참 멋지네. 우주에는 별이 이렇게 많은가? 서울 하늘에서는 별이 잘 안 보이던데.”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은 아니죠. 우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과 행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글리제처럼 생명이 살아가는 세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 나 막 우주의 신비에 접근하는 건가?”
―우주의 신비는 아니지만, 글리제에 접근하실 수는 있습니다.
“까칠하긴.”
암튼 이번에는 누굴 찾아봐야 하려나.
괜히 마왕 같은 개체 말고 인간 중에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한… 아니다.
한 10…등도 아니다. 100등 정도면 되려나.
“알파야, 글리제의 인간 중에서 한 100번째로 강한 인간을 찾을 수 있을까?”
―100번째요? 음… 애매합니다. 인간들의 강함에 대한 서열이 공식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정도면 되겠네요. 그 정도 실력이면 중소왕국의 기사단장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소왕국으로는 프란시아, 바이론… 등이 있습니다.
“뭐, 처음 말했던 곳부터 보여줘.”
―네, 프란시아 왕국 기사단장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판 시르온이라고 일대에서는 나름 유명한 사람입니다.
행성이 점점 다가왔다.
확대되는 화면.
와우.
3D 놀이기구 화면을 보는 것 같다.
화면은 어느 고풍스러운 왕성으로 다가갔다.
옛 유럽 어딘가에서 볼만한 성의 모습이 펼쳐졌다.
큼직한 바위를 이어서 만든 성곽과 아치형 성문.
성 안쪽으로는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여러 공간이 보였는데, 알파의 화면은 어느 작은 연무장으로 보이는 곳으로 다가갔다.
여기 있나?
연무장에는 어느 남자가 홀로 훈련하고 있었다.
저 남자인가 보다.
상의는 탈의한 채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남자는 바닥에서부터 가슴 높이까지 오는 거대한 검을 들고 있었다.
울룩불룩한 근육.
어디 헬스클럽을 가도 꿀리지 않은 것 같은 몸매였다.
아니, 당장이라도 헬스클럽 트레이너를 해야 할 것 같은 몸이었다.
검을 쥔 손을 굽히자 내 머리통만 한 이두박근이 불룩 솟는다.
남자는 검을 들고 춤을 춘다.
들고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검을 가로로 베고, 세로로 베고, 흔들고 튕기며 현란한 움직임을 보인다.
발놀림이 리듬감 있고 경쾌하다.
저 커다란 검을 한 손으로 들고 춤을 춘다.
춤을 추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드럼 연주자의 드럼 스틱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대검.
웅웅웅!
그러다 검이 진동하더니 이내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마나로 이루어진 막.
마나 소드.
마나 소드를 들고 있는 남자는 빙판 위의 피겨 스케이트 선수처럼 회전하더니 공간을 가로로 베었다.
샤악.
문득 공간 자체가 베어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짝짝짝!
“와, 대단하다.”
나는 멋진 공연을 관람한 듯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중소왕국이긴 하지만 나름 기사단장입니다. 오러 익스퍼트 최상급의 검무는 일반인이 보기에 한계를 넘어선 동작으로 보이겠죠.
“응 좋아, 멋져!”
삐이익!
나는 입에 손가락을 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얹고.
아이돌을 앞에 둔 팬이라도 된 듯 부푼 기대를 갖고 말했다.
“저분에게 제안을 해줘.”
―네, 인간 판 시르온에게 소환수 계약을 제안하겠습니다.
시르온은 매일 하는 훈련을 하러 왔다.
오러 익스퍼트 최상급.
조금만 더 하면 마스터로 올라가는 실마리가 잡힐 듯했지만, 마스터의 벽은 높고 험했다.
시르온은 궁금했다.
이렇게 훈련하는 것이 맞나?
실전을 더 경험해야 할까?
마나를 관조하는 시간을 늘려야 할까?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자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까?
생각이 복잡했다.
이렇게 생각이 복잡할 때는 칼춤 한 번 추는 것이 좋다.
시르온은 자신의 애검을 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휘두르고, 베고, 찌르고, 비틀고, 막고, 차고, 튀어 오른다.
검에 집중했다가, 발놀림에 집중한다.
발길은 느리게 했다가 다시 빠르게 움직여 본다.
근육이 풀리며 살며시 땀이 난다.
검무를 추다 보니 단전의 마나가 왜 나를 쓰지 않냐며 징징거린다.
훗.
그래, 너도 마음껏 춤을 추거라.
발끝으로, 손끝으로, 검 끝으로 곳곳을 누비며 마나가 춤을 춘다.
그렇게 한참을 춤을 추었다.
샤악.
가상의 공간을 베는 것으로 검무를 마무리 했다.
그때 낯선 소리가 들렸다.
띠링!
―판 시르온 님에게 소환술사의 제안이 도착하였습니다.
흠칫.
시르온은 긴장했다.
누구의 목소리지?
보이지 않는다.
이 연무장 어디에서도 상대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다.
마나를 끌어올려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인기척을 느낄 수도 없는 곳에서 보내는 음성.
고수인가?
마법의 전령인가?
까마득히 높은 법사가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일까?
―소환술사의 제안이란 글리제의 인간이신 판 시르온 님과 먼 지구라는 행성의 소환술사의 상호 계약입니다.
―판 시르온 님께서 소환술사의 소환수가 된다는 계약입니다.
―계약에 응하시면 소환술사의 소환에 의해 지구로 소환되실 수 있습니다.
―소환수가 되면 뭐가 좋냐구요? 소환수가 되시면 시스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소환술사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도 있고, 레벨업을 통해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강해지고 싶지 않으신가요? 술사로부터의 지원, 경험치 축적에 의한 레벨업. 어떠세요?
―소환술사와의 계약에 응하신다면 ‘계약에 응한다’라고 말씀해 주세요.
시르온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묵묵히 들었다.
시르온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심마(心魔)인가?”
시르온은 분노했다.
그 분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이제는 강함을 추구하고자 악마의 속삭임을 듣는가?
아무리 마스터의 벽이 높다고 한들 묵묵히 걷다 보면 오를 수도 있는 길이다.
만약, 능력과 재능이 부족해 마스터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유혹이 들릴 줄이야.
강해지고 싶냐고?
그래,강해지고 싶다.
도움을 받고 싶냐고?
그래, 도움을 받고 싶다.
하지만 소환수라니?
대 프란시아 왕국의 기사단장으로서 왕과 왕국에 충성해야 할 이 몸에게 소환의 계약이라니.
배신하란 뜻인가?
베이론 왕국에서 나를 노린 어둠의 마법인가?
시르온을 이빨을 깨물며 말했다.
“내 비록 너의 기척을 느낄 수 없으나, 너와의 말도 안 되는 계약을 맺을 수는 없다. 나는 대 프란시아 왕국의 영예로운 기사단장으로서 심마처럼 찾아온 너와 나눌 이야기는 없다.”
시르온은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마나를 뿜으며 말했다.
“꺼져라!”
화아악!
화면이 뒤로 물러났다.
그 기세에 놀라서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다가 침대에 걸려 뒤로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민준 님 괜찮으십니까?
“마지막에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꺼져라’라고 합니다.
나 어제 여친에게 차인 사람이야.
그리고 마왕과 아이컨택해서 피 철철 흘렸어.
가만히 있어도 어지러워.
그런데 오늘은 나보고 꺼지래.
검무 개쩔었는데.
나는 아이돌에게 꺼지라는 말을 들은 팬처럼 내상을 깊게 받았다.
―그래도 대단합니다. 머지않아 마스터가 될 것 같은데요?
―마지막에 ‘꺼져라’는 말에는 마나와 함께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화면이 꺼지라는 말에 의해 밀려난 것이지요. 어지간해서는 공간을 보는 창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아쉽네요. 머지않아 마스터가 될 것 같은데 계약하면 대박일 뻔했습니다.
―잉? 민준 님 뭐하십니까?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두 손을 모아 심장 위에 올리고 가만히 있었다.
내상이 깊었다.
“꺼지라니…….”
십 분 후.
“그래, 나 김민준이 싫다는 사람한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그런 사람 아니야. 알파! 이번엔 동물 가자, 동물!”
―어떤 종류의 동물을 원하십니까?
“왜 그런 것 있잖아. 은빛 좔좔 흐르는 늑대 같은 것 말야. 소환수 하면 원래 동물이지, 동물!”
―은빛 늑대라면 산맥 쪽을 찾아보면 되겠군요. 이곳 프란시아 왕국에서 북쪽으로 가면 큰 산맥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보겠습니다.
슈우욱!
화면이 날 듯이 이동했다.
수많은 사람, 지형이 스쳐 지나갔다.
스으윽!
화면이 천천히 멈췄다.
―여기 한 마리 있네요.
와, 장군감이네.
멋지다, 잘생겼다.
어느 절벽 끝 바위 위에 늑대 한 마리가 고고한 모습을 한 채 서 있었다.
좔좔 윤기가 흘렀다.
얼굴에는 작은 상처 몇 개가 나 있어서 더욱 터프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물었다.
“근데 쟤가 나를 물진 않겠지?”
―네, 계약에 응한다면 기본적인 친밀도가 쌓이기 때문에 명령에 충실하진 않더라도 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멋진 은빛 늑대. 너로 정했다. 내 소환수가 되어라.”
―계약을 제안합니다.
…
“크르르르르르.”
…
“왜? 뭐라는데?”
…
―거절당했습니다.
뭐?
나 늑대한테도 차인 거야?
―새끼 늑대는 어떠신가요? 새끼 때부터 잘 키우다 보면…….
나 이미 맘 상했거든?
“하아, 그냥 소환술사면 첨부터 킹왕짱 소환수 주면 안 돼? 막 드래곤 이런 거 그냥 주면 되잖아?”
―민준 님, 마왕의 곁눈질 한 번에 피 토하셨는데, 드래곤 찾아 드릴까요?
절레절레.
“아니, 하지 마.”
늑대한테도 까이는데, 드래곤이 퍽이나 내 소환수 하겠다.
분노의 브레스를 맞겠지.
아니, 브레스도 필요 없을 거다.
발가락으로 꾹 하면 손톱으로 눌린 개미가 되겠지.
그것도 아니면 ‘오호, 차원이동?’ 이라면서 드래곤의 장난감이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하…….”
깊은 한숨이 나온다.
어? 그런데 쟨 뭐지?
산기슭에 한 소녀가 웅크린 채 있었다.
“알파야 쟤 좀 비춰봐.”
화면이 소녀에게 다가갔다.
금쪽같은 소환수들
—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