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64th. Last All-in (4)
미국에 가는 날 새벽.
짐을 챙긴 나는 장하연과 문 앞에서 마주서있었다.
“다녀올게.”
“잘 다녀와, 여보.”
짧고 굵게 장하연과 인사를 나눈 나는 현관문, 그리고 대문을 나서서 밖에 대기 중인 리무진에 올라탔다. 어느 새 김포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작년에 본사에서 구입한 걸프스트림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흠···.”
창가 쪽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서 위스키를 마시던 나는 침음성을 멈추지 못했다. 무거운 내 표정이 켕겼을까 맞은편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선해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도 말 안 했냐?”
“네.”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한 나는 유리컵에 담긴 위스키를 단숨에 비웠다.
“하아··· 하연이가 신성그룹 장 씨 가문 사람을 포기하고 해동그룹 이 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했어도 장인어른에 대한 사랑은 별개일 겁니다.”
“그러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버지잖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 사이에 컵에 채운 위스키 한 모금을 축였다.
“그 장인어른이 자기 몸처럼 아끼는 신성그룹의 피를 말려온 스탠더드 캐피털이 내 회사라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히네요.”
“처음엔 많이 놀랄 겁니다. 어쩌면 서운해 하실 수도 있고요.”
박태진의 말이 내 마음을 후벼 팠다. 그 많은 재산을 들고 있으면서도 왜 신성그룹을 평화롭게 접수하지 않고 아버지의 피를 말려가며 손에 넣으려 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
“그렇겠죠?”
“하지만 제가 봐온 사모님의 모습이 내면과 같다면 결국엔 의장님을 응원해주고 의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쓴웃음을 짓던 나는 박태진이 내놓은 뜻밖의 대답에 눈을 깜빡거렸다.
“형?”
“성민이 네 계획대로 신성그룹을 넘어뜨리고 주저앉혀온 점은 실망도 하고 원망도 하겠지. 그렇지만.”
모처럼만에 반말을 해서일까 박태진은 자기 앞에 놓인 온 더 락 글라스의 위스키를 단숨에 비웠다.
“회사가 망할 게 뻔히 보이는데 하연이 성격상 절대 네 제안을 거절 못할 거다. 하연이에게 신성그룹은 장호건 회장과도 같을 테니 말이야.”
박태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호건이 자신의 몸처럼 신성그룹의 안위를 살피듯 장하연도 장호건을 사랑하는 것처럼 신성그룹에 대한 감정도 그와 비슷할 터.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박태진이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보탰다.
“너 또한 이런 일이 생길 걸 각오했을 거라고 믿는다. 모든 짐을 남에게 떠넘기는 시기는 지났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박태진은 무거운 짐을 털어내듯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의장님.”
“아니에요, 형. 형이 반말할 때는 늘 조언을 해주잖아요. 진심을 담아서.”
숙였던 고개를 든 박태진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나 또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이제야 진짜 어른이 뭔지 깨닫게 해줘서.”
지금까지는 나이만 먹고 덩치만 컸으며 돈만 벌고 가정만 꾸렸을 뿐, 어른놀이를 하는 아이에 불과했다. 이번 출장이 끝나면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할 것 같다.
***
뉴욕에 도착한 우리는 스탠더드 캐피털의 사업현황을 점검한 뒤, 클레어와 함께 헨리의 저택으로 갔다. 저택에 도착한 우리는 헨리, 그리고 미리 와있던 아이작과 함께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연 초에 자네와 만나고 나서 자네 말대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증권을 분석해봤더니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더군. 백 가지 독약이 골고루 섞인 백 조각의 파이였어.”
“아저씨 말이 맞습니다, 조니. 조니 말대로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더 힘을 줬으면 낭패를 봤을 겁니다.”
올해 초의 회동 때 나는 두 사람에게 서브프라임 모기지 증권에 투자하지 말 것을 제안했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도 의아해했지만 지금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나름대로 조사하면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이대로 가면 미국 부동산 거품 붕괴까지 길어야 3,4년 정도일 겁니다. 그때까지 두 분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든 프라임 모기지든 모기지 증권은 최대한 적게 가져가셔야 합니다.”
내 제안에 헨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자네가 모건스탠리만 그대로 방치한 거였군.”
“제 밥상에 잿가루 뿌린 모건 놈들에게 핵폭탄을 먹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습니까, 아이작?”
헨리와 마주보며 음침한 미소를 짓던 내 질문에 아이작이 미소를 지었다.
“미끼가 먹음직스러웠는지 잭슨 그 인간이 솔깃해하더군요. 당장이라도 만나자고 한 걸 겨우 뜯어말렸습니다, 흐흐.”
아이작은 그 사이에 내 부탁을 받고 잭슨 피어폰트 모건에게 연락을 넣어 모건스탠리 매각 중개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아이작의 대답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몸이 달아올랐나보다.
“모건스탠리 안에서 폭탄 타이머가 돌아가고 있는데 사지 못해 안달이라니··· 재밌겠네요, 흐흐.”
“자네 말대로 한 3,4년간은 즐기게 놔두세, 조니. 그동안 우리는 자네 제안대로 원자재나 주식시장에 집중하면 될 것 같군. 모건 놈들이 망할 때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말이야, 후후.”
헨리의 웃음에 이어 아이작도 미소를 지었다.
“그 뒤에 당신이 모건스탠리를 헐값에 거둬오면 그 또한 참 재미있을 겁니다, 하하.”
“그럴 겁니다. 비싸게 팔아치우고 헐값에 가져오면 잭슨 그 인간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네요, 흐흐.”
나와 함께 소파에 앉아있던 이들 모두 바보 같은 모건 놈들을 비웃으며 차를 마셨다.
***
며칠 뒤.
아이작은 뉴욕 외곽의 조용한 별장에서 잭슨 피어폰트 모건을 맞았다.
“오셨군요.”
“모건스탠리가 걸린 일인데 와야 하지 않겠소?”
JP모건은 체이스맨해튼에 흡수되어 사라졌지만 모건스탠리는 스탠더드 캐피털에 넘어갔을지언정 여전히 그 간판을 달고 있다.
두 회사를 모두 털리면서 월가의 볕 드는 땅에서 쫓겨난 모건 가문에게 모건스탠리 매각은 다시 한 번 볕 드는 땅에 발을 들일 기회였다. 그러니 잭슨도 올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 놓인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차를 마시던 잭슨이 아이작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 온다는 스탠더드 캐피털의 대표는 누구인가? 설마 클레어 그 fucking bitch인가?”
잭슨의 입에서 나온 쌍욕에 아이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월가의 볕 드는 땅에서 쫓겨나신지 얼마나 되셨다고 격식이 없어지신 겁니까?”
“빈정거리는 거면 그만둬. 생각 같아선 아이작 네놈도 죽여 버리고 싶은 걸 겨우 참는 거니까.”
잭슨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지만 아이작도 만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죽일 테면 죽여보시죠, 잭슨. 날 죽이는 순간 이 별장을 지키는 우리 집안 경호원들이 당신 모가지도 따서 엑손모빌 기름에 푹 절여줄 테니까.”
거친 쌍욕을 내뱉은 아이작과 눈싸움을 하던 중 잭슨이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낮게 들었다.
“신경전은 그만하지, 아이작. 여하튼, 오늘 내가 만날 사람이 누구인가?”
“나오시죠.”
아이작의 외침을 들은 나는 문을 열고 옆방에서 거실로 나온 나는 잭슨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잭슨 피어폰트 모건. 날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후후.”
“너, 넌?”
튀어나올 듯 눈이 커진 채 떡 벌어진 입으로 말까지 더듬는 잭슨에게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한 4년 전인가? 그때 IT주식으로 대출을 받겠다고 할 때 뵀었는데··· 당신 코를 보고 모건 가문 사람인 걸 알아채지 못해서 내 스스로가 한심하더군요, 후후.”
IT버블 붕괴 때의 일을 꺼내며 빙긋 웃는 나를 보고 잭슨이 소파에서 용수철처럼 튀어서 내게 달려들었다.
“You Fucking Son of bitch! 너 때문에 내 계획이 다 망가졌어! 알아!”
내 멱살을 잡은 잭슨의 두 손을 나는 내 두 손으로 힘껏 잡고 가볍게 떼어냈다.
“으으윽!”
“월가의 볕 드는 땅에서 쫓겨나셨다고 이렇게 개똥같은 매너를 익히신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내가 쥔 잭슨의 두 손을 그의 가슴팍에 얹고는 그대로 퍽 밀어버렸다.
“악!”
“조니!”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잭슨의 가슴팍을 구둣발로 밟은 나는 아이작의 외침에도 개의치 않고 서늘한 눈빛으로 잭슨의 면상을 내려다봤다.
“쓸데없이 이 사람 저 사람 적으로 만든 대가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당신이 만든 적들이 내 친구들이기에 난 내 친구들을 도왔을 뿐입니다, 잭슨.”
“이, 이···!”
잭슨이 일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잭슨의 눈과 몸에서 힘이 빠진 것을 확인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결례는 이 정도에서 끝내죠. 주먹다짐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가슴팍에서 발을 뗀 나는 잭슨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잭슨은 자신의 손등으로 내 손을 쳐내고 혼자서 일어섰다.
“건방진 원숭이 같으니라고. 그래봤자 대리인인 주제에!”
“대리인?”
“네놈과 네놈 집안이 스탠더드에 돈을 맡겨봤자 일부일 게 아니냐!”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보며 소리친 잭슨에게 씩 웃어보였다.
“어쩌죠? 당신이 건방진 원숭이에 대리인인 줄로 알고 있는 제가 스탠더드 캐피털의 주인인데?”
“뭐, 뭐라고?”
“스탠더드 캐피털, 내 회사입니다. 주식의 90퍼센트, 운용자금 6천억 달러 중 5천억 달러가 나와 내 가족들, 해동그룹의 돈이죠.”
스탠더드 캐피털의 진실에 대해 알려주자 잭슨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그 말이 사실이냐?”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까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잭슨의 표정이 참담하게 구겨졌다.
“이럴 수가···.”
“참고로 오늘 모건스탠리 매각 조건에는 내 비밀을 영원히 묻어두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슨. 안 지키면 모건스탠리는 영원히 내 회사로 둘 겁니다.”
감정가 100만 원밖에 안 되는 휘호조차도 조상님이 쓴 거라며 10억 원을 주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밖에 안 남은 모건 가문의 회사는 오죽하겠나?
낮게 으르렁거린 나를 보며 소파에 앉은 잭슨이 이내 피식 웃었다.
“그래봐야 네가 원하는 신성그룹은 내 개목줄이 채워져 있어. 잊었나?”
잭슨은 지가 이긴 줄 알고 있겠지만 이제는 그 승자의 여유를 와장창 깨버릴 시간이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콧방귀를 뀌며 잭슨의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어쩌죠? 신성전자만 신성그룹에서 뽑아버리면 신성그룹이 폭삭 망해버릴 텐데?”
“뭐, 뭐라고?”
“신성그룹은 신성전자와 신성후자로 나뉜다는 농담이 있죠. 한국식 말장난이니 당신이 알아먹지는 못 하겠군요, 후후.”
내 나라 말로 대화를 하고 싶다며 한국어를 공부중인 아이작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지만 잭슨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이작과 함께 웃던 나는 웃음을 거둬들였다.
“쉽게 말하자면 신성전자가 빠진 신성그룹은 커스터드 빠진 슈크림 같다는 겁니다. 지금쯤이면 몇몇 사모펀드들이 매입한 신성전자 주식이 스탠더드 캐피털로 옮겨지고 있겠네요.”
“그 사모펀드들이 네놈 거였다는 거냐?”
“네. 당신이 이 사실을 한국 정부에 찔러줘봐야 증권거래법 위반 정도는 벌금 몇 푼 내면 끝나는 일이고···.”
말끝을 흐리던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잭슨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신성전자를 내가 가져오면 신성전자가 당신한테 빌린 돈은 내가 갚아도 됩니다. 그렇게 신성전자를 신성그룹에서 내 손으로 빼내고 나면 내가 뭐부터 할 것 같습니까?”
저놈이 다문 입이 떨어질 줄을 모른다. 내가 대답해줄 수밖에.
“신성전자를 신성그룹에서 계열분리하면 가장 먼저 신성전자가 신성금융그룹에 빌려준 돈부터 가차 없이 회수할 겁니다. 신성금융그룹은 파산할 거고 그 뒤에 우린 신성금융그룹의 알짜배기 자산만 챙기면 되겠죠. 체이스맨해튼이 P&A 방식으로 JP모건의 알짜배기만 쭉쭉 빨아먹었던 것처럼.”
향후의 내 계획을 자랑스레 떠벌리며 예전 일까지 들먹인 게 저놈의 멘탈에 진 딱쟁이를 확 떼버렸나보다. 하얗게 질리려던 잭슨의 면상이 어느 새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Fuck You, bastard!”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욕하는 꼬라지를 보니 딱쟁이가 뜯겨나간 멘탈에서 보이지 않는 피가 철철 흐르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저놈의 멘탈에서 딱쟁이를 뗀 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신성그룹에 빌려준 당신네 집안 돈은 또 한 번 휴지조각이 될 테고 당신도 모건 가문 내에서 또다시 병신 취급을 당하겠죠. 다음 가주 자리는 점점 더 멀어질 테고요. 아니지, 아예 포기하는 게 나으려나? 흐흐.”
나는 기어이 딱쟁이를 뜯어낸 저놈의 멘탈을 내가 원하는 만큼 후벼 파고서야 낄낄 웃었고 그런 나를 아이작이 기가 질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내 또라이 같은 모습을 눈으로 보게 됐으니 오죽하겠냐마는···.
나를 보며 씩씩거리던 잭슨의 거친 숨소리가 가라앉았다. 어느 새 무표정하게 변한 잭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 샐 틈 없이 다 틀어막았군. 잔인할 만큼.”
“전부 틀어막느라 여기 오기 전까지 고생 좀 했죠. 그러게 왜 남의 집안싸움에 끼어들었습니까?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흐흐.”
비웃음을 보란 듯이 흘려주며 차를 마신 나는 잔을 내려놓고 깍지 낀 두 손 위에 턱을 괴었다.
“어떻습니까? 끝까지 시궁창에서 뒹굴다가 쪽박 찰래요? 아니면, 내 손 잡고 건질 수 있는 거라도 챙길래요?”
잭슨이 소파 팔걸이에 얹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면 무슨 선택이 현명할지 알고 있을 터. 나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며 잭슨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