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56th. 세기말 끝내기 (2)
이성민이 뉴욕에 온지 며칠 뒤.
JP모건의 해리 클락슨은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주식을 포기하겠다고요?”
[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월가 놈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영국 귀족들이나 왕족들이 쓸 법한 용인발음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거만함에 해리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럼에도 해리의 입에서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계약은 지켜야죠. 그래도 주가가 더 올라갈 텐데 정말로 주식을 포기하실 겁니까?”
[아쉽지만 투자위원회와 이사회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따를 수밖에요. 나머지 이자는 전부 내겠습니다.]
투자회사라고 해봐야 물주들의 마름에 불과하다. 자신도 똑같은 마름이지만 해리는 입꼬리를 뒤틀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런··· 투자자 분들 때문에 큰 기회를 놓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전화를 끊은 해리 클락슨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해리입니다, 모건님. 스탠더드 그 양아치들이 주식을 포기하겠다고 해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잘했습니다, 해리. 지금부터 주식 돌리세요. 연 초에 모건스탠리 통해서 받은 야후 주식 돌리는 것부터 시작하죠.]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 손정의가 모건스탠리를 통해 내놓은 주식을 모건 가문은 차명 투자회사들을 앞세워 전부 받아냈다. 주식을 쥔 놈이 주식을 놨으니 이제는 그 주식을 돌려서 주가를 더 부풀릴 때였다.
잭슨 피어폰트 모건의 지시에 해리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모건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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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모건의 해리 클락슨에게 담보 주식 포기를 통보한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대포폰으로 헨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니입니다, 헨리. 방금 전에 담보로 맡긴 주식을 포기하겠다고 JP모건에 통보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잘 됐군. 그 망할 코주부 놈들을 월가에서 쫓아낼 생각을 하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네, 후후.]
로이스 가문이 미국에 발을 붙인 이래로 텃세를 부려온 모건 가문에 대한 복수 때문일까 헨리의 웃음소리에서 싸늘함이 느껴졌다.
“증시에서의 공격도 퍼부어야 하지만 워싱턴 D.C에도 손을 써두셔야 합니다. 헨리 당신이나 저나 이번 사태로 욕을 먹을 테니까요.”
[물론이지. 내년이 대선 철이니 우리 둘이서 각자 두 당에 1억 5천만 달러씩 뿌리면 될 걸세.]
나와 헨리가 1억 5천만 달러씩 뿌리면 총 6억 달러의 돈이 대선을 코앞에 둔 민주당과 공화당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그 6억 달러는 나와 헨리가 양 당에 찔러줄 수수료였다.
그 수수료를 내고 나와 헨리가 증시에서 딸 수천억 달러의 판돈을 안전하게 챙기는 것을 보장받을 테니 6억 달러쯤이야 가볍게 던질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헨리. 로비는 클레어와 썬에게 일임하겠습니다. 제가 주식을 던지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헨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엔론과 월드컴, 글로벌 크로싱, 그리고 아서 앤더슨의 회계조작 공모 문건은 제대로 터뜨려주겠네. 아직은 언론사 놈들에게 공개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문건을 보내주는 대로 터뜨리겠다고 했으니 걱정 놓게, 하하.]
헨리는 내게서 세 회사의 비리정황이 담긴 자료들을 받자마자 CNN, BBC를 비롯한 방송사들과 월스트리트 저널, 파이낸셜 타임즈 등을 비롯한 신문사까지 섭외했다.
자료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헨리에게서 거액의 광고비를 약속받은 언론사들은 헨리가 보내줄 문건들을 핵심 기사로 다룰 것을 약속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언론사는 다들 똑같군.’
헨리의 호언장담에 나는 왠지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액수만 다를 뿐 언론이라는 것들이 돈에 움직이는 걸 보면 자본주의만큼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헨리. 그럼 새해에 축배를 들도록 하죠, 하하.”
헨리와의 통화를 마친 나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조니입니다, 아이작. JP모건에 맡긴 담보 주식 전부 포기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조니. 체이스맨해튼도 총알을 쌓아뒀으니 타이밍에 맞춰 쏟아 부으면 되겠군요. 정치인들, 공무원들, 그리고 모건 놈들에게 이를 가는 가문들도 움직이고요. 일이 끝나면 약속한 정산은 확실히 해주겠습니다, 하하.]
아이작도 헨리 못지않게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똑똑한 아군의 독기가 바싹 올라있어서 나쁠 건 없기에 나는 미소를 머금고 통화를 계속했다.
“고맙긴요, 아이작. 서로 주고받는 거래 아닙니까? 내년이 지나기 전에 끝내버리죠.”
[물론입니다, 조니. 내년에 아저씨 집에서 터뜨릴 샴페인은 제가 사가지고 가죠, 하하.]
아이작의 시원시원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통화를 마친 나는 회의실로 모든 이사진들을 소집했다.
“지금부터 닛케이 225, S&P 500, 나스닥 100 선물옵션, 월드컴, 엔론, 글로벌 크로싱에 전부 숏으로 배팅합니다. JP모건, 모건스탠리를 제외한 모든 창구에서 거래하세요.”
사상 최대의 총력전 선포에도 이사진들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흥분을 감추지 못해 얼굴이 달아오르거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는 이길 겁니다. 늘 그래왔듯이. 이상입니다.”
“Yes, sir!”
***
그날부터 스탠더드 캐피털은 JP모건에서 대출을 받고 남겨둔 돈에 미국 증시와 일본 증시 인덱스 펀드에 묻어뒀던 돈까지 회수했다.
그 돈은 전부 주식 현물 공매도와 풋옵션 매수에 투입되었고 전 세계 금융가는 스탠더드 캐피털을 신나게 비웃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주가가 올라가는데 전 재산을 폭락에 배팅했으니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나? 결과는 뻔하지만.
12월 31일 오늘 오전에 구찌의 상장을 성공적으로 마친 나는 오후 리셉션이 끝나자마자 저녁 무렵에 사무실로 돌아와서 공매도와 풋옵션 매수 결과를 확인한 뒤, 모든 임직원들과 함께 스탠더드 캐피털 사옥에서 20세기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프로그램 보수 작업, 전부 다 끝났죠?”
Y2K에 대한 대비를 확인하려는 내 질문에 선해철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걱정마라, 조카야. 작년 초부터 본사, 지사 할 것 없이 전부 손 봤어. 미국 본사는 전산팀에서, 한국, 중국, 일본 지사는 해동물산 전산사업부에서 손 봤잖냐?”
스탠더드 캐피털이 Y2K에 대비해서 프로그램 보수에 쓴 돈만 총 4억 달러였다. 그 중 반절인 2억 달러는 해동물산이 보수 작업을 맡은 한국, 중국, 일본 지사에서 지출됐고, 그 작업을 신호진이 지휘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후후. 잠시만요.”
시계를 확인한 나는 전화 한 통을 걸었다.
“네, 백부님. 성민입니다. 그룹 전산망 관리, 잘 되고 있죠?”
[오늘 저녁 되면 야간대기 들어갈 거다. 신 선배가 그거 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 들어오면 선배님 찾아뵙고 인사라도 올려, 하하.]
껄껄 웃는 고승주의 목소리에서 여유가 느껴지는 게 해동그룹 전산망 관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백부님. 출장 끝나는 대로 돌아가서 인사 올리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하.”
그 뒤로도 나는 이명진, 조영찬, 태재호, 배재훈 순으로 연말 인사를 올린 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민입니다, 할아버지.”
[오, 그래. 그쪽은 지금 한밤중이겠구나. 별 탈 없지?]
“1시간 뒤에야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작년부터 프로그램을 고치긴 했는데 어떻게 터질지 모르겠네요, 하하.”
[해철이 고놈이 미즈 로렌스와 잘 했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다. 그럴 시간 있으면 둘째 증손주 소식이나 들려줄 노력이나 하거라, 으허허.]
우리 할아버지, 못 말리는 분이다.
반세기 역사의 비밀 비자금까지 내세워 당신 장손의 수백억 달러 대출의 보증을 서준 분이 돈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이 둘째 증손주 소식을 들려 달라니··· 나는 지구 반대편에서 20세기의 마지막 하루를 시작한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되지 않으세요?”
[뭐가 말이냐?]
“저희가 지금 뉴욕에서 작업하는 거요.”
[걱정할 필요가 있겠느냐? 신 회장이 그룹 전산망 다 고쳤다고 보고한 거 듣고 네 도박은 무조건 성공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둘째 증손주 만들어서 돌아 오거라, 흐흐.]
역시 할아버지도 나름의 확신을 갖고 안심하고 있었다. 대답을 들은 나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하.”
[오냐, 그래. 너도 새해 복 많이 받거라, 허허.]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전화를 마친 나는 가볍게 숨이 내쉬어졌다. 덩달아 홀가분해진 표정을 보고 박태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장님께서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누나하고 둘째 증손주 만들어오라고 하시네요. 제 도박은 무조건 성공할 거라 걱정 안 하신다면서요, 하하.”
박태진을 보며 껄껄 웃던 나는 선해철에게 물었다.
“삼촌, 헨리 쪽에 넘겨준 자료, 언제 터지나요?”
“내일은 새해 첫날이라 모레 아침에 터뜨리기로 했어.”
어느 나라나 새해 첫날은 공휴일이다. 우리가 만들고 헨리가 폭발 버튼을 쥔 핵폭탄 세 발은 증시 개장일에 맞춰서 터뜨리는 게 효과적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삼촌. 우린 그럼 Y2K에 대비하도록 하죠.”
내 인생 중 사무실에서 보내는 연말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나는 내 사람들과 함께 회의실에서 조용히 연말을 기다렸다.
***
1시간 뒤.
다행히도 스탠더드 캐피털 미국 본사 전산망에서는 Y2K 오류가 하나도 안 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우리는 2000년도 1월 1일을 맞으며 회사에서 나왔지만 오후쯤에야 한국, 일본, 중국 세 곳의 지사와 해동그룹 전산망에서도 오류가 없었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새해 첫 날을 가족들과 함께 보낸 나는 새해 첫 근무일부터 트레이딩 룸 중앙의 원탁 앞에 앉아서 벽에 걸린 대형 화면을 보고 있었다.
[전 세계의 IT업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Y2K 버그는 수많은 이름 없는 프로그래머들의 헌신 속에서 조용히 잠재워졌습니다. 이로써 세계는 새천년의 하루를 희망차게···.]
화면 속에서 새해 첫 기사를 발표하던 CNN 앵커는 갑자기 들어온 서류 한 부를 살펴보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속보입니다! 엔론에서 자행한 대규모의 회계조작이 적발됐다고 합니다! 내부 고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엔론은 각종 유령자회사에 본사의 부채를 숨겨왔다고 합니다. 또한, 유선통신회사인 월드컴, 글로벌 크로싱, 외부감사인 아서 앤더슨과 공모, 회선 임대 교환거래로 매출을 조작했으며···]
TV를 보던 나는 앞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서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던져요!”
“Yes, sir!”
앉은 채로 크게 대답한 트레이더들은 수화기를 붙잡고 엔론과 월드컴, 글로벌 크로싱 주식에 대한 추가 공매도를 주문했다. 책상 사이에 놓인 통로를 돌아다니며 직원들을 독려하던 나는 박태진, 선해철, 클레어와 함께 위층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헨리도 시작했겠죠?”
차를 마시던 선해철이 잔을 입에서 떼고 말했다.
“물론. 방금 전 통화했는데 야후, 아메리카온라인, 시스코시스템즈, 오라클 할 것 없이 전부 팔고 있어.”
헨리는 약속대로 세 회사와 아서 앤더슨의 부정을 터뜨렸고 그간 투자해왔던 IT주식들도 미련 없이 팔아치우고 있었다. 선해철의 대답을 들은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헨리, 정말 대단한 분이네요. 공매도, 풋옵션에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 던지다니.”
헨리의 트라이엄프 캐피털은 주가조작 혐의를 피하고자 이번 작업에서 주식 현물만 매도할 뿐, 공매도나 풋옵션은 일체 배팅하지 않았다. 경외감을 숨기지 못한 나를 보며 선해철이 빙긋 웃었다.
“월가에 몸을 담고 있어도 명예를 챙기는 분이니까. 이게 우리 장인어른 본모습이야, 하하.”
자신의 장인을 자랑스러워하듯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던 선해철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분도 원수는 절대 용서 안 해. 대를 이은 원수는 더더욱 용서하지 않으시고. 그렇지, 클레어?”
“물론이죠. 그래서 지금 그 복수를 하고 계시잖아요? 호호.”
클레어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칼을 빼든 것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5대에 걸쳐 로이스 가문을 괴롭혀 온 모건 가문 아닌가?
“그 똑똑한 사람들만 모였다는 JP모건도 넋이 나갔을 겁니다. 지금 터진 핵폭탄은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요. 이번 일로 월가가 너무 움츠려들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하하.”
박태진의 말대로 엔론과 월드컴, 글로벌 크로싱의 분식회계는 원래대로면 내년인 2001년 초쯤부터 터질 문제였다. 그러나 JP모건을 절단 내고자 더 일찍 터뜨린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박태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월가 놈들은 정신을 못 차릴 겁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요.”
월가는 똘똘한 놈들 중에서 양아치란 양아치들만 죄다 모인 아수라판이다. 냉소적인 표정으로 대꾸하던 나는 손뼉을 두어 번 치고 세 사람에게 말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니 나중 일은 나중에 준비하고 지금 현안에 집중하죠.”
우리가 치르는 전쟁은 JP모건과 모건 가문을 월가의 볕 드는 땅에서 쫓아내야 끝나는 싸움이다. 세 사람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미국의 로이스 가문과 록펠러 가문, 그리고 해동그룹 이 씨 가문의 먹잇감이 된 JP모건.
그 JP모건을 앞에서 이끄는 해리 클락슨은 집무실에서 임원들과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주가 방어로 손해 본 게 얼마라고?”
“200억 달러입니다. 트라이엄프가 쏟아낸 물량 때문에 압력을 받기도 했지만 CNN, 뉴스코프 할 것 없이 엔론과 월드컴, 글로벌 크로싱의 회계부정을 터뜨린 바람에···.”
절망적인 보고를 내놓던 임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새해 첫 개장일부터 지금까지 IT주식 주가 방어에 나섰는데도 총 200억 달러의 손실을 내지 않았나?
수없이 많은, 그러나 의미 없는 말들이 둥둥 떠다닌 끝에 회의는 별다른 소득도 없이 끝났다.
“말도 안 돼···.”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자신, 고베대지진 때부터 온갖 환투기로 돈을 긁어모아온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다니··· 해리 클락슨과 둘만 남은 회의실에서 잭슨 피어폰트 모건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