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229화 (완결) (228/229)

229. (完) 64th. Last All-in (6)

성의원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집무실에 들어갔다.

“장인어른 계시죠?”

“아버지 계시죠?”

“예. 두 분 외에는 그 어떤 손님들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문 앞을 지키던 비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우리는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에는 장호건만이 소파에 혼자 앉아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어서 오게. 앉아서 술이라도 한 잔 들지.”

탁자 위에 놓인 빈 잔 두 개를 보니 우리와 술을 마시며 할 얘기가 있는 듯했다. 나는 장하연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자리에 앉았다.

“받게.”

“네.”

두 손으로 공손히 온더락 글라스를 잡은 나는 장호건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술을 다 받은 내가 잔을 병에서 떼자 장호건이 장하연을 바라보며 술병을 쥔 손을 뻗었다.

“너도 한 잔 받아라, 하연아.”

“네··· 아버지.”

장하연도 몸을 앞으로 뻗으며 장호건이 채워준 술을 받았다. 술을 다 따라준 장호건이 병을 내려놓았다.

“이게 성의원에서 하는 마지막 일이 될 것 같구나. 들자.”

“네.”

우리는 장호건이 마시는 속도에 맞춰서 위스키를 마셨다. 장호건과 함께 잔을 입에서 뗀 우리들 중 질문을 던진 건 나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신 겁니까, 장인어른?”

“선 대표한테 못 들었나?”

“그건 들었습니다. 지주회사를 만드신 게 처남들과 처제에게 낸 후계자 시험이었다는 거, 그리고···· 그 시험에 저희도 포함되었다는 것도요.”

고개를 끄덕인 장호건은 술 한 모금을 축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희들도 내가 낸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너희들만이 시험에 통과했지.”

“그런데··· 왜 저희를 부르신 겁니까?”

조심스럽게 건넨 내 질문에 장호건이 침음성을 흘렸다.

“···너희들과 나만 평생 지고가야 할 비밀 때문이다.”

“평생 지고가야 할 비밀이요?”

“자네, 내 친구 내외였던 자네 부모님이 왜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는지 아나?”

장호건의 질문을 받자마자 뒷골이 서늘해졌다. 부모님의 자동차 사고가 왜 이 자리에서 나온단 말인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장인어른?”

“그 사고, 내 처가 때문에 난 사고였네.”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조국일보 황 씨 가문 때문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자, 장인어른?”

“아, 아버지?”

나도, 장하연도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는 중에도 장호건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자네 어머니에게 한때 마음을 줬었지.”

들을수록 충격의 연속이었다. 장호건이 어머니를 짝사랑했었다니?

“그렇지만 그 시절의 나는 숫기도 없는 놈이어서 고백하지도 못했네. 내 부친 때문에 사랑할 자격도 없었고.”

그랬을 것이다. 신성전자를 세우면서 내 외가와 악연을 시작한 장병호 아닌가? 신성그룹에 보냈던 종조부까지 도로 불러들인 외증조부님도 보통 성정이 아니었으니 두 사람의 교제를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네 모친은 자네 부친을 더 사랑했지. 나 또한 자네 부친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었고. 그래서 둘이 결혼하는 걸 지켜봤네. 그런데···.”

말끝을 흐리던 장호건이 술을 들이켰다.

“내가 자네 부모와 친하게 지내는 걸 두고 내 와이프가 이상하게 생각하더군. 내가 아직도 자네 모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만나는 줄 알고 말이야.”

“서, 설마··· 그래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장호건은 죄인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게 많다네. 내가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았겠지만 나 또한 알았을 땐 이미 자네 부모가 죽은 뒤였지. 증거를 겨우 모으긴 했지만 자네와 하연이의 관계, 그리고··· 나머지 자식들 때문에 숨길 수밖에 없었네. 미안하네.”

장호건은 생전 처음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신성그룹을 저희 내외에게 넘기시려는 겁니까? 돌아가신 부모님 목숨 값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묻던 나는 대답이 없는 장호건을 보며 소리쳤다.

“말씀해보세요, 장인어른! 아니, 아저씨!”

“신성그룹이 어떻게 내 친구와 내가 사랑하던 여자의 목숨 값에 비할 수 있겠느냐, 성민아? 그래도 네가 내가 가장 아끼는 딸, 가장 미안한 딸을 사랑해준 최소한의 보답이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보세요, 아버지?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라도 시부모님을 죽였어요! 앞으로 내가 어떻게 성민이 옆에서 살아요!”

장호건에게 소리친 장하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장하연이 우는 모습을 보니 메마른 들판에 불붙은 것처럼 타오르던 분노가 소나기라도 맞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만해, 여보. 그래도 당신 아버지야.”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야! 그런 일이 있었으면 할아버님께 알렸어야지! 너한테 나 보내겠다고 숨긴 거잖아!”

어느 새 장하연은 내 품에 기대어 울었고, 내 가슴팍도, 마음도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하염없이 우는 장하연의 등을 토닥여주던 나는 장호건에게 물었다.

“그럼··· 장모님은 어떡하실 겁니까? 장인어른은 몰랐다고 해도 장모님과 장모님 친정 놈들은 죽어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황나연 그 년의 머리채를 가죽 째로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장하연이 장호건 대신에 용서를 구하고 있으니 간신히 참는 거다. 그럼에도 살기가 넘치는 내 눈을 장호건은 담담히 받아내며 입을 열었다.

“그거 때문에 너희를 보자고 한 거다. 지금쯤이면 모두들 모여 있을 테니 한남동으로 가자.”

한남동이면 장호건의 집을 말하는 거다.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

한남동 장호건 저택에 도착한 우리는 소파에 앉은 장 씨 삼남매, 그리고 황나연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며 거실로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처가 망하게 하고도 들어올 엄두가 나디?”

“참 뻔뻔하네요, 매형.”

다들 한 마디씩 틱틱 거렸지만 나와 장하연은 오히려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봤다. 장호건마저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있자 어느 새 이 집 거실에는 싸늘한 냉기만 감돌았다.

“시작하게, 이 서방.”

“네, 장인어른. 조만간 채권단 회의를 통해 신성그룹 장 씨 가문이 보유한 신성그룹 주식은 전부 소각될 겁니다. 그 대신, 스탠더드 캐피털이 보유한 모든 채권을 주식으로 바꾸고 신성전자 주식 전량을 신성지주에 현물 출자하는 등 구조조정을 개시할 겁니다.”

네 모녀가 날 죽일 듯이 쏘아보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해서 놈들에게 철퇴를 먹였다.

“구조조정이 끝나고 나면 스탠더드 캐피털이 보유한 신성지주 주식의 절반은 내 부인인 장하연이 인수할 겁니다. 신성금융지주는 상장폐지해서 신성생명과 합병한 뒤, 해동물산에 모든 지분을 넘길 거고요.”

“야, 이성민!”

“아버지!”

“아빠!”

“여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게 나와 장하연, 우리 집안에 뺏길 거란 소리에 장용재부터 장민재, 장수연 그리고 황나연까지 차례대로 소리 질렀지만 장호건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싫으면 스탠더드 캐피털이 쥐고 있는 신성그룹 채권부터 신성카드 부실채권까지 전부 처리해.”

“아, 아버지?”

소파에 앉은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장호건의 말은 계속됐다.

“난 이제 더 이상 힘이 없다. 비자금도 다 쓰고 수십조 원이나 되는 빚을 갚을 여력이 없어.”

“그, 그래도 신성미술관에 있는 미술품이라도 팔면···.”

“그거 전부 가품이다. 비자금 만들려고 진품은 전부 팔아치운 걸 모르는 게냐?”

좀 더 버텨보자는 말을 하려던 장용재는 죽일듯한 눈빛으로 장민재를 쏘아봤다. 비자금을 전부 까먹은 게 장민재 아닌가?

“그리고 하나 더. 너희가 신성그룹 회장이 되려면 너희들 어미를 감방에 보내야 할 거다.”

“아, 아버지?”

“무, 무슨 말이에요, 여보?”

자식들에 이어 황나연까지 당황했지만 장호건은 손에 들고 있던 누런 봉투를 황나연 앞에 내던졌다.

“이거, 기억하지? 당신이 질투에 미쳐서 이 서방 부모 죽인 거.”

“여, 여보?”

황나연의 얼굴이 파리해졌고···

“어, 어머니?”

“어, 엄마?”

소파에 앉아있던 놈들 모두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황나연을 쳐다봤다.

“너희들이 너희 어미를 죽을 때까지 감방생활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죽을 때까지.”

장호건은 자신의 처자식들에게 모질게 말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내 속이 달래질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허나 그런 모습으로도 내 분노는 티끌조차 깎아낼 수 없었다.

“장인어른, 그것만으로는 제 분을 다 풀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떡하겠다는 건가?”

“성의원에서 한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그 약속만 지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 말을 듣고 고민하던 끝에 장호건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뜻대로 하게.”

“예. 황나연 씨, 일어서세요.”

“뭐, 뭐라고? 황나연··· 씨?”

황나연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 분노를 더 자극할 뿐이었다.

“씨라도 붙여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시죠.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은 거, 장인어른 때문에 어거지로 참는 거니까. 너희도 전부 일어서.”

“여, 여보···?”

장하연마저 내 입에서 그렇게 험한 말이 나올 거라 생각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는지 눈빛도 흔들리고 몸도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 장하연의 두 팔을 잡은 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미안해, 여보. 진짜로 죽일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살인자 부모가 될 순 없으니까.”

“응···.”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장하연에게 쓴웃음을 지어보인 나는 다시 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 살기 때문이었는지 네 연놈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너희가 신성그룹에 발붙이고 살고 싶으면 니들 에미, 니들 손으로 뺨부터 때려.”

“뭐? ···야, 이 개새끼야!”

장용재가 눈에 불을 켜고 주먹을 치켜든 채 내게 달려들었지만 나는 그대로 장용재의 팔을 잡아서 바닥에 패대기쳐버렸다.

“악!”

매트도 안 깔린 대리석 바닥에 패대기쳐진 장용재는 비명을 지른 채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까불지 마, 장용재. 술만 처마실 줄 알고 손가락으로 사람 부릴 줄만 아는 놈이 어디라고 덤벼? 주제도 모르고.”

“이, 이 새끼···!”

심하게 다쳤는지 일어설 생각도 못하는 장용재의 가슴팍을 짓밟은 나는 그대로 무릎을 굽힌 채 놈에게 내 얼굴을 가져가며 노려봤다.

“더 까불어봐. 이대로 더 밟아서 죽여 버릴 수도 있으니까.”

“으으윽!”

그대로 체중을 더 실어서 가슴뼈를 압박하자 신음소리를 터뜨리던 놈이 손으로 바닥을 연신 두들겼다.

“아,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 제발···!”

“제발 뭐?”

“···살려 줘!”

“살려··· 줘?”

말끝을 높인 내 표정을 보고 장용재가 다급하게 말했다.

“사, 살려주세요!”

“뭐라고? 더 크게!”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 커, 커억···.”

“빙고.”

숨이 막히는지 컥컥 거리는 장용재를 보며 나는 씩 웃으며 대답한 뒤,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병신 새끼. 까불긴 왜 까불어서는.”

몸을 편 채 일어선 나는 장용재의 가슴팍에서 발을 떼고 나머지 세 마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미나 암컷이나 수컷이나 장용재가 나가떨어진 꼴에 충격을 먹었는지 벌벌 떨고 있었다.

“어떡할래? 너희도 장용재처럼 까불고 똑같은 꼴 될래? 아니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할래?”

“때, 때릴게요!”

허겁지겁 대답한 장수연과 장민재는 황나연 앞에 마주섰다.

“너, 너희들···!”

황나연의 흔들리는 눈빛에 잠시 망설이던 장수연이 꼴에 누나랍시고 먼저 나섰다.

“···미안해···, 엄마. 감방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 이게 다··· 엄마를 위해서야.”

장수연은 같잖은 변명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며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그대로 눈을 질끈 감은 장수연이 자신의 손을 황나연의 뺨으로 내려붙였다.

“아흑!”

황나연은 그대로 소파에 팽개쳐졌고, 장수연은 어찌나 입술을 세게 깨물었는지 피까지 흘리며 울고 있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황나연 씨. 뭐하고 있어, 처남? 안 일으켜 세우고.”

“매, 매형···.”

공포와 원망, 슬픔,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장민재가 날 쳐다봤다.

‘그래, 저 눈이야말로 내가 죽기 전의 눈이었겠지.’

내가 느낀 만큼의 분노와 그로 인한 고통이 저놈들에게도 퍼졌을 거라 여긴 나는 장민재에게 건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약속은 지킬 거야, 처남. 지금 자리 지키려면 시키는 대로 해.”

“···네.”

머뭇거리던 장민재가 소파에 널브러진 채 흐느끼는 황나연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 민재야! 나! 너희들 엄마야! 내 배 아파서 낳은 게 너희들이라고!”

“미안해요, 엄마. 그래도··· 살인은 아니지!”

“아악!”

어찌나 이를 악물었는지 턱 주변의 힘줄까지 불거진 장민재가 황나연의 뺨을 쫙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황나연은 선 채로 엉엉 울다가 정신이 나간 듯 옆으로 쓰러졌다.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손가락 하나로 사람 부리던 사람이 제 자식들 손에 뺨을 맞았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나.

자리가 높을수록 떨어져 내리는 깊이는 끝이 없단 걸 모르고 날뛴 대가였다.

‘그렇게 자기한테 면죄부를 주고 싶었냐? 보시라이도 울고 갈 새끼.’

제 어미를 바닥 없는 나락으로 내던진 장민재의 독한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차던 나는 내 차례를 시작했다.

“장수연, 처남, 둘 다 와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짓을 한 내게 두 연놈이 마주섰다. 나와 감히 눈도 마주칠 생각도 못하는 두 연놈을 보며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장수연 너, 나더러 고자라고 했다지?”

“···네?”

당황한 장수연을 보던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입 다물어.”

“···네.”

입을 다문 장수연의 뺨에 나는 내 손을 풀 스윙으로 날렸다.

“아악!”

뺨을 맞고 바닥에 쓰러진 장수연이 고개를 쳐들고 날 노려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너희들 뺨 안 때린다는 소리는 안했어. 처남도 준비해.”

말할 엄두도 못 냈는지 장민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다시 장민재의 뺨을 풀 스윙으로 후려쳤다.

“으윽!”

장민재까지 바닥에 널브러진 꼴을 보니 후련하다 못해 허무했다.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내쉬던 나는 뒤쪽으로 몸을 돌리고 장호건과 장하연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사과와 함께 90도로 허리까지 숙인 내게 장호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니 어쩔 수 없겠지.”

그 말을 면죄부로 받아들인 나는 고개를 들고 장하연에게 말했다.

“미안해, 여보.”

“미안해 할 거 없어, 여보. 당신은 자식 된 도리로 해야 할 걸 한 것뿐이야.”

장하연과 마주보며 서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난장판이 된 거실을 둘러보고 말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장인어른 말대로 죽을 때까지 입 다물고 숨만 쉬고 살겠다면 장모님, 아니 황나연 씨를 감방에 보낼 일은 없을 겁니다. 휴지조각이 된 여러분들의 주식도 적게나마 값을 쳐서 거둬주고 회사에 자리도 남겨줄 거고요.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나는 숨을 고르고 최종경고를 날렸다.

“이번 거래에 대해 반대하면 죽지 못해 산다는 게 어떤 건지 확실히 보여드리죠. 그 본보기로 조국일보 간판부터 내 손으로 작살낼 테니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똑같은 괴물이 되기도 싫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도록 평생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

너희들 스스로 제발 죽여 달라고 빌게 만들어 주마.

내가 과거에 겪었던 고통보다 더 평생 고통 받고 지옥에 가도 잊지 못할 가시밭길을 깔아줄 테니.

***

얼마 뒤.

[···신용불량자 사태로 인해 우려됐던 금융권의 붕괴는 스탠더드 캐피털의 유례가 없을 대규모의 후한 투자로 빠르게 수습될 예정입니다. 또한, 신용불량자들의 채권을 대량으로 인수한 추심업체들과 신용정보회사들은 이번에 인수한 채권의 회수를 20년에 걸쳐서 하겠다는 공동 기자회견을 발표했으며···.]

스탠더드 캐피털 사무실에서 뉴스를 보던 나는 미소를 지었다.

“미국에 있는 제 돈 한국에 옮기는 일일 뿐인데 금칠을 해주네요.”

“그러게 말이다. 추심업체들이랑 신용정보회사들이 죄다 나중에 네가 물려받을 사채조직에서 만든 건 줄 알면 뒤집어 지겠어, 흐흐.”

이번 거래는 마냥 내게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니었다. 과정은 복잡하지만 수십조 원이나 되는 돈을 이자까지 받으면서 우리집안의 사채조직으로 옮기는 거대한 돈세탁 작업 아닌가?

무엇보다.

우리 집안 사채조직으로 채권자가 바뀐 신용불량자들은 앞으로 20년간 원리금이 동결된 채 빚을 갚으면 된다.

100만 원짜리 채권을 2,30만 원에 산 꼴이라 사채조직의 수익도 충분하고 무직자들은 해동그룹에 일자리를 알선해줄 테니 조금은 힘들더라도 삶을 포기할 이유는 없어진 셈이다.

‘이 정도면 다들 윈윈하는 일이 되겠지.’

내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던 내게 박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의장님 처가 분들이 순순히 주식을 내놓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박태진의 새삼 놀랍다는 표정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휴지조각 된 주식 거둬준다고 하니 얼마나 좋겠어요. 처숙부님이나 처고모님은 장인어른 쪽에서 주식 전부 털어낸다고 하니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해서 넘겼을 테고요.”

박태진에게도 평생 말 못할 황나연의 부모님 살해.

그 사건을 알자 그놈들도 사람의 본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황나연은 살려달라며 주식을 전부 넘기겠다고 했다.

“그래도 수백억 원을 건졌으니 그게 어디냐? 안 그래?”

“그 돈이 앞으로 신성그룹 임직원으로서 겪어야 할 고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건 모르겠지만요, 흐흐.”

앞으로 장 씨 집안의 3세들은 평범한 임직원들처럼 사원증을 목에 걸고 보안대를 통과하며 주변 임직원들의 날카로운 평가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남고 싶다면 말릴 수는 없겠지만 얼마나 갈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나저나 취임식은 언제할 거냐?”

“며칠 뒤에 성의원에서 합동 이사회 소집하고 그 자리에서 발표하려고요. 첫날부터 집무실 쓰게 해줘야죠, 후후.”

돌아가신 부모님께는 미안하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니 할아버지께도 말할 수 없었다. 숨이 붙어있는 이상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행복하게 사는 게 좋으니 부모님도 이해해주실 거라 믿었다.

***

며칠 뒤.

오후 5시.

서서히 노을이 지기 시작한 성의원에는 수십 대의 검은 세단들이 몰려들었다. 차에서 내린 남자들은 전부 야외에 세팅된 테이블마다 자리를 잡았다.

그 테이블들 중 단상 앞 중앙의 로열석 테이블 두 개는 할아버지와 배재훈, 태재호, 조영찬, 고승주, 박태진이 한 개, 선해철과 클레어, 헨리, 그리고 체이스맨해튼의 임원으로 위장하고 참석한 아이작이 한 개를 차지한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신성지주의 최대주주인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 대표 자격으로 합동 이사회 임시의장을 맡아 단상 위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신성그룹 합동 이사회 소집을 요청한 것은 새로 태어날 신성그룹의 미래를 이끌 리더를 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에 앞서서 오늘 오후 4시경에 장하연 고려호텔 대표이사가 스탠더드 캐피털이 보유한 신성지주 주식 절반을 매입, 스탠더드 캐피털과 공동 최대주주가 됐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장내가 술렁이는 가운데 나는 마이크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주위를 환기했다.

“본 임시의장은 신성지주 신임 회장 겸 신성그룹 신임 회장으로 장하연 대표이사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또 한 번 술렁이는 장내를 보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렸다.

“참고로 본 이사가 소유하고 있는 해동그룹, 본 이사가 근무 중인 스탠더드 캐피털은 해동그룹과 신성그룹의 합병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내 질문이 향한 곳은 해동그룹 수뇌부들이 앉은 테이블이었다. 그 테이블의 연장자이자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로 꼽히는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소이다. 본인은 해동그룹 고문으로 물러났지만 그룹 내 여러 회장들의 자문 요청에 두 그룹의 합병은 이 나라 경제에 좋지 않을 거라는 답을 해줬소. 합병을 하게 되면 여기 계신 분들의 일자리부터 날아갈 게 아니오? 으허허.”

두 그룹이 합병은 이 자리에 있는 신성그룹 사장들 대부분의 목을 날릴 일이다.

총수가 바뀐 것만으로도 그룹이 어수선할 텐데 대숙청을 하면 수습이 더 어려워지지 않겠나? 날려야 할 인간들은 날려야겠지만.

할아버지의 웃음이 사람들에게 번지고 번져서 성의원 장내를 채우며 분위기가 풀렸고 자리에 앉은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짧게 미소를 지었다 지워버리고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장하연 고려호텔 대표이사의 회장 취임에 대한 찬성하시는 분들은 기립해주십시오.”

발언을 마친 나는 가장 먼저 일어섰고 로열석 테이블에 앉은 우리 가족들과 내 친구들도 일어섰다. 그들을 중심으로 신성그룹 대표이사들도 파도타기마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성 다수. 장하연 고려호텔 대표이사의 신성그룹 신임 회장 취임이 가결됐음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신임 회장께서는 단상으로 올라와주십시오.”

내 진행발언이 끝나자마자 단상 뒤에 있던 장하연이 검은 정장을 입고 단상 위로 올라왔다.

포니테일 머리에 강렬한 인상의 화장을 한 장하연은 아랫단이 넓은 바지를 찰랑찰랑 흔들면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누구 마누라인지 몰라도 참 예쁘단 말이지, 흐흐.’

오늘 그녀의 모습은 늘 보던 부드러운 아름다움과는 다른 힘이 넘치는 아름다움으로 휘감겨있었다. 미소를 지우지 못하는 나를 보며 살풋 웃은 장하연은 내가 마이크를 꽂아준 연설대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신성그룹 신임회장으로 취임한 장하연입니다.”

할아버지의 박수에 이어서 모든 이들의 힘찬 박수가 들렸다. 누군가는 진심을 담고 누군가는 억지로 치는 박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나도 장하연도 더 이상 뿌듯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신성그룹은 옛 오너들의 업으로 인해 고행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 고행의 길이 언제 끝날지 본 회장조차도 가늠할 수 없기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할 뿐입니다.”

처음부터 작심하고 무거운 발언을 쏟아내자 장내에 적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분위기를 깬 건 그 분위기를 만들어낸 장하연이었다.

“그러나 비관에 빠져 주저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앞으로 새로 태어날 신성그룹은 구태와 악습을 청산하고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모범기업, 선도기업으로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본 회장 또한 사력을 다해 경주할 것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께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장하연은 반드시 신성그룹이 부활의 날개를 펼치고 훨훨 날아오르게 할 것이다. 나라는 든든한 파트너도 있지만 본인 또한 열심히 노력할 사람이 아닌가?

사람들의 박수가 한창일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하연의 옆에 섰다.

“장하연 회장이 잘 해낼 것이라 믿습니다. 이에 해동물산 또한 형제기업으로서 신성그룹에 대한 지원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이건 내가 장하연에게 주는 회장 취임 축하선물이었다. 단순히 공수표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공개석상에서 내 의지를 천명한 나는 깜짝 놀란 장하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며칠 뒤.

각자의 직장 일로 시간을 못 냈던 우리는 일요일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시간을 맞춰 해동물산 인천창고에 도착했다. 휴일이라 할아버지 댁에 아이들을 맡긴 우리는 인천창고를 둘러봤다.

“이만하면 신성물산 상사부문이나 신성전자도 같이 쓰기엔 충분할 거야.”

“고마워, 자기야.”

해동물산 인천창고는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면서 물류자동화 창고로 진화하고 있었다. 이 창고의 일부를 신성물산 상사부문에 싸게 임대해주고 신성전자 수원공장에서 생산될 물량의 중국 수출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창고를 다 둘러본 우리는 임원들과 함께 부둣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인천창고에서 일하셨던 거, 사실이야?”

“대학생 때 할아버지가 시켜서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처럼 뛰셨대. 그래서 나 대학 졸업하면 인천창고부터 돌리려고 했었다지 뭐야, 후후.”

빙긋 웃던 나는 봉투에서 소주 병 하나와 종이컵 하나를 꺼냈다.

“잔 좀 들어줘, 자기야.”

“응.”

장하연이 쥔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채운 나는 소주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종이컵을 넘겨받았다.

“아버지, 어머니, 이젠 편안히 주무세요.”

나지막한 읊조림과 함께 나는 천천히 소주를 바닷물에 끊어서 부었다. 반절 정도 소주를 부었던 나는 숨을 고르며 나머지 소주를 천천히 부었다.

‘과거의 나도 이젠 편안히 잠 들길.’

지금 붓는 술에 그간 내가 품고 있던 한과 미련까지 담아서 버리고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종이컵을 다 비우고 나서 미소를 짓는 내게 장하연이 말했다.

“자기 얼굴, 오늘처럼 밝은 적이 없었어.”

“그런가? 난 언제나 당신 옆에 있어서 밝은 줄 알았는데.”

“빨리 점심 먹으러 삼청동 가자. 할아버님하고 아이들 기다리겠어, 후훗.”

싱긋 웃는 장하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종이컵과 소주병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바닷가를 등지고 장하연과 함께 차로 돌아갔다.

죽은 자 이성민의 미련을 모두 털어낸 채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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