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64th. Last All-in (1)
2002년 12월 20일 아침.
삼청동 본가 서재에서 그룹 수뇌부들과 함께 대통령 선거 방송을 지켜본 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배팅이 또 터졌네요, 하하.”
“그렇구나, 허허. 저 친구, 보통 깡이 아니라고?”
할아버지의 질문에 이명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 성문이가 영란이한테 듣고 알려줬는데 미국 사돈이 방문했을 때 기자들한테 면박 줬다고 합니다. 격 떨어지는 질문 던졌다고요, 하하.”
“허허, 정치인이 기자들 무서워하는 게 상식인데 보통 깡이 아니구먼. 그래도···.”
TV에 나온 대통령 당선인을 보며 말끝을 흐리던 할아버지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관상을 보아하니 사람을 너무 믿을 것 같아서 걱정이다. 온갖 똥파리들이 꼬여도 제 손으로 쳐내지 못할 것 같아서 걱정이구먼.”
이번 대통령 당선인은 할아버지 못지않은 감식안을 지녔으면서도 그놈의 정에 약해서 자신의 인생의 엔딩을 베드 엔딩으로 끝낸 양반이었다. 나는 TV 속의 당선인이 꽃다발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저 양반 때부터 이 나라의 기초를 잘 잡아놔야 해. 이번 서울시장이 되고 다음 대통령이 되어야 할 이영백이를 쳐냈으니 더더욱.’
회귀자로서 초대형 사고를 쳐놨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뒷수습을 해나가야 한다. 때문에 정부든 정치권이든 사법부든 알량한 권력 장사로 분탕질 칠 만한 놈들은 아가리를 찢어서라도 내 돈을 배가 터질 때까지 처먹일 생각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염려하신 점 때문에 당선인 캠프에서 일했던 놈들 중에 사고 칠 만한 놈들은 전부 스탠더드 캐피털 해외 지사에서 5년간 스카우트하기로 했습니다. 야당 놈들도 일부 데려가기로 했고요.”
자신만만한 내 대답에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권력만 탐내는 놈들도 거부하기 힘들 만큼의 돈을 처 물려주면 개새끼마냥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테니 말이다, 흐흐.”
낮게 웃는 할아버지의 거친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나라 정관계, 사법부 인사들 중 해동그룹의 돈을 안 받아먹은 놈들이 얼마나 되는가? 분란을 싫어하는 할아버지의 성격상 손해만 안 보겠다고 기름칠을 해뒀지만 그 인맥은 나조차도 모를 정도였다.
“그나저나 올해가 종금 박 사장이 올렸던 문건에 나온 마지막 해 같은데···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웃음을 거둬들인 할아버지의 질문에 조영찬이 입을 열었다.
“작년도 카드 이용금액 중 현금서비스 비중이 65퍼센트였다고 합니다. 연이율 30퍼센트라도 대출이 쉬우니 많이들 썼지요.”
그 외에도 조영찬은 할아버지에게 월드컵 열풍에 묻힌 신용불량자 급증 문제를 요점만 간단히 보고했다.
“결제대행이 아니라 사채놀이로 돈 벌어먹고 있었구먼, 쯧쯧.”
조영찬의 보고를 받은 할아버지가 혀를 찰만했다. 뭉칫돈을 들고 다니는 불편함을 덜어내려고 탄생한 신용카드 사업인데 돈놀이가 웬 말인가?
“그래도 저와 이 의장, 박 사장이 작년 초부터 손을 쓴 덕분에 해동종금에 남은 카드채는 4천억 원 남짓입니다. 그나마도 내년 1분기 내에 상환 받을 물량이고요.”
작년을 뜨겁게 달궜던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해동그룹 금융부문은 조용히, 신속하게 카드채를 방출했다.
우리가 방출한 카드채는 신용카드 회사가 중간에 끼인 채 투자자들과 신용카드 소비자들이 연결된 채권, 아니 폭탄이다. 우리가 떠안은 폭탄은 전 금융권에서 가장 작은 데다 연쇄폭발이 시작되기 전에 폭탄 심지가 잘릴 테니 문제없었다.
“게다가 내년 초에 인덱스 펀드 투자금을 회수해서 해동종금에서 받은 대출도 처리할 테니 유동자금은 문제없습니다.”
“잘했군.”
나와 조영찬의 완벽한 조치를 듣고 할아버지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에게는 걸리는 게 있었다.
‘북핵 문제가 안 터지면서 단기외자 도입이 안 끊어졌어.’
내가 일으킨 나비효과는 분명히 국가적으로는 좋은 일이었지만 나와 우리 집안에는 안 좋은 일이었다. 외부에서의 자금 수혈까지 끊겨야 어거지로 버티는 카드사들이 줄줄이 박살나지 않겠나?
굳은 표정으로 고민하던 나는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카드대란, 외국에서부터 터뜨려야 할 것 같습니다. 고문님.”
“무슨 말이냐?”
“카드대란이 터지려면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자금 공급이 끊어져야 합니다. 국내는 어려우니 외자 도입을 막아야 합니다.”
“뭐라?”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 수뇌부도 적잖이 놀랐는지 크게 뜬 눈으로 날 바라봤다.
“이 의장?”
“의장님?”
“신성그룹을 잡아먹는 일이기도 하지만 카드 사태를 지금 터뜨리지 않으면 제 2의 외환위기가 올 수도 있습니다. 헨리와 아이작을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전화 한 통이면 쉽게 처리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감정이 안 들어갈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이번 일은 우리 집안의 복수를 위해 그들의 영향력을 빌려야 하니 정성을 보이는 게 마땅했다.
“흠···.”
침음성을 흘리던 할아버지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쿵 내려쳤다.
“좋다. 허나 우리 욕심 때문에 애먼 국민들이 한 명이라도 덜 다치게 해야 할 터. 이 의장 자네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야.”
“물론입니다, 고문님. 장 씨 놈들을 우리 집안 앞에 무릎 꿇릴 수만 있다면 제 모든 재산이라도 걸겠습니다.”
나의 말을 끝으로 할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수뇌부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한 판에 모든 것을 걸면 모든 게 끝날 것이다.
***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넘어가서 요트를 타고 카리브 해에 있는 헨리의 섬으로 간 것이었다. 섬에 발을 내딛은 우리는 별장 앞 선베드에 누워서 햇볕을 즐기던 헨리, 아이작과 함께 별장으로 들어갔다.
“한국으로 들어갈 외자를 막아야 한다고?”
“네. 카드 사태를 지금 터뜨리지 않으면 대한민국에는 두 번째 외환위기가 찾아오게 될 겁니다.”
“흠···.”
헨리가 침음성을 흘리던 사이, 아이작이 물었다.
“그렇지만 돈의 흐름을 막는 건 힘든 일입니다, 조니. 방법이 있겠습니까?”
“전에 제가 드렸던 문건이 있잖습니까?”
새삼스럽다는 표정의 내가 답을 내놓자 아이작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걸 활용할 방법이 정확해야 합니다. 아시죠?”
“물론입니다. 나중에 제가 연락드리면 그 때 맞춰서 S&P, 무디스, 피치에 그 문건 보내주시죠. 트라이엄프와 체이스맨해튼 명의로요, 흐흐.”
미국 월가의 양대 산맥이 된 두 사람의 후광을 입히면 세계 3대 신용평가사도 박태곤의 리포트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자신의 것으로 포장해줄 박태곤의 리포트는 수류탄에서 차르 봄버 급 핵폭탄으로 업그레이드될 터.
“그것만 해주면 되겠나? 신성그룹 계열사들이 신성카드를 지원하면 숨을 붙일 텐데?”
음침하게 웃던 나는 헨리의 의견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신성카드가 살아날 확률은 제로입니다.”
“제로?”
단정지은 나를 보며 놀란 두 사람에게 나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신성카드가 천만 회원을 돌파, 시장점유율이 20.8퍼센트나 됩니다. 그만큼 부실도 커서 작년 하반기부터 신성그룹 모든 계열사들이 신성카드에 돈을 퍼붓고 있죠. 언론에 안 나간 건 초대형 광고주의 힘으로 찍어 누른 거고 실적에 이상이 없는 건 자금지원이 대출 형식으로 나가서 그런 거고요.”
계열사가 망하는 판국에도 증자를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걸 이용해서 돈놀이까지 하는 신성그룹의 꼬라지를 드러내자 헨리와 아이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지독하군요.”
“그러니 부자가 된 거죠. 8.3 사채동결 때 우리 집안 돈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처럼. 그런 처가 놈들을 우리 집안 앞에 무릎 꿇릴 겁니다.”
우리 집안 돈도 날려먹고 나도 죽였던 놈들이다. 반절의 진실은 말하지 않았지만 8.3 사채동결은 들려줬던 터라 헨리와 아이작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성그룹은 알아서 돈을 퍼붓게 놔둔다 치고··· 한국의 은행들은 어떡할 건가?”
한국의 은행들이 민영화됐다고 해도 해동그룹과 스탠더드 캐피털, 트라이엄프 캐피털, 체이스맨해튼이 쥐고 있는 물량이 총 40퍼센트다.
허나 금산분리법 때문에 의결권이 16퍼센트로 제한되니 정부에서 손을 쓸까 걱정한 것 같았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헨리.”
나는 헨리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우리는 헨리, 아이작과 함께 신성그룹에서 카드 대란 촉발부터 진화까지에 이르는 계획을 공유하고도 향후 투자 현안을 의논한 뒤, 모든 조치를 마치고서야 한국에 돌아왔다.
물론, 한국에서도 준비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나머지 준비를 마친 뒤, 신용카드 시장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했다.
그 사이 해가 바뀌어 2003년 3월이 됐다.
[SG글로벌 분식회계의 나비효과? 카드대란의 전조를 발견하다.
검찰과 금융감독위, 금융감독원 합동으로 SG글로벌 분식회계를 조사하던 중 금융시장 전체에 균열이 일어날 문제가 발견됐다. SG그룹의 채권이 포함된 펀드를 조사하던 중 펀드의 규모대비 환매요청 규모가 비정상적으로 큰 이유를 파고든 결과, 신용카드 회사들이 고객들의 카드대금을 대신 결제하고자 투자자들에게 매각한 카드채가 원인임을 발견한 것이다. 그 규모는 처음에 50조 원 규모로 알려져 있었으나 조사 결과 90조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동양일보에 올라온 기사를 보던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요!”
“됐다!”
“됐습니다!”
나처럼 신문을 보던 선해철과 박태진까지 돌림노래처럼 함성을 질렀다. 나는 곧바로 헨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헨리. 오늘 저녁 때 그 문건 터뜨려야겠습니다.”
[알겠네. 우리 이름은 절대 안 드러나게 처리해주지.]
짤막한 통화를 끝으로 아이작에게도 전화를 넣은 나는 주먹을 말아 쥐고 우두둑 소리를 냈다.
“마지막 게임이 시작됐네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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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이런 씨발!”
장민재가 거친 욕설과 함께 자신이 양 손에 쥐고 있던 동양일보를 쫙쫙 찢어발겼다.
보험금 지급 건으로 빵꾸 난 집안 재산을 어떻게든 다시 채워보겠다고 사촌들과 함께 신성카드 영업에 온 힘을 기울이던 장민재.
요즘 들어 늘어나는 미납고객들에게 추심고객을 보내라는 말만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던 장민재에게 동양일보의 기사는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갈기갈기 찢은 신문 쪼가리들이 널브러진 책상을 연신 내려치며 씩씩거리던 장민재는 숨을 고르고 수화기를 들었다.
“신성카드 장 상무입니다, 회장님.”
[무슨 일이냐?]
“우리 그룹에서 동양일보에 내던 광고 전부 끊어주십시오.”
기존에 주던 광고라고 해봐야 십억 단위도 안 되지만 그 돈을 광고비라고 찔러주는 것조차 화가 치밀었다. 분풀이를 해달라는 장민재에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다. 그런데··· 카드 문제는 어떡할 거냐?]
“그, 그건···.”
장민재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지금 발견된 부실만 10조 원이 훨씬 넘는다. 앞으로 터져 나올 부실을 생각하면 얼마까지 불어날지는 자신조차 알 수 없어 말할 엄두가 안 났다.
[정신 차려, 장민재! 머뭇거릴 시간 있으면 은행 문이라도 두드리란 말이다!]
“···예!”
수화기에서 터져 나온 아버지의 호통에 장민재는 엉겁결에 대답해버렸다.
대답을 마친 장민재는 통화가 끊어지자마자 부랴부랴 재킷과 코트, 가방을 챙기고 집무실을 뛰어나갔다. 하지만···.
[미안합니다, 장 상무님. 우리도 지금 자회사로 둔 카드회사를 떠안게 돼서 신성그룹에 자금을 지원해주기 어렵습니다.]
[외국계 대주주들이 난리입니다. 신성그룹에 대출해주면 주주총회 소집해서 우리 목 날리겠다는데 어떡합니까?]
[우리 코가 석자입니다, 장 상무님. 신성그룹이 우리 은행에 넣어준 예금이 얼마나 큰지는 알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성의 이름이 안 먹히다니··· 장민재는 허망함만 무겁게 짊어지고 회사로 돌아왔지만 그가 짓눌리기엔 너무 일렀다.
***
장민재가 죽을상이 되어있을 때 지구 반대편의 뉴욕에서는 한국의 신용카드 사업, 정확히는 신성카드를 겨냥한 폭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S&P가 지금껏 조사해온 바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외환위기 관리체제를 벗어나고자 내수를 진작시키겠다고 국민들에게 신용카드를 퍼뜨렸습니다. 그 결과가 지난밤 사이에 한국에서 불거진 카드채 문제죠.]
CNN 방송에 출연한 S&P 소속 애널리스트는 그 뒤로도 한국의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을 잔뜩 쏟아냈지만 무디스와 피치 소속의 애널리스트 또한 뉴스코프나 NBC 방송에 출연해서 껍질만 다를 뿐, 똑같은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 중 현재 한국 신용카드사 1위인 신성카드의 문제가 가장 심각할 거라 추측됩니다. 한국에서 발표된 카드채 규모와 신성카드의 점유율을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부실 규모는 적게 잡아도 최소 18조 원 이상으로 추정되며···.]
“저, 저런!”
TV로 그 꼬라지를 지켜보던 잭슨 피어폰트 모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전화를 걸었다.
“미스터 장! 어떻게 된 겁니까?”
[진정하시오. 우리도 지금 수습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자신과 달리 당사자인 장호건의 차분한 대답에 열이 받은 잭슨은 목소리가 더 커졌다.
“어떻게 수습할 거요? 당신네 비자금, 전부 우리 통해서 가입한 재보험으로 날리지 않았소!”
신성그룹의 비자금을 세탁해서 신성화재의 재보험 인수에 투입한 건 전보 모건 가문의 투자회사들이었다. 재보험 인수를 욕심냈지만 수수료 2억 달러를 받고 빠진 게 천만다행이었어도 문제는 신성그룹에 대출된 200억 달러 아닌가?
“이번 일이 잘못되면 나는 물론이고 당신 집안까지 모두 끝장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소. 그러니 기다려주시오.]
무뚝뚝한 장호건의 대답을 끝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Fucking yellow monkey!”
피부 누런 원숭이 따위가 모건 가문 사람의 전화를 먼저 끊다니··· 잭슨은 바닥에 패대기친 핸드폰을 콱콱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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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성의원 집무실에서 통화를 마치고 한숨을 내쉬던 장호건이 소파에 앉아있던 이수한에게 말했다.
“당장 우리 돈 먹은 사람들한테 연락해. 공무원, 금뱃지 가리지 말고 전부!”
신성그룹에 남은 건 정관계를 움직여 구제금융을 끌어내는 것뿐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