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59th. 새 판 짜기 (2)
“손님이 없어서 다행이네. 편하게 써, 여보.”
“고마워, 여보.”
장하연과 가볍게 포옹하며 볼을 살짝 비빈 나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박태곤과 함께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거실 소파에 앉았다.
“미안합니다, 박 사장님. 우리 부부 금슬이 아직도 좋아서요, 하하.”
“아닙니다, 의장님. 부부관계가 좋은 건 좋은 일 아닙니까? 하하.”
“이렇게 된 거, 우리끼리 조용히 술이라도 마시죠.”
헤네시에서 판매되는 3백만 원짜리 고급 코냑 한 병과 미니바에 있던 코냑 글라스 두 개를 가져온 나는 탁자에 글라스를 놓고 술을 채웠다. 몸을 살짝 일으켜서 글라스를 가볍게 부딪친 나는 박태곤과 함께 술을 축였다.
“의장님과 함께 이런 호사를 누릴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박 사장님이 제 손을 잡고 열심히 뛴 덕이죠, 하하.”
너스레를 떨며 웃던 나는 코냑 한 모금을 축인 뒤, 가볍게 숨을 내쉬고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그게···.”
말끝을 흐리던 박태곤은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 흔들던 글라스를 단숨에 비우고서야 입을 열었다.
“개인고객들 중 대출 상환 연체를 조사하던 중 이상한 징후를 발견했습니다.”
‘개인고객? 대출 상환 연체?’
짚이는 게 있어서 절로 눈이 가늘게 변한 나는 당황한 박태곤을 보며 눈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편히 말씀하세요. 박 사장님 탓하려는 건 1도 없습니다, 하하. 무슨 징후입니까?”
너털웃음을 터뜨린 나를 보며 박태곤이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신용카드 연체입니다.”
“신용카드 연체요?”
“예. 아시다시피 외환위기를 타개하겠다고 정부에서 신용카드를 권장했잖습니까?”
내가, 우리가 아무리 한국에 돈을 퍼부었다고 해도 내수까지 살리지는 못했다. 결국, 정부는 경제를 살리겠다고 국민들에게 신용카드사용을 권장하는 극약처방까지 해버렸다.
“그렇죠.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신용카드 회사는 우리 그룹 내에 없는데.”
카드대란에 대해 모르는 체하며 묻는 내게 박태곤의 상황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 측 추심부서 담당자들이 조사한 결과, 대출 상환이 연체된 고객들 중 신용카드 연체자들이 제법 발견됐습니다. 아직은 큰 문제가 없지만 증가규모와 그 속도가 올라가는 수준을 보면 2,3년 내에 대형사고가 터질 듯합니다.”
‘이래서 내가 이 사람을 데려온 거였지.’
댐에 생기는 개미구멍을 알아보는 것처럼 리스크 관리에 탁월한 박태곤을 데려온 효과는 확실했다. 원래는 카드대란이 터지기 6개월 전에야 박태곤이 그 조짐을 발견하는데 이번에는 더 큰 물에서 놀아서인지 그 속도가 빨랐다.
“조영찬 회장님도 알고 계십니까?”
“예. 며칠 전에 보고를 올리자마자 고문님의 그룹 회장 은퇴 파티 때 의장님께 조용히 알리라는 것 외에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마라고 하셨습니다. 의장님이라면 이유를 알 거라면서요.”
‘조 회장님도 그 원한을 지우진 못하셨나보네.’
우리 집안과 우리 그룹에는 신성그룹에 대한 원한이 뼛속깊이 새겨져있다. 신성을 세운 장병호가 8.3 사채동결 때 우리 집안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휴지쪼가리로 만들지 않았나?
내가 스탠더드 캐피털의 주인이라는 걸 밝힌 날, 그 자리에 있던 수뇌부들은 각자의 소회에 이어서 앞으로의 계획도 공유했었다.
[신성그룹 장 씨 가문, 무조건 무너뜨려야 하네.]
[태현그룹이야 명진호 회장님이 회장님께 사과를 드렸으니 됐지만 자네 처가는 끝까지 모르쇠니 절대 용서할 수 없네.]
[이 이사 자네 안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절대로 곱게 넘어갈 수 없어.]
[신성을 망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처가는 알거지로 만들어야 한다, 조카야.]
[신성그룹 장 씨를 재계에서 쫓아내는 건 우리 그룹의 숙명이다, 성민아.]
당시 내가 기억하는 그룹 수뇌부들의 표정은 말만큼이나 그 의지를 확고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해동그룹의 확장에 여념이 없었지만 확장도 할 만큼 했고 총알도 충분하니 30년 묵은 구원(舊怨)을 갚으려는 모양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던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박태곤에게 말했다.
“우리 말고 다른 놈들, 그것도 제 처가는 전부 진흙뻘창에 밀어 처넣자는 뜻인 것 같네요, 흐흐.”
“예?”
내가 내뱉은 거친 말에 박태곤의 눈이 커졌지만 나는 빙긋 웃어보였다.
“해동그룹은 최근 몇 년 간의 거듭된 인수합병 중에도 재무건전성을 지켜왔습니다.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항상 어디선가 고문님과 의장님께서 돈을 벌어오셨잖습니까?”
해동그룹의 화수분이 할아버지와 나라는 건 박태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이어 붙였다.
“그러니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기존 신용카드사들이 전부 자빠졌을 때 우리가 선심 쓰듯 나서서 헐값에 떠안을 수 있으니까요. 다른 하나는···.”
말끝을 흐리던 나는 눈빛을 새롭게 잡고 박태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박 사장님께 우리 집안의 비밀을 조금은 알려드려야 할 것 같네요.”
“비밀이요?”
“비밀을 들으면 영원히 해동그룹에서 근무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들으시겠습니까?”
잠시 흔들리던 박태곤의 눈빛이 굳게 자리 잡혔다.
“3년 전에 의장님 집에서 술을 마시던 날, 해동그룹에 뼈를 묻기로 했습니다. 들려주시죠.”
“알겠습니다. 근 30년 전 일인데···.”
8.3 사채동결 때 우리 집안이 장병호 때문에 돈을 까먹은 일을 들려주자 박태곤의 눈이 커졌다.
“···그래서 고문님께서 의장님 처가를 싫어하신 거였군요.”
박태곤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저나 제 와이프 모두 능력을 보여준 데다 제 와이프도 자기 위치를 확실히 정리했으니 결혼을 허락해주셨지만 제 처가가 망하기 전까지 명예회장님이나 세 분 원로 회장님들의 원한은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내가 처가 놈들을 박살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자 박태곤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의장님. 지금도 그랬지만 신성그룹 사람들이 접근해도 아무 것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의장님 집안의 비밀도 마찬가지고요.”
이로써 박태곤은 우리 집안의 사람이 될 것을 내 앞에서 맹세했다. 나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다른 비밀들은 차차 하나씩 알려드리기로 하고···.”
또 다른 비밀이 있다는 걸 넌지시 흘리자 박태곤이 흠칫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에게 주고 싶은 게 있었다.
“해동종금과 해동증권 주식 2퍼센트의 스톡옵션을 박 사장님께 드리죠. 세금으로 낼 돈까지 전부요.”
“예?”
이 나라에서 1, 2위를 다투는 두 회사의 스톡옵션이면 수천억 원의 가치가 있다. 얼마나 놀랍겠나?
“앞으로 박 사장님이 진짜 제 사람이라는 징표라고 생각하십시오, 하하.”
입이 벌어진 박태곤을 보며 나는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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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옵션을 약속한 뒤, 박태곤에게 관련 보고서를 올리라는 지시를 끝으로 그를 보낸 나는 혼자 남은 방에서 코냑을 마시고 있었다.
카드대란.
대한민국에 초대형 유동성 경색을 일으킬 초대형 금융 사고다.
해동그룹이야 그간 나와 집안어른들이 불려놓은 돈으로 수월히 넘기겠지만 다른 그룹들, 카드회사를 끼고 있는 재벌들이나 은행들은 무조건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신성은 무조건 휘청거릴 수밖에 없지. 박태곤을 내가 빼돌렸으니.’
박태곤을 내 사람으로 데려왔으니 장호건이든 이수한이든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신세기도 마찬가지야. 소비에 민감한 업종들로 꾸려져 있어도 장호경 욕심 때문에 무시할 테고.’
장호경은 내수에 민감한 식품과 유통에서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1등에 대한 욕심이 커서 신세기카드의 고객유치에 힘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세기리테일에 제일제분 현금흐름 믿고 밀어붙이고 있겠지만··· 쉽지 않을 걸?’
신세기그룹의 양대 축인 신세기리테일과 제일제분의 현금흐름이 아무리 좋아도 카드대란으로 터질 부실을 막을 수는 없다. 오히려 카드대란의 여파로 소비가 줄어들 테니 소비에 의존하는 유통회사인 신세기리테일은 고꾸라지기 딱 좋다.
‘내후년이면 신세기그룹은 내 손에 들어오겠군. 10년 내로 장호민, 마지막은···.’
음침한 미소를 짓던 나는 코냑을 단숨에 들이켰다. 순조롭게 풀려가는 내 복수가 감미료가 되어서일까 코냑의 맛이 오늘 따라 더 달콤했다.
***
이성민이 자신의 복수가 성공해가는 것을 자축하고 있을 때 장호건은 그 자축을 무색하게 만들 계획을 장호경, 장호민과 꾸미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 아버지?”
서재로 자식들을 부른 장호건은 그 계획을 알려줬고,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는 이구동성으로 아버지를 찾았다. 장호건은 예상이라도 한 듯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 너희들을 위해서다. 너희들이 지금 꼬라지로 스탠더드 캐피털이나 이 서방을 당해낼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래도 고모님, 숙부님한테 지분을 양보하신 건···.”
장용재의 볼멘소리는 장호건에 의해 바로 잘렸다.
“화살 한 대는 쉽게 꺾이지만 화살다발은 꺾기 힘든 법이다. 앞으로 너희들이 신성그룹의 후계자로서 임직원들을 호령하는 건 이제 너희들이 얼마나 성과를 내냐에 달려있어.”
장용재와 장수연, 장민재의 표정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자식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힘든 길로 밀어 넣다니!
그런 자식들을 장호건이 굳은 눈빛으로 쏘아봤다.
“얼마나 더 밀어줘야 한다는 거냐? 하연이, 이 서방은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그놈의 장하연! 그놈의 이성민!
지긋지긋한 이름이었다. 차라리 자신들에게 신성그룹을 물려주기 싫다고 하면 될 게 아닌가?
그렇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자신들은 재벌이라는 이름으로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최악을 견딜 수 없었기에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애비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힘을 합치던 각자 알아서 하던 실력으로 승부해. 너희 사촌동생들하고.”
‘이 서방이나 하연이라면 노력하겠다는 말이라도 했을 텐데···.’
자신이 손해를 봐가면서까지 새 판을 짜줬는데도 아무 말도 못하다니··· 한심한 자식들 때문에 자괴감을 느끼는 장호건이었다.
***
2001년 새 해를 맞은 나는 해동그룹의 3대 오너로서 공식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게 각종 잡지사와 신문사, 방송사 프로그램의 인터뷰에 응해왔던 나는 3월 초순의 오후 3시, 증시가 마감하고 나서도 미리 잡힌 일정에 따라 여러 기자들을 모아놓고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다들 문과 출신인 제가 전자사업을 한다니 많이들 의문을 품으실 겁니다. 그렇지만 결과로 승부하겠습니다.”
인터뷰를 받아 적던 기자들 중 동양일보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들리는 바로는 조만간 해동전자가 미국의 애플과 위탁생산 계약을 체결하고 개성공단 공장에서 아이맥을 생산할 거라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예. 스탠더드 캐피털의 해동전자 유상증자를 조건으로 애플과 연결됐습니다. 여기에 GSMC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받아 아이맥을 생산할 계획이고요.”
잡스는 나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고 위탁생산과 부품 공급을 맡겼다. 이로써 전자업계 내에서 내 생태계는 하나씩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남들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별 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하자 함께 인터뷰를 받아 적던 조국일보 기자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북한에 퍼주는 게 아닙니까? 국내에서의 사업 계획은 있으신지요?”
‘너 이 새끼, 눈치도 없냐?’라는 메시지가 담긴 다른 기자들의 싸늘한 눈초리가 저놈에게 쏟아졌지만 그런 눈초리에 굽힌다면 한국 최대의 신문사인 조국일보의 기자인가?
여기에 제 주인집 사돈댁이 신성그룹이니 어떻게든 나를 맥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지만 나에게도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내부에서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개발이 완료되면 국내 생산과 동시에 전 세계에 출시할 계획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나는 기자를 돌려보내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휴우, 정신이 없네요.”
“엄살은, 흐흐.”
선해철은 날 보며 낄낄 웃었지만 엄살이 아니었다.
스탠더드 캐피털의 투자 사업에 전략 컨설턴트 일, 여기에 해동전자의 ‘아쿠아 웨이브’와 해동자동차의 신차 개발까지 체크하느라 밤늦게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IT버블 붕괴 때 아쿠아 웨이브를 준비할 줄은 몰랐어.”
“먹고 살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흐흐.”
아쿠아 웨이브는 IT버블 붕괴 때 기획을 시작하여 현재는 해동전자에서 개발 중인 제품이다.
‘이거 만들려고 IT버블 터뜨리면서도 디지털캐스트 인수 챙기고 뉴욕대까지 갔었지.’
해동전자를 통해 MP3 원천기술이 있는 디지털캐스트를 인수하고 뉴욕대에서 정전식 터치스크린 기술을 연구하던 제프 한(Jeff Han) 박사를 영입하는 등 기반기술을 확보한 나는 곧바로 아쿠아 웨이브의 하드웨어 개발에 착수했다.
GK디스플레이에 기술을 제공하여 개발한 정전식 터치스크린, 태현전자 시절에 개발된 이미지 센서를 토대로 만든 디지털 카메라 모듈, 무선 인터넷 접속 등으로 게임, 음악, 영화, 소설, 메모, 사진촬영까지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다음에 출시할 아쿠아 웨이브는 좀 더 작게 만들고 통화기능까지 넣기로 했지. 그 다음엔 인터넷 검색이 되도록 만들 거고, 흐흐.’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이번에 출시할 아쿠아 웨이브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에 대항마가 될 거라는 말만 할 뿐 스마트폰으로 향하는 중간다리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지금을 즐기며 차를 마시던 나는 오후 4시가 넘자 거세게 문이 열리는 걸 봐야 했다.
“크, 큰일입니다, 사장님!”
“무슨 일이야?”
선해철이 가늘게 눈을 뜨며 물었지만 직원은 진정할 기미가 안 보였다. 박태진도 표정이 굳은 가운데 나는 언짢은 내색을 하지 않고 냉수 한 잔을 채워 직원에게 다가갔다.
“마시고 말해요.”
유리컵을 받은 직원은 눈을 질끈 감고 컵에 채워진 냉수를 전부 비웠다. 목에 퍼진 냉기 때문일까 눈살을 찌푸리던 직원은 겨우 숨을 가라앉혔고, 나는 그 직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시, 신성그룹과 신세기그룹이 회사채를 발행하고 시간외거래로 계열사 주식을 옮겼습니다!”
직원이 터뜨린 폭탄에 나와 박태진, 선해철의 눈이 커졌다. 처가 놈들이 빚을 얻어서 주식을 옮겼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