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58th. 감당할 수 있으니 (2)
사업계획을 전부 살펴본 명선우의 입이 벌어졌다.
“자, 자네···.”
말을 더듬는 명선우를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트라이엄프 캐피털은 선해철 대표님의 인맥에 대통령님께서 통역을 통해 맺어준 헨리 로이스 의장과 접촉해서 움직였고, 체이스맨해튼은 해동그룹과의 대출 거래에 IT버블 붕괴 때 스탠더드와 거래한 인연이 있습니다. 해동그룹이야 제 집안이고 스탠더드는 저를 신임하고 있고요.”
인맥은 내 필요에 맞게 움직일 수 있어야 인맥이다. 확실한 내 인맥들의 힘 때문인지 명선우가 탄성을 흘렸다.
“허어··· 이래서 아버지께서 자넬 컨설턴트로 영입하라고 한 거였군.”
“태현그룹에 돌아갈 개성공단 지분이 적어서 아쉬울 수 있으시겠지만 토목공사 등 각종 건설공사는 태현건설도 큰 몫을 차지할 테니 태현그룹의 재도약에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분이 적다고 불평할까 걱정됐지만 명선우는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이만하면 아버지께서도 여한이 없으실 걸세. 다른 먹거리는 북한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봐야겠지.”
말을 들어보니 명선우 본인도 명진호가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아는 모양이었다. 명진호 생전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어느 정도 풀어주고 싶었던 걸까?
“이 사업은 전부 명선우 회장님 공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제 조언을 충실히 받아주신다면요.”
잠시 고민하던 명선우가 손을 내밀었다.
“알겠네. 잘 부탁하겠네.”
악수를 나눈 나는 명선우를 보면서 웃었다.
‘이걸로 태현이 여러 개가 되겠군.’
예전은 몰라도 난 지금의 태현그룹이 너무 좋다.
그래서 태현그룹이 여러 개였으면 좋겠다. 쭉.
***
이성민을 돌려보낸 뒤, 명선우는 강남의 태현병원 VVIP 병실로 들어갔다.
“잘 됐느냐?”
“네, 아버지.”
병상에 누워 있는 명진호가 아들의 굳은 표정을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기죽지 말어. IT버블이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느냐. 그래도 아직 남은 회사들이 있으니 잘 해봐.”
“그게 아닙니다, 아버지.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명선우는 자식뻘 되는 놈에게서 받은 대북사업 계획서를 명진호에게 넘겨줬다. 서류를 보던 명진호의 눈이 커지더니 아들을 바라봤다.
“선우야?”
“이성민 그 친구가 아버지 숙원사업에 힘을 보태줬습니다. 예전부터 이북 땅에서 자동차를 만들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명진호의 자식들 중 배다른 자식이지만 가장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명선우. 그는 이북 땅에서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숙원을 생전에 이뤄주고 싶었었다.
그러나 명선구의 분가 때문에 불가능한 꿈이라 여기고 한만 쌓이고 있었는데 그 한이 오늘에야 풀린 것이었다. 아들뻘 되는 녀석에 의해서 말이다.
“비록 우리 지분이 적고 조립만 하는 공장들뿐이지만 이성민 그 친구가 이 사업을 제 공으로 넘겨주고 싶다더군요. 앞으로 제가 자신의 조언을 받아주는 조건으로요.”
재계 1위를 찍었던 태현그룹의 후계자로서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지만 삶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명선우는 그깟 자존심쯤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명진호는 그런 아들을 물기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고맙다, 선우야. 이 애비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줘서.”
형제들과 자식들의 사분오열을 보며 삶에 덧없음을 느끼던 명진호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남의 회사나 다름없는 회사라도 고향 땅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걸 봐야 눈을 감을 것 같았다.
***
얼마 뒤.
고려호텔 그랜드볼룸에서는 명선우와 선해철, 오현무가 단상 위의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지금부터 태현전자 양수도 계약을 체결하겠습니다. 대표 분들께서는 서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진행발언이 떨어지자마자 세 사람은 망설임 없이 각자의 서명을 시작했다. 그렇게 세 번씩 서명을 번갈아 하고나서야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로써 태현전자 양수도 계약이 체결됐음을 공표하는 바입니다.”
조인식을 마친 뒤, 명선우는 그랜드볼룸 구석에 서있던 나를 향해 걸어왔다.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회장님. 저희도 좋은 거래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태현전자 인수가 아니라 대북사업 말일세. 아버지께서 삶을 포기하기엔 이르다고 하셨어.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걸 보고 가셔야겠다고 하셨네, 하하.”
밝게 웃는 명선우를 보니 명진호의 아들들 중에서 유일한 효자인 것 같았다. 명선구나 다른 아들들은 다들 제 뱃속만 채우려고 하는 구렁이들 아닌가?
‘좀 더 빠르게 추진해야 하려나.’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대주자동차를 흡수하면서 확보한 ‘티코’의 조립라인을 개성공단에 깔고 생산할 수 있었다. 고민을 하는 사이에 오현무도 내게 다가왔다.
“명 회장님도 우리 이 이사한테 볼 일이 있으신 것 같군요.”
“이 이사 덕분에 아버지 한을 풀어드리게 됐으니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지요. 감사인사는 나중에 제대로 하겠네, 이 이사.”
명선우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자리를 떴다.
“무슨 말이냐, 성민아?”
“그게···.”
스탠더드 캐피털의 이름을 씌우고 저수율 웨이퍼 재활용 공정까지 맡을 반도체 공장 등의 대북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을 들려주자 오현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호오, 그거 괜찮겠구나. 저수율 웨이퍼를 재활용할 수만 있다면 손해 볼 일은 아니지. 경차까지 북쪽에서 만들면 마진을 높일 수 있으니 좋은 사업이 되겠어, 하하.”
껄껄 웃는 오현무와 달리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괜찮으세요?”
“뭐가 말이냐?”
“북한에 투자하는 거요.”
“정부의 대북사업을 돕는 모양새를 뽑아내는 일이 아니냐? 미국의 큰손들까지 투자하겠다니 안전도 보장받을 테고.”
우리 외삼촌도 사업가 기질은 속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GK그룹의 회장이니 어련하겠냐마는··· 흡족함을 감추지 않던 오현무는 이내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네 돈을 털어서 태현전자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핸드폰, 컴퓨터 사업까지 인수할 생각이냐?”
“외가와 사업이 겹쳐서인가요?”
나도 그 점이 부담스러웠지만 외삼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가져가주면 태현전자, 아니 GSMC를 더 빨리 살릴 게 아니냐. 외가가 못나서 우리 조카 쌈짓돈 허투루 쓰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그럼에도 오현무는 내게 GK그룹 회장님이기보다 외삼촌이었다. 나는 그런 오현무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걱정 마세요, 외삼촌. 저 돈 많아요. 그 회사 가져가서 살릴 방법도 있고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나중에 도와주기만 하시면 됩니다. 딱 한 번만.
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현무가 날 바라보는 눈길은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도와줄 것처럼 보였다.
***
그날 저녁.
명선우는 김 대통령에게 대북사업 관련 독대를 요청했다. 비밀통로를 통해 청와대에 들어간 명선우는 지하벙커에서 김 대통령에게 대북사업 계획서를 건넸다.
“명 회장?”
서류를 살펴보던 김 대통령이 크게 뜬 눈으로 명선우를 바라봤다. 명선우는 비장한 표정으로 김 대통령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 참에 곁가지는 전부 쳐내고 몸통을 직접 파고 들까 합니다, 대통령님.”
“그게 아니오. 정부에서 해동그룹에 대북사업 참여를 요청했는데도 거절당했는데 어떻게 명 회장이···.”
김 대통령이 본 대북사업은 믿을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미국 재계의 큰손 둘이 개성공단에 은행을 만들고 해동그룹이 세울 공장에 지분까지 참여한다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김정일이라도 대남도발은 꿈도 못 꿀 게 아닌가?
‘절대 명 회장이 짜낼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다.’
결론을 낸 김 대통령이 명선우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 계획, 누가 짠 겁니까? 외부에 드러내지 않을 테니 편히 말해요.”
“···스탠더드 캐피털의 이성민 이사가 발품을 팔아서 만든 계획입니다.”
머뭇거리던 명선우의 실토에 김 대통령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에 큰 복이구나. 걸물이다.’
잔잔한 미소를 띠던 김 대통령이 명선우에게 말했다.
“명 회장도 애썼소. 태현전자는 내 실수 때문에 떠나보내게 됐지만 해동과 손잡고 다시 한 번 태현을 일궈보시오.”
그 뒤로도 몇 차례의 덕담 끝에 명선우를 내보낸 김 대통령은 지하벙커에 그대로 남아서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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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전화 왔어.”
집에 돌아와서 현빈이와 놀아주고 있던 나는 장하연이 가져다 준 핸드폰을 받았다.
“예, 이성민···”
[대통령일세. 우리 이 이사한테 통역을 맡기길 잘한 것 같구먼, 허허.]
“대···!”
아닌 밤중에 대통령 전화를 받은 나는 내가 지금 누구와 있는지 깨닫고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끊었다.
“왜 그래, 자기야? 대가 뭐?”
“대나무 숲에 불 났다는데?”
“대나무 숲?”
“담양에 있는 우리 집안 대나무 숲 말이야. 할아버지, 매년 봄마다 거기서 유기농 죽순 캐오시잖아. 큰일이네, 이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친 나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은 뒤, 핸드폰 하나를 더 챙겨서 지하차고로 내려갔다.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와이프랑 애하고 있어서 그만···.”
[아닐세. 그나저나 알리바이 만드는 일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구먼, 허허.]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대통령님.”
핸드폰을 귀에서 뗀 나는 다른 핸드폰으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라이, 팔푼이 같은 놈아. 하필이면 왜 담양 죽림을 몽땅 태워먹게 만든 게야? 할애비가 봄마다 거기 숲 거닐면서 죽순 캐는 거 모르는 게야?]
난들 그러고 싶었겠나. 갑자기 대통령 호출을 받고 누가 당황하지 않겠나?
“죄송해요, 할아버지. 거기 주 집사님한테 말씀드려서 불 좀 질러주세요.”
[끄응··· 알았다. 다른 놈들한테도 전부 입 맞춰두라고 하마, 에잉.]
졸지에 방화교사범(?)이 된 나는 할아버지의 투정 섞인 소리를 무시하고 대통령과 통화하던 핸드폰을 들었다.
“다 됐습니다, 대통령님.”
[허허, 내 졸지에 이 이사를 방화교사범으로 만들었구먼. 나도 밑에다 얘기해서 적당히 덮으라고 해둠세.]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헌데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을···?”
[명 회장한테 대북사업 이야기 들었네. 자네가 짰다면서?]
단박에 푹 찌르고 들어오는 대통령의 질문에 잠시 놀랐던 나는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예. 햇볕정책에 한 점의 누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준비했습니다.”
‘의도는 안 했지만 현성배, 진남기, 성영동이 입김 키우는 일도 없어지겠군.’
대북송금 사건은 현 여당의 현-진-성 정치꾼 트리오가 입김을 키우는 빌미가 된다.
다음 대통령이 집권할 때 지금 대통령의 가신들을 몰아내려고 지들이 터뜨렸으면서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다음 대통령이 될 양반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지 않았나?
‘애먼 사람 구하면서 해충 세 마리 박멸하는 일도 되니 잘 됐네, 후후.’
회귀자로서 역사를 바꾸고 있음을 실감하던 내게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네. 그래서 말인데··· 내일 저녁 때 청와대로 들어오게. 내 자네한테 술 한 잔 따라주고 싶구먼, 허허.]
대통령한테 술까지 얻어마시게 되고··· 이번 생에는 별 일을 다 겪는 것 같다.
***
다음 날 저녁.
나는 대통령에게 부탁해서 선해철, 박태진, 클레어까지 함께 들어가서 뵙고 싶다는 간 큰 부탁(?)을 했다.
다행히도 대통령은 선선히 수락을 해줬고, 우리 넷에 마이클과 라이언까지 총 여섯 명은 비밀통로를 통해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주안상을 받았다.
“월가의 여제를 만나게 돼서 참으로 반갑습니다, 허허. 자!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영광입니다, 대통령님.”
클레어는 살풋 웃으며 김 대통령이 따라주는 술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우리 선 대표는 미즈 로렌스를 잘 모셔야 할 거요. 안 그렇소?”
“물론입니다, 대통령님. 하하.”
“박 전무는 내년에 부사장 승진할 거라는 소문을 들었소. 이 이사가 이렇게 큰 데는 박 전무의 헌신이 컸다고 들었는데 앞으로도 이 이사를 잘 도와주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선해철과 박태진에게도 덕담과 함께 술을 채워준 대통령은 내게 술을 채워주고 입을 열었다.
“우리 이 이사가 이 나라에 정말 큰 복인 것 같소. 이리도 든든한 동지들을 곁에 두고 있으니 말이오.”
“과찬이십니다, 대통령님. 이번엔 제가 따라드려도 되겠습니까?”
“오, 그러시오. 내 우리 이 이사가 주는 술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허허.”
오늘따라 김 대통령의 얼굴이 밝아보였다. 평생의 숙원사업에 탄탄대로가 깔려서일까?
술을 받은 김 대통령은 잔을 든 손을 내밀었다.
“이런 저런 구호 붙이지 말고 위하여만 합시다. 위하여!”
“위하여!”
호쾌하게 구호를 외친 우리는 예법을 갖춰서 술을 비웠다. 몇 순배가 돌자 김 대통령이 조금은 풀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소. 실업자가 늘어나고 기업들도 망하고··· 거기에 내 자식새끼들까지 사고를 쳐서 내 속이 속이 아니었소.”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에서 이 양반만큼 공적으로 사적으로 고생한 양반이 없다. 우리 네 사람은 숙연한 표정으로 김 대통령의 넋두리를 듣기만 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 덕분에 이 위기를 보다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었소. 체이스맨해튼에서도 좋은 조건으로 국채를 사줬으니 오는 8월이면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날 거요.”
김 대통령의 말대로 한국의 외환위기 관리체제는 실제 역사보다 1년이나 빠른 2000년 8월에 종결될 예정이다. 내가, 우리가 이 나라에 쏟아 부은 달러를 생각하면 일찍 끝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겠나.
한결 가벼워진 표정의 김 대통령이 우릴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 여러분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고 싶소. 무리한 게 아니면 들어줄 테니 이 이사부터 기탄없이 말해보시오.”
‘선물이라···.’
대통령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줄 수 있는 것 중에서 내게 해줄 수 있을만한 건 딱 하나였다.
‘내 밥그릇 건드릴 놈 죽이는 거.’
올해가 지나면 해동그룹은 계열분리를 한다.
그 중에서 나는 해동물산의 본업인 상사부문과 물류유통부문, GK금속, GK통신, 센트럴스퀘어의 지분 50퍼센트씩, 그리고 해동정유를 비롯한 석유화학계열사 지분 전량에 금융부문 지분까지 물려받는다.
젊은 놈이 재계에서 손에 꼽히는 재벌의 오너가 되면 만만하게 보고 덤빌 놈들이 생긴다. 그 중에서도 나중에 청와대를 차지하고 내 밥그릇을 건드릴만한 놈을 죽여야 한다.
‘역사를 바꾸는 일이지만 상관없어. 감당할 수 있으니까.’
바뀔 미래쯤이야 이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마음을 굳힌 나는 대통령을 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