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64th. Last All-in (5)
몇 시간 뒤.
계약서를 꾸민 우리는 그 자리에서 최종합의 된 계약서를 검토했다.
“만족스럽군요, 후후.”
“나는 그닥 만족스럽지 않은 내용이군, 조니.”
퉁명스럽게 내뱉던 잭슨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신성그룹에 집착하는 건가? 지금 갖고 있는 재산과 거느린 기업들이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당신이 나한테 신성그룹 채권을 넘기고 모건스탠리를 챙기려는 이유와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잭슨.”
“흠···.”
침음성을 흘리던 잭슨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루이 14세와 다를 게 없군.”
모르는 사람에겐 뭔 개소리냐는 투로 넘기겠지만 나는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다.
태양왕으로 유명한 루이 14세.
그는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사가 자신에게 시집올 때 지참금을 완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페인 왕위계승권을 포기한다는 조항이 무효라고 했고, 결국엔 당시의 스페인 영토였던 벨기에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나에 대해 아직도 견적이 안 나왔나보군. 그러니 IT버블 때도 당하고 이번에도 나한테 당했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아이작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와 잭슨을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봐, 잭슨. 내가 신성그룹만 먹자고 내 여자랑 결혼한 줄 아나?”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자네가 루이 14세처럼···.”
잭슨이 순식간에 미소를 지우고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그 입 닥쳐. 계약서에 아직 서명 안 된 거 몰라? 지금이라도 계약서 찢어버리고 끝장내줄까?”
눈에 살기를 가득 품고 낮게 으르렁거리자 잭슨의 눈이 커졌다.
“조, 조니?”
“조니라고 부르지 마, 이 코주부 새끼야. 너 따위한테 날 그렇게 부를 자격이 있을 것 같아?”
우리 둘의 거래를 중재하느라 고생했던 아이작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게 대수인가. 나이 처먹은 값을 해야 대접을 해주지.
“나한테 돈은 그냥 수단일 뿐이야. 너희 코주부 모건 새끼들처럼 돈이 쌓이는 것만 봐도 즐거워서 웃음을 쳐 흘려대는 병신이 아니라고. 이거 찢어버리고 나서 네 그 잘난 주둥아리 때문에 계약 파토 났다고 모건 가문에 알려줄까?”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빈정거리던 내가 계약서 윗부분의 가운데를 두 손으로 잡고 찢어버리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잭슨이 황급히 두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닐세, 미스터 리! 내가 경솔했네!”
“경솔한 줄 알았으면 사과를 해야겠지?”
“사, 사과?”
“동양에서는 정말 죄송하다고 하면 90도로 허리까지 숙여서 사과를 하지. 정말 죄송하면 지금 내 앞에 일어서서 90도로 사과해봐.”
내가 지금 요구하는 사과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아있는 아이작도 함께 받을 사과였다. 모건 가문에게 시달렸던 록펠러 가문의 가주 아닌가? 나는 아이작을 보며 빙긋 웃은 뒤,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잭슨을 노려봤다.
“그새 귓밥이 쌓였나보지? 아니면, 아직도 세울 자존심이 남아있는 건가?”
턱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간 잭슨을 보며 나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쾅 내려쳤다.
“대답해! 어서!”
그때서야 잭슨이 두 손으로 양 팔걸이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잭슨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두 팔을 옆에 딱 붙이고 90도로 허리까지 숙여봐. 그래야 계약서에 싸인 들어갈 줄 알아.”
잭슨의 얼굴이 전에 없이 붉게 물들었지만 그의 두 팔은 옆구리에 딱 붙었다.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잭슨은 서서히 허리를 숙였다.
“자, 이제 ‘죄송합니다, 미스터 리. 죄송합니다, 미스터 록펠러.’라고만 말해. 그러면 바로 싸인 넣어주지, 흐흐.”
잭슨 이 새끼는 절대 봐줄 수 없는 놈이다. 처가 놈들의 피를 천천히 말리며 자연스럽게 신성그룹을 접수하려던 내가 과격한 방법을 쓰게 만든 놈이 아닌가?
아이작이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때 90도로 허리를 숙인 잭슨의 입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미스터 리! 죄송합니다, 미스터 록펠러!”
분노가 철철 넘치는 목소리를 타고 나온 사과였지만 나는 그때서야 속이 후련해졌다.
“오케이. 사인합시다, 미스터 모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잭슨은 분을 못 참고 흘러나온 눈물을 훔치고 나와 함께 계약서에 서명했다. 다시 계약서를 교환하고 서명을 한 번 더 마친 나는 잭슨을 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아! 당신이 우리 앞에서 사과한 거, 전부 녹화됐습니다. 헛 수작 부리면 당신은 그날로 월가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겁니다, 흐흐.”
저놈도 모건 가문의 긍지는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새하얗게 질린 잭슨의 얼굴을 보며 나는 씩 웃었다.
***
계약을 마친 우리는 헨리의 저택에 갔다. 응접실에 마련된 대형 TV로 잭슨이 우리 둘에게 깍듯이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헨리가 박장대소했다.
“으하하하! 조니 자네가 그렇게 지독한 사람일 줄은 몰랐네!”
“웃을 일이 아닙니다, 아저씨. 옆에서 지켜보던 저는 얼마나 식겁했다고요? 흐흐.”
현장에서는 얼어붙었던 아이작도 지금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웃어보였다.
“의장님이 원래 그런 분입니다, 미스터 록펠러.”
“태진이 말이 맞아요, 미스터 록펠러. 한 번 송곳니 드러내면 조니처럼 지독한 녀석도 없습니다, 흐흐.”
선해철이 맞장구를 치며 낄낄 웃고 있을 때 클레어가 내게 물었다.
“모건스탠리 지분하고 신성그룹 채권만 바꾸면 끝나겠네?”
“아니죠. 5년 내에 우리가 재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넣었으니 그때가 진짜 끝이겠죠, 흐흐.”
잭슨과 내가 체결한 계약서에는 5년 내에 내가 모건스탠리 지분을 시가로 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넣어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 모건 놈들은 또 한 번 바보가 될 것이다.
“자, 그럼 모든 고비를 넘겼으니 축배라도 들어야겠군. 집사장!”
헨리의 호기로운 외침에 집사장이 미소를 지었다.
“예, 주인어른.”
“당장 만찬 준비를 하게. 오늘 같은 날은 즐겨주는 게 예의 아니겠나? 하하!”
***
며칠 뒤.
신성그룹 성의원에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채권을 처분했다뇨?”
[당신들이 신성카드인지 지랄인지 돈놀이를 어설프게만 안 했어도 우리가 채권을 팔 일은 없었을 거요. 신성그룹이 오늘내일해서 채권이 휴지가 되게 생겼는데 더 좋은 값을 쳐주겠다는 곳에 파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소?]
잭슨의 뻔뻔한 대꾸에 장호건의 표정이 굳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는 있었지만 두 번 이상 당하고 싶은 치욕은 아니었다.
[이제 신성그룹의 최대 채권자는 스탠더드 캐피털이 됐으니 그리 아시오. 그럼.]
통화가 끊어지자 장호건이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놨다. 그 모습을 보고 이수한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떡··· 하시겠습니까, 회장님?”
“어떡하긴? 그 양놈들한테 회사를 뺏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 양놈들이 스탠더드 캐피털이라는 걸 이수한이 모를 리 없었지만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놈들이 쥐고 있는 주식과 채권이면 신성전자를 신성그룹에서 뽑아내고도 남을 규모가 아닌가?
“그, 그럼···.”
이수한이 주저하고 있을 때 집무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약속이 없는 분들은···.]
[신성그룹 최대 채권자이자 신성전자 최대주주로서 온 겁니다. 성의원도 신성그룹 재산인데 못 올 이유가 있습니까?]
밖에서 들린 소리에 장호건이 한숨을 내쉬며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안으로 모시도록 해.”
장호건의 지시가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며 선해철이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장 회장님.”
“어서 오시오, 선 대표. 가장 보기 싫은 당신이 올 줄 알았소. 여기, 차 세 잔 갖다 주게.”
장호건의 지시에 비서가 차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고 선해철은 휘적휘적 걸어 들어오며 제 집 소파마냥 편하게 앉았다.
“이미 아시겠지만 우리 스탠더드가 신성전자의 최대주주 겸 최대 채권자가 됐습니다.”
“알고 있소. 주식거래 때문에 벌금만 수천억 원을 맞았는데도 순식간에 털어버리더군.”
“수천억 원이라고 해봐야 스탠더드 캐피털 총자산의 1퍼센트도 안 되니까요. 신성전자를 하루빨리 차지하는 데 수천억 원이면 싼 값 아닙니까? 흐흐.”
빙글빙글 웃는 선해철을 보며 이수한이 소리쳤다.
“당신! 지금 누구 앞이라고···!”
“마름은 입 다물고 계시죠, 이수한 씨. 뭐, 나도 마름 신세긴 하지만 당신이야 망해가는 집 마름이고 나는 앞으로도 더 커질 집 마름이니 격은 다르지 않겠소? 후후.”
이수한은 저 시건방진 선해철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다. 그렇지만 주먹질을 해도 지금의 사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잖나?
뿌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가는 이수한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선해철은 꼰 다리를 풀고 비서가 가져온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여기 차 맛은 영 좋지 않군요.”
“골든팁스가 아니니까. 그래,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뭐요?”
찻잔을 내려놓은 선해철이 소파에 등을 편하게 기대며 말했다.
“당신들에게 원하는 건 없습니다. 통보를 하러 왔을 뿐이니까.”
“통보?”
“이 시간부로 채권단 회의를 소집할 겁니다. 의제는 신성그룹의 경영을 말아먹은 오너 가문의 모든 주식을 소각하면서 우리가 쥔 채권을 전부 현물로 출자하겠다는 거요.”
“그 다음은?”
“신성지주도 신성금융지주도 전부 우리가 차지할 겁니다. 더 말하려면 둘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선해철이 말끝을 흐리며 이수한을 쳐다보자 장호건이 이수한에게 말했다.
“자리 좀 비켜주게.”
“···예, 회장님.”
잠시 머뭇거리던 이수한이 대답하고는 선해철을 죽일 듯이 쏘아보고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에 둘만 남자 선해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편히 얘기할 것 같군요.”
“더 말할 게 뭐요?”
“장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스탠더드에서 운용되는 자금의 상당부분은 성민이 집안의 사람들과 해동그룹 자금입니다. 그렇죠?”
정확한 액수는 모르지만 스탠더드 캐피털에 해동그룹과 이 씨 가문의 돈이 들어간 사실을 장호건이 모를 리 없다. 고개를 끄덕이는 장호건을 보며 선해철이 말했다.
“우리가 신성그룹을 접수하면 신성지주의 건설, 중공업 계열사는 전부 해동중공업그룹에 매각할 겁니다. 잔존 계열사를 거느릴 신성지주에는 신성전자 주식 전량을 현물출자한 뒤, 신성지주 주식의 절반을 조카며느리에게 넘기고 신성금융지주는 상장폐지시킨 뒤, 성민이한테 넘길 거고요.”
“은행권에서 신성카드 문제를 걸고넘어질 텐데 그건 어떡할 거요? 그 문제를 해결 못하면 신성그룹의 재건은 힘들 거요.”
다 망해서 쫓겨날 마당에 회사의 재건을 걱정하다니··· 장호건을 보며 실소를 흘리던 선해철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찌됐든 자신이 아끼는 조카의 장인 아닌가?
“신성카드 불량채권은 전부 외부에 매각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은행들이 떠안을 손실은 스탠더드가 연이율 2퍼센트 30년 만기 채권을 사줘서 메울 거고요. 물론, 은행들이 자회사로 둔 카드사 때문에 떠안을 손실분도 우리가 채워주기로 했습니다.”
그게 아니면 신성그룹 장 씨 가문을 신성그룹에서 쫓아내는데 은행들과 정관계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다. 자그마치 100조 원 가까이 투입될 일이 아닌가?
선해철의 담담한 표정을 보며 장호건 또한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서방만이 내가 낸 시험을 통과한 것 같구려.”
“무슨 소립니까?”
선해철이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자 장호건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지주회사 체제를 만든 건 자식들에게 낸 시험이었소. 물론, 그 시험은 하연이나 이 서방한테도 응시자격이 있는 시험이었지.”
장호건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선해철의 눈이 커졌다.
“그, 그럼 이게 전부···?”
“솔직히 두 아이만이 신성을 이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왔소. 선 대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장호건의 말대로 장호건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들과 그 배우자들 중 신성그룹을 제대로 이끌어갈 만한 역량을 갖춘 건 이성민 내외뿐임을 선해철도 알고 있었다. 황당해하는 가운데 고개를 끄덕인 선해철에게 장호건이 계속 말했다.
“허나 내 품에 남은 아이들이 수긍하게 하려면 더 큰 시험을 내야 했지. 그 시험을 통과한다면 누구든 이 집무실을 물려주고 싶었지만 난 하연이와 이 서방이 시험을 통과하길 원했소.”
“자, 장 회장님?”
“보아하니 이번 작업도 이 서방이 그간 스탠더드에서 쌓은 신뢰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군. 돌아가는 대로 이 서방한테 전해주시오. 하연이와 함께 여기로 오라고.”
부탁을 마치고 초연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장호건에게 선해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사, 사실이에요?”
“그렇다니까? 처음부터 너희 내외 믿고 꾸민 것 같더라.”
회사로 돌아온 선해철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나는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수백억 달러의 빚을 져가면서까지 지주회사 체제를 만들고 이 지경까지 이르게 만든 게 나와 장하연에게 회사를 정당하게 물려주려고 꾸민 짓이었다니?
‘대체 왜?’
장호건은 늘 신성그룹이 장 씨 집안의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왜 나와 장하연에게 회사를 물려주겠다고 판을 짰단 말인가?
멍하니 있던 내게 선해철이 말했다.
“빨리 네 와이프하고 성의원 가봐. 할 얘기가 많이 있던 것 같더라.”
“네, 삼촌. 형은 지금 바로 본사로 가서 회장님들한테 알리세요. 숙부님도 부르시고요.”
“네, 의장님.”
박태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나는 규정 속도도 무시하고 정신없이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장하연의 집무실에 들어간 나는 선해철에게서 들은 내용을 장하연에게 빠짐없이 알려줬다.
“사, 사실이야?”
“삼촌이 직접 듣고 왔으니까 맞을 거야. 빨리 가자.”
“응···.”
장호건 덕분에 내 비밀은 지키게 됐지만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와 장하연은 황급히 호텔 밖에 세워둔 차를 타고 성의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