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60th. 배가 찢어질 만큼 (1)
배재훈, 이명진과 만난 다음 날 아침.
스탠더드 캐피털 사옥 1층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나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장민재를 보고 손을 들었다.
“여기야, 처남.”
장민재는 현재 신성그룹의 금융부문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장호건의 성격상 금융부문을 물려줄지 안 물려줄지는 모르겠지만 장민재는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만큼 자신이 물려받을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을 것이다. 전생처럼.
장민재는 손을 흔들며 반기는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더니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매형?”
장민재의 목소리가 까칠하게 들렸다. 장용재와 나의 신경전을 들은 건가?
“오랜만에 보는 매형인데 너무 까칠한 거 아냐, 처남?”
“까칠할만하니까 까칠한 거죠. 용재 형 속을 박박 긁어놨다면서요?”
그럼에도 장민재의 입가에서 잠시나마 미소가 엿보였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고 피식 웃었다.
“그랬지. 안하무인인 큰처남 콧대 좀 눌러주고 싶었거든, 흐흐.”
“그런 건 형한테나 먹히지 나한테는 안 먹힐 겁니다. 알죠?”
장민재 이놈은 인격 수양이 꽤나 된 놈이다. 우리 회사 사업을 자랑하는 것만으로는 이놈을 흔들 수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흔들어야 했다.
“뭐, 처남이 큰처남에 비해 참을성이 좋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런데 그거, 큰처남보다 능력 떨어진다는 거 인성으로 땜빵하려고 연기하는 거잖아?”
“뭐라고요?”
심드렁하기까지 보였던 장민재의 얼굴이 순식간에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뇨, 매형!”
지 약점을 헤집어놨으니 얼마나 열이 뻗칠까? 눈에서까지 불길이 치솟은 채 장민재가 고성을 터뜨렸지만 이건 겨우 맛보기에 불과했다.
“그뿐만이 아냐. 통합 지주회사 만들어서 앞으로는 큰처남이나 처제뿐만 아니라 사촌처남들이나 처제, 처형들하고도 박 터지게 싸워서 살아남아야 할 텐데 자신 있겠어?”
통합 지주회사 체제를 만들면서 외부로부터의 압박은 어느 정도 막아냈다지만 내부에서의 경쟁은 미칠 듯이 치열하게 변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아 신성그룹의 회장이 된다는 건 아이돌 데뷔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다.
빙글빙글 웃던 내게 장민재가 소리쳤다.
“그래서! 지금 나 놀리는 거요? 죽어라 개처럼 고생해도 신성그룹 손에 넣을지 불확실해서?”
“그래. 놀리는 거야, 처남.”
“뭐요? 이런 씨ㅂ···!”
욕이 나오다 말았지만 저 정도면 장민재는 정말로 열 받은 거다. 욕만 나오다 만 게 아니라 엉덩이까지 소파에서 떼어진 채 나에게 달려들 것 같던 상체도 멈추지 않았나?
“사람들 보고 있어, 처남. 앉아서 얘기하지?”
“후우우···.”
장민재는 자리에 앉아 거친 날숨소리와 함께 숨을 고르고 앞에 놓인 물컵을 단숨에 비웠다.
“내 손에 들어온 해동그룹이 계열분리로 반 토막 났다고 해도 후회 안 해. 내가 물려받은 게 불어나면 10년쯤 뒤엔 예전 해동그룹 규모 복구하는 건 일도 아니거든.”
원래 규모를 복구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최대의 재벌그룹으로 우뚝 설 해동그룹 아닌가? 이명진과의 아름다운 분가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난 물려받은 거 말고도 내가 일군 게 많아. GK디스플레이와 GK통신, 해동전자 주식을 50퍼센트씩 손에 쥐었으니 처남들이나 처형, 처제들보다 훨씬 낫지, 안 그래?”
처가 놈들 중 우리 내외와 같은 항렬에 있는 놈들 치고 제대로 상속을 받은 놈들은 단 한 놈도 없다. 그에 반해 해동물산은 거의 대부분의 주식을 내가 쥔 데다 나머지 주식들도 그룹 수뇌부를 비롯한 임직원들, 장학재단이 쥐고 있다.
이런 사실을 말할 필요가 없었는지 장민재가 내를 노려봤다.
“지배구조 탄탄해서 좋겠습니다, 매형. 자랑만 할 거면 더 이상 들어줄 게 없을 것 같은데요?”
“자랑만 할 생각은 없어. 나나 내 와이프만큼은 아니지만 처남도 슬슬 지분 확보해야지. 안 그래?”
본제로 향하는 물꼬를 틀면서 은근한 눈길을 보내자 장민재의 눈빛이 바뀌었다.
“무슨 소립니까? 매형 회사가 쥐고 있는 신성지주 주식이라도 넘겨줄 겁니까?”
“그건 안 돼지. 증권하고 자산운용이 쥔 주식은 임원들이나 사촌들 동의가 필요하니까.”
그렇지만.
해동자산운용은 해동종금과 해동증권이 50퍼센트씩 출자한 자회사이고 그 해동자산운용을 지배하는 해동종금과 해동증권 모두 내가 직간접적으로 지배하는 주식이 70퍼센트가 넘는다. 팔 생각이 없다는 말에 장민재가 나를 쏘아봤다.
“그럼 대체 나하고 뭐 하자는 겁니까, 매형? 주식을 넘겨줄 것도 아니면서.”
“우린 재벌 후계자이기 전에 기업가야. 기업가답게 사업으로 장인어른 지분 따야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다그치던 장민재의 눈이 커졌다.
“사업···이요?”
“그래, 사업. 이거부터 봐봐.”
서류가방에서 꺼낸 파일을 내게서 넘겨받은 장민재가 파일 커버를 펼쳤다. 그 안에 담긴 서류를 보던 장민재가 커진 눈으로 날 바라봤다.
“매, 매형?”
“왜? 수수료율이 너무 낮아? 우리 해동그룹 카드 결제 규모면 신성카드 실적 끌어올리면서 다른 카드사 점유율까지 갉아먹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은데?”
내가 건네주고 장민재가 받아본 서류에는 해동전자와 아쿠아 스토어를 제외한 해동그룹의 모든 카드 결제를 신성카드에 밀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있었다.
‘수수료율이 박하지만 저놈도 경쟁사를 말려 죽이는 방식으로 커 온 신성그룹의 후계자야. 그깟 수수료 몇 푼에 연연할 놈은 아니지.’
아니나 다를까 장민재는 의아한 체하는 내 표정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해동그룹 같은 거래처를 독점하면 나쁘진 않죠, 하하.”
말과 달리 장민재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에게 내가 준비한 폭탄을 먹이려고 설득을 계속했다.
“여하튼 그게 전부는 아냐. 이번 거래를 처남이 트면 더 큰 거래도 넘겨줄 생각이 있어.”
“더 큰 거래요?”
“그래. 솔직히 큰처남한테 막말만 하고 거래도 제안하지 않은 건 큰처남 성격 때문이야. 항상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사람이잖아?”
“그럼 나한테 막말한 건 뭡니까?”
장민재의 볼멘 표정을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우리 처남 송곳니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고 싶어서 그랬지. 내가 이 건 넘겨줘도 신성그룹 회장실 차지할 만해야 나도 줄 맛이 날 거 아냐?”
“매형도 날 아래로 보는 겁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느라 힘들었지만 장민재의 눈에서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늘 막내라고 집에서 제대로 된 인정을 못 받아온 놈이 아닌가?
“지금까지는. 그러니까.”
잠시 말을 끊은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건으로 나랑 똑같은 눈높이에서 봤으면 좋겠어. 큰처남이나 처제는 몰라도 처남은 최소한 우리 와이프한테 대놓고 각 세우지는 않았잖아. 그래서 챙겨주는 거야.”
장민재는 제 형, 누나와 달리 장하연에게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 형과 누나가 알아서 각을 세우고 있으니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 했던 거지만 말이다.
“나야 큰누님이 그닥 싫은 건 아니었으니까요. 여하튼, 이 건을 처리하고 나면 주겠다는 큰 거래는 뭡니까?”
“이번 거래 처리하고 알려줄게, 흐흐.”
빙글빙글 웃던 나는 장민재의 굳은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기분이다! 힌트 좀 주자면 다음 건도 신용카드 관련 거래야. 건당 사이즈가 꽤 커서 오랫동안 할부가 들어갈 물건이고.”
그 순간 장민재의 눈이 번쩍거렸다. 이놈도 장호건의 아들이고 서울대 졸업장을 노름으로 딴 게 아닌지라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힌트는 충분히 줬으니까 가볼게. 이번 건 잘해서 나중에 신성그룹 회장 되면 우리랑 친하게 지내자고.”
끝까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던진 나는 장민재가 고민에 빠질 틈을 주고자 자리를 비켜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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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재는 이성민이 자리를 뜨자마자 입술을 곱씹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작은 누나야 출가외인이라지만 형은···.”
어렸을 때부터 늘 자신을 한 수 아래로 내려다봤던 형 장용재.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고부터는 그 콧대가 더 높아졌고 장민재 자신이 서울대 사회학과에 들어간 뒤로는 더 아래로 취급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사업을 말아먹었으면서도 그 태도가 변하지 않았기에 장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언제까지 뒤에만 숨어있을 수는 없지.”
각오를 다진 장민재는 탁자에 놓인 제안서를 들었다.
“흠···.”
장민재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지만 그 소리가 무겁지는 않았다. 수수료율이 다른 거래처보다 박한 게 걸리지만 유통업계에서 로엘그룹과 1위를 두고 다투는 해동물산 소매유통 결제를 독점하면 경쟁사들의 파이를 빼앗지 않겠나?
그뿐만이 아니다.
이성민이 힌트를 준 ‘더 큰 거래’는 그 집안의 가장 큰 금융사업 중 하나다. 그 사업까지 가져오면 자동차 사업에서 철수하여 신성그룹이 꿈도 꾸지 못하는 ‘그 사업’을 자신이 해내게 된다.
그 사업까지 따내면 체이스맨해튼 그 흰둥이들을 설득하여 신세기금융지주와 신성생명의 합병을 성사시키고 신세기카드와 신성카드의 합병까지 추진할 때 신성카드의 영향력을 보전할 수 있으니 무려 일석사조의 비책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민재는 호구 같은 이성민이 건네준 서류를 챙겨들고 카페를 나섰다.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
장민재를 함정에 끌어들인 나는 오현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외삼촌.”
[성민이구나. 무슨 일이냐? 허허.]
“죄송하지만 외삼촌들 세 분과 해동물산 인천 물류센터에서 뵙고 싶습니다.”
[형님이랑 현준이까지 거기서 보자니··· 무슨 일이냐?]
오현무도 심상찮은 낌새를 알아차린 듯했지만 한가하게 전화 통화를 길게 늘여 뺄 수가 없었다.
“직접 뵙고 싶지만 조국일보에서 붙여놓은 거머리들 때문에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미행이 붙을 수 있으니 다른 차량으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오현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다. 지금 바로 출발하마.]
통화를 마친 나는 박태진, 선해철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장민재, 물 것 같냐?”
선해철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물 겁니다. 막내라고 장인어른한테 관심도 못 받고 기대도 못 받은 놈이니까요. 제 제안을 이용해서 성과를 내고 장인어른의 지분을 조금이라도 먼저 물려받고 싶을 겁니다.”
“하긴, 장용재는 몰라도 장민재 얘기는 그룹에서도 언론에서도 보기 힘들었으니까.”
“그러니 더 큰 거래도 물려고 들 겁니다, 형님. 장민재도 장호건 회장님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이니까요.”
그만큼 욕심이 많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박태진의 첨언에 선해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우리 셋은 인천창고에 도착했다.
“세 분은 도착하셨습니까?”
“예, 의장님. 지하 밀실로 안내해드렸습니다.”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 밀실로 내려간 우리는 탁자 앞에 앉아있던 오현무와 해수찬, 오현준에게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보자고 한 이유가 뭐냐, 성민아?”
“신용카드 때문입니다.”
“신용카드?”
의아해하는 오현무와 해수찬, 오현준에게 나는 장민재에게 제안한 거래에 대해 알려줬다.
“그걸 전부 장 씨 것들한테 주겠다고?”
“네. 더 큰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삼촌.”
“알았다, 성민아. 일단, 저희가 드릴 문건부터 보시죠, 오 회장님.”
오현무에게 대답한 나는 선해철을 불렀고, 선해철은 가방에서 박태곤이 올린 문건의 사본 세 개를 오현무, 해수찬, 오현준 세 사람에게 나눠줬다.
“‘신용카드 연체 문제’요?”
표지를 보고 눈이 커진 세 사람에게 선해철이 말했다.
“예. 지금의 신용카드 시장은 정상이 아닙니다. 모객부터 단기대출까지 전부 상식을 뛰어넘었습니다.”
선해철의 직설에 이어 박태진도 설명을 보탰다.
“소비자들이 신용카드로 단기대출을 받고는 여러 개의 신용카드를 이용해서 대출 돌려막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해동그룹 임직원들까지 고문님께서 나눠주신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등 문제가 심각합니다.”
마른침을 삼킨 세 사람은 우리가 나눠준 문건을 정신없이 살펴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류철을 덮은 세 사람의 표정은 잔뜩 어두워져있었다.
“이럴 수가···.”
“GK그룹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제 지인들도 GK카드 모객 좌판에서 현금을 받고 카드를 발급받았다고 하니까요.”
선해철의 말에 오현무, 해수찬, 오현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신성그룹을 하나라도 앞서겠다고 카드 사업에 힘을 주고는 있었지만 회사의 큰 줄기만 짚는 사람들이니 그런 비상식적인 경쟁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몰랐겠지.
“지금이라도 당장 모객 기준을 엄격하게 잡아야 하겠군요, 선 대표.”
“그렇습니다, 회장님. 확실한 상환능력이 되는 고객들만 가려서 받아야 할 겁니다.”
“그럼··· 신성카드에 왜 해동물산 유통부문 독점 결제를 넘겨준 겁니까? 해동백화점이야 객단가가 크다지만 하이마트는 생필품 위주라서 결제대금 상환이 쉬울 텐데.”
해수찬은 내심 마뜩찮은 기색을 비쳤지만 나는 해수찬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외삼촌, 카드깡 아세요?”
“카드···깡?”
생판 처음 듣는 단어인지 해수찬뿐만 아니라 오현무와 오현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카드로 결제한 물건을 전당포에 저당 잡히고 돈을 빌리는 겁니다. 맥주, 소주, 양주, 와인, 금, 심지어 배추까지 몽땅 사서 말이죠. 절대 좋은 게 아닙니다, 흐흐.”
카드깡을 설명하고 음흉하게 웃던 나는 입이 벌어진 세 남자에게 말했다.
“처가 쪽은 이런 걸 모르고 있을 테니 좋은 거래라 여기고 있을 겁니다. 저는 그걸 이용해서 더 큰 함정에 처가를 빠뜨릴 거고요.”
“더 큰 함정?”
더 큰 함정이라는 말에 오현무, 오현준, 해수찬의 눈이 커졌지만 나는 세 남자를 보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