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59th. 새 판 짜기 (1)
2000년 12월 30일.
학생들은 겨울방학 초반이지만 직장인들에게는 그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종무식 날이다.
다른 그룹들처럼 해동그룹 강남 본관 대회의실도 그룹 핵심 계열사와 사업부를 맡은 사장단 등 주요 임원들이 책상 앞과 벽면 앞에 자리 잡은 가운데 회의실 문이 열렸다.
가장 문을 열고 들어간 할아버지를 따라서 고승주와 금석호, 배재훈, 태재호, 조영찬, 신호진, 그리고 이명진과 나, 박태진이 순서대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할아버지와 우리를 본 사장단들은 큰소리로 올린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였고, 할아버지는 그들을 보며 손을 가볍게 흔들고 자리에 앉았다.
“다들 앉아.”
할아버지의 주문에 우리는 모두 자리에 앉았다. 물 한 모금을 마신 할아버지는 유리컵을 내려놓고 스탠드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다들 알겠지만 오늘은 우리 해동그룹의 역사에 중요한 날이네. 오늘부로 우리 해동그룹은 그간 준비해왔던 계열분리를 정식으로 선언하는 바일세.”
올 것이 왔다는 듯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를 둘러보던 할아버지는 고승주에게 말했다.
“본부장, 시작하게.”
“예, 회장님. 지금부터 해동그룹 계열분리 계획을 발표하겠습니다. 발표에 앞서 회장님 말씀이 있겠습니다.”
고승주의 진행발언이 끝나자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재계의 변방에 있던 우리 해동이 10년도 안 돼서 재계 1위에 올랐네.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여정이었지.”
모두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할아버지의 말이 계속됐다.
“허나 그만큼 덩치가 지나치게 커졌어. 이대로 가면 재계에서 우리 해동은 외돌토리가 될 터. 그래서 이번 계열분리를 결정하게 됐네.”
나와 이명진의 홀로서기가 계열분리의 진짜 목적이었지만 할아버지는 늘 적을 만들지 않고자 노력해왔다. 나를 비롯한 이 자리에 있는 모두들 그 성정을 알고 있었기에 할아버지의 말씀에 표정을 가다듬었다.
“다들 알겠지만 우리 해동은 그룹을 쪼갤 때 다른 그룹들처럼 주식 때문에 지지고 볶을 일이 없네. 해동물산만 쪼개면 되는 건 다들 알지? 으허허.”
“하하하하!”
우리 그룹은 다른 그룹들처럼 복잡하게 계산을 해가며 지배구조를 바꿀 필요가 없다.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해동물산만 쪼개서 나와 이명진이 상대방의 지주회사에 보유한 주식을 교환하고 그에 필요한 세금만 내면 그만이지 않나?
그 과정에서 낼 세금이 조 단위지만 그간 내가 불린 우리집안 사람들의 개인 재산이면 그깟 세금쯤이야 열 번도 훨씬 더 넘게 낼 수 있다. 그룹 총괄전략본부의 재무팀과 기획팀 임직원들에겐 하품만 나올 만큼 싱거운 일이기에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할아버지와 함께 껄껄 웃었다.
한 차례의 웃음이 잠잠해지자 할아버지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오늘부로 해동물산은 기존의 해동물산에서 해동중공업지주를 분리할 걸세. 자세한 내용은 고 본부장이 알려줄 걸세.”
할아버지가 마이크를 떼고 물을 마시는 사이, 고승주가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명진 부회장은 해동물산에서 분리될 해동중공업지주를 승계합니다. 해동중공업지주는 기존 해동물산의 유동현금 65퍼센트, 세계 각지에 보유한 각 철광 및 탄광 지분의 3할씩, 해동물산이 보유한 해동자동차, 해동건설, 해동중공업, 해동제철, 해동시멘트의 지배지분 전량을 보유할 것입니다.”
‘나만 잘 나가는 건 의미가 없어. 다 같이 잘 나가야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지.’
해동중공업지주는 순수지주회사인 데다 계열사 모두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해동물산의 현금을 최대한 이명진에게 얹어주고 해동제철과의 거래 명분을 쌓을 겸 철광 및 탄광 지분까지 얹어줬다. 나도 다른 이들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고승주는 다음 순서를 발표했다.
“앞서 말씀드린 것들을 제외한 해동물산의 나머지 모든 자산들과 계열사들은 스탠더드 캐피털의 이성민 이사가 승계합니다. 이에 따라 서로가 해동물산과 해동중공업지주에 보유한 지분을 교환하면 계열분리는 마무리될 것입니다.”
계열분리 내용을 밝힌 고승주는 이어서 향후 인선에 대해서도 밝혔다.
“해동중공업그룹 회장은 이명진 부회장이 맡고 해동자동차 금석호 회장님을 제외한 각 계열사 대표이사 분들은 부회장으로 승진하실 예정입니다.”
회장이 된다는 말에 이명진의 얼굴이 상기됐다. 해동중공업그룹으로 옮겨갈 대표이사들도 한 계단 더 올라감에 얼굴이 달아오른 사이, 고승주는 해동그룹의 인선을 발표했다.
“해동물산은 배재훈 부회장님께서 상사부문 회장으로 승진, 해동정유 이하 석유화학 계열사와 GK금속까지 통괄합니다. 태재호 부회장님 또한 물류유통부문 회장으로 승진, 해동물산의 소매유통사업과 전자상거래-전산서비스, 육상물류, 해운, 레저사업을 지휘하시고 금융부문의 조영찬 부회장님도 회장으로 승진하십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고승주가 약간 붉은 빛이 도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고승주 또한 해동그룹 총괄전략본부장으로서 회장을 맡고 세 회장님과 함께 그룹 전반의 사업을 조율합니다. 부본부장은 이번에 부사장으로 승진할 박태진 전무를 선임, 저를 보좌하여 해동그룹의 전반적인 경영을 살필 것입니다.”
고승주에 이어 박태진까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형도 쑥스러운가 보네, 후후.’
쑥스러울 것이다. 40대 중반도 안 돼서 부사장, 그것도 해동그룹 컨트롤타워의 2인자가 됐으니 얼마나 민망할까?
나처럼 박태진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던 고승주는 마지막 인선을 발표했다.
“스탠더드 캐피털의 이성민 이사는 기존의 해동그룹 전략 컨설턴트 외에도 존속할 해동물산 이사회 및 해동그룹 합동 이사회의 의장을 맡으며 그룹 전체 경영을 살필 것입니다. 또한, 고려호텔의 장하연 대표는 해동물산 이사회의 등기이사로 참여할 것입니다.”
이로써 해동그룹 계열분리 계획이 모두 공개됐다. 그에 맞춰 책상을 가볍게 내려친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나 이대수는 오늘부로 해동그룹 고문으로 물러난다네. 내게 남은 해동물산 주식 10퍼센트 중 절반은 그룹 계열사 임직원들에게 증여하고 나머지 절반은 해동장학재단에 출연할 걸세. 지금껏 함께 해서 즐겁고 고마웠네.”
할아버지의 완벽하고도 멋진 은퇴 선언에 우리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했습니다, 회장님!”
고승주와 배재훈, 태재호, 조영찬, 이명진, 그리고 나와 박태진이 미리 합을 맞춘 인사를 큰소리로 올렸고···
“감사했습니다, 회장님!”
금석호와 신호진을 비롯한 다른 사장단 이상 핵심 임원들도 우렁차게 인사를 올렸다.
그런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을 나갔고 우리는 모두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손이 터지도록 박수를 쳤다. 오늘 따라 뒷모습이 커 보이기만 하는 할아버지였다.
그렇지만.
다 끝난 게 아니었다.
***
“으하하하! 내 이제야 홀가분해져서 참으로 개운하다네! 이제야 한량처럼 살 것 같구먼!”
“하하하하! 그간 진심으로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샴페인 잔을 쥔 할아버지와 금석호는 서로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고···
“축하한다, 박 부사장! 출세했네, 흐흐!”
“출세는 무슨, 민 부사장. 너처럼 고생길 훤히 열렸어, 흐흐.”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본부장님! 하하!”
“고마워, 주 전무. 앞으로 잘해보자, 하하.”
박태진과 민주형, 주승빈도 서로를 축하며 껄껄 웃었으며···
“이젠 우리 유 부장한테 조심해야겠어? 남편 분이 그룹 실세 아냐? 흐흐.”
“사장님도 참, 제 남편이 그룹 실세지 저는 일개 부장이잖아요, 호호.”
하이마트 사업부장으로서 사장으로 승진한 나창석은 유현정과 웃음꽃을 피우는 등
해동그룹의 핵심 임원들과 그 배우자들 모두 ‘박수칠 때 떠나다! 해동그룹 이대수 회장님 은퇴 축하 파티!’라는 플랜카드가 걸린 고려호텔 영빈관에서 송년회를 즐기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박 사장님.”
“아닙니다, 의장님.”
이번에 해도그룹 금융부문 전략실 사장으로 승진한 박태곤은 겸연쩍은 미소를 띤 채 나와 함께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회장님께서 저렇게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워낙 다재다능하신 분이라 그룹 일 놓으셨으니 취미생활 즐기시느라 바쁘실 겁니다, 하하.”
할아버지는 삼청동 본가에서 그룹 일을 보면서도 틈틈이 난을 치거나 악기 연주, 영화 감상, 바둑, 운동 등 여가 활동을 즐기셨다. 그 와중에도 그룹 고문으로서 우리의 자문을 해주실 테니 절대 노년이 심심할 일이 없으실 것이다.
“그렇군요. 의장님 제안을 받고 여기까지 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샴페인을 한 모금 축인 박태곤이 밝힌 소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왜죠?”
“하루하루 일에 치여 살지만 이렇게 보람있는 일을 할 줄은 몰랐거든요, 하하.”
박태곤이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데려오길 잘했다 싶었다. 신성그룹에 남아있었으면 비자금 조성을 비롯한 온갖 궂은 일, 더러운 일에 휘말렸을 게 아닌가? 비자금을 만들 필요가 없는 해동그룹과 달리.
“앞으로는 더 많이 바빠지실 겁니다, 하하.”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합니다, 하하.”
잠시 멈칫한 박태곤의 웃음과 표정이 개운치가 않았다. 왜지?
“무슨 일 있습니까? 혹시··· 토박이들이 텃세를 부리는 건···.”
혹시나 해서 물어본 내게 박태곤은 손을 저어보였다.
“그런 건 아닌데··· 잠시 자리를 바꾸는 게 어떠십니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얘기를 나누기엔 민감한 사안이라서요.”
남들보다 더듬이가 예민해서 조영찬과 함께 금융부문을 관리하게 된 박태곤이다. 그런 그가 조심스러워하는 걸 보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죠. 잠시만 기다려줘요.”
자리를 뜬 나는 정창호와 함께 샴페인을 마시던 장하연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여보?”
“객실 하나만 쓸 수 있지? 아무도 엿들을 수 없는 방으로.”
내 말에서 묻어나는 뉘앙스를 알아챘는지 장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아저씨, 저 이이하고 잠시만 다녀올게요.”
정창호의 양해를 구한 장하연은 나, 그리고 박태곤을 데리고 고려호텔 본관으로 향했다. 박태곤이 할 말이 뭘까?
***
그날 저녁.
신세기그룹의 웨스턴호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서 장호건, 그리고 장호경과 장호민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호건이 네 큰딸 시할아버지, 오늘 은퇴했다더라? 명예회장도 안 거치고 고문으로 물러나다니··· 누구하고 다르게 걱정이 없나봐?”
“이젠 우리 형님 맏사위 세상이 됐네요. 그런데 이 서방이 물려받을 회사가 형님 회사보다 크던가요? 흐흐.”
스테이크 조각을 삼킨 장호경이 운을 떼자 장호민이 실실 웃었다. 두 사람을 보던 장호건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은 늘 이런 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운데에 있는 자신을 위에서 찍어 누르고 아래에서 찌르지 않았던가?
한숨을 내쉰 장호건은 자리에 앉아서 반쯤 비워진 와인 병을 잡고 술을 채웠다. 고기도, 빵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한가득 채운 와인을 단숨에 비워버려서인지 장호건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잔을 내려놨다.
그렇지만 장호경은 이 자리를 만든 장호건을 가만 놔둘 생각이 한 점도 없어보였다.
“우리 동생, 속이 많이 짠가 보네. 반도체 치킨게임으로 다 넘어뜨리고 다 재끼겠다고 큰소리 땅땅 친 게 엊그제 같았는데.”
장호경의 속 긁는 소리에 장호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 초만 해도 IT버블 붕괴와 RD램의 결함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을 이용하여 다른 경쟁자들을 모조리 말려죽이고 독주체제를 굳힐 기회라고 적극적인 공세를 천명했건만 GSMC라는 초대형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았나?
인상이 구겨진 형을 보고 이번에는 장호민이 실실 웃었다.
“형님 맏사위가 일하는 회사가 형님 발목을 잡는 것 같습니다그려. 3년 전엔 자동차를 뺏기더니 이젠 반도체에서까지 붙게 됐잖수? 아! 신성전자랑 신성물산 지분도 15퍼센트 이상 스탠더드가 들고 있다죠? 흐흐.”
그 빌어먹을 스탠더드 캐피털은 무슨 꿍꿍이인지 장호건 계열의 양대 축인 신성전자와 신성물산에 초대형 포크만 찍어둔 채 사방에서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동생의 비아냥 섞인 웃음에도 장호건은 화를 내기는커녕 입꼬리를 올렸다.
“피차 마찬가지 아닐까, 동생아? 신성건설, 신성중공업도 그만치는 넘어갔어. 안 그래? 흐흐.”
“뭐, 뭐요?”
피장파장인데 누가 누굴 비웃냐는 형의 핀잔에 장호민의 눈에서 쌍심지가 켜졌다. 성난 동생을 보고도 장호건의 조롱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게다가 넌 제철소 하나 먹겠다고 덤벼들었다가 반푼이 됐잖냐? 내가 듣기로는 우리 맏사위 다니는 회사가 해동에 팔아치운 석유화학계열사는 우리 맏사위한테 갈 거라더라? 그 회사가 누구 거였더라? 흐흐.”
“이, 이···!”
장호민은 장호건을 노려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후벼 파대다니!
두 동생들을 지켜보던 장호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만들 하지? 호건이 네가 호민이 놀리려고 모이자고 한 게 아닐 텐데?”
“누님 말이 맞소. 나나 호민이뿐만 아니라 제일제분과 신세기리테일 지분도 스탠더드에 우리만큼 넘어가서 보자고 한 거요.”
“끄응···.”
꼭 깨문 장호경의 입술 틈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신들이 그룹 지배에 행사하는 것과 맞먹는 주식을 스탠더드 캐피털이 쥐고 있지 않은가?
“왜 모이자고 한지 알 것 같소. 지분 때문이오?”
“그래. 스탠더드 그 양놈들이 우리 지분을 너무 파먹고 있어.”
질문을 던졌던 장호민이 장호건의 대답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 서방까지 해동증권과 해동자산운용을 내세워 지분을 갖고 있다는 게 문제겠지. 이 서방 지분까지 스탠더드 그 양놈들 손을 들어주면 나, 누님, 형님이 각자 계열사에 보유한 지분과 맞먹지 않소. 안 그렇소, 누님?”
막내 동생의 질문에 장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건이 네 사위가 나한테 대주그룹 금융계열사 양보해준 건 고마운데 호민이 말이 맞아. 스탠더드나 네 사위나 지금은 잠자코 있다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랄까···.”
어느 새 손에 쥔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장호경이 잔에서 올라오는 와인 향을 맡고는 고상을 떨며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장호건은 와인 잔을 내려놓은 장호경, 그리고 뺀질뺀질한 표정의 장호민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우리, 거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