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58th. 감당할 수 있으니 (1)
힘이 생긴 만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은 감당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바로 박태진, 선해철-클레어 가족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도착, 헨리의 저택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리. 주인어른과 미스터 록펠러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의 안내를 받은 우리는 응접실로 가서 헨리와 아이작에게 태현전자 인수, 그리고 내가 명선우의 컨설턴트가 됐다는 이야기, 명선우의 대북사업을 내 계획대로 바꾸고 싶다는 것을 알렸다.
“···그래서 두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내 계획에 힘을 보태달라는 부탁을 끝으로 고개를 숙인 내게 아이작의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렸다.
“편하게 말해요, 조니. 우린 친구 아닙니까? 하하.”
“아이작 말이 맞네. 우리가 내외할 사이는 아니잖나, 하하.”
나이를 떠나서 함께 할 친구들, 든든한 친구들이 있다는 건 참 복 받은 일이다. 나도 두 사람을 도와주긴 했지만 헨리와 아이작에게 정말로 고마웠다.
“체이스맨해튼과 트라이엄프 캐피털 합작으로 개성공단에 은행을 세워주셨으면 합니다. 두 분이 대주주로 있는 미국 통신사들을 움직여서 개성까지 회선을 이어주시면 더 좋고요.”
미국 월가를 대표하는 두 회사가 북한에 은행을 세우고 미국 통신회사의 통신망을 깔면 그 괴팍한 김정일도 먹튀는 꿈도 못 꾼다. 미 해군 항모전단이 서해까지 올라오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게 아닌가?
물론, 나 또한 마냥 손만 내밀 생각은 없었다.
“대신에 개성공단에 지을 전자제품 조립공장과 경차 조립공장, 불량 웨이퍼 재활용까지 담당할 반도체 공장의 지분은 두 분께 20퍼센트씩 총 40퍼센트를 나눠드리죠.”
보통 국가라면 몰라도 북한의 낮은 인건비와 물가를 활용하면 극한의 마진을 뽑아낼 수 있는 사업들이다. 부품 공급을 끊어버리면 공장이 멈추면서 산업기술이 유출될 일도 없기에 미국 국민인 헨리와 아이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머지 60퍼센트는 어떻게 나눌 건가?”
“해동그룹이 45퍼센트, 명선우 회장의 태현그룹 계열사들이 총 15퍼센트입니다. 개성공단 토목공사만으로도 엄청난 노다지가 될 테니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그밖에 북한과의 협상은 은행 사업 예치금에 초과생산 인센티브를 내걸어서···.”
생산성을 높이고 그에 따른 이해관계자들의 수익분배 계획까지 밝힌 내게 헨리가 물었다.
“그래도 역시 워싱턴 D.C가 걸리는군. 어떡할 건가?”
헨리의 얼굴에서 심각함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이작도 싱긋 웃는 걸 보니 알고 묻는 게 분명했다.
“정치적 명분이야 차고 넘치죠. 북한에 자본주의를 스며들게 해서 순조로운 체제 전환을 유도하고 중국의 각종 첨단산업 성장을 견제하는 겁니다.”
“그 명분을 만들어내려면 워싱턴 D.C에 우글거리는 구렁이들에게 던져줘야 할 먹잇감이 많이 필요합니다, 조니. 이미 돈을 냈다고 해도 거래 건이 다르니까요. 괜찮겠습니까?”
이미 나와 헨리가 미국 정계에 총 6억 달러를 뿌렸다고 해도 정치자금과 이권을 교환하는 거래는 한 건 한 건이 따로 움직인다. 아이작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두 분이 개성공단의 안전보장 보험료로 현금 5억 달러를 북한에 맡겨주시면 민주당과 공화당에 두 분 명의로 낼 기부금은 제가 내죠. 공화당 20억 달러, 민주당 10억 달러, 어떻습니까?”
선거 직전에 배팅을 못한 게 아쉬웠지만 타이밍을 뒤집을 수 있는 건 스케일이다. 선거자금 30억 달러에 트라이엄프와 체이스맨해튼의 권위가 더해지면 워싱턴 D.C의 정치꾼들도 대북사업에 초 칠 생각을 못할 것이다.
***
헨리, 아이작과의 합의를 마치고 미국 정계에 대한 로비까지 마친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삼청동 서재 회의 소집을 요청했다. 모처럼만에 모였지만 그룹 어른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오늘 회의 소집을 요청한 건 해동그룹의 대북사업 참여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 이사? 그 빨갱이 놈들은 믿을 만한 종자들이 아닌데 대북사업이라니?”
내가 내놓은 안건에 가장 먼저 입을 연 배재훈은 굳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북한 놈들이 날강도인 건 다 아는 사실이네, 이 이사. 정부가 요청한 북한 쪽 자원개발 사업 참여도 그래서 거절하지 않았나?”
“자원개발 사업은 우리 투자 자산 전부를 뺏길 수 있는 사업이니 당연히 안 되지요. 그래서··· 이걸 먼저 보여드릴까 합니다.”
서류 가방에서 대북사업 자료를 꺼낸 나는 테이블에 앉은 이들 모두에게 나눠준 뒤, 자리로 돌아왔다.
“‘개성공단 위탁생산기지화 계획’?”
“스탠더드 캐피털 본사에 가서 논의를 했는데 트라이엄프 캐피털과 체이스맨해튼까지 끌어들이면 북한 정권도 날강도 짓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항모전단이 서해까지 올라와서 평양을 불바다로 만들고 싶지는 않을 거라면서요. 이미 워싱턴 D.C에서의 로비도 끝났습니다.”
“흠···.”
모두들 침음성을 흘리며 서류를 살펴보는 가운데 선해철이 뒤를 이어서 말했다.
“제 옛 보스였던 헨리와는 얘기가 잘 됐습니다. 체이스맨해튼이 이번에 합류하기로 한 건 해동그룹이나 스탠더드 캐피털과 좋은 거래를 트기도 했고··· 이번 사업으로 수익이 날 거란 확신이 있어서였고요.”
선해철, 그리고 박태진도 동의했듯이 경차나 저급 반도체, 웨이퍼 리워크, 전자제품 조립은 전부 한국에서 펼치기에 마진이 박한 사업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면 고수익 사업으로 탈바꿈되는 사업들인데도 어른들은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잠시 성민이하고 바람 좀 쐬고 오겠네.”
정원으로 나간 할아버지는 따사로운 햇볕을 맞으며 내게 말했다.
“미국 정치꾼들에게 얼마나 돈을 먹였는지는 모르겠다만 북한에 투자하는 건 세 부회장이 마뜩찮아 할 게다. 전쟁을 겪어본 세대들이니 말이다.”
고승주와 이명진은 몰라도 세 원로 부회장들이 20대에 겪은 전쟁의 트라우마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30년 뒤에도 지워지지 않을 레드 콤플렉스 아닌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북한에 투자하지 않으면 중국 놈들이 너무 커집니다, 할아버지.”
그럼에도 나는 이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중국의 전자산업이 커지는 걸 막을 기회다. 단위 무게 당 부가가치가 높은 효자산업이 아닌가? 게다가···.
‘할아버지께서 맺어준 사람 살리는 일입니다. 명선우 회장, 죽게 두기 아까운 사람입니다.’
명선우는 태현그룹 후계자들 중 이질적이라 할 만큼 유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필요할 땐 강단도 보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대북송금으로 자살하지 않게 하려면 이번 투자를 해내야 한다. 충분한 힘을 가진 만큼 회귀자로서 살릴 사람은 살리고 싶었으니 말이다.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침음성이 멈췄다.
“단순히 돈 때문은 아닌 것 같구나.”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이 걸린 일이니까요.”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찔리는 양심을 드러내지 않은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네가 스탠더드의 주인이라는 걸 서재에서 밝혀야 할 게다.”
“할아버지?”
“큰일을 도모하려면 큰 힘이 필요한 법이다. 네가 큰일을 감당할 힘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부회장들도 네 뜻을 따를 게야.”
“그래도···.”
솔직히 조금은 두려웠다.
그간 내가 아무리 그룹을 위해 헌신했다고 해도 어떻게 보면 다섯 부회장들을 기만한 게 아닌가? 내가 스탠더드 캐피털의 주인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서도 나를 대하는 게 지금처럼 똑같을까도 걱정됐다.
말끝을 흐린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토닥여줬다.
“무슨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일이다. 피하지 못할 거라면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워야 할애비 뒤를 이어 이 집의 서재에서 이 나라를, 아니 세상을 내려다볼 게 아니냐? 허허.”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표정을 다잡은 나는 할아버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
서재에 돌아온 나는 의자에 앉은 할아버지 옆에 선 채로 테이블 앞에 앉은 어른들을 둘러봤다.
“지금부터 중요한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숨을 한 번 가다듬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탠더드 캐피털, 제 회사입니다.”
무슨 반응이 나올까? 분노? 놀람? 경악?
그렇지만 다섯 부회장들은 잠시 눈이 커졌을 뿐,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당황한 나는 할아버지를 바라봤지만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피식 웃은 뒤, 좌중을 향해 말했다.
“이제야 자네들이 궁금한 게 풀렸구먼, 으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저놈이 언제 제 입으로 말할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듣게 되네요, 흐흐.”
껄껄 웃는 어른들의 모습에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런 나를 보며 고승주가 말했다.
“스탠더드 캐피털이 네 회사가 아닐까 모두들 짐작하고 있었단다.”
“백부님?”
“솔직히 말해서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어. 그렇게 대단한 회사가 왜 우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했지. 안 그렇습니까, 부회장님?”
고승주의 눈길을 받은 배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5년 전에 호주 출장 가서 광산 개발 투자할 때 수십억 달러나 되는 돈을 우리 사업에 보태주겠다는 게 이해가 안 돼서 요리조리 알아봤는데도 답이 안 나오더군.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이제야 속이 시원하구먼.”
“미국에서 잘 나가는 전자상거래 회사 노하우를 우리가 빼먹을 수 있게 해준 것도 빠질 수 없지요. 그 회사 주인이 무슨 호의로 자기들이 투자한 회사 노하우를 흘려준답니까? 거기서 성민이 저놈이 주인이겠거니 생각했지요, 흐흐.”
능글맞게 웃는 태재호에 이어서 조영찬도 흐뭇한 표정으로 콧수염을 매만졌다.
“형님들도 성민이 덕을 봤지만 우리 금융부문이 가장 큰 덕을 봤습니다. 해동증권 민 전무나 주 상무 일행도 그렇고 스탠더드 캐피털에 맡긴 돈이 벌써 200억 달러가 훨씬 넘게 불어났습니다. 이러다 배가 찢어질 것 같습니다, 하하.”
“아버지께서 해동자동차 지분을 제게 넘겨주겠다고 하셨을 때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성민이 걱정하는 거라는 말씀에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습니다. 고맙다, 조카야.”
이명진까지 내게 푸근한 눈길을 보내는 걸 보고 멋쩍은 미소만 지어졌다.
‘다들 짐작하고 있었구나.’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티가 안 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뒤에서 우리 집안을 위해 애쓴 게 말이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할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이제 스탠더드 캐피털 주인장이 우리 뒤를 봐주는 이유가 확실해졌으니 의견들을 들어보지. 대북사업, 찬성하면 손 들게.”
할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두들 손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크게 외친 나는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뿌듯해지고 가벼워진 마음을 안고.
***
며칠 뒤.
삼청동 본가에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눈 나는 박태진, 선해철과 함께 태현그룹 계동사옥 정문에서 GK그룹 실무진들과 합류했다.
로비로 들어간 우리는 우릴 마중 나온 태현그룹 명선우 계열사 임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명선우라고 합니다.”
대학 시절에 국문학과를 선택했을 만큼 명선우는 몸에 배인 듯한 정중한 태도로 우릴 맞았다. 우리는 차례대로 인사를 나눈 뒤, 협상을 시작했다.
“GK그룹과 스탠더드 캐피털 컨소시엄이 제안한 조건을 수용하겠습니다. 또 다른 건 없습니까?”
부채를 전부 떠안고 현금 2조 원을 인수대금으로 주겠다니 꽤나 의심이 되는 모양이다. 나는 박태진, 선해철과 눈짓을 주고받은 뒤, 손을 들었다.
“아, 이성민 이사군요. 회장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명선우 회장님. 저희가 GK그룹과 손잡고 호의적인 조건을 내건 이유는 한국의 전략산업인 반도체 산업에 큼지막한 포크를 찍어두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더 이상의 요구사항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되십니다, 하하.”
미소를 지으며 말한 나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계동 사옥은 욕심이 나지만··· 범 태현그룹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지.’
태현그룹 계동 사옥은 신성그룹 본관 건설비용의 3분지 1밖에 안 들었으면서도 튼튼하게 지어서 명진호 회장이 자랑스러워한 건물이다.
그런 건물을 내가 집어삼킨다? 이건 범 태현그룹 전체를 상대로 싸우자는 것 밖에 안 된다.
욕심을 누른 덕분에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협상을 마친 나는 명선우와 함께 그의 집무실로 가서 냉커피를 마셨다.
“아버지께서 자네 얘기를 많이 하시더군. 자네를 전략 컨설턴트로 초빙하면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라고 하셨네.”
“감사합니다, 하하.”
한 차례의 접대용 멘트를 주고받은 뒤, 명선우가 내게 물었다.
“솔직히 지금 태현그룹은 예전의 영광을 찾기 어려울 걸세. 그래도 활로를 찾아야 한다면 어디서 찾아야하겠나?”
명선우의 물음에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해동물산이 조만간 영국 P&O그룹의 해운사업을 인수하고 나면 태현상선과 해운동맹을 체결하는 식으로 돕겠습니다.”
“사, 사실인가?”
명선우의 눈이 커졌다.
태현전자를 떼어낸 이상 그룹에서 가장 믿을 곳이라고는 태현상선뿐인데 영국의 P&O그룹에서 해운사업을 가져올 해동물산과 손을 잡으면 활로를 뚫고도 남을 일이 아닌가?
“대신에 기존에 추진하시던 대북사업은 전부 접으십시오. 금강산 관광까지 포함해서요.”
“뭐라고?”
눈매가 날카로워진 명선우를 보며 나는 빙긋 미소를 띠었다.
“그 다음, 해동그룹, 트라이엄프 캐피털, 체이스맨해튼과 함께 개성공단에 집중하시죠.”
개성공단이라는 말에 명선우의 눈매가 다시 풀린 채 크게 뜨였다.
“개, 개성공단? 아니지, 해동에 트라이엄프, 체이스맨해튼은 왜···?”
“일단, 서류부터 보고 얘기하시죠. 이 거래 만들어오려고 정말 고생했습니다.”
가방에서 꺼낸 서류를 내밀자 명선우가 급히 받아서 읽었다.
‘당신, 나한테 빚 진 줄 알아요.’
나만 아는 일이지만 명선우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생명 연장의 동아줄을 잡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